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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베이 징산시 수련자 리아이핑, 부당하게 출국 제한받아

[명혜망](후베이성 통신원) 후베이성 징산(京山)시 파룬궁수련자 리아이핑(李愛平)이 올해 5월 중순 자녀를 해외로 데려가 치료하기 위해 시 공안국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여권을 신청했지만, 담당 공무원은 발급을 거부했다.

나중에 징산시 공안국 국보대대에서 이미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보고하고 등록해, 불법적으로 그녀의 출국을 막은 것으로 알려졌다.

리아이핑의 아이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고통을 겪으며 자랐다.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하던 1999년, 그는 한 살이었고 아버지 저우칭(周淸)이 불법 감금되어 있을 때, 아이는 종종 장난감을 들고 “아빠를 찾아서 같이 놀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아이는 큰 희망을 품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어머니와 먼 길을 떠났지만, 매번 차가운 철문 밖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고 거절당했다. 나중에 아이는 골결핵에 걸렸고 게다가 당국의 박해로 괴롭힘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여러 번 이사했다. 전신이 마비된 후 우한의 큰 병원에서 목등뼈 앞·뒤쪽, 허리뼈 및 등뼈에 복잡한 큰 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거의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허리를 곧게 펴면 통증을 느끼고, 20분 정도 서 있으면 잠시 앉아 있거나 누워 있어야 했다. 주치의와 큰 병원 교수도 병의 원인을 분명히 알지 못했다.

리아이핑의 남편 저우칭은 징산 제1고등학교의 물리 교사였는데,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수업 수준과 개인적인 수양이 크게 향상되어 동료 교사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한 나이 많은 교사는 “우리 학교에 저우칭 같은 교사가 열 명만 있으면 학생 모집에 걱정이 없겠다”라고 말했고, 한 책임자는 “명예와 재물을 추구하지 않는 저우칭에 놀랐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저우칭은 여러 차례 불법 감금됐고, 세뇌반에 납치돼 박해받았으며, 공직에서 해임됐다. 후베이성 샤오간(孝感)시 국보 경찰에게 납치돼 구치소에서 박해받아 마비되고 말을 할 수 없을 상황에 처하자 친척들의 보증 서명으로 업혀서 집으로 돌아왔다. 저우칭의 몸은 파룬궁 수련을 통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또 부당하게 4년 형을 선고받고 후베이성 사양(沙洋) 판자타이(范家台) 감옥에 불법 감금되어 박해받았다. 8개월(실제 형량은 4년 8개월)을 초과 수용된 후, 또 곧바로 우한시 탕순후(湯遜湖) 세뇌반에 납치되는 등 박해를 받았다.

올해 51세인 리아이핑[일명 리샤오훙(李小紅)]은 징산현(현재는 시) 신시(新市)진 출신으로 징산현 백화점의 전직 직원이다. 최근 몇 년간 리아이핑과 그의 친척들은 징산시 바이리투(八里途) 파출소 경찰과 ‘610(파룬궁 탄압 기구)’ 직원들로부터 여러 번 괴롭힘을 당했다. 경찰은 심지어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에 의존하는 80여 세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가 어디 있느냐고 추궁했다. 원래 뇌졸중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노인은 이로 인해 충격을 받았다. 많은 경찰이 불법 가택수색을 해서 이웃들은 집안의 누군가가 나쁜 짓을 해서 경찰이 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 결과 연로한 아버지는 또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충격으로 심장병 등 질병이 생겼다.

1. 운 좋게 파룬따파를 얻어 구사일생으로 건강을 되찾다

리아이핑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태어났고 아버지는 ‘우파’로 몰려 자주 비판을 받았기에 당시 어머니가 얼마나 압박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태어날 때 매우 허약했다. 의사들은 “이렇게 허약한 아이를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빈혈이 있었고 감기에 자주 걸렸는데, 한 번 걸리면 몇 달간 지속되고 주사와 약물 치료도 빠른 효과를 보이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걷기도 힘들었고, 겨울에는 두꺼운 패딩을 걸치고 있어도 추위에 떨며 젊음의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각한 질병으로 목숨을 잃을 뻔한 그녀는 글도 읽을 수 없었다. 삶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운 좋게 파룬따파를 얻고 죽을 고비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녀는 대법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에 놀랐고, 길 잃은 아이가 마침내 집을 찾은 것처럼 기뻐하며 환호했으며, 파룬따파는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다.

