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간쑤성 통신원) 중국공산당(중공) 언론의 파룬궁에 대한 모함 선전을 막기 위해 케이블TV에 진상 영상을 삽입해 방송했던 파룬궁수련자 웨이쥔런(魏俊仁)이 20년간 감옥에 감금된 것으로 확인됐다.
2002년 10월 27일, 웨이쥔런은 란저우(蘭州)시 청관(城關) 법원에서 불법적으로 20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고문 박해를 당했다. 2022년 8월 13일, 웨이쥔런은 집에 돌아왔지만 집과 가족을 다 잃었다. 그러나 여전히 현지 공안과 검찰원의 괴롭힘을 받으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올해 54세인 웨이쥔런은 간쑤성 핑량(平涼)시 징촨(涇川)현 뤄한둥(羅漢洞)향 출신이다.
2002년 8월 17일 19시, 칭하이성 시닝(西寧)시 청둥구와 청베이구에서, 이튿날인 8월 18일 20시에는 간쑤성 란저우시 훙구구에서, 셋째 날인 8월 19일 20시에는 칭하이성 민허현에서 파룬궁수련자들은 케이블망을 통해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의 진상 동영상 ‘증거[見證]’와 ‘역사의 심판’ 등을 삽입방송하는 데 성공했다. 각 방송은 30분간 방영돼 수많은 중국인을 일깨웠다.
삽입방송된 영상은 파룬궁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전했을 뿐만 아니라 ‘톈안먼 분신자살’ 조작 사건의 진상과 파룬궁을 모함하려는 중공의 의도를 폭로했다.
삽입방송이 성공하자 중공 장쩌민 집단은 극도로 공포에 질려 복수에 나섰다. 그 결과 웨이쥔런, 리원밍(李文明), 장룽쥐안(張榮娟), 허완지(賀萬吉), 리충펑(李崇峰), 돤샤오옌(段小燕), 런화(任樺), 쉬펑(徐峰), 쑨자오하이(孫照海), 장징메이(張京梅), 자오리리(焦麗麗), 왕위샤(王玉霞), 류바이위안(劉百源), 장샤오핑(張小萍), 장훙강(張宏剛) 등 사건과 관련된 수련자 최소 15명이 납치됐다. 그 이후 이들은 모두 불법 강제노동 처분이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웨이쥔런이 당한 박해는 다음과 같다.
폭력적인 납치
2002년 8월 14일 정오, 란저우시 공안7처에서 허보(何波), 웨이둥(魏東)을 우두머리로 한 경찰 5~6명이 ‘유다’(역주: 파룬궁을 수련하다 중공 편을 들며 배신한 사람을 비유)를 앞장세워 란저우 바이인(白銀)로에 있는 웨이쥔런의 임대 주택을 찾았다. 경찰들은 웨이쥔런을 심하게 구타했고 그의 머리카락을 한 줌이나 뽑았다. 경찰은 또 신발 밑창으로 웨이쥔런의 얼굴을 구타하고, 그의 다리를 밧줄로 묶은 후 발로 밟았으며, 수갑을 등 뒤로 채운 후 내리치는 등 폭행을 가했다.
그날 밤 웨이쥔런은 란저우 공안7처로 끌려갔고 허보, 웨이둥과 다른 경찰 몇 명이 그를 고문 도구 ‘호랑이 의자’에 앉히고 머리에 헬멧을 씌운 다음 나사를 조이고 손목을 조이는 등 고문을 가했다. 웨이쥔런은 고통으로 땀투성이가 됐다. 또 경찰은 또 그의 목을 가죽끈으로 묶어 호랑이 의자 뒤쪽에 쇠사슬에 고정시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경찰은 또 그의 손목을 강제로 조여 힘줄과 뼈에 상처를 입혔는데, 1년이 지난 후에도 엄지는 마비 상태였다.
웨이쥔런은 불법적으로 컴퓨터, 프린터, 외장하드, 휴대폰, 2300위안이 넘는 현금, 1만 위안이 넘는 은행카드 등을 강탈당했는데 경찰은 메모 한 장 남기지 않았다.
공안, 검찰, 법원에 모함당하다
2002년 8월 17일, 웨이쥔런은 란저우시 시궈위안(西果園) 구치소로 보내졌다. 2003년 3월, 만성 영양실조와 사악한 박해로 그는 연공할 수 없게 되어 온몸에 옴과 궤양이 생겼다. 게다가 급성 맹장염에 걸려 수술도 받았다.
당시 웨이쥔런의 몸은 극도로 허약해져 걷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했다. 잘 때는 발목뼈가 너무 아파서 바닥에 닿게 할 수 없었다. 경찰은 가족에게 병원비를 요구했고 결국 가족은 속아서 1000위안을 냈으며, 경찰 자오 씨가 사사로이 챙겼다. 며칠 후 구치소 경찰이 웨이쥔런에게 병원비를 또 요구하자 웨이쥔런은 “가족이 돈을 이미 지급했고 아직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또 무슨 돈을 달라고 하는가”라고 말했다.
