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1995년, 제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학우를 통해 파룬궁(法輪功)을 알게 됐습니다. 점심 휴식 시간에 학우들과 함께 동북사범대학교에 있는 연공 거점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연공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동북사범대학교의 학생과 선생님이었고 모두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3세, ‘진선인(真·善·忍)’의 씨앗이 마음속에서 싹트다
당시에 만났던 보도원 언니는 제게 파룬궁의 기본적인 상황을 소개해주었습니다. 은은한 연공 음악이 숲 사이로 울려 퍼졌고 오빠와 언니들은 조용히 연공을 하고 있었으며 고요하고 평화로웠습니다. 언니는 제게 파룬궁은 다섯 가지 공법이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심성 수련이라며 우주 특성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자신의 심성을 수련해야 하고 진선인의 법리로 자신의 마음을 단속하여 일에 부딪히면 자신을 안으로 찾고 일을 함에 있어 타인을 고려해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단번에 이 법리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이런 고요함과 평온함은 자신의 도덕적 요구에 깊은 감동을 주었고 진선인 이 세 글자는 13살밖에 되지 않은 저의 마음에 씨앗을 뿌렸습니다. 저는 이 세 글자를 대단히 좋아했고 파룬궁이 사람을 선을 향하게 마음을 닦도록 가르치는 요구가 아주 좋았습니다. 저는 저 자신의 천진하고 선량한 본성이 이 세 글자에 공명하는 것을 느꼈고, 이것이 바로 제가 줄곧 찾던 것이며 제가 원하던 것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파룬궁을 배우겠다고 의사를 밝혔고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언니는 제게 전부 무료라고 알려주면서 시간이 있으면 와서 모두와 함께 연공을 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전법륜’ 책 뒤표지에 적혀 있던 정가는 12위안(한화 약 2061원)이었지만 언니는 원가인 10위안만 받았으며 누구에게나 이렇게 했습니다. 파룬궁은 사람에게 명리를 추구하지 않고 선을 향하도록 가르칩니다.
나중에 나는 이 언니가 대학원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언니의 기숙사 방의 네 사람도 모두 대학원생이었고 파룬궁을 수련했습니다. 파룬궁은 고급지식인과 학식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매우 환영받았고 모두 주견이 있고 독자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들로서 전혀 맹목적으로 무엇을 듣고 믿지 않았습니다.
나는 정말 고요하고 평온한 정토를 체험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학교가 바뀌면서 저는 예전 사범대학에서 같이 연공하던 사람들과 연락할 방법이 쉽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몰랐었는데, 저는 창춘 곳곳에서 파룬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련하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있었으며 출근하는 사람도 있었고 퇴직해서 집에서 쉬는 사람도 있었으며 학생들 가운데 박사, 석사, 학사,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심지어 더 어린아이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연령대가 수련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다 자신의 시간에 따라 가까운 곳을 찾아가 연공했고 비용을 받지 않았으며 무슨 특별한 요구가 없이 환경이 조용하기만 하면 연공하면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학교 가는 길에, 저는 한 파룬궁 연공 거점을 지납니다. 똑같은 은은한 음악 소리와 똑같은 평화로운 사람들이 서로 알지 못하지만, 그곳에 서기만 하면 서로 보고 웃으면서 마치 오래된 벗처럼 마음이 편안합니다. 모두 진선인으로 자신을 요구하고 타인에 대해 모두 그처럼 우호적이고 선했습니다. 여기에는 명리가 없고 질투도 없으며 오직 서로 관심을 기울이는 마음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자신이 어떤 일에 부딪혔고 어떤 일을 잘하지 못했으며, 무엇이 진선인의 요구에 맞지 않아 더 고칠 필요가 있으며, 어떤 부분이 예전보다 더 좋아졌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들은 사람은 그 의미를 알고 미소짓거나 자신과 대조하여 생각해봅니다. 모두 그처럼 평화롭고 관용적이어서 그곳에 있으면 편안한 느낌이 들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밖에 이르기까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그곳은 하나의 정토로서 어떤 파룬궁 연공 거점이든 다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이름을 신고할 필요가 없고 개인적인 상황을 캐묻는 사람이 없으며 사람마다 모두 ‘전법륜’을 읽으면서 누군가 한 일이 좋고 나쁨과 누군가의 언행의 시비를 모두 이 ‘전법륜’ 속의 법리로 가늠했으며 논쟁할 필요가 없이 잘하면 모두 상대방을 위해 기뻐했고 잘하지 못하면 모두 상대방을 격려해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의 마음마저 고요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듭니다.
17세, 청원하러 갔다가 수련인의 사심없는 선량함을 목격하다
연공 거점에서 제가 아는 보도원은 지린대학의 박사였고 매우 능력이 있는 언니였습니다. 언니는 제게 매우 친절했습니다.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중공)은 파룬궁에 대한 광적인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위에서 착오를 일으킨게 아닐까? 윗사람들은 분명 파룬궁이 어찌 된 일인지 모를 거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들에게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알려주어야겠다. 그들에게 파룬궁은 TV에서 말한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려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저는 다른 네 명의 사람과 함께 베이징으로 갔고 그때 저는 17살이었습니다.
