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창춘 대법제자 화위(華宇)
[밍후이왕] 나는 1998년에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을 시작했고 올해 70세다. 퇴직하기 전에는 교사로 일했다. 시아버지에게 맺힌 원한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한을 맺다
당시 시댁과 친정집은 모두 도시에 있었고 우리는 다른 지역에 살았다. 남편은 철도청에서 일했고 나는 학교에서 일했다. 딸애는 7살이라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일가족 세 식구는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편안하고 행복했다.
1993년 4월의 어느 날 오후, 학생에게 줄 상품을 사고 돌아온 나에게 학교 상사는 어떤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고 말했다. 가보니 낯선 남자 2명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그들은 아주 많이 머뭇거리면서 이 지역 시 교통국 사람들이라고 답했다. 나는 좀 이상한 마음이 들어 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그들이 말했다. “사람이 차에 치여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차에 치인 사람이 의식이 없는데, 선생님 남편 같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나는 불현듯 그날 아침이 떠올랐다. 그날 아침 남편은 휴무라서 일 보러 나간다고 내게 알려줬다. 나는 남편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예감이 들어 마음이 너무 불안했다. 학교 상사가 병원에 동행해 주면서 계속 나를 위로해줬다.
병원 응급실에 가서 보니 남편은 겨우 목숨만 붙어있었다. 심한 뇌 손상을 입었고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는 모두 골절돼 색이 변해 있었다. 의사가 말했다. “사흘을 버텨낸다 해도 식물인간입니다.” 비관적인 의사의 소견에 충격을 받은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져 앉고 싶었다. 학교 상사가 말했다. “정신을 차려야 해요. 양가에 전화해서 가족들이 빨리 병원에 오게 해요.”
나는 가족들의 전화번호를 생각해내려고 애쓰며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지를 생각했다. 겨우 전화를 건 몇 시간 뒤 양쪽 집안사람들이 모두 달려왔다. 사람들이 모두 모였고 분위기는 매우 가라앉았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내 머리는 공백 상태였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또한 다소 흐리멍덩해져 꿈을 꾸는 것인지 현실 속인지 분명치 않았다.
사고 사흘째 되는 날. 남편은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그때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디서 봤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혼미한 상태의 사람에게 가족이 큰 소리로 부르면 깨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남편이 깨어나게 하려고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가면 안 돼요. 당신이 가면 나와 아이는 어떻게 해요 우리는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나는 남편 옆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두 마디를 불렀을 때 시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물었다. “너 무슨 마음으로 이렇게 하는 거냐?” 나는 멍해졌다. 무슨 마음이라니? 나는 단지 남편이 깨어나게 하려고 했는데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한순간 나는 엄청난 억울함이 느껴졌다. 왜 시아버지는 나에게 이러시는가? 내가 당신 아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나는 울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서러움을 쏟아내며 시아버지와 다투기 시작했다. 양가 사람들이 모두 와서 말렸다. 언니가 나를 한쪽으로 끌어가더니 계속 타이르며 눈물을 닦아줬다. 그날 남편은 내내 깨어나지 못했고, 결국 밤에 사망했다.
교통사고는 시 기계국이 낸 것이었다. 교통국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남편이 자전거를 타고 작은 길에서 도로로 올라갈 때 성(省)으로 회의하러 가느라 질주하던 기계국의 산타나 승용차와 부딪쳤다고 했다. 뒷일을 처리하는 데 대략 한 달이 걸렸다. 시댁 사람은 아무도 나서지 않아, 내 오빠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전부 해결했다. 오히려 시아버지와 시댁 사람은 잇달아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했다. 그들은 내 아이를 데려가려고 했다. 아이는 그들 집의 사람이고 그들의 성씨이니 내게 줄 수 없다고 했다. 이 일은 셋째 삼촌이 막아줬다. 또 그들은 남편의 회사에 가서 후사 비용을 요구했다. 회사 노동조합의 상사가 그들에게 답했다. “우리는 돈을 사망자의 아내한테만 줘야 합니다. 당신들한테 줄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후사를 치른 후 시아버지는 보상금 일부를 원하며 떠나지 않았다.