2002년 10월 1일, 그는 청관 검찰원에 의해 불법 기소를 당했다. 10월 27일 청관 법원은 웨이쥔런, 창샤오이(强小毅), 쑤안저우(蘇安洲), 리원밍, 왕펑윈(王鵬雲), 쑨자오하이, 류즈룽[劉志榮, 2007년 톈수이(天水) 감옥에서 박해로 사망] 등 수련자에 대해 비밀 재판을 열었다. 법정에서 웨이쥔런과 다른 수련자 7명은 이구동성으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수련은 무죄다!”라고 외쳤다.
수련자들이 정념으로 거부하자 재판은 계속될 수 없었다. 오후 2시쯤, 법원은 소위 ‘상급자’와 상의한 후 웨이쥔런 등 7명에게 불법적으로 중형을 선고했다. 리원밍 20년, 왕펑윈 20년, 쑨자오하이 19년, 창샤오이 16년, 류즈룽 15년, 쑤안저우 10년을 선고했다. 웨이쥔런은 법원에서 이른바 ‘X교를 사용하여 법률 집행을 파괴한 죄’(실제로는 중공이 사교 집단)로 13년을 선고받고, 또한 ‘X교’를 사용해 케이블TV 및 시설을 훼손한 혐의로 14년을 선고받아, 총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기간에 법원 측은 수련자 가족에게 재판 방청을 통지하지 않았다.
란저우 감옥에서 당한 고문
2003년 11월 5일, 웨이쥔런은 란저우 감옥으로 이송돼 박해당했다.
중국 서북방의 11월 날씨는 비교적 춥다. 웨이쥔런은 감옥에 들어간 뒤 곧바로 집중 관리팀으로 보내졌다. 죄수 4~5명이 그를 구타해 바닥에 넘어뜨리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옷을 벗긴 후 20분 정도 알몸으로 추위에 떨게 한 다음 죄수복을 입혔다. 그런 후 웨이쥔런은 경찰에 의해 다시 감옥 대대로 끌려갔다.
그가 입감(入監)대에 있는 동안 키가 큰 한 경찰이 란스(蘭石) 공장의 파룬궁수련자를 구타해 수련자들이 경찰에게 공정한 평가를 요구하며 단식으로 항의한 사건이 있었다. 나흘 후 그 경찰은 처벌받았다. 그동안 수련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고, 법을 알리고, 항소 자료를 쓸 수 있는 수련 환경을 개척했다.
대학 학위가 있고 지식이 풍부한 수련자 뉴완장(牛萬江)은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에 10페이지가 넘는 항소장을 썼다. 그 과정에서 경찰은 수감자들을 시켜 글을 쓰지 못하도록 감시하라고 했다. 종이가 없자 그는 바닥에서 주운 담뱃갑 종이를 하나하나 모아 두었고 볼펜을 찾아냈다. 그러나 경찰에게 발각되기만 하면 몰수당했다. 죄수들은 수련자들이 친절하고 인품이 좋은 것을 보고 몰래 펜을 주었다. 하나를 몰수당하면 다른 사람이 또 하나 주었는데, 이렇게 3개월 시간을 들여 뉴완장은 항소장을 작성해 상부에 제출했다. 경찰은 파룬궁 진상을 똑똑히 알고 충격을 받았으며 대법 수련자를 새로운 안목으로 대했다. 이때부터 수련자들을 별로 괴롭히지 않았다.
2003년 6월 4일, 웨이쥔런은 10감구(監區)로 이송됐다. 대장이자 감구장은 가오젠둥(高振東)이고, 감옥경찰은 다이쉐이(戴學義, 나중에 폐렴으로 사망)였다. 웨이쥔런은 죄를 자백하지 않았고, 감옥 규칙을 외우지 않았으며, 노동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수감자 두 명에게 감시당해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었다. 웨이쥔런이 작성한 항소 자료는 가오젠둥에 의해 보류됐다.
2006년 11월 감옥경찰들은 모든 감방에서 강제 ‘전향(수련 포기)’을 진행했다. 수련자 한 명을 ‘전향’시키면 4000위안을 받았기에 이익에 눈이 먼 경찰은 더욱 광적으로 수련자들을 괴롭혔다. 어두운 독방에 가두기, 작은 의자에 앉히기, 밤낮 잠 못 자게 하기, 매달기, 수갑 채우기, 전기충격, 구타, 욕설 등 학대를 진행했는데 못 하는 짓이 없었다.
웨이쥔런은 어두운 방에 갇혀 잠을 자지 못했는데 2교대로 8명이 감시했다. 낮에는 중대장 리훙(李弘)이 경찰 창샤오쥔(常小軍), 리수탕(李書棠), 리창(李强), 마융(馬勇)과 함께 비공개 법정을 만들어 수갑을 채우고 웨이쥔런을 불법 심문하며 “범죄를 자백하고 법에 복종하라”라고 요구했다. 웨이쥔런은 경찰들과 법을 기준으로 이치를 따지며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른바 ‘천안문 분신자살’ 조작 사건은 파룬궁을 모함한 장쩌민을 우두머리로 한 정치 깡패들이 만든 것으로, 흑백을 전도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법원 측은 근본적으로 사실을 상관하지 않고 증거를 중히 여기지 않으며 완전히 ‘610(파룬궁 탄압기구)’의 말을 듣고 횡포한 짓을 하는데, 죄를 씌우려고만 한다면 무슨 구실이 없겠습니까?”
