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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찾는 것이 구세력을 부정하는 것이며, 찾지 않으면 잘못을 고수하는 것

장기간 ‘병업’ 마난에 처해있는 수련생과 교류

글/ 중국 대법제자 위청(玉成)

[밍후이왕] 우리 지역에는 5년 넘게 눈이 보이지 않는 수련생이 있다. 눈이 정상일 때, 그는 나에게 때로는 안개 같은 것이 보인다고 말했다. 그 당시,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개의치 않았다. 후에 갈수록 좋지 않아 두통이 심해지고 최후에는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악화했다. 이때 수련생들은 모두 그와 법 공부하고 발정념을 해주었는데 또 어떤 수련생들은 그에게 안으로 찾으라고 했다. 그 당시 그는 손가락으로 세면서 “명(名), 고생을 겪고 있는 사람이 무슨 명이 있겠는가? 이(利), 더욱이 없다. 정(情), 아내가 이혼해서 아이들을 다 데리고 갔는데 또 무슨 정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 당시 나는 듣고서 매우 불편해서 그에게 “명, 리, 정도 다 없다면 수련 성취한 것이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갔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나중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의식중에 “만약 안으로 찾는다면 구세력의 박해를 인정한 것이다.”라는 그의 인식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는 사부님의 법을 비뚤게 이해하고 있었고 줄곧 발정념을 해서 박해를 제거하는 동시에 수련생들에게도 자신을 위해 발정념 해달라고 했다.

시간이 길어져도 호전되는 것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안으로 찾기 시작했는데, 기억 속에 그는 당시 두 가지 큰 문제를 찾았다. 하나는 속인과 함께 동업할 때였는데 어느 날 밤, 속인 기사가 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탄 사람을 쳐서 그에게 차에서 내려 가보라고 했었다. 그는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다고 말했는데 운전기사는 두말할 것 없이 그를 내버려 두고 뺑소니를 쳤고 그마저도 바로 떠났다. 그 사람의 생사를 지금까지 모른다고 했다. 또 다른 일은, 아내와 이혼한 후에 다른 여자와 결혼하지 않고 동거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몇 년간 거의 수련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땅히 맞게 찾았다고 느꼈지만, 여전히 호전되지 않았다. 사실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옳은 것을 찾지 못했다. 즉, 그는 수련 중의 집착심을 찾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알고도 범한 큰 잘못 두 가지를 말한 것이다.

그는 정념도 발했고 찾기도 했지만, 여전히 호전되지 않았고 그는 또 자신의 관(關)이 너무 크다고 느껴 본인이 발정념해도 교란이 매우 컸으며 수련생들마저 발정념 해주는 데 있어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의 인식이 늘 제고되어 올라오지 않으니 나중에는 그와 교류하는 사람도 없었고 다만 그와 그저 법공부하고 발정념을 할 뿐이었다.

최근 나는 그와 교류를 했다. 그는 “○○가 나에게 안으로 찾으라고 하는데 안으로 찾는 것은 틀림없이 맞다. 하지만 그녀는 왜 구세력의 박해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라고 했는데 나는 듣고 나서 할 말을 잃었다. 구세력을 언급하니 나는 그와 자신의 깨달음을 말했다. 그는 “나는 많은 수련생의 교류를 들었는데 당신처럼 이렇게 깨닫는 것은 처음 본다. 이런 식으로 깨닫지 못한다면 실질적인 일을 하시오.”라고 내게 말했다. 그는 빙빙 돌려서 말했는데 결국 여전히 나보고 자기를 위해 발정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수련생과 주변 수련생의 상황을 고려해 나는 자신의 최근 깨달음을 써서, 혹시라도 특히 장기적으로 병업 마난 속에 있는 수련생에 대해 도움이 될 수 있으면 한다. 쓰는 과정에서 나는 정말로 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사부님과 법에 대한 확고한 마음을 보았는데 현재 그는 거의 ‘전법륜(轉法輪)’을 다 외웠으며 연속으로 외우는데 9강만 남았다. 사실 그가 최근 6년간 볼 수 없는 원인은 매우 복잡할 텐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속인에게는 ‘마음이 밝으면 눈도 밝다’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가 구세력에게 틈을 타게 했다고 느낀다. 나는 그 수련생이 ‘정진요지-도법(道法)’을 한 번 더 배우면 좋겠다.