당시 친정아버지가 병이 위중해 입원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마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앞으로의 삶이 막막한 내게 시아버지와 시댁의 행동들은 태산이 내 정수리를 누르는 듯했다. 나는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고 그들과 도리를 따질 여력이 없었다.
마음속은 화와 원한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어디에 이런 노인이 있는가, 그는 내 상처에 소금을 뿌리지 않는가? 딸은 내 팔을 당기면서 말했다. “엄마, 화내지 말아요. 이제 할아버지는 내 친할아버지가 아니에요. 나는 할아버지가 싫어요.” 오빠와 언니는 모두 나를 타일렀다. “그런 사람에게 화내지 말라. 그냥 각자가 자기 인생을 살면 되지.”
그렇다. 내가 이후 또 시아버지와 시댁 사람과 왕래하겠는가? 어찌 또 왕래하겠는가? 내 마음속에는 그 어떤 것에도 견줄 길 없는 원한이 깊고도 깊게 묻혔다.
인연을 맺다
1993년 7월 내부 이동으로 나는 딸애를 데리고 지금 거주하는 도시로 돌아왔다. 두 집과 모두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나는 시아버지의 가족에게 알게 하지 않았다. 나는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또 그들을 볼 일도 없었다.
그런데 시아버지의 친척 한 명이 나와 같은 학교 직원이었다. 아마도 이 동료가 시아버지에게 내가 왔다고 알려준 것 같았다. 한번은 퇴근하는데 시아버지가 교문 밖에 서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게 됐다. 딸아이를 보러 온 듯했다. 나는 바로 아이를 데리고 다른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1997년까지 5년 동안 시아버지는 대략 세 번 학교로 찾아왔지만, 나는 모두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언니 집에 머물렀는데 출근하자면 꽤 멀었다. 비록 나를 상심하게 한 곳에서 멀리 떠나왔지만, 생소한 업무환경과 생활 부담에 직면해 있었다. 남편과 아버지까지 잃은 거대한 고통으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매우 심했다. 나는 점점 허약하고 초췌하고 예민해졌다. 신체도 갈수록 나빠졌다. 풍습, 부건염, 담낭염, 위염(위저출혈), 경추 골질증식으로 인한 뇌빈혈은 신체를 몹시 나빠지게 했다. 나는 약에 의지했다. 한약, 양약 한 꾸러미씩 집으로 사들였다. 나는 담임을 맡고 있었으며 수업은 두 개 반을 가르쳤다. 가끔은 3교시 수업을 하면 숨이 찼다.
당시 상사가 나를 매우 돌봐주었다. 동료 한 명을 파견해 함께 수업하게 했다. 이 동료는 파룬따파 수련자였다. 내 상황을 본 동료는 나에게 수련을 권했다. “이 공법은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데 신기한 효과가 있습니다. 수련하면 신체는 반드시 나아질 겁니다.” 그 당시 내 생활은 아주 단조로웠다. 매일 집에서 학교, 학교에서 집을 오가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나는 파룬따파 수련이 이미 세상에 널리 전해진 것을 몰랐고 어떤 공법인지도 몰랐다.
이후 내 신체는 갈수록 나빠져 아예 3교시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자주 병가를 내자 동료 선생님은 계속 파룬따파 수련을 권하며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준다고 느껴졌다. 게다가 그녀의 인품도 괜찮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파룬따파가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했지만 동의했다. 동료 선생님은 대법 책을 모셔왔다. 바로 이렇게 나는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해 대법제자가 되었다.
