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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허베이 쭌화시 멍진청 구타, 사망 사건의 증인과 증언

[밍후이왕] (밍후이 통신원 허베이 보도) 2002년 11월, 허베이(河北)성 쭌화(遵化)시 바오쯔뎬(堡子店)진 주자이(舊寨)촌 파룬따파(파룬궁) 수련자 멍진청(孟金城.50)이 노동교양소(강제노동수용소)에서 구타당해 사망한 사건의 증인과 증언이 나왔다. 멍진청은 2002년 11월 파룬따파(法輪大法)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불법적으로 경찰에 잡혀, 2003년 7월 7일 쭌화시 ‘6.10’ 사무실 지시로 노동교양처분을 받고 허화컹(荷花坑) 노동교양소에 감금되어, 노동교양소 교도관의 사주를 받은 죄수들에게 혹독한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孟金成
멍진청(孟金成)

멍진청은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하면서 ‘진선인(真·善·忍)’의 원칙에 따라 스스로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렸고, 노동교양소에 감금될 때만 해도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러나 노동교양소 부대장 왕위린(王玉林)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멍진청을 6대대로 끌고 가서 “파룬궁은 ×교”임을 승인하라고 핍박했고, 승인하지 않자, 건장한 8~9명 죄수를 시켜 무자비하게 구타했고, 왕위린은 멍진청이 구타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떴다.

멍친청이 구타당할 때 이진반( 一進班)에서 일하던 수감자들은 멍진청의 비명과 8~9명이 소란스럽게 구타하는 소리를 다 들었다. 그 과정에서 멍진청은 몇 번씩 실신했다.

中共酷刑示意图:毒打
중공 고문 구타 설명도

구타당하던 멍진청은 오후 4시경 뒤로 쓰러졌다. 대대에서 몇 사람을 시켜 노동교양소 병원으로 보냈는데, 병원 측에서 가망이 없다고 하자, 다시 탕산시 궁런(工人) 병원으로 이송해 응급처치했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 후 노동교양소 측은 고문 구타 사망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지병이 도진 것이고, 즉시 병원으로 이송해 응급처치 했다.”는 위조 서류를 만들어 당직자 서명까지 받아놓고 철저히 은폐했다. 어떤 교도관은 “상부에 진정하고, 조사한다고 해도 두렵지 않다. 해마다 사람은 죽어 나간다. 어느 책임자도 문책당한 적 없다.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 것이다.”라고 큰소리쳤다.

구타 사망 사건은 말 대로 흐지부지됐고, 시신은 화장되었으며, 살인범 중 1명 가오커아이(高克愛)는 8개월 전 출소했고, 주범 황융신(黃永新)은 높은 평가를 받아 감금된 파룬궁 수련자를 체벌하고 박해하는 감방장에 임명됐다.

2003년, 멍진청이 구타로 사망할 때 10여 명의 목격자가 있었는데, 그중 몇 명 목격자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1) 다하이(大海-가명). 2003년 7월 7일 오전 10시경 ‘룬쯔(輪子-파룬궁수련자 호칭)’ 1명이 쭌화에서 왔다고 들었다. 잠시 뒤 밖에서 욕설과 심하게 구타하는 소리가 들렸다. 약 30분이 지난 후 구타당한 사람을 교실로 보냈는데, 그는 비틀거리며 사진 촬영 거치대에 걸려 쓰러졌다. 뒤이어 구타자 주범 황융신 죄수가 몇 사람을 대동하고 따라 들어갔다. 그는 ‘룬쯔’에게 똑바로 서라고 명했다. 제대로 서시 못하자, 앉으라고 했다. 그때 그의 얼굴은 노랗게 질려있었고, 머리를 쳐들어 눈을 크게 뜨고,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다가 뒤로 쓰러졌다. 당직 요원이 얼른 대장에게 보고한 뒤 밖으로 들고 나갔다.

나중에, 파룬궁 수련자 멍진청이 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처치를 받았어도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고, 대대에서는 서류를 위조해 죄수 루장(盧江), 팡카이위(龐開玉), 천푸(陳福), 창푸하이(常福海) 등에게 서명하게 했다고 했다.

