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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수련자 안영희, 여러 차례 감금과 고문 박해로 사망

[밍후이왕](지린성 밍후이왕 통신원) 옌지(延吉)시 조선족 파룬궁수련자 안영희(安英姬)가 중국공산당(중공)의 24년간 파룬궁 박해 중 여러 차례 불법 감금과 고문을 당해 2022년 12월 26일 64세로 사망했다.

안영희는 1958년 3월 20일 옌지시에서 태어났다. 1994년 그녀는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옌지 설법반에 참가해 대법이 좋은 것을 알았지만 수련인에 대한 요구가 높다고 생각해 수련을 견지하지 못했다. 그녀는 심각한 류머티스 관절염과 심장병이 있었고 결막하 출혈과 안압이 높은 증상이 있어 햇빛 아래에서 눈을 뜨는 것도 힘들었다. 1997년, 유일한 남동생이 나쁜 사람에게 살해당하자 이미 매우 허약했던 그녀는 큰 충격으로 머리카락이 백발이 되고 절반 이상이 빠졌다. 남동생과 사이가 좋았기에 그녀에 대한 충격은 아주 컸다. 이후 정신상태가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슴이 답답해 매일 저녁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공황장애가 생겨 저녁에 집 문을 나서지 못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도 죽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1998년 병마의 손에서 벗어나고 생존하기 위해 파룬궁 수련을 다시 시작했다. 한 달도 안 돼 기적이 발생했고 모든 증세가 사라졌다. 정신도 많이 맑아지고 성격도 낙관적으로 변했다. 그녀를 알던 사람들도 너무 신기하다면서 그녀에게 수련을 계속 잘하라고 했다.

노동수용소에서 잔인한 박해를 받다

중공은 이렇게 좋은 공법을 1999년부터 국가기구를 총동원해 탄압했다. ‘연좌제’로 안영희의 화목한 가정은 깨졌다. 박해가 시작되자 공안국 악당들은 공안국에 다니던 그녀의 남편에게 “아내를 선택하겠소? 직장을 선택하겠소?”라며 압박해 그녀가 파룬궁을 그만두도록 강요하게 했다.

1999년 연말, 그녀는 베이징에 청원을 갔고 옌지시 국내안전보위국(이하 국보) 경찰에 불법 납치됐다. 2000년 1월 안영희는 또다시 베이징에 파룬궁 진상을 알리러 갔고 또다시 옌지시 국보 경찰에 납치됐다. 이후 안영희는 옌지시 공안국의 중점 관리 대상이 됐다.

고문 시연: 전기봉 충격

2000년 10월, 안영희는 옌지시 국보 경찰에 또 납치됐다. 파룬궁 수련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불법 강제노동 처분 1년을 받았다. 옌지시 구치소에 3개월 감금된 후 창춘시 헤이쭈이쯔(黑嘴子) 노동수용소에 옮겨 잔인한 박해를 받았다. 전기충격, 혹독한 구타, 벌서기, 세뇌, 강제노동 등 박해를 당했다. 2001년 10월, 갖은 괴롭힘을 받은 안영희는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납치돼 괴롭힘을 당하다

2006년 2월 28일, 안영희는 어머니 집에서 옌지시 ‘610(파룬궁 탄압기구)’과 국보 경찰에 다시 한번 납치됐다. 그들은 불법적으로 집에 침입해 돈이 되는 물건들을 모조리 약탈했다. 어머니 집에 있던 텔레비전, VCD, 카메라, 핸드폰, 컴퓨터 및 1만 위안(약 190만 원) 현금 등 개인 재산도 모두 약탈했고 안영희도 옌지시 국보 경찰(옌지시 공안국 8층)에 납치됐다.

610 소속 경찰은 그녀의 머리를 잡고 흔들며 괴롭혔고 2박 3일간 못 자게 했다. 그녀를 가장 괴롭게 한 것은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사진을 발로 밟게 한 것이다. 그때 당시 그녀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온몸이 떨렸고 마음속으로 절대로 그들이 나쁜 일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안영희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에게 좋지 않습니다!” 결국 사부님의 도움으로 그 두 경찰이 큰 죄를 짓는 것을 피하게 했다.

경찰들은 달래고 속이는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안영희에게서 다른 수련자들의 이름을 알아내려 했다. 밍후이왕에서 경찰들이 미혼약(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약)을 사용하는 사례를 본 안영희는 경찰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녀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좋은 사람이 억울한 박해를 받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또 진상을 모르는 경찰들이 그녀로 인해 또 다른 박해에 참여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파룬궁수련자를 박해하면 천벌이 따르는데 이것은 그녀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비극이 발생하는 것을 바라지 않던 안영희는 그들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약물 박해로 반신불수가 되고 생명이 위태롭게 되다

3월 2일 저녁, 안영희는 투먼(圖們)시 구치소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안영희는 더 많은 박해를 받았다. 음식을 먹지 않아 여러 차례 강제 음식물 주입을 당했다. 어느 한번, 한 조선족 남자 경찰(키가 좀 작고 40~50세쯤 되어 보임)은 안영희에게 약물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했다. “고통을 느끼게 해주지!” 그 후 정말로 음식에 무언가를 넣었는데(누군가 경찰이 음식물에 백색 분말을 넣는 것을 보았다고 함), 그 후 그녀는 토하고 설사하더니 머리가 멍하고 눈이 조이는 것을 느꼈다.

