[명혜망](종합보도) 2월 초 소식에 따르면, 산둥성 웨이팡(濰坊) 칭저우(靑州)시 파룬궁수련자 난전신(南振欣·62)이 부당하게 5년 형을 선고받고 현재 산둥성 여자감옥에 납치돼 박해받고 있다.
난전신은 칭저우시 국가세무국 공무원 출신이며 1997년부터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을 시작해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어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은 이로움을 얻었다. 수련 한 달 만에 그녀를 괴롭히던 불면증, 구강 건조증, 비염 및 기타 질병이 약 없이 완쾌됐다. 난전신은 대법 법리로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해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했고, 청렴결백해 우수공무원이나 선진근로자로 평가받았다.
2022년 3월 10일, 난전신은 임대 거주지에서 칭저우 공안국 경찰에게 미행을 받다가 납치됐고, 하루 만에 풀려난 후 모함을 당했다. 2023년 난전신은 또다시 칭저우시 공안국에 의해 비밀리에 웨이팡 구치소로 납치돼 박해받았다.
이전에 난전신은 파룬궁을 꾸준히 수련했다는 이유로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반복적으로 박해를 받았고, 남편 위안허쉰(袁和訓)과 어린 딸 역시 파룬따파 수련을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다음은 난전신의 가족이 중공으로부터 박해받은 경험 중 일부 사례다.
I.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불법 감금되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은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2000년 9월, 난전신의 남편 위안허쉰은 칭저우 공안국과 윈허(雲河) 파출소의 사악한 경찰에게 납치와 가택수색을 당했고 보름간 불법적으로 감금됐다. 난전신은 어린 딸을 데리고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러 베이징에 갔다가 톈안먼에서 경찰에게 납치됐다. 그 후 현지로 이송돼 보름간 불법적으로 감금됐다.
2001년 초, 난전신 등 수련자 10명은 성냥공장 기숙사에서 교류하던 중 칭저우시 공안국과 역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돼, 차례로 역 파출소, 둥관(東關) 파출소에 불법 감금됐다. 어떤 수련자는 전기충격을 당했고, 어떤 이는 불법적으로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다. 난전신은 세뇌반에 납치돼 불법 감금됐고, 그녀가 소지하던 1500위안을 역 파출소에 강탈당했다.
2. 유랑생활, 일가족 세 식구가 불법적으로 감금되다
2001년 봄, 난전신의 남편인 위안허쉰은 칭저우시 ‘610(파룬궁 탄압기구)’에 납치돼 역 파출소로 끌려가 소지하던 현금 1500위안을 강탈당한 후 세뇌반으로 끌려가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위안허쉰 부부는 박해를 피해 어린 딸을 데리고 타향으로 가서 유랑생활을 했다. 몇 달간의 방황 끝에 그들은 웨이팡에 머물게 됐다.
2002년 10월, 웨이팡시 공안국은 파룬궁수련자를 불법 납치하는 데 경찰력을 집중했다. 위안허쉰 부부 일가족은 웨이팡시 공안국 시관(西關) 파출소로 납치됐고, 열두 살 된 딸도 수갑을 차고 밤새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다. 나중에 한 친절한 경찰이 아이에게 솜 방석을 주었다.
위안허쉰 가족이 칭저우로 돌아오는 길에 경찰 리차오메이(李超美)는 아내 난전신과 딸이 보는 앞에서 광적으로 위안허쉰을 구타하고 괴롭혔다. 위안허쉰은 수갑을 차고 고문을 당하다 수갑이 살에 박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난전신과 딸은 리차오메이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지만, 리차오메이는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노발대발하며 모녀도 공격했다.
저녁에 위안허쉰과 난전신은 칭저우 구치소에 감금됐고, 딸은 한 달간 그 지역의 악명 높은 세뇌반에 갇혀 박해당했다. 세뇌반 두목 류룽유(劉榮友) 등 악인들은 궤변, 수면 박탈, 공갈 협박, 노려보기, 종이로 나팔을 만들어 딸의 귀에 소리를 지르는 등 방법으로 수련 포기를 강요했다. 그 후 1천여 위안을 갈취해서야 그만뒀다.
3. 난전신은 부당하게 3년 형을, 위안허쉰은 8년 형을 선고받다
2002년 11월, 난전신의 딸은 세뇌반에서 풀려난 뒤 친척 집에 돌아가며 기거했다. 어린 소녀였던 그녀는 아버지가 고문당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매일 같이 부모님이 돌아오기를 갈망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8년, 어머니는 3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그녀의 어린 마음은 다시 한번 큰 충격을 받았다. 이른 아침, 그녀의 외숙모와 삼촌은 왜 아직도 학교에 가지 않냐며 이불을 젖혀보니 베갯잇이 온통 눈물로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외숙모와 그녀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위안허쉰은 칭저우 구치소에서 9개월간 감금돼 박해받았으며 매일 16~20시간의 강제노동을 해야 했는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곧 사악한 경찰과 옥졸에게 심하게 구타당했다. 또 늘 굶주려 눈앞이 흐려졌다.
2003년, 위안허쉰은 산둥성 감옥으로 이송돼 박해당했다. 감옥에서 그는 장기간 바오자(包夾, 수감자로 이뤄진 감시자)에 의해 벨트가 채워졌고 23일 연속으로 16시간 동안 작은 나무 의자에 강제로 앉혀져 둔부가 썩고 종기가 났다.
