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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 박해로 사망한 허페이시 수련자 리메이를 추억하며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2024년 2월 1일은 안후이성 허페이(合肥)시 파룬궁수련자 리메이(李梅)가 박해를 받아 사망한 지 22주년이 되는 날이다.

리메이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리 속에서 피어난 매화처럼 찬바람 속에서도 외롭고 강인하게 피어났다.

파룬궁수련자 리메이(李梅)

당시 28세였던 리메이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로 납치되기 전까지 건강이 좋았다. 2000년 6월쯤, 리메이는 허페이에 위치한 안후이성 여자 노동수용소로 납치돼 파룬궁 박해를 전문으로 하는 제2대대에 불법적으로 감금됐다. 그녀는 ‘진선인(真·善·忍)’에 대한 믿음을 포기할 것을 거부했다가 노동수용소에서 잔인한 박해를 받았다. 그녀는 악당들에게 잔인하게 구타당해 장기가 파열됐고 혼수상태로 허페이 105병원으로 이송됐다. 2001년 2월 1일 오전 6시, 노동수용소에서는 리메이의 사망 소식을 가족에게 알렸고, 그녀의 시신은 강제로 화장됐다. 리메이는 허페이에서 박해를 받아 최초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자다.

다음은 리메이가 허페이 여자 노동수용소에 불법 감금됐을 때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이 회상한 일부 기억이다.

불법 감금 기간에 리메이는 ‘전향(수련 포기)’한 변절자나 ‘바오자(包夾, 수감자로 이뤄진 감시자)’가 온갖 수단을 사용해도 굴복하지 않았다. 리메이는 한때 다른 대대에서 특별히 전출된 두 명의 바오자(한 명은 마약 밀매업자, 다른 한 명은 살인자)에게 엄격한 통제를 받았는데, 이들은 노동하지 않고 전문적으로 리메이를 감시하고 연공을 못 하게 하며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강요했다. 당시 리메이는 그런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노동수용소에서 거의 탈출할 뻔했지만 실패했고, 그 이후로 리메이는 더욱 엄격한 관리를 받게 됐다.

환경이 점차 엄격해짐에 따라 감옥경찰은 매일 리메이와 대화를 나눴는데, 대화를 시작하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리메이는 원래 말수가 적었는데, 고립과 엄격한 통제로 대화할 사람이 없어 점점 더 차분한 사람이 됐다.

한번은 모두가 모여서 드라마를 볼 때 교대 근무를 하던 바오자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당신들은 얼마나 편안하나요? 아이고, 리메이는 정말 바보 같아요. 아직 그렇게 어린데 편안한 날을 보내지 않고 기어이 그런 고통을 겪으려 하다니, 여기서 나가서 연공하면 좋지 않나요? 그녀는 다시 단식하고 있는데 너무 말랐지만 계속 벌을 받아야 해요. 연공을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하려 하는데, 보고 관리하지 않으면 안 돼요. 아니면 감옥경찰이 나에게 감점을 줘요. 나간 뒤에 연공을 하면 누구도 상관하지 않을 텐데요!” 리메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어넘겼다.

그때 이 바오자 옆에 있던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바오자는 갑자기 큰 목소리로 “당신은 리메이와 비교할 수 없어요! 당신은 그녀와 수준 차이가 나요. 하하, 당신이라면 그들과 싸웠겠죠”라고 받아쳤다. 말을 한 다음 그녀들은 하하거리며 웃었다. 그들도 마음속으로 리메이를 존경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메이는 매우 조용하고 부드러워 보였으며 깨끗하고 밝은 눈, 깨끗한 피부, 아름답고 위엄있는 외모, 나이를 뛰어넘는 성숙함과 안정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친절하고 조용한 성격이지만 그래도 때를 놓치지 않고 한두 마디는 했다.

한동안 리메이는 박해에 저항하기 위해 단식을 했다.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음식을 주려 했지만 그녀는 전부 다 거절했다. 어떤 사람은 먹지 않으면 얼굴이 노랗게 변할 거라며 먹으라고 했지만 그녀는 모두 거절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실제로 그녀보다 얼굴이 더 노란색을 띠었다. 리메이는 “당신은 왜 먹어도 얼굴이 노랗게 보이는 거예요?”라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웃었고 리메이도 약간 미안한 듯 웃었다.

한번은 리메이가 자발적으로 ‘전향’ 당한 사람들과 함께 일할 것을 요청했는데 감옥경찰들은 그녀도 전향할 것 같아서 매우 기뻐했다. 사실 리메이는 새로운 경문을 듣기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한 것이었다. 어떤 이가 리메이에게 새로운 경문을 알려주자 그녀는 바로 (짧은 것) 외웠으며, 심지어 ‘전향’한 사람들에게 대법을 읽고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명확하게 알려줬다. 이 문제를 알게 된 경찰들은 리메이가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중단시키고 그녀를 독방에 가두어 대법을 보고 연공할 기회도 주지 않았으며, 소위 가족 면회도 금지하고 때때로 그녀에게 고함을 질렀다.

