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청년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나와 비교적 사이가 가까운 수련생 A, B가 잇따라 중공 요원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A 수련생은 이번에 악당의 ‘제로화’ 박해 대상이었다. 중공 요원은 집으로 찾아와 그에게 소위 ‘삼서(三書)’에 서명하라고 했다. 만약 서명하지 않으면 그는 납치당할 수도 있었다. 안전을 위해 A 수련생은 피했고 모든 수련생과 연락이 끊겼다.
B 수련생은 누군가의 신고로 진상 화폐가 나와 현지 파출소에서 그를 납치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사부님의 보호 아래 한동안 대치하다가 경찰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 두 가지 일은 나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수련의 엄숙함이 더욱 명백해졌고 어떤 은폐된 하나의 집착심도 시간이 길어지면 매우 큰 교란을 가져오고 심지어 자신에게 넘기 어려운 마난을 가져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1. 두려운 마음을 버리고 수련의 길을 확고히 하다
당시 A 수련생은 연락이 끊어지고, B 수련생은 여전히 중공 요원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주위의 수련 분위기가 갑자기 긴장됐다. 두 법공부 팀도 부득불 중단되었다. 나는 2000년에 태어난 청년 대법제자이며 진정으로 수련한 지는 지난해 초 중공 바이러스(우한 폐렴) 전염병이 발생한 시기였다. 평소에 밍후이왕에서 수련생이 괴롭힘을 당하고 박해당한 소식을 보았는데 지금은 나의 신변에서 발생했다.
법공부가 깊지 못한 나는 두려운 마음이 단번에 일어났다. 그 전에 복도에서 진상 자료를 배포할 때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두려운 마음이 비교적 적었는데, 지금 진상 자료를 배포할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앞뒤를 보면서 사람에게 발견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당시 정념이 강하지 못해 늘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했는데 모두 사부님의 보호 아래 평안했다.
집에 돌아온 후 매우 두려웠고 머릿속에는 밍후이왕에서 보도한 수련생이 박해당한 참혹한 정황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정말 두려운 마음은 일종 물질이며 확실히 일종 물질임을 느꼈다. 그것은 하나의 산처럼 나를 내리눌러 정말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린이집 교사다. 두려운 마음의 영향으로 수련상태가 좋지 않아 어린이들을 늘 책망하고 욕했고 짜증을 냈다. 법공부도 형식적이었으며 연공은 잡념이 많았고 머릿속에는 늘 ‘내가 만약 납치되면 어떻게, 어떻게 하겠다’라는 바르지 않은 염두가 나타났다. 또 수련 전 드라마에 빠졌는데 그 드라마 이야기가 휴대전화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각종 예능· 팔괘가 머릿속에 끊임없이 나타나 보라고 유혹하고 배척해도 안 되고 누르지도 못했다.
또 머릿속에 끊임없이 “드라마를 보렴! 일이 그렇게 힘 드는데 왜 자신에게 억지를 부리니? 수련하지 말고, 지금부터 아무런 구속도 당하지 말고 자유자재로 행동하고, 힘들게 연공을 하지 않으니 얼마나 좋니!”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계속 배척했지만, 효과가 미미했다. 머리가 흐리멍덩하고 무거우며 늘 동영상을 보는 것을 통제하지 못했고 보고 또 후회했다. 수련에 대해 확신이 없었고 수련이 어렵고 너무 힘들게 느껴졌다.
그때 집에서 사부님 법상 앞을 지날 때마다 늘 사부님을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머리를 수그리고 빨리 지나쳤다. 마치 일을 잘못한 것처럼 사부님이 나에게 실망할까 봐 두려웠다. 나는 떨어졌고 사악(邪恶)의 요소가 미친 듯이 아래로 나를 잡아당기는 것을 명확히 느꼈다. 한동안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일찍이 매우 흐릿한 장면이 있었는데, 마치 희미한 꿈속 같았다. 나는 사부님 신변의 동자였고 활발하고 익살스러웠다. 사부님은 매우 높고 크며 황색의 가사를 걸치고 있었으며 가부좌하고 계셨다. 나는 사부님 주변에서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힘들면 사부님의 발치에 엎드려 휴식했다. 때로는 장난을 치며 사부님의 가사를 만지기도 했다. 사부님께서는 자신의 아이를 보는 것처럼 줄곧 미소지으며 나를 보고 계셨고 아무런 말이 없으셨다. 이런 느낌은 너무 신성하고 너무 아름다웠다.
