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중국 청년 대법제자다. 밍후이왕에는 청년 수련생의 교류문장이 매우 적다. 나는 줄곧 자신이 수련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쓸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사실 ‘남을 고치려면 내가 먼저 잘해야 한다’는 사당(邪黨)의 사설(邪說)이다. 나는 어린 제자에서 청년제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의 수련 경험을 교류함으로써 다른 수련생들이 영감을 얻고, 더욱 많은 청년 수련생들이 자신의 수련체험을 교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시 법광(法光)에 잠기자 정원에 과실이 가득하다
어머니는 1996년에 법을 얻은 노 제자이시고 그해 나는 겨우 두 살이었다. 어릴 적부터 가정난이 컸는데 아버지가 술과 도박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술 접대가 있는 날이면 반드시 취하셨으며 취하면 반드시 욕설과 구타가 있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날 욕하고 때리고 나면 어머니는 날 안고 할머니 댁에 가서 밤을 지새우시곤 했다. 그때 어머니는 법을 깊이 배우지 못했기에 증오가 맺힌 채 참고만 있으셨다. 나 또한 대법 중의 가장 쉬운 이치만 알고 있었기에 매번 어머니께 권해드렸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당신이 속인과 마찬가지로 다투고 싸운다면 당신은 곧 속인이며, 당신이 그보다 더하다면 당신은 그 속인보다도 못하다.’”[1] 내 모든 어린 시절의 기억은 흑백이고 아버지는 더욱 내가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그늘이었다. 어머니는 늘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함께 왔다고 말씀하신다.
2001년 어머니는 베이징에 대법을 실증하러 가셨다가 2년간 불법 노역을 당하셨고 나는 잠시 할머니(수련생)께서 키우셨다. 많은 친척이 극력 대법을 반대하자 할머니는 집안의 압력으로 수련을 포기하고 대법에서 벗어나셨다. 나는 말을 잘 듣는 아이에서 제멋대로이고 반항하는 아이로 변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속수무책이셨다.
어머니가 불법 감금 시설에서 돌아오신 후 나는 다시 수련의 길로 돌아왔다. 할머니도 사부님의 점화로(꿈에서 집을 찾지 못했음) 대법으로 돌아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그때 나는 매일 아침 할머니와 아침 연공을 하고 저녁에는 법공부를 하며 법광에 젖어 있었다. 한 번은 학교에 갈 때 갑자기 열이 머리 위에서 내려와 발가락 끝까지 전신을 꿰뚫는 것을 느꼈다. 집에 돌아가서 기쁜 마음으로 사부님께서 나에게 관정(灌頂)을 해주셨다고 할머니와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나중에 사부님께서 어린 제자인 나를 격려해주셨는데 농구공만한 멜론이 가득 자란 과수원이 나오는 꿈을 꿨다.
어머니도 점차 소위 가정난은 모두 구세력이 강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사부께서 말씀하셨다. “매번 마난(魔難)이 닥쳐올 때, 본성(本性)의 일면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완전히 사람의 일면으로 이해한다. 그럼 사악한 마(邪魔)는 이 점을 이용하여 끝없이 교란하고 파괴함으로써, 수련생으로 하여금 장기간 마난 속에 빠지게 한다.”[2] “제자로서 마난이 올 때, 정말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거나 부동한 층차에서 당신에 대한 부동한 요구에 부합하도록 마음을 둔다면, 충분히 고비를 넘을 수 있다. 끝없이 끌고 내려간다면, 만약 心性(씬씽) 또는 행위에 다른 문제가 없다면, 사악한 마(魔)가 당신들이 방임(放任)한 틈을 탄 것이 틀림없다. 수련하는 사람은 필경 속인이 아닌데, 그럼 본성의 일면이 왜 법을 바로잡지 않는가?”[2] 무조건 참는 것에서부터 아버지 배후의 사악한 요소를 청리하고 두려운 마음을 닦아 없애자 아버지의 접대와 술에 취한 횟수가 갈수록 줄어들면서 ‘생각이 바르면 사악은 무너지리라’라는 것을 실감했다. 뒤늦게 술에 취하면 때리고 욕하는 이 ‘경험’도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나와 어머니도 술 취한 모습에 거부감을 갖지 않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아버지에게 자비롭게 대했고 차츰 아버지도 술에 취해도 술주정을 하지 않으셨다.