동행했던 사람 중, 보도원 언니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저는 잘 몰랐습니다. 그중 오빠 한 명이 있었고 보도원의 남동생이었으며 다른 두 명은 언니였습니다. 제게는 이삼백 위안(3만 원~5만 원)밖에 없었습니다.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에는 많은 대법제자가 있었는데 우리처럼 베이징으로 청원 가는 수련생이 있었고, 외지에서 창춘으로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수련생도 있었습니다. 모두 기차에서 서로 자리를 양보했고 서로를 돌보았습니다. 외지에서 온 많은 사람이 베이징에서 발표한 탄압 명령을 알게 된 후, 티켓을 다시 구매하여 베이징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천지에 감동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모두 진실했고 선량한 마음이었습니다.
베이징에 도착해서 기차에서 내리니 견디기 힘들 정도로 날이 더웠습니다. 베이징에는 세 걸음마다 보초가 한 명이 있었고, 다섯 걸음마다 보초가 한 명 있었으며 완전 무장하고 전투태세를 갖춘 사람들이 경계하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남녀노소는 모두 손에 어떠한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고 설명하러 온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그들이 무엇을 방비하는지 몰랐습니다. 베이징에 도착한 후 많은 지역에서 와서 상황을 반영하는 수련생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우리에게 일부 생활용품을 주었고 어떤 수련생은 우리에게 일부 돈을 주었으며 모두 제가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알고 저를 매우 잘 돌봐주었습니다. 저는 그때 급하게 베이징에 가기로 해서 아무것도 챙겨오지 않았고 자신이 가져갔던 그만한 돈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이가 어려서 밖에 혼자서 나다닌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수련생은 제게 치마와 옷을 사주었고 생필품을 사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게 돈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제게 무엇이 필요해 보이면 무엇을 주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중국 오늘날 사회에서 지금 사회인의 가치관으로 가늠하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바보’들입니다. 그러나 진선인을 수련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타인을 위해 생각하는 이런 일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평범한 일입니다.
수련생이 머무는 곳에서 있었던 일인데, 한번은 불볕더위와 먹은 음식 때문에 불편했습니다. 저는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지만, 미처 채 가지 못하고 화장실 곳곳에 토했습니다. 저는 토하다가 허탈해져서 모두에게 “들어오지 마세요. 아무도 들어가지 마세요. 곳곳에 토해서 역겨워요. 일에서 타인을 고려해야 하잖아요. 모두에게 번거로움을 드릴 수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앞다투어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억지로 저를 부축해서 휴식하게 하고 그분들이 저를 도와 깨끗하게 청소했습니다.
이처럼 저를 선하게 대해주었던 이런 사람들은 이번 베이징에서 서로 만나기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분들이 누군지 이름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법을 함께 수련함으로 이렇게 서로 진실하게 서로를 대했던 것입니다. 이것 역시 십몇 년 후인 오늘날 중국 사회에서는 몹시 보기 드문 장면입니다.
잔혹한 박해 속에서 이제는 자유롭게 배우고 연마하던 시절은 없다
저는 우리가 자유롭게 함께 진선인을 수련하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박해로 우리는 더는 예전처럼 그렇게 공개적으로 연공을 하고 심득을 교류할 수 없습니다. 박해의 잔혹함으로 조성된 공포 분위기와 실제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납치, 체포, 가산 몰수, 노동교양, 징역형 선고, 생체장기적출 등 박해의 수단으로 인해 저와 수련생들이 정상적으로 왕래하는 것마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와 함께 베이징으로 갔던 그 네 명의 수련생들을 찾을 수 없습니다. 폭로된 많은 파룬궁 수련인에 대한 생체장기적출 사실을 고려하면 그분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습니다. 설령 아직 연락하는 수련생이 있다 하더라도 때때로 아는 사람이 납치됐거나 가산을 몰수당했거나 심지어 노동교양 박해를 받고 있다는 소식뿐입니다. 이런 대우를 받는 그분들은 어떠한 항목의 법률 조항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저는 실질적으로 이번 박해로 육체적인 박해를 감당하지 않았지만, 저의 정신은 십몇 년 동안 줄곧 박해 속에 있었고 저의 정상적인 생존 환경도 파괴됐으며 대체된 것은 커다란 공포입니다.