리아이핑은 낡은 공중화장실 맞은 편에 있는 옛 징산현 백화점에서 일했는데 그곳 공중화장실은 아무도 청소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징산현 시내에서 가장 번화가에 있었기에 많은 사람이 화장실을 사용했다.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 발 디딜 곳도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근처에 공중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밤에는 전등도 없어 더더욱 사용하기 힘들었다. 리아이핑은 여가 시간과 퇴근 시간을 이용해 스스로 청소도구를 사서 화장실을 청소해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결했다. 백화점은 문을 일찍 열어야 해서 직원들은 일반적으로 먼저 문을 연 다음 아침밥을 사서 와 직장에 와서 먹었다. 백화점은 건물 뒤편에 창고를 연결하는 복도가 있었고 구석에 싱크대가 있었다. 직원들은 아침을 먹은 후 남은 음식을 싱크대에 붓고 자신의 그릇만 깨끗이 씻는다. 싱크대를 제때 관리하고 막히면 뚫어줄 사람이 없다 보니 가끔 싱크대가 막혀 물과 음식물이 넘쳐 사방이 엉망이 되기도 한다. 여름철에는 음식이 썩은 악취로 인해 뒤쪽 창고로 상품을 가지러 가기도 어렵고, 때로는 창고 문으로 악취가 흘러 나와 상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리아이핑은 여가나 퇴근 시간을 이용해 막힌 싱크대를 뚫고 음식물을 깨끗이 청소했다. 회사 직원에게 더 편안하고 깨끗한 작업 환경을 갖도록 할 뿐만 아니라 상품이 영향을 받지 않도록 했다.

고향인 시골에 사는 남편의 몇몇 형은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한번은 개학이 됐는데 두 형의 세 자녀가 수업료를 낼 돈이 없다고 시부모가 그녀에게 말했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돈을 꺼내 아이들의 수업료를 내게 했다. 당시 리아이핑의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시부모가 도와 아이를 돌보다 보니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남편과 그녀의 임금을 합치면 1천여 위안이었고, 세 자녀의 학비를 합친 것도 1천여 위안이었다. 그 직전에 남편의 셋째 형 부부가 몇 달간 그들 집에 얹혀살았고, 셋째 형 부부가 떠날 때 수백 위안의 생활비 외에 요리 도구부터 이불에 이르기까지 많은 물건을 차에 실어서 보냈다. 셋째 형 부부는 떠난 후 징산현에서 일했고, 그 후 큰 형과 셋째 형 식구들이 리아이핑의 집에서 식사했는데 10명의 식구가 한 달에 쓰는 비용이 2천 위안이었다. 남편의 월급은 한 달에 1천여 위안에 불과했고, 그녀의 월급을 합쳐도 충분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아이가 태어나자 상대적으로 생활 조건이 좋은 친정 친척들이 그녀에게 준 축의금 전부를 내놓았다. 시부모는 리아이핑에게 시댁 친척들이 파룬궁을 수련하는 좋은 며느리를 만나 운이 좋다고 했다.

저우칭이 부당하게 투옥됐다가 풀려난 후, 그들은 줄곧 시부모의 생활비를 냈다. 시부모는 건강이 좋고 자신을 스스로 돌볼 수 있어 대부분 따로 살고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한동안 셋째 형 집에 머물기도 하는데 저우칭의 가족은 여전히 매달 생활비를 주었다. 저우칭의 아버지와 큰형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후 저우칭의 작은 형과 셋째 형이 어머니의 생활비를 내지 않겠다고 해서 분쟁이 생겼다. 나중에 수년간 헌신한 저우칭 가족은 심지어 온 친척의 구이양(貴陽)시 여행비도 내줬다. 이를 본 저우칭의 작은 형도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기꺼이 돈을 보태기로 했다.