사존께서 항해를 호위하시니 지혜가 열리다
우리 현지 고등학교는 일반반, 중점반, 우수반으로 나뉘어 있는데 중간고사 후에 나는 중점반에 배정됐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인맥을 이용해 우수반으로 전반시켜 줄지 물으셨는데 나는 수련인이 뒷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단호히 거절했다.
고1 때는 2교시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했는데 담임교사가 성적을 올리기 위해 3교시 야간자율학습을 하게 했다. 싫으면 반드시 학부모가 신청해야 한다. 어머니와 나는 법에서 교류하면서 법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는데, 일반인 중의 일(공부)은 자연히 적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리하여 어머니께서 선생님께 신청해 나는 저녁에 시간이 나서 집에 돌아가 법을 배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내 손글씨가 신기하게도 점점 좋아져서 남들은 다 내가 손글씨 연습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대법이 내 지혜를 열어줬다는 것을 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다시 반을 나누어 나는 자연스럽게 우수반에 배정됐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학교는 3교시 야간자율학습으로 통일했는데 저녁 6시에는 마침 자습 시간이라 교실이 매우 조용해 나는 머리를 숙이고 발정념(發正念)을 했다. 저녁에 집에 도착하면 11시가 다 되어 가기에 식사 시간에 어머니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30분을 짜내 법공부를 했다. 학우들 모두 스트레스가 급증했다고 느끼는 고등학교 시절을 나는 오히려 온종일 기분이 유쾌했는데, 아버지는 보시더니 줄곧 내가 공부에 열중하지 않는 줄 아셨다.
고3이 되기 전에는 글을 지을 줄 몰라 매번 틀에 박힌 상투적인 수법을 베꼈다. 작문은 나에게 ‘큰 난제’였다. 고3의 어느 시험에서 나는 ‘중화문화의 신운(神韻)을 노래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글이 마치 물이 흐르듯, 대법에서 알게 된 이치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데, 그때 나는 오로지 전통문화를 위해 이름을 바로잡아야겠다는 단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뜻밖에 성적 발표 당일 선생님은 개강하자마자 서둘러 ‘밍크코트’와 같은 글이라 칭찬하셨고, 두 반에서 함께 감상하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교류하면서 우리가 기점을 바로 잡았기에 대법의 지혜가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로 글을 쓸 때마다 나는 대법에서 알게 된 얕은 법리를 녹여 넣었고, 선생님께서는 자주 내 문장을 모범 문장으로 반에서 배우게 하셨고 중생에게 유익하게 됐다. 고민하던 작문에서 나는 오히려 가산점을 받았다. 사존의 보호 아래 나는 다시 배정한 반에서 47등에서 십몇 등까지 성적이 올랐다.
