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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잘못된 생각에서 걸어 나오다

‘핸드폰, 8년 잡히지 않았는데 이듬해 잡혔다’를 읽은 소감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수련생의 문장을 읽고 주변 수련생들을 둘러보니, 핸드폰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수련생이 아직 매우 많았다. 수련생들이 이렇게 이지적이지 못하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원인이 도대체 무엇일까?

내 층차 중에서 한번 분석해보고자 하니, 수련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런 수련생들은 대개 다 특징이 있는데 두려움이 아주 적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 나가서 진상을 알리고, 집에서 법 공부할 때 수련생들이 많다.

그들 주변 사람들은 법을 배우지 않고, 대신 사람을 따라 배우는 수련생이 있기도 하다. 그럼 그는 수련도 잘하고 있고, 정념도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부 수련생은 여러 차례 “전화안전에 주의하라”라는 말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일깨워주는 수련생을 ‘두려움이 있고, 잘 수련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사부님께서 핸드폰은 하나의 도청기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왜 깨닫지 못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는가? 그 수련생은 사부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면서 “자신은 아직도 법에 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법에서 법을 깨닫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높게 잘 수련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수련생은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수련생에게 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대면해서 진상을 알리며, CCTV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진상 자료를 배포하고 있는데 왜 핸드폰, 전화의 감시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모두 사악을 대면하고 두려움을 내려놓은 것이 아닌가? 정정당당하게 사람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이는 것인데, 법을 잘 모르는 주변의 많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법리를 아주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질문: 인류사회는 빅 데이터를 만들고 있습니다. 대륙에 설치되는 감시카메라가 갈수록 많아지고, 안면인식, 자세인식 등등이 더해져, 데이터 분석이 남용되고 있습니다.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을 알리는 대법제자는 더 큰 안전문제를 마주한 것입니까, 아니면 굳이 마음에 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사부: 대법제자는 대법제자의 길이 있다. 만약 당신이 바르게 걸으면 교란은 곧 적어진다. 나는 줄곧 말했는데, 당신이 바르게 걸으면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사람마음을 가지고 한다면 비록 대법 일을 하더라도 또 문제가 나타나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표준과 법도는, 해내기가 아주 어렵고, 이 기초가 없으면 역시 해내기가 아주 어려운데, 그래서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1]

“진상을 밝혀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구세력은 감히 반대하지 못하는데, 관건은 일을 할 때의 심태(心態), 그것이 빈틈을 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2]

이상은 사부님께서 진상을 알리고 CCTV 앞에서 진상 자료를 배포하는데 관한 설법이다. 사부님께서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만약 우리가 바르게 걸으면 구세력은 감히 반대하지 못한다.

사부님께서는 ‘2018년 워싱턴DC 설법’에서도 핸드폰을 언급하시면서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제자: 어떤 사람이 대륙에서 1년이나 반년을 살다가, 해외에 돌아와서 또 법회를 포함한 여러 가지 활동에 참가합니다. 대륙에 돌아가도 어떠한 박해도 없습니다. 이런 정황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사부: 이것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당신은 이 전화가 도청(監聽)되는 것을 아는가. 우리 몸에 지닌 전화기는,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매 하나가 모두 도청기이다. 중공이 그런 것을 듣는데, 거기에 앉아 당신이 일상사를 얘기하는 것을 듣는바, 그걸 아주 똑똑하게 듣는다. 매 한 명의 대법제자 그 핸드폰은 모두 도청되는데, 당신은 당신이 폭로되지 않았다고 하는가? 게다가 그 핸드폰은 아주 빨리 꿰이는데, 당신이 전화를 걸기만 하면 그 번호가 꿰이게 되며, 그런 후에 그는 도청시스템을 설정한다. 폭로되지 않은 것이 아주 적고, 심지어 가능하지도 않다. 당신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기만 하면, 곧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귀국했는데 아무 일도 없이 평탄한 길을 걷는 것 같았다고 하는 사람은, 내가 생각하건대, 반드시 문제가 있다.”[3]

어떤 수련생은 하나 또는 여러 개를 유추해낸다. 마음가짐이 바르기만 하면 사악은 감히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더욱 높은 층차의 법리가 아니다. 더욱 높은 층차의 법리는 이렇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수련 중 우리가 높은 층차의 이치를 깨달았어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건 다른 공간에서 보여주는 것이므로 인류의 언어로는 표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사부님께서 명확하게 알려주셨다. 고층차로 올라갔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법을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깨달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오래전 사부님께서 ‘스위스법회설법’ 중 제자의 질문에 해답해주신 설법이 생각났다.

“제자: 사부님의 경문을 신문에 실어 홍법해도 됩니까? 또 사람들이 경문의 함의를 곡해할까 봐 걱정됩니다.

