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19년 전 다칭 납치사건’ 파룬궁 수련생 3명, 박해로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헤이룽장 보도) 2002년 11월 28일, 다칭(大慶)시 싸얼투(薩爾圖)구 중린(中林)제 1-3동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무단장(牡丹江)시 예롄핑(葉蓮萍, 여, 당시 30세), 둥수옌(董淑豔, 여, 당시 30여 세), 왕융창(王永強, 남, 당시 55세)과 이안(依安)현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가명이 ‘꼬맹이’라는 소녀(당시 21세), 하이룬(海倫)시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원(文) 씨(남, 당시 39세), 다칭 왕커민(王克民, 남, 당시 37세) 등 파룬궁 수련생들은 감시하고 있던 다칭 사복 경찰에게 납치됐다. 예롄핑, 왕커민, 왕융창은 잇따라 박해로 사망했다.

1. 폭력으로 납치한 경위

2002년 11월 27일 오후, 무단장시 파룬궁 수련생 예롄핑, 둥수옌은 다칭시에 처음 와서 왕융창이 세 들어 사는 싸얼투구 중린제 1-3동 301호에서 휴식했다. 이튿날 오전, 다칭 국보 및 중린제 파출소, 싸얼투구 공안국 소속 사복 경찰 여러 명이 301호에 불법 침입해 폭력적으로 예롄핑, 둥수옌, 꼬맹이를 납치했다. 또 꼬맹이 주머니에서 850위안(약 17만 원)을 갈취해 갔다. 밖에서 침대 매트를 들고 숙소로 돌아온 왕융창은 불법 침입한 다칭 사복경찰의 납치를 피하기 위해 다급하게 3층에서 뛰어내리다 허리를 심하게 다치고 다리가 부러졌지만, 경찰에게 납치됐다.

경찰은 집 안에서 숨어 계속 감시했는데, 오후 1시쯤과 저녁 5시가 넘어서 301호의 원 씨와 왕커민을 폭력적으로 납치했다.

예롄핑, 둥수옌, 꼬맹이는 중린제 파출소 경찰에게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꼬맹이는 현장에서 구타당해 기절했고, 왕커민은 싸(薩)구 공안국 푸창(富強) 파출소에 납치돼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동시에 다칭 경찰은 하이룬시 경찰 및 무단장시 경찰과 결탁했는데, 28일 밤 하이룬 경찰은 원 씨를 하이룬으로 납치해 박해했고, 불법 노동교양 2년 형을 선고했으며, 무단장시 정치보안과 경찰은 예롄핑, 둥수옌, 꼬맹이와 왕융창을 각각 무단장으로 납치했다. 도중에 예롄핑, 둥수옌은 지프에 매달아 수갑을 가장 좁게 채워놓았다. 그녀 둘은 키가 커서 매달려 앉지도 서지도 못했는데, 손목은 수갑에 쪼여 파여 들어갔다. 이렇게 무단장에 끌려가 도착한 후 예롄핑, 둥수옌, 꼬맹이, 왕융창은 각각 무단장 국보 경찰에게 각기 다른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아래는 박해 사실을 정리한 것이다.

2. 무단장 예롄핑이 가혹한 고문 박해로 사망

예롄핑은 전문대학을 졸업했고, 생전에 무단장시의 우수한 패션디자이너였다. 키는 164cm로 체격은 균형이 잡혔으며 용모가 준수하고 단아했다. 또 전통적인 여자 헤어스타일을 했는데, 자상하고 대범했다. 그녀는 파룬궁 진선인(眞·善·忍)의 신념을 견지해, 2001년 무단장 경찰에 의해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아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 여자 마약재활노교소에 보내져 박해받고 강제 전향을 당해 신념을 포기하려 했다. 예롄핑은 대법(파룬궁)에 대한 바른 믿음과 확고함으로 사악이 파룬궁을 먹칠하는 억지 비방을 타파했고, 중공(중국공산당)에 기만당하고 이용당한 유세꾼들의 추악한 연기를 궁핍하게 만들었다.