저우칭의 형이 집을 사고 사업을 해도 그들은 형을 돕기 위해 돈을 냈다. 저우칭이 집을 사려는데 돈이 부족했을 때 형이 또 돈을 빌려달라고 하자(돈을 빌려도 돌려주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돈을 형에게 빌려줬다. 이제 리아이핑과 저우칭의 친척들은 그들이 착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리아이핑도 홍대한 불은호탕(佛恩浩蕩)의 혜택을 누리며 무한한 행복과 기쁨을 느꼈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편안해져 삶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2. 중국공산당 장쩌민 집단의 박해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다

1999년 중국공산당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한 이후 리아이핑은 후베이성 징산 제1구치소에 두 차례 불법 감금됐고, 후베이성 징먼시의 한 세뇌반에 납치돼 박해받기도 했다. 리아이핑은 불법적인 박해에 맞서 열흘 넘게 단식했고 생명이 위독해지자 세뇌반에서 풀려났다.

1970년생인 남편 저우칭은 후베이성 징산현 뤄뎬(羅店)진(현재는 시) 출신이며, 징산현 제1고등학교에서 물리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저우칭은 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을 받았을 때 성도(省都)에 남아 일할 수도 있었지만, 고향인 징산현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일찍이 미국에 사는 리아이핑의 오빠(물리학 박사)가 종종 그에게 오라고 초청해 해외로 가서 발전할 기회가 있었지만,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학생들을 버릴 수 없었기에 떠나기를 꺼렸다. 그는 항상 파룬궁의 ‘진선인(真·善·忍)’ 이념을 사람이 되는 준칙으로 삼아 학생들이 좋아하고 학부모들의 존경을 받았다.

저우칭의 박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명혜망의 ‘후베이성 징산시 교사 저우칭과 가족, 구이양 경찰에 박해받아’라는 보도와 ‘후베이성 징산현 교사 저우칭, 박해받아 거의 실명 위기…가족 석방 촉구’라는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저우칭은 부당하게 4년 형을 선고받았고, 리아이핑은 아이를 데리고 판자타이 감옥에 저우칭을 만나러 갔으나 결국 감옥 측은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찬바람 속에서 2~3시간 이상 기다렸고, 때로는 여름 더위나 폭풍우를 겪었으며, 때로는 빙설로 뒤덮여 뼛속까지 파고드는 찬 바람을 맞아야 했다. 때로는 아이가 밖에서 울면서 “아빠, 아빠…”라고 외치는 소리에 뛰쳐나온 감옥 직원은 그의 아내와 아들을 꾸짖고 쫓아냈다. 리아이핑은 현지 ‘610’을 찾았으나 그들이 거듭 핑계를 대며 거절했기에 매우 우울했는데 그날 대형 트럭에 치였다. 대형 트럭이 두 다리를 누르고 지나갔기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오른쪽 종아리 피부 압사, 오른쪽 발목 분쇄 골절, 오른쪽 발 인대가 끊어져, 의사는 양쪽 다리를 절단할 것을 권했다. 여름이었기에 의사들은 감염, 패혈증을 우려했다. 리아이핑은 두 다리를 절단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그녀는 허벅지 피부를 잘라내 오른쪽 종아리 피부에 이식했지만 수술은 실패했고, 이식된 피부는 죽어서 떨어졌다. 나중에 파룬궁 수련을 통해 리아이핑의 다리는 점차 회복됐고 그녀는 스스로를 돌볼 수 있었다.

리아이핑이 중상을 입은 후, 아이를 돌봐줄 사람도 없고 생계원도 없었으며 오른쪽 다리가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는 남편 저우칭을 집으로 데려가게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610’ 두목 톈리샹(田禮祥)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톈리샹은 리아이핑에게 시간을 약속했지만, 결과는 톈리샹이 한 여자(그의 아내인지 누군지 모름)를 보냈다. 리아이핑은 약속한 시간에 갔고 사무실에 있던 그 여자는 심한 욕설을 퍼붓고 리아이핑을 쫓아냈다. 저우칭은 불법 감금, 판결 기간에 임금이 중단됐기에 친척이 도움이 아니라면 리아이핑 모자는 길거리에서 굶어 죽었을 것이다.