2002년 2월 1일 아침, 리메이가 사고를 당했다는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 경찰들은 리메이가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했다. 당시 다들 의견이 분분했다. 그녀는 그렇게 명석하고 이성적인 수련인이었고, 불법 강제노동 처분이 끝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누가 자살했다고 믿겠는가.

사실 리메이가 ‘자살당했다’는 것은 여러 징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약 일주일 전, 허페이 경찰 측이 치안 유지를 위해 많은 경찰을 동원해 리메이의 시신을 강제로 화장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22년이 지났다. 그해의 리메이는 28세로 영원히 고정되어 젊고 아름다우며, 온화하고 친절하며, 이성적이고 성숙하며, 단순하고 단호하며, 고통을 겪을 수 있었고 삶과 죽음에 집착이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지조가 굳고 아름답고 친절한 여성을 항상 마음속 깊이 기억할 것이다.

리메이가 박해로 사망한 사례에 대한 간략한 설명

허페이시 출신의 28세 파룬궁수련자 리메이는 2001년 2월 1일 안후이성 여자 노동수용소에서 박해받아 사망했다. 경찰은 ‘투신자살’이라고 주장했지만, 가족들은 리메이가 사망 판정을 받은 지 10시간이 넘은 후에도 시신이 여전히 따뜻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부자들에 따르면, 당시 안후이성 부성장 왕자오야오(王昭耀), 안후이성 공안청장, 안후이성 사법청장, 노동교양국 국장, 안후이성 및 허페이시 ‘610(파룬궁 탄압기구)’ 사무실 두목 등이 장례식장에 주재하며 지켰고, 이들은 리메이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지시했다. 리메이의 시신을 화장할 때 수많은 경찰이 화장터를 지키고 아무도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고, 각급 정부 관리들은 가족에게 비밀을 외부에 누설하지 말라고 압력을 가했다.

리메이의 가족은 모두 6명으로, 아버지 리자딩(李家鼎)은 허페이시 헝퉁(恆通) 기계회사에서 은퇴한 간부였고, 어머니 추자전(邱家珍)은 허페이 싱즈(行知)학교 음악 교사로 1996년 파룬궁을 수련했다. 두 딸 리쥔(李軍)과 리메이도 1998년 대법 수련에 들어섰다. 리메이는 헝퉁 회사에서, 여동생 리쥔은 둥스(東市) 양식분국에서 일했으며, 리쥔의 남편 우싱(吳星)은 허페이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일하며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었다. 일가족은 ‘진선인(真·善·忍)’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해 가정은 따뜻하고 즐거운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1999년 7월, 중국공산당 장쩌민 정권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뒤, 리메이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파룬궁의 선하고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베이징에 여러 차례 청원했다. 두 차례나 그녀는 베이징에서 허페이로 끌려가 15일간 불법 감금 및 세뇌반에 갇혀 박해를 당했다.

2000년 4월, 리메이는 또다시 밖에서 연공을 했다는 이유로 15일간 불법 감금됐다. 구치소에서 풀려난 다음 날, 리메이는 네 번째로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는 길에 올랐다. 도중에 그녀는 벙부(蚌埠)에서 진상 현수막을 주문하던 중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점 주인의 신고로 납치됐다. 열흘 넘게 불법 감금된 후 허페이 타이어 공장 세뇌반으로 옮겨져 9일간 박해에 맞서 단식을 했다. 그 후 안후이성 노동수용소로 불법적으로 이송됐다. 노동수용소는 리메이가 ‘진선인’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온갖 육체적, 정신적 시달림을 가했다. 대부분 시간 그녀는 모두 엄격한 통제를 받았으며 두 명의 수감자가 온종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녀를 감시했다.

2001년 1월 26일, 리메이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눈을 맞으며 노동수용소에 있는 리메이를 면회하러 갔지만 수용소 측은 온갖 핑계를 대며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가족은 “왜 자꾸 면회를 허락하지 않죠? 도대체 이유가 뭐죠?”라고 물었다. 리메이의 언니는 그들에게 “설명은 단 하나, 제 여동생은 당신들에게 박해와 괴로움을 당했고, 우리가 당신들이 인권을 짓밟은 범죄행위를 볼까 봐 두려워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화를 내며 말했다. “여기서 인권에 관해 이야기하지 마세요! 여기서는 논할 인권이 없습니다.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해 말하지 마세요. 저는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리메이는 온종일 두 사람이 지켜보는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고 아무도 만나지 못합니다.” 리메이의 가족은 눈물을 흘리며 떠날 수밖에 없었다.

