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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극물 주입으로 기억을 잃었던 헤이룽장 수련자, 20년간의 감금과 괴롭힘으로 결국 사망​

[밍후이왕]

이름: 왕위팡(王玉芳)
성별: 여성
나이: 59세
지역: 헤이룽장(黑龍江)성 자무쓰(佳木斯)시
직업: 의류점 운영
사망일: 2022년 9월 28일
가장 최근 납치일: 2012년 12월 13일
가장 최근 구금 장소: 자무쓰시 유치장

1998년 12월, 파룬궁(法輪功)을 시작한 왕위팡은 대장암이 사라져 고대의 심신 수련법인 파룬궁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1999년, 중공 정권에 의해 전국적으로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후에도 왕 씨의 신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신념을 견지했던 그녀는 6번 납치됐고 여러 차례 괴롭힘을 당했다. 구치소에서 독극물을 주입 당해 기억을 잃은 적도 있다.

2022년 9월 28일, 헤이룽장성 자무쓰시에 살던 왕위팡은 결국 박해로 인해 건강이 악화해 사망했다.

왕 씨는 2015년, 박해를 명령한 전 중공 우두머리 장쩌민을 형사 고소했다. “박해로 인해 40대였던 나의 머리카락은 백발로 변했습니다. 박해는 단지 저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을 고통 속에 살게 했습니다. 제가 구치소에 구금됐을 때, 저의 어머니는 박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건강이 나빠져 병원에 입원하셨고, 딸애는 어머니인 제가 다시 납치될까 무서워 한시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왕위팡

아래는 자신이 겪은 박해에 대한 왕위팡의 진술입니다.

파룬궁 수련 후, 사라진 대장암​

저는 여동생과 수년간 의류점을 운영했습니다. 그래서 1년의 반은 의류를 구매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다녀야 했습니다. 제대로 된 휴식과 식사를 챙기지 못해 소화장애와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렸던 저는 어느 날 헤이룽장성 하얼빈(哈爾濱)시로 가던 도중 왼쪽 배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이후, 병원에 간 저는 대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두려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딸이 2살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 막 4살이 된 딸을 양육해야 하고, 저까지 대장암 판정을 받았으니 제가 죽으면 딸은 고아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드시 제가 딸을 돌봐야 한다는 굳은 의지로 저는 모든 종류의 약을 먹어보고 수련도 해봤지만, 병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1998년 12월 어느 날, 옷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데, 옆 가게 주인이 찾아와 파룬궁은 불가(佛家)의 수련법이라며 건강에 매우 효과가 있다고 파룬궁을 소개했습니다. 그녀가 제게 어디에서 책을 구입할 수 있는지 알려줘 그날로 저는 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저는 파룬궁의 주요 도서인 ‘전법륜(轉法輪)’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책에 빠져든 저는 그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파룬궁 수련을 시작하자마자 대장암이 사라졌고, 나머지 인생은 저에게 새로운 시작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대법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도 충분치 않습니다.

파룬궁 청원으로 납치당해​

1999년 7월 20일, 중공 정부의 파룬궁 박해가 시작한 후, 저는 파룬궁을 수련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해, 베이징의 여름은 특별히 더웠지만 저와 뜻을 같이하는 수련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청원을 위해 모였습니다.

호텔 체크인 후, 저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납치됐습니다. 자무쓰시 당국에 의해 저는 자무쓰시 구치소로 이송됐습니다.

가족들이 저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지역 경찰서를 자주 찾아오자, 7일 후 그들은 저를 석방했습니다.

세 번의 납치​

몇 개월 후, 저는 다른 수련자들과 모임을 하기 위해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시로 갔는데, 경찰이 다른 수련자들과 협력하여 빌린 그 장소로 난입했습니다. 한 남성 경찰은 어떤 수련자가 조금 움직였다고 그를 때리고 바닥으로 내동댕이쳤습니다. 그 경찰이 수련자를 다시 구타하려 했을 때 저는 그를 저지했습니다. 얼마 후, 그들은 우리를 경찰차에 실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톈허(天河) 구치소로 이송돼, 무보수로 긴 시간 노예 노동했습니다. 제가 일을 좀 느리게 하면 재소자(바오자)가 제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자무쓰시에 있는 샹양(向陽) 공안 분국의 쑨푸리(孫福利)와 리쥔(李軍)이 저를 다시 자무쓰시 구치소로 데려갔습니다. 그들은 우리 가족으로부터 5천 위안(약 90만 원)의 돈을 갈취했습니다.

원래 자무쓰시 구치소에는 여성 수감자 방이 2개 있었으나 당국은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이후 3개의 방을 더 만들었습니다.

각각의 방은 침대와 화장실 공간을 포함해 10m²(약 3평) 정도였는데 간수들은 각 방에 20명에서 30명을 수용했습니다. 우리는 잠을 잘 때 옆으로 누워서 자야 했습니다.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면 제가 있던 자리는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없었습니다. 수감자들에게 배급된 음식은 찐 빵, 야채는 조금 있고 모래가 섞인 멀건 국뿐이었습니다.