초등학교 동창생의 어머니는 수련으로 기사회생했지만 참혹한 박해를 받다
저의 초등학교 친구와 그녀의 어머니는 모두 파룬궁 수련자입니다. 그녀들이 법을 얻은 경험도 매우 전설적입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마침 저의 중학교 같은 학년 학급의 다른 반 담임 선생님이었고 저는 그분을 아주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아주머니는 매우 명망이 있는 국어 선생님이었고 매우 잘 가르쳐서 학생과 학부모 모두 아주머니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1995년,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때에는 그런 복잡한 병명을 몰랐고 단지 매우 심각하여 병이 위중하다는 진단서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주머니 반은 그로 인해 해산됐고 담당했던 학생들은 다른 반으로 보내졌으며 몇 명은 우리 반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주머니가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나중에 아주머니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출근했고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알아보니 어떤 학생의 학부모가 파룬궁을 알려줘서 파룬궁을 배워서 신체가 건강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기사회생의 진실한 사건은 그때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렇게 파룬궁으로 생명을 구한 선생님은 오히려 1999년 7월 20일 이후,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았고 여러 차례 가산 몰수, 노동교양, 잔혹한 고문으로 고통받았고 임금지급이 정지되었으며 딸은 이로 인해 1년 정학을 받았습니다. 모녀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심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중 제가 직접 겪은 일도 있었는데, 한 번은 2003년 설 기간에 아주머니 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잡혀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서둘러 그녀 집에 가서 문에 들어서자마자 매우 공포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사정을 물어보니 구정 초사흗날 밤 여섯 시가 조금 넘어 열 몇 명의 경찰관이 아주머니 집에 침입해 들어와 아주머니를 강제로 연행해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을까요? 그들이 이렇게 하면, 이 가정은 어떻게 설을 쇠나요?
21세, 공안국에 가서 죄 없는 수련생의 석방을 요구하다
저는 그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큰 압력을 느꼈습니다. 제가 친구와 함께 아주머니를 보러 가기로 하자 이 압력은 거대한 공포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가면 무엇에 직면하게 될지 몰랐고 그들이 아주머니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몰랐으며 우리에 대해 또 무엇을 저지를지 몰랐습니다! 아주머니와 우리는 모두 어떠한 법도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을 납치하는 것 자체가 법을 위반한 것이므로 그들은 전혀 이야기할만한 이치가 없었습니다.
차오양(朝陽)구 공안 분국에 도착하자 공포감은 더욱 높았습니다. 우리 두 어린 소녀가 이런 곳에 언제 가보았겠습니까. 내딛는 매 한 걸음은 모두 천근만근인 것 같았고 몸과 마음의 압력은 너무 높아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 참을 수 없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철의자에 수갑이 채워진 채 높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주머니를 도와 수갑을 풀어드리고 싶었지만, 전혀 어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아주머니의 상황을 물어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사람을 석방하라고 요구해도 아무런 결과가 없어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해 저는 21살이었고 친구는 20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주머니의 이번 납치, 가산 몰수로 아주머니의 어머니는 4시간 넘도록 가산이 몰수되는 전반 과정을 경험했으며 놀라서 40여 일 만에 원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일은 모두 제가 직접 경험한 것입니다. 21년에 걸쳐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파룬궁 박해 속에서 저의 본래 단순하고 선량한 내면은 오염됐습니다. 저는 왜 저를 낳아 길러준 이 땅에서 진선인이 인정받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왜 ‘헌법’은 우리의 신앙은 자유라고 말하면서 현실 생활에서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이용해 저의 신앙을 바꾸게 하려고 전력을 기울여 모든 국가 기구를 동원해 저를 바꾸게 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알 수 없는 공포를 겪는 이유는 단지 제가 파룬궁을 수련하고 진선인을 신앙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수련하지 않겠다’라는 한 마디만 말하면 이 모든 공포는 저와 무관하게 될까요? 이것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사회인가요?!
저는 마음과 생각이 정상적인 한 사람이라면 파룬궁을 박해하는 이 결정을 내린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진선인이라는 세 글자가 그 사람의 신경을 어떻게 건드린 것인지, 무엇이 그를 곳곳으로 뛰어다니며 꼭 파룬궁을 제거해야 마음이 후련한지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록 저는 그를 이해할 수 없지만 저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장쩌민(江澤民)입니다. 그가 바로 1999년 혼자서 파룬궁에 대한 탄압을 발동했고 이른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을 ‘자살’했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을 ‘살인’했다고 하는 등의 거짓 뉴스를 내보냈습니다. 또 2001년 1월 23일, 천안문 광장에서 분신자살 거짓 사건을 꾸며내어 파룬궁에 죄를 뒤집어씌웠고 사람들 마음속에 파룬궁에 대한 적대적인 증오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이런 씨앗은 그 후 여러 차례 모함하고 먹칠하면서 전반적인 사회의 두려운 분위기 속에서 끊임없이 뿌리를 내리고 발아하게 했으며 지금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몸소 겪은 경험을 써내어 사람들이 파룬궁 수련인이 받은 천고의 억울한 누명을 알고 선악을 똑똑히 가려내며 시비를 명백하게 분별하여 더는 사악한 공산당이 박해하는 순장품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진상이 크게 밝혀지는 그 날에 비로소 후회막급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법망은 매우 넓고 성글지만 빠뜨림이 없으며 선악에는 반드시 인과응보가 따릅니다.
원문발표: 2020년 3월 3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3/30/42272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