원한을 풀다
수련을 막 시작한 그때가 마침 1998년 1월 겨울방학 기간이었다. 나는 ‘전법륜’을 배우기 시작했고 한 번 다 읽기도 전에 초상(超常)적인 책이라고 느꼈다. 좋은 사람으로 되게 하고 향상하게 하는 책이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며 아무리 생각해도 알지 못했던 많은 문제의 답안을 책 속에서 찾았다. 내 흉금은 전에 있어 본 적 없이 넓게 열리고 투명해지고 즐거워졌다. 자연스럽게 끝까지 배우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法輪大法 대원만법’에 따라 5세트 공법도 배웠다. 공법을 시작한 지 불과 몇 달 뒤, 나를 힘들게 한 온갖 병은 나도 모르게 사라졌고 온몸이 가볍고 예사롭지 않았다. 출근길에 자전거를 타면 마치 누가 뒤에서 나를 밀어주는 듯했고 위층도 아주 쉽게 올라갔다. 예전의 한 걸음 걷고 세 걸음을 쉬는 상태가 사라지고 정말 미묘하기 그지없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기였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연공인이라면 당신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며, 점차적으로 우주특성에 동화하여 당신의 그런 좋지 않은 것을 끊어버려야 한다.”[1] “각종 환경 중에서 모두 다른 사람을 좋게 대해야 하고, 남을 선하게 대해야 하는데, 하물며 당신의 친인(親人)임에랴. 누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서, 부모에 대해, 자녀에 대해서도 모두 잘 대하고, 곳곳마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이 마음은 곧 이기적인 것이 아니며, 모두 자선지심(慈善之心)이고 자비(慈悲)이다.”[1]
사부님의 대법에 대조해 나는 자신이 사부님의 말씀을 들었는지 대법의 요구에 도달했는지를 생각했다. 나는 자신이 몹시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시아버지에 대한 원한을 생각하니 내가 달라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매우 어렵게 느껴졌다. 원한의 매듭이 매우 단단해 틈이 없었고 게다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내가 행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면 어찌 수련자이겠는가? 내가 어찌 좋은 사람이겠는가? 나는 대법의 표준 진선인(真·善·忍)에 도달하지 못했고 사부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자비롭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마침 그때 친척을 통해 들었는데 근래 시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했다. 나는 친척의 말을 듣고서 시아버지를 뵈러 가겠다고 알렸다. 그런데 내가 가기도 전에 시아버지께서 먼저 학교로 오셨다. 오랜만에 그를 보자 나는 여전히 다소 불편했고 무슨 할 말이 없었다. 또 그전의 일이 여전히 마음에 올라왔다. 나는 최대한 자신을 자제하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평온을 유지했다.
5~6년 새 시아버지는 많이 늙었고 정신 상태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나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그도 몹시 고달프다고 여겨졌다. 나는 시아버지를 모시고 교실로 갔고 딸애를 보시게 했다(딸애는 내가 있는 학교에 있음). 아이를 보시더니 시아버지는 우셨다. 나도 눈물이 흘렀다. 아이는 울고 있는 우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시아버지가 손녀만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아들을 그리워함을 느꼈다.
집에 돌아온 후, 내 마음은 매우 편치 않았다. 내가 편치 않은 원인은 원한이나 그 시기에 시아버지의 옳고 그름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아버지에 대한 동정과 가련함 때문이며 강렬한 자책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시아버지도 역시 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남자로서 시어머니가 일찍이 돌아가셨기에 그는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동시에 엄마가 되어 아이 몇을 홀로 다 키워야 했다. 직장과 가정을 다 책임지느라 시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을까? 또 노인이 젊은 자식을 앞세우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다. 그 당시 이지적이지 못한 그의 행위를 탓할 수 없으며 그가 돈을 그렇게 중하게 본 것도 탓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 몇 해 동안 이런 측면을 고려하지 못했을까? 나는 시아버지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보지 못했고 늘 원한의 마음을 잡고 놓지 않았다. 게다가 손녀를 보지 못하게 하는 고통을 더해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사무치게 했다. 그가 몇 번이나 학교에 와도 매번 아이를 볼 수 없었는데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여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망연해졌고 마치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닌 듯했다. 나는 완전히 변한 자신을 발견했다. 사상 관념은 아주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마침내 나는 먼저 다른 사람을 위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전의 나는 이렇게 해 본 적이 없었고, 이런 것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는 체험했다. 바로 대법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신 연고이고 결과였다! 나는 내심에서 느꼈다. 아, 이것이 바로 수련이구나! 수련은 진짜 좋다! 사부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진짜 좋다!