다음은 먼저 무엇이 법보인지 말해보자. 과거 소도 수련에서는 사부가 제자를 떠날 때 보통 그에게 법보를 주는데, 어떤 사부는 구결을 알려주고 어떤 사부는 보물 하나를 주며 그의 제자가 위험이나 마난에 부딪칠 때 직접 주문을 외우거나 보물을 꺼내서 요괴를 물리치고 마를 제거하라고 알려준다. 우리는 정법(正法) 수련이므로 비단 구세력의 가담이 있을뿐더러 대법제자에 대해 파괴적인 검증을 하는데 이에 대해 사부님은 인정하지 않으셨으니 대법제자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법보를 하나 주셨는데, 바로 ‘안을 향해 찾는 것’이다.

내 현 층차에서의 체득은, 장기적으로 병업 마난에 처해있는 수련생들에게는 대부분 모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신체에 바르지 않은 상태가 나타나기만 하면 첫 일념이 바로 자각적이든 비 자각적이든 박해를 생각하는데, 박해를 제거하는 것을 첫 자리에 놓고 안으로 찾는 법보를 다음으로 놓고, 심지어 어떤 수련생은 안으로 찾는 것이 바로 구세력의 박해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내 개인적인 인식은, 첫 일념이 박해라고 여기는 것은 첫 일념이 ‘병’이라고 여기는 것과 큰 구별이 없다. 이는 모두 마음이 바르지 않은 데 속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아무리 큰 마난(魔難)으로, 아무리 큰 고통으로 여기든지 간에 모두 좋은 일이다.”[1] 당신이 박해라고 생각하면 바로 박해를 불러올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 자신이 가진 것이므로 다른 사람은 상관할 수 없는데, 이것은 오성(悟性) 문제다.”[2]라고 하셨다. 그럼 박해는 좋은 일일 수 있는가? 만약 좋은 일이라면 왜 사부님은 이런 박해를 인정하지 않으시는가. 구세력의 박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가? 내 현재 층차의 인식으로는, 비록 구세력의 박해가 있지만, 사부님께서는 ‘장계취계(將計就計)’의 법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사부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개변해주셨고 정말 좋은 일로 개변해주셨다. 그럼 마땅히 싱글벙글하며 받아들이고 마난을 제고의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눈, 귀, 코, 혀, 몸이 사람의 감각 기관이라는 것을 안다. 사부님께서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가상이라는 점을 언급하셨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공의 연화(演化) 과정은 극히 복잡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각은 아무것도 아니며, 감각에 의거해 수련해서는 안 된다”[2] 다시 말해서 사실 기타 장기의 감각도 마찬가지로 가상이다. 기왕 감각이 가상(‘병’을 가리키는 상태)이라면 사부님께서 연화해주신 공은 당연히 진상이다. 나는 이때 당신이 어떻게 고통스럽다고 느끼든지 막론하고 마땅히 탄연하게 움직이지 않음을 해내야 하며, 가상으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되도록 빨리 안으로 찾아 그 ‘병’을 초래한 집착을 찾아내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좋지 못한 것을 제거해 버리려면 우선 당신의 이 마음부터 바로잡아야 한다.”[2] 이 정도면 충분히 관을 넘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당신이 박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럼 무엇 때문에 우리를 지켜주는 법보를 꺼내어 요괴를 물리치고 마를 제거하지 않는가? 반박해 속에서 오히려 수련생들이 도와서 발정념하는 것을 강조하는가? 물론 수련생들이 도와서 발정념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하지만 걸어 나올 수 있는지는 여전히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2] 완전히 ‘사(私)’에 빠져 장기간 넘어가지 못할 때 비로소 안으로 찾는데 이것은 수동적으로 수련하고 조건부로 수련하는 것이 아닌가? 고난에 대항하고 마난을 제거하기 위해 수련하는 것이 아닌가? 구세력이 배치한 마난 속에서 수련하는 것이 아닌가?