사부: 그럴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기는 이렇게 하지 말라. 무엇 때문인가?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우리의 가장 좋은 홍법 방식은 바로 여러분이 단체로 연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연분이 있는 사람을 빼놓지 말라고 말했을 뿐이다. 내가 말한 홍법은 전 인류가 모두 와서 법을 얻으라는 것이 아닌바 절대로 이런 개념이 아니다. 나는 연분이 있는 사람에게 와서 법을 얻으라고 말했다.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투철히 말해도 괜찮겠다. 우리가 줄곧 채용한 홍법 방식은, 당신들이 밖에서 연공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바로 사회상에서 우리 대법의 책을 서점에서 판매하게 하는 것이다. 나의 법신은 연분이 있는 사람에게 그 책을 사게 할 것이고 연분이 있는 사람이 보면 그는 와서 배울 것이다. 우리가 또 밖에서 연공하는데, 그러면 법신은 그에게 연공장을 찾아가서 법을 얻도록 배치할 것이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연공하게 하거나 우리 수련생을 찾을 수 있도록 한다. 우리는 이 일을 이렇게 배치한다.

당신들은 더욱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아주 많고 많은 방법을 채용하였다. 이는 수련생의 성심임을 나는 보았다. 당신들이 한 것도 모두 아주 좋지만 모두 자발적인 개인 행위이므로 내가 그것을 된다, 안 된다 하지는 않지만, 내가 대법 속에 남겨놓은 홍법 방식은 바로 이것이다. 곧 우리가 밖에서 단체로 연공하고 법회를 열며, 서점에서 책을 판매하게 하는 이것이다. 연분 있는 사람은 책을 사 본 후 수련하려고 그 자신이 주동적으로 찾아와서 배우는 이러한 것이다. 물론 우리 수련생이 때로 개인적으로 신문에 실어 다른 사람이 좀 알도록 하는, 이것 역시 아주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법을 얻을 수 있게 하므로, 나도 이런 형식을 부정하지 않는데, 연분 있는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당신들에게 남겨준 가장 좋은 홍법 형식은 바로 단체 연공과 법회라고 했다.”[4]

그 당시 사부님의 이 설법을 듣고 이해되지 않아 어리둥절했다. 왜 신문에 실으면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온다고 하셨을까. 그러나 그럴 것이라고 사부님의 말씀을 믿었다.

나는 긴 시간의 법 공부를 통해 깨달았다. 대면 진상을 알리는 방식이 바로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신 길이고, 신문에 싣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들어와서는 안 될 것이 들어오게 된다고 말씀하신 거로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대면 진상을 알리고 CCTV를 무시하고 진상 자료를 배포하는 것은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신 법을 실증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이런 것이라고 하시면 바로 이런 것이다. 즉 사부님께서 정해놓으신 일이므로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구세력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핸드폰은 도청기라고 말씀하셨다. 즉 이 핸드폰 뒤에 구세력이 배치한 사악한 요소가 있다는 것이고, 이 감청 시스템은 마치 수련생의 공간장으로 뻗는 흑수와 같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승인하시지 않은 것으로 핸드폰 감청문제에 대해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구세력이 배치한 요소가 우리 공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핸드폰으로 교류하고 핸드폰으로 연락하면 우리의 일거일동을 쉽게 감시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구세력이 배치한 길로 가는 것이다.

왜 특별히 깨닫는가? 자신을 실증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私)’다. 이런 ‘사’는 어떤 땐 느끼기 힘들다. 이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은 정의롭게 대법의 일을 하고 있다’라는 것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수련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사악이 적어졌다고 핸드폰안전에 느슨하게 생각하는 수련생도 있다. 사악이 적든, 일이 발생했든 발생하지 않았든 일 할 때 법에 있지 않으면 대법제자가 일하는 기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부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바로 구세력의 것을 승인한다는 것이다. 일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법의 길에 있지 않은데 어찌 수련인의 위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수련자가 그래서야 되겠는가?

내가 말한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수련생이 설령 잠시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주변 수련생의 안전을 생각하길 바란다. 당신이 생각하는 정념은 주변 수련생의 정념을 대체할 수 없다. 또한, 우리의 정체도 생각해야 한다. 지금까지 핸드폰안전에 주의하지 않아서 초래한 교훈은 끊이지 않았다. 자신을 한번 돌이켜 보고 반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경문: ‘2019년 뉴욕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2-2002년 보스턴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18년 워싱턴DC 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스위스법회설법’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관점만을 대표할 뿐, 옳고 그름은 글쓴이 개인의 책임이므로 독자 스스로 헤아리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3월 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1/3/9/42186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