예롄핑은 노교소에서 나온 후 무단장 악경(惡警, 사악한 경찰)에 의해 인터넷에서 현상 수배당해 하는 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다. 무단장 공안국 국보지부 대장 악경 리푸(李富)는 “예롄핑을 붙잡으면 꼭 때려죽이겠다”고 떠들어댔다.

2002년 11월 27일 오후, 납치된 예롄핑은 무단장시 정치보안과 경찰에 의해 지프로 무단장에 끌려왔다. 예롄핑은 난방 설비에 수갑이 채워져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고통을 당했다. 또 코에 겨자 오일 2병을 주입했고, 머리부터 목까지 비닐로 씌우고(악경은 ‘오토바이 모자’라고 부름) 숨을 못 쉬게 해, 숨이 막혀 기절할 뻔했다. 악경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온 방 안에서 돌려 가며 뺨을 때렸고, 뒤로 수갑을 채워 매다는 고문을 가했다. 예롄핑은 박해당해 고통스러워했는데,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몸이 허약해져 버티기 어려웠다.

29일 오후, 예롄핑은 꼬맹이에게 말했다. “가혹한 형벌에 시달려 감당이 극에 달했다.” 그 후 예롄핑이 박해당해 사망한 소식이 전해졌다. 2002년 11월 29일, 예롄핑은 향년 30세로 악경의 가혹한 형벌과 고문에 시달려 사망했다. 가련하게도 그녀의 7살 된 딸은 엄마를 잃고 말았다. 무단장 악경 차오핑(喬平), 리푸는 예롄핑을 핍박해 사망에 이르게 한 범죄자다.

3. 다칭 중학교 교사 왕커민이 가혹한 고문 박해로 사망

왕커민은 다칭사범대학교 지리학과를 졸업했고 다칭시 제65중 중학교 교사였다. 1999년 7월, 중공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한 후 왕커민은 여러 차례 납치, 세뇌, 감금, 고문 박해를 당했다.

'王克民'
왕커민.

1999년 7월 20일, 왕커민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납치됐다. 학교에서 3일간 세뇌당했고, 10월에 바바이상(八百坰) 파출소 경찰이 15일간 구류한 후 세뇌반에 보내졌다.

2000년 2월 27일, 왕커민은 또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는데, 45일간 불법 감금됐다. 5월에 학교에서 세뇌반을 만들고 한 달간 감시했다. 7월에 왕커민을 속여 다시 세뇌반에 보내 박해했다. 그를 핍박해 ‘보증서’와 파룬궁 ‘삼서’를 쓰게 했지만 왕커민은 정념으로 거부했다. 8월에 다칭 교육센터 610과 바바이상 파출소 악경이 결탁하여 왕커민을 다시 납치해, 45일간 불법 감금했다. 9월 27일 다칭 노동교양소에 보내 불법적으로 1년 형을 선고했다.

2001년 9월, 왕커민은 학교 동료와 파룬궁 진상 DVD를 보다가 65중 서기 왕수샹(王樹祥)의 고발로 줄곧 외지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2002년 1월 15일, 왕커민은 워리툰(臥裏屯)에 자료를 주러 갔다가 현지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돼 가혹한 고문을 밤새 받았다. 쇠의자에 앉히기, 수갑 채우기, 족쇄 채우기, 비닐로 머리 씌우기, 눈에 고춧물 붓기, 의자로 목 조르기, 발로 수갑 차기 등 고문을 받았는데, 코는 맞아서 삐뚤어졌다. 왕커민은 단식 1개월로 불법 감금에 항의하다 병원에 입원 후 응급조치를 받았는데, 도중에 병원에서 탈출했다.

'图:王克民从医院走脱后拍下的三个镜头,可以看出他当时被酷刑迫害的严重程度。'

병원에서 탈출한 후 촬영한 3개의 왕커민 사진에서, 그 당시 받은 고문의 가혹함을 알 수 있다.