어떤 수련생은 아마 ‘내가 나으면 법을 실증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을 구도할 수 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말은 억지스러워 보인다. 당신은 구세력의 ‘위사위아(爲私爲我)’의 틀에 빠졌는데, 당신의 사상이 그 한 층 생명에 부합되어 그 한 층 생명이 당신을 관할할 것이고, 구세력이 당신을 박해할 수 있는 구실이 생겼다. 본래 마난에 부딪힌 것은 바로 당신에게 사사로움을 제거하라고 하는 것인데 이제는 제거하지 못했을뿐더러 또 자신의 더욱 많은 ‘사(私)’를 보호하게 되었으므로 이때 구세력은 열심히 당신에게 박해를 더 가중한다. 그때 사부님께서는 조급하시지만, 오히려 관여하실 수 없다. 수련생은 자신이 장기간 마난 속에 처해있게 하여 아주 고생스럽게 수련하며 아주 힘들다. 만약 장기간 넘기지 못한다면 어떤 사람은 아마 ‘병’의 사유 속에 빠져 관(關)을 지나가기를 포기하고 병원에 들어갈 수 있다.

만약 첫 일념이 좋은 일(사부님께서 개변해주셨기 때문이다)이라고 생각하고, 안으로 찾아서, 집착의 뿌리인 사(私)를 파내고 능동적으로 법에 동화하고 연공인의 씬씽 표준에 부합한다면, 그럼 사부님께서는 마땅히 제거해야 할 그 좋지 않은 마음을 제거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점화(點化)해주실 것인데 또 찾지 못할까 봐 걱정인가? 오직 당신이 제고해 올라온다면 그 마난의 가상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탁자에 썩은 사과를 놓으면 파리가 많이 꼬이게 마련이다. 계속 때려죽여도 잠시 후면 또 한 무리가 오는데 때려 없앨 수 있겠는가? 누구나 알고 있듯,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썩은 사과를 버리는 것인즉 자신의 좋지 않은 마음을 찾아서 제거하는 것이다.

또 아무리 무섭게 보이는 가상을 보거나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느낄지라도 끊임없이 안을 향해 찾는 것을 제외하고는 반드시 진아(眞我)와 사람 마음의 집착을 똑똑히 구분해야 한다. 주이스(主意識)는 사람 마음과 집착, 그리고 외래에서 강제로 더해진 염두를 끊임없이 배척해야 한다.

우리 지역의 여러 수련생은 관을 넘길 때 일일이 검증한 적이 있다. 정말 자신의 업력, 집착, 관념이 형성한 그 ‘가짜 나’는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므로 배척해야 한다. 당신이 사람 마음의 집착을 똑똑히 구분할 수 있고 배척할 수 있다면 사부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제거해주신다. 만약 당신이 그 집착을 정확하고 빠르게 찾아낸다면, 그 마난도 빨리 사라진다.

내 수련 중에서 안으로 찾아 마난을 해소한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1) 원망하는 마음은 마난의 근원