내심의 변화를 통해 전진하는 동력과 방향이 생겼다. 그 후 나는 시아버지를 집에 오시게 했다. 시아버지는 다소 부자연스러워했고 나도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대법의 요구에 따라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했다. 나는 시아버지께 잘해야 하고 대법제자의 자비를 그에게 체현해야 했다. 나는 시아버지께서 좋아하는 음식을 해드리며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비록 아들은 없어도 그는 천륜지락을 누릴 수 있었다. 시간이 길어지자 시아버지는 내가 진심으로 그에게 잘해주고 있음을 느껴 매우 감동했다.
하루는 시아버지께 내가 파룬따파를 수련한다고 알려드렸다. 그는 한참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시아버지가 좀 두려워한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중공 사당(邪黨)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설득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지적으로 가서 할게요.” 이어서 나는 파룬따파는 무엇이며 왜 중공 사당이 파룬따파를 박해하는지를 알려드렸다. 그에게 내가 온몸의 병이 어떻게 나았는지, 내가 왜 그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는지를 이야기했다. 또 대법 사부님께서 내게 이렇게 하라고 하신 거라고 알려드렸다. 나는 그가 삼퇴(중공의 당·단·대 조직에서 탈퇴) 하도록 도와드렸고 삼퇴한 시아버지는 밝게 웃었다.
그 후 시아버지는 한동안 혼자서 생활하다가 후에 양로원에 들어갔다. 나는 자주 그를 보러 갔다. 먹거리와 이런저런 필요한 물건들(신발·침대 시트·이불 커버·속옷·양말·팬티 등)을 사드렸다. 시댁 사람 모두 내가 시아버지께 효도한다는 걸 알게 됐고 양로원의 사람들도 알았다.
한번은 내가 시아버지를 보러 갔는데 시아버지가 없었다. 나는 같은 병실 노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노인이 이렇게 말했다. “당신 시아버지는 당신이 가장 잘해준다고 말했어요.” 나는 말했다. “저는 조건이 좋지 않아요.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데 아이가 마침 대학에 다녀서 경제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요. 저는 그저 자녀로서 해야 할 효도를 할 뿐입니다.” 그때 나와 이야기하던 노인의 눈빛이 문 쪽을 바라보더니 말을 멈췄다. 내가 고개를 돌려 보니 시아버지가 마침 그곳에 서서 눈물을 닦고 있었다.
2005년 가을, 시아버지는 병들어 얼마 안 가서 세상을 떠났다. 유서에 그가 일생 모은 작은 저축을 아들딸에게 나눠줬는데 내 몫도 있었으며 일부 급여는 내 딸애 앞으로 남겨주셨다.
소원을 이루다
시아버지가 떠나시고 내 마음은 더욱 평온해졌다. 나는 시아버지가 세상에 계실 때의 나날을 회억해 봤다. 아쉬움은 남지 않았다. 남편이 떠났지만, 나는 시아버지께 효도를 다 했고 대법제자로서 며느리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또 시아버지에게 대법 진상을 알게 해 그의 생명에 좋은 귀속이 있게 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련은 생명의 승화과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서 시작해 점차적으로 더욱 좋은 사람, 속인을 초월한 고상한 생명이 되어, 더욱 높게 되는 것이다.”[2]
내가 실제로 이런 일을 해낸 것은 파룬따파를 수련했기 때문이다. 나는 시아버지에 대한 가득 찬 원한으로 영원히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혹독하게 굴었다. 실제로 찾아온 그를 피하며 만나지 않다가 수련하고 나서 그를 보기로 했으며 그를 한번 만났고 그 후 자주 만났다. 이 모든 과정은 심성을 제고하는 수련이었고 내 마음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바로 이것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승화 과정임을 나는 깨달았다.
사부님의 자비와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은 내 마음에 가득 찬 아주 오래 응고된 차가운 원한을 녹였다. 나는 비로소 파룬따파로 수련해 낸 관용·선량·자비로 타인을 대하게 되었다. 사부님의 가르침이 없으면 나는 해낼 수 없었다.
나는 사부님께 감사하고 대법에 감사드린다! 나는 자신을 격려해 앞으로도 계속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경문: ‘베트남 수련생들에게’
원문발표: 2021년 5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5/20/42586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