리아이핑 모자는 저우칭이 억울한 투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살아남았지만(저우칭은 8년 가까이 집에 없었음), 현지 ‘610’은 저우칭의 가족을 놓아주지 않았고, 가족은 강제로 이주당해 구이저우성 구이양시로 떠돌아야만 했다. 저우칭은 학생들에게 과외를 해주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학생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차분한 마음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었기에 많은 기관과 동업자들이 그와 협력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저우칭의 가족은 이후 구이양에 집을 사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2013년 징산현 공안국 국보대대 전 대장이었던 펑이린(彭義林)은 새로 임명된 ‘610’ 책임자 저우즈핑(周志萍)을 이끌고 구이양으로 가서 저우칭을 만나려 했지만 그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펑이린은 전화를 걸어 저우칭의 출국을 (불법적으로) 제한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구이양 경찰은 저우칭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저우칭이 다른 사람과 협력해 꾸린 보충 수업반이 강제로 문을 닫게 된 후 그는 사립학교에 근무했다. 파출소는 관산후(觀山湖) 교육국 국장을 통해 관련 기관과 함께 학교 교장을 위협하고 저우칭을 해고하지 않으면 학교를 운영하지 못한다고 협박했고, 저우칭은 어쩔 수 없이 퇴직해야 했다. 2009년 여름, 저우칭은 어느 날 아침 자녀의 호적 이전과 관련된 절차를 신청하기 위해 관산후 주민센터의 스지청(世紀城) 파출소에 갔지만, 직원은 이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저우칭을 억류했다. 주민사무소, 주민위원회 및 기타 관련 직원은 하루에 여러 번씩 저우칭 가족을 지속적으로 괴롭혔고, 심지어 집주인에게 저우칭의 가족을 쫓아내게 했다.

리아이핑의 아이 저우밍후이(周明慧)는 골결핵에 걸려 치료와 재활을 위해 안정적인 환경이 필요했지만, 오랫동안 당국의 박해로 겁에 질리고 쫓기는 등 무섭고 우울한 환경에서 살았다. 어쩔 수 없이 구이양과 후베이를 오가며 여러 번 이사하고 호구를 이전하면서 괴롭힘을 당했다. 그 당시 아이의 몸은 이미 매우 아팠고 호흡과 걷기가 어려웠다. 구이양시, 다산둥 주민위원회의 왕슈가 집에 찾아와서 저우칭 가족에게 호구를 옮겨 빨리 이사하라고 했다. 저우칭 가족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이사해야 했고, 이번에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전신이 마비됐다. 결국 이 아이는 후베이성 우한의 한 큰 병원에서 목등뼈 앞쪽, 뒤쪽, 허리뼈, 등뼈에 대한 복잡한 큰 수술을 받았다. 손바닥만 한 부위를 제외하고 목 뒤쪽에서 꼬리뼈까지 아이의 등 척추 전체가 수술 자국이었다. 수술 기간에 병원에서는 몇 번이나 위독 통지를 내렸다.

아이는 수술한 지 이미 3년 가까이 되지만 허리를 곧게 펴면 통증을 느끼고, 20분 정도 서 있으면 잠시 앉아 있거나 누워있어야 됐다. 주치의와 큰 병원의 교수도 병의 원인을 분명히 알지 못했다. 리아이핑은 치료를 위해 아이를 해외로 데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여권을 신청하기 위해 징산시 공안국에 갔다. 아이의 현재 몸 상태는 곁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고 공안 당국이 리아이핑의 출국을 불법적으로 제한한 것은 아이의 치료를 위한 출국을 막아 버린 것이다.

지금 ‘10.1’ 기간 중국공산당은 노래와 춤으로 평화를 가장하며 수많은 인간 세상의 비극과 고통, 슬픔을 숨기고 있다.

(역주: 관련 박해 기관과 박해자 정보는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3년 10월 7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10/7/4668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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