수련자 몇 명과 저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수련 후 좋은 사람이 되고 건강이 향상됨을 누렸으니 파룬궁의 인식에 대한 당신들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구치소 소장에게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보복으로 우리에게 ‘비행기 태우기’ 고문을 했습니다.

비행기 태우기

고문에 항의하기 위해 우리는 단식투쟁을 했습니다. 구치소 의사들은 익히지 않은 옥수수에 농축 식염수를 섞은 것을 우리에게 강제로 주입했습니다.

2000년 6월 2일, 저는 다시 납치됐습니다. 경찰은 제 옷을 들어 올려 머리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조사를 위해 비밀스러운 장소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저는 금속 의자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는데 한 경찰이 뒤에서 머리를 세게 잡아당겨 제 머리는 목에서부터 90도 각도로 꺾었으며 그는 손바닥으로 제 목을 내려쳤습니다. 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억지로 저를 일으켜 ‘비행기 타기’ 자세로 고정하려 했지만 저는 그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심문을 받은 후, 저는 자무쓰시 구치소로 이송됐습니다. 제 머리에는 큰 혹이 생겼습니다. 정신적, 신체적 고통으로 저는 심장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저는 목이 몹시 부어 말을 할 수도, 물을 삼킬 수도 없었습니다. 경찰은 저를 24시간 동안 감시했습니다. 다른 수련자 마샤오화(馬曉華)는 제게 음식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돼 3년간의 노동교양처분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가족에 의해 지역 중의원으로 옮겨진 저는 그곳에서 회복하고 석방됐습니다.

2001년 5월, 길을 지나던 경찰이 저를 납치해 시거무(西格木)노동 교양소로 데려갔습니다. 박해에 저항하여 단식 투쟁하던 저는 죽음이 임박해 석방됐습니다.

2002년 봄, 다시 납치하려던 경찰에게 거세게 저항하던 저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정신을 잃었습니다. 경찰은 납치를 포기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자무쓰 구치소에서 독극물 주입으로 기억 상실​

저는 2003년 또다시 납치됐습니다. 구치소에 감금돼 있던 저는 딸이 너무나 그리워 식욕을 잃었습니다. 구치소 의사 장구이판(張貴凡)은 저에게 수액을 투여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저는 몸이 갑자기 저려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고 손가락도 뻣뻣해져 구부릴 수 없었습니다. 기억을 잃은 저는 딸의 존재조차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첸진(前進)구 법원은 저에게 3년 형을 선고했습니다. 2004년이 되기 전, 저는 헤이룽장성 여성 감옥으로 이송됐으나 간수가 입소를 허가하지 않아, 다음 날 저는 구치소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구치소 의사 장(張)은 몇 개월 후 다시 저를 감옥으로 보낼 생각이었으나 저의 건강 상태가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자 그들은 저를 석방했습니다.

반복된 납치와 괴롭힘​

집으로 돌아온 저는 딸도 알아보지 못하고 걸을 때도 자주 넘어졌습니다. 파룬궁 수련을 다시 시작한 저는 건강을 회복하게 됐습니다.

2006년 어느 봄날 오전, 식료품을 사서 오던 저를 경찰은 사구(社區)사무실(한국의 주민자치센터에 해당) 앞에서 멈춰 세우고 오늘 중으로 사무실로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경찰은 제게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와 괴롭히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저는 점심시간이 지나 그곳으로 갔습니다. 경찰은 저의 사진을 촬영하고 아직도 파룬궁을 수련하는지 제게 물었습니다. 대답이 없자 경찰은 잠시 대치하더니 저를 훈방해 그날 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집 앞에서 머무르며 저를 감시하던 경찰은 친척이 저를 방문하고 떠나자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집을 불법 수색한 그들은 몇 권의 파룬궁 서적들을 압수했습니다. 경찰이 돌아간 후, 또다시 박해받을 것이 두려워진 저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났습니다.

2012년 12월 13일, 파룬궁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저는 다시 납치됐습니다. 납치되는 과정에서 저는 허리를 삐어 통증으로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자무쓰 유치장으로 보내졌습니다.

12월 17일, 딸은 저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창성(長勝 )파출소로 찾아 갔습니다. 파출소 소장 옌리민(閆利民)은 매우 귀찮은 태도로 딸에게 자신은 석방에 대한 권한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딸이 경찰에게 자신은 어머니의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항의하자, 한 경찰이 상스러운 태도로 “그렇다면 내가 너를 돌봐주지.”라고 추근거렸습니다. 2012년 12월 22일, 저는 건강이 악화해 석방됐습니다.

2021년 7월, 경찰은 저의 사진을 가지고 언니가 사는 곳을 찾아가 그녀의 이웃에게 제가 언니네 집에 사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미 이사를 한 뒤였으나, 경찰은 저를 납치하기 위해 며칠간 언니의 아파트 앞에서 잠복했습니다.

박해로 인해 저는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사지가 굳고 심장이 두근거려 고통스럽습니다. 저의 건강은 계속 나빠져 이제는 계단을 내려갈 수도 없어 집 안에서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경찰은 저를 감시하면서 괴롭힘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원문발표: 2023년 1월 1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례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1/15/4550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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