(2) 민쯔(民子-가명). 2003년 7월 7일 오전 10시경, 파룬궁 수련자 1명이 또 왔는데, 쭌화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다. 잠시 뒤 교실에서 욕설과 구타하는 소리가 들렸고, 30분 지나서 구타당한 사람이 감방으로 끌려오다가 뭣에 걸려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벽 쪽에 정 사세로 서 있으라고 했지만, 그가 서지 못하자, 냉수 한 대야를 끼얹었다. 그는 이미 실신해 있었다.

(3) 얼산(二山-가명), 2003년 7월 7일 오전 10시경 ‘룬쯔(輪子)’ 1명이 왔다고 했다. 쭌화 사람이고 이름은 ‘멍진청’이라고 했다. 멍진청은 부대에서 ‘사교’ 두 글자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도관의 지시를 받은 황융신 등 형사범 죄수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다. 멍진청은 이미 고문 구타로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실신한 그에게 황융신의 머리에 냉수를 끼얹었다.

점심 식사 시간에 멍진청의 얼굴은 노랗게 질려있었고 호흡이 가빠졌다. 루장은 그에게 “더 혼나지 말고 서명하라.”라고 말했고, “너는 계속 연공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멍진청은 “연마한다.”고 말했다. 오후 3시경, 멍진청은 거듭 혼절했다. 루장이 대장에게 보고해 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처치를 받았다. 그 후 병원에서 멍진청이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다.

(4) 쿠이웨이(奎偉-가명), 2003년 7월 7일, 파룬궁 수련자는 이른바 ‘전향’에 응하지 않으면 모두 큰 방에서 엄한 관리를 받았다. 당시 오전 10시경 또 한 명 ‘룬쯔’가 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그 방에서 구타와 비명이 들렸다. 10여 분 뒤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다가 잠잠해졌다. 기절해 조용했을 것이다. 잠시 후 죄수 한 명이 “죽은 척하다니!”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한 사람이 교실로 끌려오다가 발이 걸려 쓰러졌다. 점심밥을 퍼 담으며 그 사람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고, 호흡곤란으로 얼굴이 누렇게 변해 있었다. 멍진청의 죽기 전의 모습일 줄은 몰랐다.

(5) 둥촨(東川-가명), 2003년 7월 7일 점심시간에 5대대 젓가락 작업실에서 포장하고 있을 때였다. 3시경 북쪽 창문을 통해 아스팔트 길에 몇 사람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은 카트를 밀고 북쪽 건물로 갔고, 차 위에는 한 사람이 누워있었다. 당시 류루장(劉汝江), 천푸(陳福)와 키가 크고 마른 사람도 있었다.

천푸와 키가 크고 마른 사람이 차 위의 사람을 들것에 싣고 북쪽 건물로 들어갔는데, 작은 병원으로 갔을 것이다. 잠시 후 노동교양소 미니버스가 차고에서 급히 북쪽 건물 입구로 달려갔다. 왕위린도 자전거를 타고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북쪽 건물 입구로 갔다. 천푸와 키가 크고 마른 사람이 들것을 들고나와 잠시 나무 밑에 내려놓았다가 자동차에 싣고 떠났다. 내가 6대에 배치된 후, 들것에 실려 나간 사람이 멍진청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6) 주원(朱文-가명), 20003년 7월 7일 9시 반쯤, 또 ‘룬쯔’ 한 사람이 들어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룬쯔가 큰 교실로 끌려갔는데 그가 바로 멍진청 임을 알았다. 멍진청은 형사범 리하이허(李海河)에게 끌려가 ‘사교’라는 두 글자에 서명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쓰지 않았다.

잠시 후 심한 구타와 비명이 들렸고, “써넣을 거야! 안 할 거야!”라는 큰 소리가 들렸다. 구타당하는 사람이 멍진청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멍진청은 다시 교실로 끌려가 사진 촬영 거치대 쪽으로 넘어졌다. 황융신이 똑바로 서라고 했지만, 서지 못했다. 7월 11일 저녁 작업이 끝난 후 밤 9시 반경 모두 침대 위에서 휴식할 때, 리하이허가 낮은 소리로 “황융신에게 멍진청이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원문발표: 2022년 12월 17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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