지금 나는 이 세상에 미혹되었다.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법을 떠나 지금 떨어져 속인이 되는 것이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이니? 이것이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이니? 사부님이 원하는 것이니?” 당시 이 문제에 직면하자 억눌린 마음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만약 나는 포기하면 정말 집이 없고 더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하며 사부님께서 정말 나에게 실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두려웠다. “아니, 나는 원하지 않아! 나는 정말 원하지 않아! 나는 수련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겠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불성이 나오면 시방세계(十方世界)를 진동한다.’ 누가 보든지 모두 그를 도와주려 하며, 조건 없이 그를 도와준다.”[1] “왜냐하면 수련하는 사람이 가장 진귀하기 때문이다. 그가 수련하려 하기에 내보내는 이 일념(一念)이 가장 진귀한 것이다.”[1]
나에게 이런 견정한 일념이 있어서인지 그때의 나는 정말 법을 얻은 초기의 그런 순결한 마음, 수승하고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단번에 사부님의 법이 생각났다. “어쨌든, 더 어려울지라도 사부가 당신에게 준 길을 반드시 걸어올 수 있다. (박수) 당신의 心性(씬씽)이 제고되어 올라오기만 하면 당신은 곤란을 박차고 지나올 수 있다.”[2]
나는 사부님께서 내가 정말 수련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보고 나를 포기하지 않고 격려해 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주왠선(主元神)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되도록 자신이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게 통제하고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공부를 했다. 천천히 정념이 회복되고 법리에 대해 차츰차츰 똑똑해졌다.
나는 일념을 내보냈다. 이 극단적인 관념과 두려운 마음은 내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나를 통제하려고 의도하는 것이며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박해를 배치하지 않으셨고 나는 박해를 받지 않는다! 나는 이런 사람 염두를 원치 않는다! 나는 그것을 소멸하겠다! 동시에 나는 자신에게 누락이 있기에 이런 위험한 경지에 빠진 것을 알았다. 나는 수련의 길을 확고히 하는 동시에 진지하게 안으로 찾기 시작했다.
2. 의지하는 마음 배후의 명·리·정을 정시하다
사부님께서는 “두 사람 사이에 모순이 발생했을 때 제삼자가 보게 되었다면, 제삼자도 ‘나 자신은 어디에 잘못이 있는가, 왜 나에게 보게 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3]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신변의 수련생이 소란을 당하는 것을 왜 내가 다 보았지? 나에게 문제가 없는가? 나는 자세히 자신의 집착심을 깊이 파보았다.
내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진정으로 수련하게 된 기회는 A 수련생이 입이 닳도록 나를 설득하고 사심 없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나는 늘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후에 그의 집이 법공부 장소로 되자 그의 도움으로 수확이 매우 컸다.
A 수련생은 20여 년을 수련한 노제자다. 나의 눈에는 그가 수련을 매우 잘하고 법에 대해 매우 견정하며 사람 됨됨이가 온화하고 선량했다. 내가 법을 얻은 초기 A 수련생은 늘 나의 수련상태에 신경을 쓰고 끊임없이 정진을 격려했다. 정말 자애로운 아버지가 딸에게 차례대로 잘 일깨워주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아버지는 성격이 좋지 않고 나와 매우 적게 시간을 보내며 심지어 늘 질책하고 욕한다. 그 때문에 A 수련생의 관심에 나는 더욱 친근함을 느끼고 마치 일종 어렸을 적에 받지 못한 ‘부친의 사랑’을 받는 것 같았다. 그 후 부지불식간에 나의 마음속 깊이 일종 매우 크게 의지하는 마음과 변이된 수련생에 대한 정이 생겼다.
A 수련생과 갑자기 연락되지 않자 나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사악이 아직도 그를 찾고 있는지, 만약 찾으면 그를 납치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두렵기도 하고 걱정이 되었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진지하게 자신을 자세히 보니 이 마음을 의식했지만 도리어 의지하는 마음을 정시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의지하는 마음의 배후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아래로 찾으니 일종 숭배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의 무엇을 숭배하는가? 그가 수련을 잘한 것을 숭배하고 정념이 강하고 법리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사부님에 대해 확고하고……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나는 문제가 있으면 늘 A 수련생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이런 일을 분명히 자신이 깨달을 수 있는지만 물어보고 그의 생각을 들어보려 했다. 나는 그가 수련을 잘하고 견식이 많고 그의 긍정적인 대답을 들어야 마음이 안정되었다.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만약 그가 내 생각을 부정하면 나는 자신이 깨달은 문제에 대해 동요하고 자신의 길을 걷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러면 사람을 배우고 법을 배우지 않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러면 위험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정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A 수련생이 수련을 잘한다는 것을 구실로, 그의 생각을 듣는다는 명의로 그를 숭배했다.