어느 한번은 ‘나’의 이가 심하게 아파 앉아있을 수도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자정이 다될 무렵 ‘나’는 아파서 발정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박해를 생각하지 않고 줄곧 문제가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생각했다. 수구(修口) 같지도 않고 먹는 데 집착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조용히 생각해보니 갑자기 사부님의 법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렇다. 단번에 생각이 났다. 최근에 한 수련생에 대해 원한이 있어 초래한 것이었다. 재빨리 사부님께 사과드렸는데 즉시 이가 아픈 것이 완화됐으며 거의 아프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또 한번은 우리 지역 수련생들이 대법 서적이 부족 하자 다른 지역 수련생들이 우리에게 대법 서적을 많이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제본은 우리가 해야 했다. 이 경서들을 제본하는 데 편리하고 안전하게 하려고 수련생 아들의 집에서 했는데 결국 경서를 모셔온 지 1년이 다 되어 갔지만, 경서를 제작할 줄 아는 수련생이 작업을 미뤄 책이 나오지 않았다. 당시 나는 매우 화를 내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경서 여러 상자를 모두 우리 집에 가져와 수련생 몇 명을 찾아 함께 완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다들 만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그래도 그녀에게 와서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 결국, 그녀가 매일 늦게 와서 다들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아주 늦게까지 작업을 해서 나는 밥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장인댁에 가서 밥을 먹기로 했는데 계단을 오를 때 다리가 조금 아픈 느낌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계단을 오를 때도 개의치 않았지만 막 문을 열었을 때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즉시 원망하는 마음이 초래한 것임을 알아차렸고 사부님께 사죄드리며 마음속으로 자신이 잘못한 것을 말했는데 그러자 다리는 아주 빨리 움직일 수 있었고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2) 색욕은 함정

어느 한 번은 저녁에 수련생과 함께 시내에서 보드판을 붙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풀을 바르고 한 사람은 붙이는 일을 했다. 첫 장을 배전함에 붙였다. 우리 두 사람이 거기에 서서 잘 붙이고 나서는 같이 떠났다. 내가 다시 보니 한 귀퉁이가 잘 붙지 않았길래 다시 다가가서 손으로 펴 문질렀다. 내가 손으로 힘을 쓰자마자 발아래 판이 단번에 끊어져 나는 2m가 넘는 깊이의 장방형 시멘트 구덩이에 떨어졌다. 알고 보니 발로 디딘 곳은 석면 기와였다. 이 석면 기와는 30여 년 전에 차고를 방수하기 위해 쓰였는데 전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이 동시에 섰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나 한 사람만 섰는데 오히려 그 아래로 떨어졌다.

그 시대에 도시에서 석면 기와 한 장을 찾는다는 것은 마치 천안문 광장에서 벽돌 한 장을 찾는 것처럼 너무 불가사의한 일이다! 아! 정말로 구세력이 나에게 설치한 함정이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장계취계’ 하셔서 개변해 주셨으므로 정말로 좋은 일로 변했고 다행히 아무 위험도 없었으며 다만 팔꿈치가 아플 뿐이었다. 그 당시 나는 어떠한 생각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전혀 구세력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두려움도 없었다. 바로 재빨리 위로 올라갔지만, 수련생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올라와서는 남은 20여 장을 전부 붙였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안으로 찾아보니, ‘함정’? 무엇이 함정일까? 맞다!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색욕심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욕망을 끊은 지 십몇 년이 되었는데 최근에 또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3) 표면 현상을 부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내(수련생)의 예를 하나 들겠다. 그녀는 매일 거의 수련생과 함께 진상을 알리러 나간다. 매일 오후에 돌아오는 아내는 어느 한 시기, 몸에 많은 부스럼이 생겨서 가렵기 그지없었다. 처음 나보고 보라고 할 때, 나는 보고 나서 개의치 않았고 이후에 나보고 또 보라고 하면 전혀 보지 않고 다만 아내에게 “없어요”라고 말해주었다. 그녀가 그 뒤로 또 부스럼에 관해 말하면 나는 “없어요”라고만 말했다.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또 보라고 하며 나에게 긁어달라고 했는데 나는 견정하게 “없어요”라고 답했다. 그 뒤로 정말 없어졌다. 참으로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一念)에서 나오며”[2]였다. 이 일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것은 바로 수련생(타인)의 바르지 않은 상태를 봤을 때도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되며 정념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 단계의 작은 인식이니 치우친 부분이 있으면 부디 바르게 지적해주시고 함께 교류하여 제고하면 좋겠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8-2008년 뉴욕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관점만을 대표할 뿐, 옳고 그름은 글쓴이 개인의 책임이므로 독자 스스로 헤아리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4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4/12/42318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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