4. 부부는 납치되고 난전신은 불법 노동수용소로 이송
2008년 7월 베이징 올림픽 전날, 저우융캉(周永康)은 웨이팡에 뛰어가서 직접 비밀 지시를 내렸다. 웨이팡시 ‘610’의 통일적인 배치에 따라 칭저우 공안국에서는 집중적으로 파룬궁수련자를 납치했다. 난전신은 집에서 나오던 중 칭저우 공안국 경찰들에게 납치됐다. 경찰들은 그녀 몸에서 열쇠를 빼앗아 집 문을 열고 컴퓨터, 프린터, 휴대폰 등 개인 소지품을 강탈당했다. 난전신은 구치소에 불법적으로 감금돼 거의 20일간 족쇄에 채워졌다. 한 달 뒤 불법 강제노동 처분을 받고 노동수용소로 이송됐지만, 고혈압을 이유로 수용소 측은 수용을 거부했다.
난전신이 납치된 당일, 남편 위안허쉰은 납치돼 한 달간 칭저우 구치소에 불법적으로 감금된 후 다시 세뇌반으로 끌려가 두 달간 고문을 당했다.
2009년 3월, 중공 ‘양회’ 기간에 위안허쉰은 다시 납치돼 칭저우의 ‘법제학습반’(세뇌 장소)에 끌려가 보름간 감금돼 박해받았다.
5. 거듭 납치된 부부, 남편은 불법 강제노동 처분 받아
2012년 4월, 칭저우시 공안국과 청리(城裏) 파출소에서 미행해 칭저우시 진상 자료점 두 곳이 파괴됐다. 컴퓨터, 프린터, 기타 장비와 현금이 깡그리 강탈당하고 여러 명의 수련자가 납치됐다. 난전신은 불법 감금을 이유로 구치소로 납치됐지만, 고혈압을 이유로 입소를 거부당했고 이후 ‘거주지 감시’ 박해를 받았다.
2012년 4월 25일, 공장에서 일하던 위안허쉰은 칭저우 공안국과 청리파출소에 의해 납치됐다. 경찰은 그의 집 열쇠를 빼앗고 컴퓨터, 휴대폰, 기타 개인 소지품을 가져갔으며 현금 800위안을 강탈했다. 다음 날 위안허쉰은 칭저우시 구치소로 끌려가 감금돼 박해받았고, 한 달 후 부당하게 1년간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다. 불법 강제노동 처분 기간에 위안허쉰은 강제로 몇 달간 하루에 10시간 이상의 강제노동을 했으며, 악랄한 경찰에게 머리를 구타당하고 세워 두기 고문, 작은 의자에 앉기, 수면 박탈, 샤워나 화장실 이용 금지 등 학대를 당했다.
6. 세뇌반에서 박해받아 목숨을 잃을 뻔한 난전신
2013년 9월, 칭저우시 공안국과 청리 파출소는 난전신을 납치하기 위해 공모했다. 그녀는 칭저우시 공안국으로 납치돼 웨이팡 구치소로 이송됐으나 건강 문제로 수용을 거부당했다.
2014년 난전신은 칭저우시 ‘610’에 의해 세뇌반으로 끌려가 감금돼 박해당했다. 그녀는 시달림을 당해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난전신은 다음과 같이 하소연했다. “세뇌반 두목 류룽유는 밤을 새우게 하고, 머리를 때리고, 잔인한 고문을 가하고, 매일 24시간 동안 잠을 못 자게 했습니다. 이렇게 연속 열흘 넘게 괴롭힌 뒤, 제가 흐리멍덩해져 반격할 능력이 없자 여러 사람을 모아 주먹과 손바닥으로 제 머리를 내리쳤고 제 몸, 특히 민감한 부분을 반복적으로 마구 꼬집고 손톱으로 찔러서 괴롭혔어요.”
“류 씨는 몇 번이나 밤중에 몇 사람을 모아 저를 고문했는데 저는 매번 기절했어요. 한 달이 넘는 고문 끝에 저는 얼굴이 너무 부어 코를 찾을 수 없었고 얼굴이 완전히 변형됐습니다. 어떻게 집에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에게 들려갔다고 들었습니다. 친척들은 하루 후 제가 깨어나자 의사에게 전화했고, 의사는 저를 보고 화를 내며 ‘그야말로 인명을 초개처럼 여기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친척들이 저를 시내에 있는 부유(婦幼)보건병원으로 데려갔는데, 제가 심하게 곪은 하복부를 보여주자 의사는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고, 다른 의사가 저에게 와서 ‘여기선 치료할 수 없으니 큰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인민병원에 갔는데 검사가 끝나자 의사는 입원 보증금 1만 위안을 내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오랫동안 감금돼 있었고 저는 직장을 잃고 돈도 없었기에 친척들에게 입원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또 저를 유명한 중의사에게 데려가 특수 연고와 다양한 치료법으로 치료하게 했습니다. 그 중의사는 제 부상을 보고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모진 사람이 있을 수 있나요’라고 말했어요.”
“제 몸에는 아직도 두 개의 흉터가 있습니다. 제 앞뒤로 두 명의 수련자가 이런 식으로 고문당해 죽었습니다.”
7. 괴롭힘과 박해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다
2014년 1월 23일 정오, 칭저우시 공안국 경찰은 또 위안허쉰의 집에 들이닥쳐 괴롭혔다. 위안허쉰 부부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경찰은 소리를 지르며 강제로 문을 열었다. 자택에서 요양 중이던 위안허쉰의 어머니는 충격으로 병세가 악화돼 5일 후 사망했다.
원문발표: 2024년 2월 9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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