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 교류 문장을 읽은 소감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어제 밍후이 교류 문장 ‘모세 이야기가 나에게 준 계시’를 읽고 나서, 사부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기초를 다져놓으신 5천 년 신전(神傳)문화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됐다.
나는 전에 사부님께서 다져놓으신 5천 년 전통문화는 사부님께서 대법을 전하시기 위해 사람들이 대법을 인식하고 이해하게 하는 바탕이 되는 문화를 다져놓으셨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사부님께서 다져놓으신 5천 년 신전문화에는 대법제자들의 정법수련을 지도하는 높고 심오한 함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신이 모세에게 이스라엘인을 데리고 이집트를 떠나라고 하자, 모세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사실 신에 대한 불신(不信)이었다. 몇 가지 신적(神跡)이 드러난 후, 모세는 신의 지시에 따라 이스라엘인을 데리고 이집트에서 떠났지만, 사람들은 생각했던 어려움에 부딪혔고, 이스라엘인은 신에 대해 원망을 품기 시작했다. 신에 대한 원망,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인들이 본래 11일이었던 노정을 40년 동안 걷게 된 원인인데, 겪지 말았어야 할 많은 시련이 닥쳤다.
이 ‘11’을 보면서 다른 또 하나의 ‘11’이 생각났다. ‘서유기’에서 당승은 천신만고, 구구팔십일 차례 마난(魔難)을 겪으면서도 전혀 불경을 구하려는 의지가 흔들리지 않고 부처를 원망한 적이 없었는데, 결국 부처의 안배에 따라 11년에 걸쳐 진경(眞經)을 얻어, 중원 대지에 불법(佛法)을 널리 알렸으며, 오늘날 대법을 널리 알리는 데 기반이 되는 문화를 마련했다. 만약 당승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원망이 생기면, 아마 걷는 길은 11년 만이 아니었을 수 있고,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 대선이 끝난 후 결과가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의아해하는 수련생이 있는가 하면, 어떤 수련생은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여러 가지 마음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정법이 끝나는 시간에 대한 사고(思考)와 예언’이라는 교류문장이 올라오자, 더 많은 수련생이 사람 마음을 움직여 원망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수련인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인 안으로 찾는 것을 잊어버렸다. 자기에게 존재하는 ‘사(私)와 나’의 불순한 요소를 깨닫지 못했을뿐더러, 우리에게 존재하는 ‘사와 나’가 오늘날 이러한 세간의 환경을 초래했고, 사부님의 정법이 추진되는 것을 가로막는 주된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를 성취하고 더 많은 중생들을 구도하시기 위해, 더 크신 감당으로 장계취계(將計就計) 하시면서 대법제자들이 제고할 시간을 안배하셨다. 이러한 문제의 실질을 대법으로 가늠하지 않고, 표면만 보면서 사람 마음으로 원망하며, 심지어 사부님을 의심하다니 참으로 부당하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제자로서 정진하지 못해 초래한 것이 아닌가?! 만약 우리가 사부님을 원망하고 의심한다면, 정법수련의 시간이 길어지게 하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점오(點悟)해 주시고 가지(加持)해주셔서 내가 쓴 교류 문장이 밍후이왕에 발표됐는데, 나는 문장을 읽으면서 문장 속의 바르지 않은 많은 부분을 편집하는 수련생이 바로잡은 것을 보고 아주 부끄러웠다. 그날 밤 꿈에 내가 일부 사람들과 함께 연단로(煉丹爐) 같은 거대한 항아리 밑부분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주 높은 항아리 입구에는 거대한 신 같은 모습을 한 네 생명체가 항아리 속에 있는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때 한동안 참고 견디면 모두 나갈 수 있다는 일념이 생겼다.