2002년 11월 27일 오후 5시쯤, 경찰은 폭력적으로 왕커민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그를 때려 기절시킨 후 다칭시 싸구 공안국 푸창(富強) 파출소에 끌고 갔다. 무단장에서 온 경찰은 그들이 왕커민을 찾고 있었다며 그를 무단장에 데려가려 했지만, 다칭시 파룬궁 박해 전담 악경은 왕커민 건은 다칭 사건이라며 데려가지 못하게 했다. 정치적 업적을 위해 두 지방의 공안 경찰은 약 30분간 다투었다. 결국, 왕커민은 다칭에 남게 됐고 다칭시 싸구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다.

2002년 11월 28일, 싸구 국보대장 쑤이(隋) 대대장이 왕커민을 심문했고 자료 내원을 캐물었다. 왕커민이 불법 심문에 협조하지 않자, 두 악경은 왕커민을 바닥에 누르고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찼다. 그의 왼쪽 눈을 때려 피가 났고 온몸은 멍이 들었다. 이튿날 결성된 특별 전담팀 악경 4명은 왕커민에게 24시간 동안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옷을 벗기고 쇠의자에 묶고 두 손을 뒤로 채우고 창문을 모두 열고 몸에 눈이 날리게 하고 동시에 찬물을 부었다. 낮이든 밤이든 몸을 얼게 했다. 4명의 악경은 수건으로 왕커민의 아래턱을 조이고 필사적으로 위로 젖혔는데, 왕커민의 목이 부러질 뻔했다. 뒤로 채운 수갑을 발로 차고 의자에 수갑을 채운 후 아래로 손을 내리누르고 “말하지 않을 건가?”라고 캐물었다.

이렇게 가혹한 고문을 연속 6일(그동안 3, 4일에 밥 한 끼 제공) 해도 박해자들은 그들이 얻으려는 것을 얻지 못했다. 왕커민은 박해당해 몸은 극도로 허약해졌고, 상처투성이인 온몸은 고통스러워 만지지도 못했다. 그때도 왕커민에게 수갑을 채운 채 쇠의자에 앉혀놓았다. 악경은 말했다. “앉는 시간이 길수록 몸에 대한 상처는 더 커진다. 게다가 내부 상처는 누구도 볼 수 없다.” 왕커민은 강제로 6일 동안 쇠의자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해 몸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왕커민은 감방에 들어갈 때 다리가 퉁퉁 부어 바지를 벗지 못했으며, 종아리가 온통 시커멓고 걸을 수 없었으며, 손을 움직일 수 없어 혼자 생활할 수 없었고, 한 달이 지난 후 오른쪽 손목도 움직이지 못했다. 감방은 음침하고 눅눅해 왕커민은 옴에 걸렸으며, 나중에 몸, 눈, 얼굴은 모두 황색으로 변했다. 이튿날 그를 룽펑(龍鳳) 구치소로 옮겼지만 거절당해 악경은 그를 워리툰(臥裏屯) 공안국에 하루 감금했다. 이튿날, 싸구 공안국 종합사무실 직원 3명은 왕커민을 다칭시 제2병원(전염병병원)에 데려가 검사했고 ‘황담성 간염’이라는 확진을 받아 비로소 ‘보석’을 해 주었다.

2002년 12월 14일 오전, 워리툰 공안국은 학교에서 사람을 데려가라고 통지했다. 저녁 7시에 학교 서기, 당사무실 주임 및 파출소 경찰 장중화(張忠華)는 워리툰 공안국에서 가서 왕커민에게 ‘보증’을 쓰라고 협박했다. 왕커민은 확고하게 거절했다. 마지막에 다칭 석유관리국 한 국장이 먼저 병을 치료하는 데 동의해 왕커민을 다칭시 제2병원에 입원시켰다.