물론 수련의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다. 나는 수련인의 일생은 사부님께서 마련해주신다는 것을 알았기에 좋은 대학에 가고 싶다는 집착은 없었다. 하지만 가끔 성적에 집착해 순위를 발표할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안으로 날 찾아보니 실은 과시심과 질투심이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때로는 글씨를 잘 쓰고 문장을 잘 짓는다고 칭찬받고 의기양양해 우쭐거리면 어머니께서 경고하신다. “이건 모두 사부님께서 주신 것인데 너는 무슨 마음이 흔들릴 것이 있느냐?” 때로는 공부에서 뒷걸음질 치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면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지 않고 함께 법에서 원인을 찾으신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비록 당신이 대법제자이지만 당신의 사회 일은 수련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의 수련이 당신의 사회 일 중에 반영될 수 있다.”[4] 공부는 어린 수련생들의 현재의 ‘일’이 아닌가. 어머니의 수련 상태가 내게 반영될 때도 있는데, 마음을 내려놓았거나 수련 중 올바른 길로 돌아왔을 때면 내 상태도 괜찮아진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아이가 산에서 표현된 상태가 좋지 않은데, 나는 집에 있는 부모가 수련을 잘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5]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년 수련생은 반드시 옆에 있는 어린 수련생을 잘 이끌기를 바란다. 수련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는 당신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당신과 동문 제자다. 때로 어린 수련생이 반항하거나 공부에 문제가 생겼을 때 무조건 일반인의 방법으로 비난하거나 강요로 학원에 다니게 하는 것은 아프면 약을 먹고 입원하는 것과 무슨 다른 점이 있는가? 내 주변에 어렸을 때부터 함께 수련하던 많은 또래가 자신을 일반인과 혼동하고 있어서 정말 안타깝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지만 크고 나면, 그의 자아 관념이 있게 되어, 사회에 이끌려가는 것도 심해진다. 당신이 그를 또 느슨하게 두면, 그는 곧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게 된다. 일부 대법제자의 아이는 하는 것이 상당히 차하지 않은가? 심지어 속인의 아이보다 못하다.”[5]
고등학교 때 나에게 두 가지 위험한 일이 있었다. 첫 번째는 여름방학 때 농구에 집착해 한 번 하면 네다섯 시간, 심지어는 법공부와 연공까지 그르치다가 악에 빌미를 잡혀 발목을 접질리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발목 복사뼈가 어긋났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일념을 견지했다. ‘나는 널 두려워하지 않는다. 난 연공할 것이다.’ 신기한 것은 연공할 때부터 발이 아프지 않았다. 나중에 발정념할 때 복사뼈에 작은 뱀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일주일 후 나는 정상적으로 뛰어다닐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어느 날 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길목 하나를 지날 때 멀리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동차가 내게서 아직 먼 것을 보고 길을 건너려 했다. 그러나 도로 한가운데까지 오자 자동차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나에게 질주해 온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머릿속에 ‘피하지 못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치 다른 공간에 간 것처럼 자동차는 자전거 뒷바퀴를 스치며 지나갔는데 불행히도 맞은편 승용차와 부딪쳤다. 동행한 학우 한 명은 놀라서 울기까지 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셨다는 것을 알았다.
방탕아가 바른길로 돌아와 부끄러움을 알고 용기를 내다
대학 입시 후 나는 국가 중점 대학에 응시했으나 3점 차이로 떨어져 나중에 성(省) 중점 대학으로 전입했다. 그때는 서운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내 물건이라면 잃어버리지 않을 것인즉, 이곳에는 나를 만나야 할 사람이 있나 보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간 후 나는 사회의 큰 염색 항아리 속에 뛰어든 것 같았다. 비록 법공부를 할 수도 있지만 수련생의 독촉이 없자 점차 법공부를 게을리하게 되고 세 가지 일은 뒷전으로 미뤄 정말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내려갔다. 나도 인터넷에 푹 빠져서 노래와 영화에 집착하고 남녀의 정에 연연하고 속인사회에 빠져 성적이 곤두박질치고 대학원 진학도 중도에 포기했다. 마음속으로 나는 대법제자이며 법공부를 해야 한다는 일념을 갖고는 있었지만 사상업의 저지는 뚫기 어려웠고, 정말 수렁에 빠지려 할 때마다 사부님께서는 어머니를 점오해주셨다(꿈을 꾸셨다). 어머니의 전화 한 통이면 나는 또 한동안 잘할 수 있었다. 대학 4년을 이렇게 비틀거리며 지나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수련하고 어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르면서 자신 스스로 법에서의 독립적인 인식과 이해가 거의 없었다. 법리적으로 어떻게 하는지 제대로 깨닫기보다 성년 수련생의 ‘감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자신에게 어려움과 시련이 닥치면 마치 ‘기댈 곳’이 없어진 것처럼 당황하기도 한다. 사실 진정 믿을 곳은 법리이지 수련생이 아니다. 나도 자신의 것을 바로 깨달을 필요가 있다.