酷刑演示:强行灌食不明药物(绘画)
약물 강제 주입

한번은 조선족 경찰 박명자가 그녀가 밥을 먹지 않자 된장국을 그녀 몸으로 차서 그녀 온몸에 된장 국물이 튀었다. 며칠간 지속된 잔혹한 박해로 그녀는 반신불수가 되어 서 있을 수 없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박명자는 구둣발로 그녀의 가슴을 여러 번 찼다.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파 숨도 올라오지 않았다. 같이 감금된 다른 사람들(파룬궁수련자는 아님)이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나요? 여기를 맞으면 죽을 수 있어요.” 극심한 통증에 그녀는 사부님께 도움을 청해 고비를 넘었다.

안영희는 투먼시 안산 구치소에서 48일간 불법 감금돼 박해를 받았다. 그해 날씨는 몹시 추웠고 4월 19일 그녀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 큰 눈이 내렸다. 구치소에서는 그녀를 박해하기 위해 잘 서 있지도 못하는 그녀를 창문 밑에 누워있게 하고 창문을 열어 괴롭혔다. 매일 추운 겨울바람에 잠들 수 없었고 가끔 마음씨 착한 경찰이 그녀를 위해 창문을 닫아줬지만 대부분 경찰은 창문을 못 닫게 했다. 이렇게 그녀의 건강은 더욱 악화됐다. 집에 돌아와서도 바람을 맞거나 추위를 타면 두드러기가 올라왔고 가끔은 참을 수 없는 다리 통증이 발생했다.

안산 구치소의 사악한 경찰들은 안영희의 자유를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용품을 사용하는 권리도 박탈해 칫솔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그녀가 돈 주고 산 칫솔도 경찰 박명자가 몰수함) 머리를 빗지 못하게 했으며 숟가락으로 밥을 먹지 못하게 했다. 결국 수십 일간 칫솔질을 못했고 머리에도 된장 국물 냄새가 났다.(감옥 경찰이 계속 머리에 된장 국물을 부었음) 또 경찰의 모욕과 욕설을 자주 들었다. 그 당시 안산 구치소 소장으로 있었던 사오잔밍(邵戰明)은 현재 보응을 받아 사망했다.

안영희가 52일간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아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그들은 책임질까 두려워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옌지시 세뇌반에서 각종 고문을 당하다

2012년 7월 1일 직장에서 근무하던 중, 조선족 경찰 정철수(鄭哲洙), 김성철(金成哲) 및 ‘610’ 경찰들은 그녀를 옌지시 세뇌반으로 납치했다. 세뇌반에 오자마자 안영희는 강제로 영상을 보고 ‘강의’를 들어야 했다. 또 사오(邪悟)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거짓말을 주입당했다. 성(省)에서 옌지시에 ‘도움’을 제공한 세뇌박해 담당자는 사오링(邵玲)이었는데, 그녀는 ‘천안문 분신’ 조작사건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을 속였다.

안영희는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나쁜 사상을 접하고 세뇌반 악인들의 모욕과 고문을 당했다. 세뇌반에 감금된 후 안영희는 벌서기를 당했다. 하룻저녁 벌을 선 후 다음날에도 계속 같은 고문을 당했다. 그녀가 서 있지 못할 지경이 되자 여러 경찰이 몸으로 그녀를 받치고 계속해 벌서기를 강행했다. 그 후 그녀를 수갑 채워 창문에 매달아 놓고 두 손등이 크게 부어오르자 수갑을 풀어줬다.

옌지시 세뇌반에서 중공 악인들은 ‘반가부좌’ 자세와 묶기로 박해를 가했다. 그때 성에서 온 30여 세 여성(특수경찰로 추정됨. 성은 왕씨)은 강제로 결가부좌를 하게 했다. 안영희가 할 수 없다고 하자 특수 경찰은 강제로 안영희의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올려놓고(반가부좌 자세) 끈으로 목과 다리를 묶은 후 두 손을 다시 뒤로 꽁꽁 묶어 놓았다. 이런 자세로 단단한 침대에 온종일 앉게 했다. 점심 12시부터 시작해 하룻저녁을 지나 다음날 오전에 강제 음식물 주입을 가하고 멈췄다.

벌서기와 묶기 고문은 37시간 지속됐고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가래도 뱉지 못하게 했다. 그 당시 그녀는 불법 감금으로 가래가 많은 편이었지만 삼키기만 해 너무 끔찍했다고 했다. 또 하룻저녁을 화장실에 못가게 해 바지에 변을 볼 수밖에 없었다.

세뇌반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경찰이 또 안영희를 관리하려 하자 그녀는 옌지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 다녔다. 2015년 안영희는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파룬궁 박해 원흉인 장쩌민을 고소했고 많은 수련자를 도와 장쩌민을 고소했다.

중공의 20여 년 잔혹한 박해 중 여러 차례 불법 감금과 잔혹한 혹형, 몇 년간의 떠돌이 생활으로 건강이 심하게 손상된 그녀는 결국 2022년 12월 26일 오후 6시 30분에 옌지에서 억울하게 사망했다.

1999년 7월부터 2019년까지 중공의 20여 년 파룬궁 박해 중, 조선족 수련자에 대한 납치 사례는 최소 345건, 강제 세뇌는 최소 59건, 불법 강제노동은 최소 99건, 불법 징역 판결은 최소 46건이었으며 형기는 1년에서 14년까지였다. 또 7명이 실종되고 53명이 박해로 사망했다.

 

원문발표: 2023년 2월 13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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