그 사이에 검찰원 직원이 왕커민을 재판하면서, 왕커민은 두 번이나 ‘보석’ 받는 등 공산당이 너무 인자하다면서 강도 같은 논리를 폈다. 왕커민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들에게 생명을 뺏길 뻔했지만 그들은 파렴치하게 인자하다고 말했다. 사악한 자는 인자한 체하며 위선적으로 왕커민의 어머니를 위로해 주며 왕커민이 보증을 쓰면 집에 돌아갈 수 있고 일자리를 준다고 말하는 한편, 내부에서 체포 명령을 내리고 왕커민에게 10년 형을 선고하려 했다. 또 왕커민이 단식하면 감옥에서 괴롭혀 죽게 만들고, 만약 감방에 되돌려 보내 도망가면 붙잡지 않고 직접 총으로 죽인다고 언급했다. 또 본 시의 ‘유다(猶大, 전향된 수련생)’를 찾아 왕커민을 다칭 노동교양소로 납치해 세뇌하려고 시도했으나 그의 정념에 의해 저지됐다. 동시에 어머니에게 수련을 포기하지 않고 보증서를 쓰지 않는 이유를 말씀드렸다. 진상을 알게 된 왕커민의 어머니는 악인이 아들을 감시하는 것을 더 이상 돕지 않았다.

2003년 1월 중순, 왕커민은 순조롭게 병원에서 탈출했고, 사악이 2003년 1월 27일에 정한 불법 개정 재판계획을 타파했다. 학교와 파출소 악경은 화가 나서 왕커민 어머니와 왕커민을 돌봐 준 셋째 이모를 납치해 불법적으로 48시간 감금했다. 불법을 행한 자는 미친 듯이 왕커민을 지명 수배했고 도처에서 찾아다녔다. 다칭 룽펑(龍鳳)지역 모든 파룬궁 수련생의 집을 샅샅이 뒤집어 놓았으며, 왕커민 집 근처 파룬궁 수련생의 집을 돌아가며 찾고 감시했다. 동시에 왕커민 시골집에 사람을 파견해 커둥(克東)현을 샅샅이 뒤졌는데, 사악은 왕커민을 붙잡으면 “현장에서 죽여도 되고 먼저 죽이고 보고해도 된다”고 떠들어댔다. 사악함이 극에 달했다.

왕커민은 2003년 5월 7일 밤, 악인에게 박해당해 사망했다. 11일에 시신을 화장했고 화장할 때 엄밀하게 소식을 봉쇄했다. 소식이 엄밀하게 봉쇄돼 왕커민이 박해로 사망한 실제 정황은 분명하지 않다. 어떤 소식에 따르면, 2003년 5월 7일 악경이 왕커민의 거주지를 알고 불법 침입해 왕커민과 다른 3명의 수련생을 함께 납치한 뒤, 그날 밤 악경이 가한 가혹한 고문으로 왕커민이 사망했다. 악경은 가족을 속이고 그들의 범죄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왕커민이 5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고 말하면서 가족에게 왕커민이 스스로 5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끊임없이 유혹했다. 왕커민 손에 있는 검은 색은 악경이 강제로 증거를 수집하려 하던 범죄증거다. 악경은 왕커민이 빗물받이 홈통을 기어 올라가다 남긴 것이라고 말했다.

4. 왕융창이 불법적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11년의 억울한 옥살이 박해당해 사망

왕융창은 무단장시 둥안(東安)구에 거주했는데, 파룬궁에 대한 믿음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박해받아 다칭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다칭에서 택시를 운전한 적이 있다.

2000년부터 2001년 사이, 왕융창은 다칭에서 납치돼 불법 노동교양 1년 형을 선고받았다. 다칭 노동교양소에 수감돼 강제로 전향 당했고 가혹한 박해를 받았으며 자주 구타당했고, 여러 번 끈으로 묶기 고문을 당했다. 2001년 2월 말, 왕융창은 노동교양소에서 회의할 때, 악경 왕시춘(王喜春)의 파룬궁 비방을 저지했다는 이유로 무고하게 형이 연장됐다. 2001년 3월, 왕융창은 끈으로 묶기 고문을 당한 수련생을 성원하기 위해 단식 항의를 했는데, 이튿날 그도 끈으로 묶는 고문을 당했다.

酷刑演示:上绳
고문 시연: 끈으로 묶기

왕융창은 노동교양소에서 나온 후 무단장으로 돌아갔다. 2002년 초 무단장시 아이민(愛民) 국보대장은 610과 함께 미친 듯이 파룬궁 수련생을 납치했다. 왕융창은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하며 다칭에 왔다.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싸얼투구 중린제 1~3동 301호에 머물렀다.