경찰들은 웨이쥔런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고문으로 그를 학대하고 특수 제작된 보일러실 굴렁쇠 위에 그를 수갑 채웠다. 그리고 경찰 7명이 강압 전기봉 3~4개로 동시에 웨이쥔런에게 전기충격을 가해 몸이 펄쩍 뛰게 만들었다. 고문 3시간 후 웨이쥔런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대대장 가오전둥은 전기충격을 가해도 그가 반응하지 않자 웨이쥔런이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숨소리가 미약하자 그제야 전기충격과 구타를 멈췄다. 하지만 경찰 다이쉐이, 리스창, 리훙은 이후 계속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수련 포기 각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2007년 약 3월쯤, 웨이쥔런은 자신이 쓴 수련 포기 각서는 무효이며 진실한 말을 하겠다고 성명했다가 경찰에게 박해당했다. 감옥경찰은 그에게 20여 일간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2007년 6월, 웨이쥔런은 7감구로 이송됐지만 여전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형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감옥 규칙을 준수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장 류둥과 경찰 사리(沙裏)는 죄수 4명을 보내 그를 감시했다.
2009년부터 경찰들은 형량을 줄여준다는 구실로 웨이쥔런에게 ‘범죄를 자백하고 법에 복종하라’라고 요구했다가 모두 거부당했다.
감옥에서는 항상 강제노동이 있었다. 입감대에서는 주로 해바라기 씨를 고르고, 마늘 껍질을 벗기는 일을 해야 했다. 제7대대에서는 카펫을 짜고, 옷을 자르고 꿰매거나 포장해야 했다. 한 달간 5위안의 수당을 받았지만 초기에는 일해도 돈을 주지 않았다. 7대대에 도착한 뒤, 카펫을 짤 때 2~3위안을 주었고 옷을 만드는 데 5~6위안을 주었다.
불행히 사망한 가족들
웨이쥔런이 감옥에 감금된 초기에 그의 아내는 란저우에서 노점을 차려 돈을 벌어 어린 두 아들을 부양하고 학비를 마련하느라 웨이쥔런을 면회하기도 힘들었다. 두 아들은 고향에 있는 웨이쥔런의 부모님이 돌봐줬다.
2006년 정월 19일, 임대 주택에서 혼자 살던 아내는 불행하게 가스중독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020년에는 웨이쥔런의 연로한 부모님도 웨이쥔런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웨이쥔런의 자녀들은 15~16살에 모두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외지로 나가 일하기 시작했다.
20년간의 억울한 투옥 후 여전히 괴롭힘 당해
2022년 8월 13일, 웨이쥔런은 감옥에서 출소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집이 무너져 폐허가 된 것을 보았다. 며칠간 형 집에 머물렀던 웨이쥔런은 공안국, 파출소, 사법부로부터 자주 괴롭힘을 당했다. 그리고 현(縣) 검찰원에서도 웨이쥔런을 괴롭히러 왔다.
계속되는 괴롭힘으로 웨이쥔런은 안정적인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직장에서 며칠 동안 일하면 경찰이 괴롭혀 다른 직업을 찾아야 했다.
TV 삽입방송으로 진상을 알리는 것은 정의로운 행동
1999년 7월 20일 이후, 중공 장쩌민 정치 깡패 집단은 TV, 신문, 라디오 등 전국의 모든 선전 수단을 동원해 거짓말을 날조해 파룬궁을 비방하고 대중의 증오심을 선동했다. 이는 파룬궁을 탄압하고 박해한 것이고 또한 모든 국민에 대한 기만이었다.
2002년 3월 5일 오후 8시쯤, 지린성 수련자들은 창춘(長春) 케이블 TV 8개 채널을 통해 ‘파룬따파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다’, ‘분신자살인가, 속임수인가’ 등 진상 영상을 최초로 성공적으로 40~50분간 삽입방송해,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진상을 전면적으로 폭로했다.
비록 당시 창춘 수련자들이 잔인무도한 박해를 당했지만, 중국 전역 수련자들은 계속해 TV 삽입방송을 통해 진상을 알렸다. 창춘 외에도 랴오닝, 간쑤, 허베이, 톈진, 헤이룽장, 베이징, 구이저우, 산둥, 칭하이, 쓰촨 등지에서 파룬궁 진상 영상을 삽입방송하는 데 성공했다.
TV 삽입방송으로 진상을 알린 수련자들은 사실 파룬궁의 진정한 메시지와 진상을 중국인들에게 전달해 국민의 알 권리를 되찾아 줬기에 마땅히 칭송받고 칭찬받아야지 감옥살이, 고문, 학살당해서는 안 된다. 어떤 정부든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국민에게 발언권을 허용해야 한다.
원문발표: 2023년 4월 7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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