이때 안에 있는 일부 사람이 왜 이렇게 덥냐며 원망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시원한 바람이 내게 불어와 나는 전혀 덥지 않게 느꼈다. 머리를 들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어딘지 찾아봤더니, 항아리 밖의 푸른 하늘에 보살 모습의 생명체가 있었는데 옆에 동자 두 명을 두고 있었다. 그 생명은 손에 작은 거울 같은 직사각형 기물을 들고 있었는데, 그 면에서 하늘색 빛이 나왔다. 시원한 바람은 바로 그 거울에서 온 것이었다. 나는 즉시 두 손으로 허스(合十)하여 감사를 표했다! 나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쪽에 오면 시원하니 오라고 했다!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이때 한 사람이 원망하며 욕설을 했는데 일부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그때 보살 모습 생명의 손에 작은 거울 같은 기물이 추가로 생긴 것이 보였는데, 그 기물은 면이 하늘색이 아니라 붉은색이었다. 욕한 사람과 맞장구친 사람에게 그 기물을 비추자 그들은 더워서 뒹굴면서 아주 고통스러워했다. 이때 나는 그들에게 “금방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거예요. 빨리 잘못을 시인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사부님 설법 한 소절을 찾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구세력(舊勢力)의 말로 하자면, 중국 그 지역은 매우 많은 고층 생명들이 집중되었고, 심지어 더욱 높은 고층 생명이 모두 그곳에서 법을 얻는다. 그렇다면 그 지역은 바로 도가에서 말하는 그 연단로(煉丹爐)처럼, 그 불은 반드시 맹렬히 타올라야 하고 왕성하게 타올라야 한다. 정말로 사나운 불길의 고험 아래서 걸어 지나올 수 있고 이 엄혹한 박해 중에서 당신이 그래도 견지해 나갈 수 있으면 당신은 바로 수련자이며 천상에서 당신을 승인하고 당신은 원만(圓滿) 할 수 있다. 걸어 지나오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곧 이런 목적인데, 바로 제련이다. 그것은 바로 그 찌꺼기를 제거하고 진짜 금을 제련해 내는 것이다.”[1]
나는 구세력이 안배한 박해는 대법제자들을 연단로에서 제련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대법제자들이 자신의 ‘사와 나’의 불순한 요소를 제거한다면, 구세력이 안배한 박해는 당신과 관계가 없어진다. 만약 이러한 요소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그것의 안배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만약 사부님과 대법을 원망하거나, 의심하거나 흔들리면 심한 박해를 당할 것이고, 박해당하는 시간도 길어질 수 있다.
사실 원망은 자신에게 존재하는 ‘사와 나’에서 오며, 본성이 원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대법의 입자인데 원망이 가능하겠는가? 나는 또 깨달았다. 현재 수련에서나 사람을 구할 때 마주친 문제는 모두 법리에 대한 인식이 올라오지 못해 조성된 것이다. 법에서 좋은 인식이 있는 수련생은 마땅히 법리 방면에서의 교류 문장을 많이 써야 한다. 좋은 교류 문장은 수련생의 제고를 돕고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를 완전히 내려놓고 매일 비바람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수련생들에 대해 나는 정말 감탄하게 된다. 사실 이런 수련생의 경지는 구세력의 연단로에 포함되지 않으며, 박해라는 것은 그들과 전혀 상관이 없다. 아직도 일부 수련생은 오늘날의 사람은 구하기 어렵고, 환경도 예전처럼 여의치 않다고 원망한다! 그러나 나는 대법제자의 수련 경지가 올라오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이며, 근본적으로 ‘사와 나’를 내려놓지 못한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깨달았다. 오늘날 세인들이 구원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그 사람 배후에 있는 사악한 요소들인데, 이러한 사악한 요소가 존재하는 심층 원인은 아직 법에 의해 바로잡히지 못한 낡은 우주의 고층 생명이 있어서다. 그것들이 저층차의 구세력의 안배를 이용해 오늘날 세인들로 하여금 대법제자에게 ‘수련환경’을 제공하게 했고, 대법제자들로 하여금 그것들이 제공한 ‘수련환경’에서 수련 성취하게 하려 했으며, 그것들이 인정하는 표준에 도달해야만 대법제자들이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그제야 대법제자를 인정하고 지나가는 것을 허용한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대법제자가 버리지 못한 ‘사와 나’의 요소가 그들에게 이용당해, 이것을 핑계로 세인들이 구원되지 못하게 안배했다.