2002년 11월 28일 오전, 왕융창은 다칭에서 납치된 후 무단장의 구치소에 수감됐다. 무단장 610, 무단장시 국보 리쉐쥔(李學軍) 악당의 모함으로 불법적으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2003년 무단장 젠산쯔(尖山子) 감옥에 수감됐는데,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강제 ‘전향’을 시키기 위해 박해와 구타를 당했다. 장기간 잠을 못 자게 하고, 소금물을 주입하고 물을 마시지 못하게 했으며, 투명 테이프로 손발을 묶고 옷을 벗기고 찬물을 끼얹었으며, 심지어 영하 몇십 도가 되는 밖에서 얼게 하는 등의 고문에 시달렸다. 2012년 6월 이미 11년의 억울한 옥살이 당한 60여 세의 왕융창은 박해로 뇌출혈이 생겨 무단장 제1인민병원에 보내 응급조치를 받았으나 억울하게 사망했다.

5. 꼬맹이, 둥수옌이 가혹한 고문을 당하다

2002년 11월 27일 오후 꼬맹이, 둥수옌은 납치된 후, 무단장시 정치보안과 경찰이 지프로 그녀들을 무단장으로 데려왔다. 꼬맹이는 무단장 공안국 국보 악경에게 공안국 7층에 끌려가 28일 밤부터 29일까지 가혹한 고문에 계속 시달렸다. 연약한 몸에 키는 1m 50cm인 꼬맹이는 구타당해 바닥에 누워있었다. 꼬맹이는 예롄핑이 박해당해 사망한 그날 밤, 무단장 제1구치소에 불법 수감됐다. 그녀가 단식으로 항의하자,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당했다. 처음에 개구기로 음식물을 주입했고 나중에 관으로 음식물을 주입했으며, 강제로 끌고 가 심문하고 찬 바닥에 놓고 발로 몸을 차고 발을 널빤지의 고리에 박아놓아 여러 차례 기절했다. 구치소에 8일간 감금돼 있을 때 또 무단장 공안병원에 보내 13일간 박해당했고, 소지하던 1000위안(약 18만원)을 갈취당했다. 꼬맹이는 불법적으로 21일 감금된 후 무죄로 석방됐다.

둥수옌은 무단장 국보 악경 차오핑이 빗자루로 때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으며, 얼굴에 경련이 생겼고, 통증은 나중에 마비로 변해 감각이 사라졌다. 악경은 그녀를 무단장시 철도구치소로 보냈다. 둥수옌이 단식, 단수로 항의하자 감옥 경찰은 가혹하게 구타했다. 구두를 신고 연속 발로 찼으며, 수갑은 앞으로 채우면 잔인하지 않다며 반대로 채우고 4일 동안 괴롭혔다. 또 둥수옌을 공안국으로 보냈다.

2002년 12월 초, 둥수옌은 무단장시 제2구치소에 불법 감금됐는데, 그녀는 계속 단식, 단수로 항의했다. 매일 강제 음식물 주입을 당했고 우유에 대량의 소금을 넣어 주입 당하기도 했다. 두 발도 수갑을 채워 고정했으며, 매일 끌고 가 고문하고 자백을 강요했으며 모욕당했다.

어느 하루, 시안(西安) 공안국 악경 왕웨이(王偉)가 둥수옌을 심문할 때 온몸에 상처가 나도록 구타해 그녀는 기절했다. 옷을 벗기고 둥수옌의 가슴을 만지며 성추행도 저질렀다. 이튿날 왕웨이는 또 자백을 강요했다. 둥수옌이 이미 살 가망도 없었고, 또 가족이 보름 전부터 매일 시 공안국에 와서 그녀의 석방을 요구하자, 2002년 12월 중순 둥수옌은 석방됐다.

 

​원문발표: 2021년 10월 4일
문장분류: 박해사례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1/10/4/432162.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10/4/432162.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