졸업 후 이상적인 일을 찾지 못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지 않아서 최근 몇 년간 내 수련 상태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후회막급이었다. 부모님과 상의해서 다시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다.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잘 가지 못했던 길을 잘 가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시 책을 들어 3개월 만에 일반인은 최소 반년을 해야 하는 공부를 마쳤고, 지금은 국가중점대학 A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학우들은 모두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것에만 푹 빠졌던 내가 그래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부를 할 수 있다니. 나는 이 모든 것이 법의 위력임을 알고 있다.
여기에 한 에피소드가 있다. 대학원 입시성적이 나온 후 나는 과거의 ‘경험’으로 이 점수로는 A학교의 재시험을 치르기 어렵다고 생각해 다른 학교에 연락해 자신의 퇴로를 찾으려 했으나 곳곳에서 벽에 부딪혔다. 어머니는 내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여러 번 교류하셨고 사부님께서도 나를 깨우쳐 주셨지만 그때 나는 공명심에 판단력이 흐려져 깨닫지 못했다. 결국 시간이 지체되어 재시험을 잘 준비하지 못했다. 재시험 명단이 나온 후에야 내가 재시험에 합격했을 뿐만 아니라 점수 선을 40점 가까이 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재시험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선생님께서 상의하셔야 합격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하셨다. 집으로 돌아온 후 냉정하게 안으로 찾았다. 나는 자신이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에 좌우되어 완전히 수련인의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어디에 갈지는 사부님 배치에 따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A학교 마지막 합격일까지 기다렸는데 불합격해 기분이 가라앉았다. 침대에 앉아서 생각했다. 말로는 사부님의 배치에 따른다고 하고 어디로 갈지, 어떤 사람과 맺어질지는 정해진 것임을 뻔히 알면서 왜 낙담하지? 다른 데로 가면 수련할 수 없는가? 이 학교가 유명하니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 때문이지! 여기까지 생각하니 단번에 명백해졌다. 유명하지 않은 다른 학교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뒤 나는 A학교 선생님으로부터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여기에서 나는 위챗 문제도 청년 수련생과 교류하고 싶다. 처음엔 위챗을 삭제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각종 이유를 둘러댔다. 예를 들어 젊은 사람들은 전부 쓰고 공부와 업무에도 편리하다고 했지만, 사실 매우 큰 원인은 사상 업력이고 나 자신이 내려놓지 못한 집착 때문이다. 나중에 작심하고 제거하고 휴대폰을 포맷했는데 석가모니가 목욕하려고 제자들에게 욕조를 청소해 달라고 부탁한 그 단락 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밍후이왕의 소식은 틀림없이 사부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자신의 관념으로 정법노정 중의 수요를 막으면 안 되는데 어찌 그렇게 많은 이유가 있는가? 정말로 위챗을 제거하자 법의 위력이 당초의 그러한 걱정들을 해결해줬다. 믿지 못하겠으면 여러분도 한번 해보라.
나는 대법이라는 옥토에 뿌리를 내린 묘목처럼 사부님의 보호 아래 이미 가지와 잎이 무성해졌다. 나는 지금 자신이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주변의 친구들에게도 진상을 똑똑히 알리지 않았다. 색욕과 명리에 대한 집착이 아직도 있으며 가끔은 일반인의 관념에 방해를 받는다. 그러나 내가 대법 수련을 확고히 하는 건 누구도 동요할 수 없다.
청년 수련생들은 더 이상 자신을 어린 제자로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사부님께서 우리 나이 또래에서 구원을 받지 못한 중생이 아직도 많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한 것이 부족하다는 뜻 아닌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염색 항아리에 빠진 수련생들은 우리가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길 바란다. 시간이 정말 많지 않다. 수련생과 함께 격려하려 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도법(道法)’
[3] 리훙쯔 사부님 시: ‘홍음2- 怕啥(두려울 것 뭐냐)’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05년 샌프란시스코 법회 설법’
[5] 리훙쯔 사부님 경문: ‘2014년 샌프란시스코 법회 설법’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관점만을 대표할 뿐, 옳고 그름은 글쓴이 개인의 책임이므로 독자 스스로 헤아리기 바란다.]
원문발표: 2019년 5월 2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9/5/26/387780.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19/6/16/17809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