4년 전쯤 우리 지역 수련생 몇 명은 운전해서 시골 장터를 방문해 파룬궁 진상 자료를 배포했다. 장터에 도착한 다음 우리는 두 팀으로 나눠서, 나와 한 수련생은 북쪽 절반을, 나머지 수련생들은 남쪽 절반을 맡기로 했다. 나와 그 수련생은 당시 마음이 깨끗했고 자아에 대한 생각이 없이 그저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배포할 곳에 이르렀더니 상서로운 장에 휩싸인 느낌을 받았는데, 몸이 아주 가뿐하고 마치 우리가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장터 사람들이 미소 지으며 우리를 맞이하고 오랜 친구처럼 먼저 인사를 했다. 우리가 진상 자료를 그들에게 건네주자, 모두 아주 즐거워했고, 어떤 사람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쳤으며, 사람마다 희색이 만연했다! 마치 우리가 함께 성대한 명절을 지내는 것 같았다. 자료를 다 배포하고 나서 남쪽으로 가 다른 수련생들을 찾았다. 이때 우리는 좀 전에 장터 북쪽에서 몇 분 만에 자료를 배포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내가 다른 공간에서 걸어 나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수련생 몇 명이 아직 자료를 다 배포하지 못했고 “자료가 잘 안 나가요!”라고 말하는 것을 봤다. 장터 남쪽은 상서로운 장이 없는 느낌이었고 세인들이 모두 무감각한 표정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수련생들은 예전에 우리가 자료를 빨리 배포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고 비교하는 심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환경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은 문제를 잘 설명하는 것 같다. 사람을 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깨끗하지 못하고, 대법의 표준에 이르지 못해 수련 경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사와 나’를 내려놓는다면 모든 바른 생명이 대법제자들을 도와줄 것인데, 사람 구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수련이 경지에 이르지 못해 구세력의 안배에 끌려든 것이며, 올바른 생명들이 우리를 도와줄 수 없어 사람을 구하기 어려운 현상이 생긴 것이다. 수련은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아야 하며,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올해의 션윈 공연에서 대법의 원용(圓容)한 지혜와 생명에 대한 자비로운 구도가 표현된 것을 보았다. 특히 첫 번째 성악곡 ‘실패하지 마세요(不要失敗)’에서는 창세주께서 제자들과 오늘날 법을 얻으러 온 세인들을 무량하고 자비롭게 구도하신다는 것이 체현된 것을 느꼈는데, 이는 말로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곡이 내 생명 가장 깊은 곳까지 울렸다. 또 하나 가장 크게 깨달은 바가 있다. 사부님께서 생명을 대하시는 것은 내가 예전에 생명에 대해 인식한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인데, 나는 내가 이기적이고 자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늘 어떤 생명은 구도될 자격이 없고, 어떤 생명은 도태돼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체 공연에서 한 생명에게 한 가닥의 선(善)한 생각이라도 남아 있으면, 사부님께서는 그 생명을 자비롭게 구도하시고 원용하신다는 것을 느꼈다. 전체 공연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러한 함의가 내포돼있다고 느꼈고, ‘훼멸’과 ‘도태’란 없었다.
우리는 대법제자로서 사부님을 도와 중생을 구하러 왔는데, 만약 우리가 마음에 훼멸과 도태를 품고 있다면 어떻게 중생을 구할 수 있겠는가? 우리 마음에 ‘훼멸’과 ‘도태’가 없이 구도만 있어야 중생을 구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은 구도(救度) 때문이지, 훼멸과 도태가 아니다.
더는 원망하거나 의혹을 품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수련과 사람 구하는 어려움만 크게 한다. 정법수련 시간이 거듭 연장되는 것은 우리의 수련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인데, 우리는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야지 사부님에게서 원인을 찾아서는 안 된다! 시간을 거듭 연장하시는 것은 사부님께서 우리 대법제자들을 성취시키시고, 미래를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다!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이다! 제자로서 더욱 소중히 해야 하고, 은혜에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상은 현재 층차에서 약간의 개인 인식으로, 대법에 부합되지 않거나 원용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수련생 여러분이 자비롭게 바로잡아 주고 원용해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2016년 뉴욕법회 설법’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관점만을 대표할 뿐, 옳고 그름은 글쓴이 개인의 책임이므로 독자 스스로 헤아리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3월 2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3/26/42255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