2001년 1월 30일 오후, 경찰은 갑자기 리메이가 105호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고 가족을 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의사에 따르면, 리메이는 뇌 위축과 내부 장기 부전으로 심장 박동만 약하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가족들이 리메이를 만났을 때 경찰은 엄격하게 통제했고 한 명씩만 면회가 허용됐으며, 모든 가족은 경찰에게 두 손을 붙잡혀 멀리서만 리메이를 바라볼 수 있었다. 가족들은 리메이의 얼굴이 부어오르고,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나며, 목이 흰 거즈로 싸여 있고 목 아래는 이불로 덮여 있는 것을 보았다. 면회가 끝난 후, 리메이의 가족은 직장 접대소로 끌려갔고 항의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01년 2월 1일 오후, 성과 시 ‘610’,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공안국, 노동수용소, 주민센터에서 온 많은 사람이 리메이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가족들을 데리고 리메이를 만나러 105병원에 간다고 말했지만, 경찰차가 대신 장례식장으로 데려다줬다. 경찰은 갑자기 리메이가 ‘투신 자살’했으며 즉시 화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리메이의 어머니는 “당신이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온종일 감시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건물에서 뛰어내릴 수 있나요?”라고 질문했다. 가족은 법의학자에게 사인을 밝혀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에게 사진이나 영상을 찍거나 녹음을 하지 말라고 했고, 그렇지 않으면 리메이를 강제로 화장하고 가족들이 리메이를 볼 수 없게 하겠다고 했다. 가족은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리메이가 아침 6시 5분에 사망했다고 말했다. 밤 9시에 언니가 옷을 사서 갈아입힐 때, 시신은 추운 겨울에 거의 15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었지만 만져보면 마치 잠든 것처럼 여전히 따뜻했다. 언니는 “사람이 안 죽었어요. 아직 뜨거운데 어떻게 화장할 수 있나요?”라고 외쳤다. 친척들도 시신을 만져보고 여전히 따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괴로워하며 경찰에게 “요즘은 산 사람도 화장하나요? 당신들도 만져보세요”라고 말했다. 여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신을 만져보려고 손을 내밀었고,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움츠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정말 따뜻해요!”라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방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친척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리메이의 몸을 주의 깊게 살펴봤는데, 리메이는 매우 얇은 옷을 입었고, 5cm가 넘는 길이로 턱이 벌어져 있었으며, 상처를 꿰맨 실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고, 배 위에 담배꽁초만 한 점이 많이 있었다. 그때는 여전히 찬바람이 살을 에는 듯 추웠는데, 사망한 지 거의 15시간 가까이 된 시신이 어떻게 여전히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가? 설마 리메이가 죽기 직전에 장례식장에 끌려갔단 말인가? 리메이의 아버지는 더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들에게 “왜 리메이의 몸이 아직도 따뜻합니까? 살아있는 사람을 구하지 않고 장례식장으로 보내다니, 당신들은 양심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리메이의 시신은 결국 강제로 화장됐다. 당시 부성장이 직접 주재하며 지켰고, 성 공안청장이 지휘해 경찰차 수십 대를 배치해 장례식장을 강제로 봉쇄하고 친척들까지 가혹하게 심문했다.

리쥔은 집으로 돌아온 뒤 여동생이 납치돼 박해받아 죽었다는 사실, 친척들이 시신에서 상처와 멍 자국을 본 사실, 리메이가 고문당하고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남겼다는 사실 등을 모두 기록해 중공 장쩌민 집단의 잔인한 파룬궁 박해 범죄를 국제사회에 폭로했다. 중공 악당들은 당황한 나머지 리쥔의 가족을 납치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리쥔과 남편 우싱은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상하이로 가서 일자리를 구하고 살았다.

2001년 10월, 상하이에서 APEC 회의가 열렸다. 중공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집집마다 철저히 조사하고 모든 사람을 검열했다. 2001년 10월 2일, 우싱과 리쥔 부부는 경찰에게 납치돼 불법적으로 감금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쥔이 ‘중병’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1월 3일, 상하이 경찰 측은 리쥔을 허페이 전염병 병원으로 이송했고, 리쥔은 한 달 뒤인 2001년 12월 4일에 억울하게 사망했다. 중공 당국은 그녀가 간염으로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리쥔은 납치되기 전까지 매우 건강했다.​

당시 리쥔의 어머니, 남편 우싱은 여전히 중공 당국에 의해 불법 감금되어 있었다. 우싱은 약 2004년부터 2005년에 걸쳐 청원하러 베이징에 갔고, 그 이후로 실종된 상태다. 전 야오하이(瑤海)구 허핑로(和平路) 파출소 소장 왕광쉬안(王光選)과 경찰 저우(周) 씨에 따르면, 우싱은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따뜻하고 화목하며 남들이 부러워하던 한 가정이 중공의 박해로 집과 가족을 다 잃었고, 리메이의 아버지만 남아 다섯 살배기 손자와 함께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리메이와 그녀의 일가족이 박해당한 더 많은 자세한 내용은 명혜망 기사 ‘부성장이 지키며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그녀를 화장해’ 및 ‘박해로 사망한 안후이성 대법 수련자 리메이와 리쥔의 이야기’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4년 1월 3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4/1/31/4717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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