그러나 찾고 찾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고 이 마음의 근원을 찾지 못한 느낌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한 가지 일념이 생겼다. ‘그는 돈이 있고 좋은 직업이 있고 지식이 있고 교양이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고 사람들의 존중을 받는다. 먹고 입을 걱정이 없고 부럽다.’ 나는 즉시 그것을 잡았다. 뜻밖에 나는 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가정조건이 줄곧 좋지 않고 부모가 지식수준이 낮기에 어려서부터 자신이 출세하면 억압에서 벗어나 활개를 치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수련한 후 나는 차츰차츰 이 추구를 내려놓았다. 그 때문에 나는 줄곧 명리를 담담하게 보고 집착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만약 단지 당신의 표면만 개변되고, 본질은 개변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가짜다. 일정한 시기에 이르고, 관건적인 시기가 되면 그것이 또 반응되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개변하지 않으면 단지 덮어 감춘 일종 가상(假相)에 불과할 뿐이다. 반드시 본질적인 변화가 발생해야만 비로소 진정하게 자신을 개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수련은 자신을 책임져야 하며 당신은 진정하게 자신을 개변하고 당신의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당신이 집착하는 좋지 못한 것을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정말로 내려놓은 것이다.”[4]
원래 내가 집착하지 않는 것은 얻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것을 마음속에 깊이 내리눌러 그것을 억압한 것이지 제거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속의 이런 명리에 대한 추구를 다른 형식으로 경제가 비교적 좋은 A 수련생에게 의탁했다. 매번 그의 집에 법공부 하러 갈 때 고의로 옷을 근사하게 차려입었고 이렇게 해야 그 집의 ‘등급’에 맞는 것 같았다. 고생을 겪고 싶지 않았고 A 수련생의 가정환경이 좋다고 느꼈다. 수련은 본신이 고생을 해 업을 갚는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내가 어찌 안일을 추구하고 편안히 수련하려고 생각하지?
아래로 찾으니 또 색심이 있었다! 나는 수련하기 전에 드라마에 빠져 소위 ‘패도총재(霸道總裁-젊고 잘 생기고 부자인 남자 주인공을 가리키는 신조어)’의 이미지를 좋아했고 색심이 매우 중했다. 수련한 후 나는 이런 것을 금했고 드라마를 보지 않고 인기스타를 쫓지 않았으며 혼인에 대해 순리를 따르는 생각이기에 초연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TV에서 나오는 연극은 실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이것은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궁여지책이었다.
나는 줄곧 A 수련생을 아버지처럼 간주했기에 여러 번 이 색심을 에돌아 갈 수 있었고 감히 이 방면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깨달았다. 그의 이 형상은 그야말로 현실 버전의 ‘키 크고 돈 많고 잘생긴 남자’였다. 게다가 수련생의 신분이고 또한 그의 일가족은 모두 수련하며 또 정진하고 화목하고 부부는 손님처럼 존경하고 말투가 고상하고 기품이 범상치 않다. 어렸을 적에 나의 부모가 늘 싸우는 가정 분위기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이것은 내가 줄곧, 속인 때부터 지금까지 동경한 생활이다.
나는 법공부하고 교류한다는 이름으로 이 따스하고 아름다운 것을 누리고 있었다. 이것은 대법을 이용하는 마음이다! 이는 얼마나 더러운 마음인가! 의지하는 마음, 그 배후에 숭배가 있고 명리에 대한 추구가 있고 색심이 있고 안일한 마음이 있고 미래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동경도 있었다.
나는 놀라 깨어났다. 나의 이런 깊이 은폐된 마음, 깊이 파고들거나 마주하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이 사이에 A 수련생 공간장에 얼마나 좋지 않은 물질을 던졌을까? 또 그에게 얼마나 큰 압력을 가했을까? 이번에 그가 소란으로 집을 떠난 일에 나는 정말 책임이 없을까? 나의 책임이 그렇게 작단 말인가?!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왜 나는 연락이 끊긴 것을 두려워할까? 연락이 안 된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첫 느낌은 이후 나는 ‘정말 혼자 깨닫고 혼자 가야 하는가? 나는 또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누가 나를 의지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삽시에 마음이 정말 텅텅 빈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자신에게 반문했다. 수련 전에 나는 고독을 무서워했고 무리를 지어 떠들썩한 것을 좋아했다. 수련 후 이런 떠들썩한 것은 마치 연속된 것 같다. 단지 속인의 범위에서 수련인의 범위로 변했다. 소통하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고 이웃집에 가는 환경을 좋아하는데 일순간에 없어졌다.
한 수련생은 나의 장점은 마음을 열고 문제를 꺼내 소통하는 것이며 소통도 괜찮게 하고 착실히 수련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통 중에 얼마나 되는 과시심이 있는가. 지금 누가 또 나의 과장된 말을 듣겠는가? 나는 A 수련생을 걱정하는가? 아니면 내가 이런 환경을 잃는 것을 걱정하는가? 후자다. 이런 장소를 잃으면 소통할 사람이 없다. 나는 적막할 것이고 제고가 늦을 것이며 아마 게으르게 변할 가능성이 있다. 나는 이러고 싶지 않다. 나는 완전히 이런 시끌벅적한 환경을 정진하는 동력으로 삼았다. 법공부에 의지하지 않고 수련의 기점마저 기울었다! 수련, 수련, 닦고, 또 닦고 나는 도대체 무엇을 닦았는가? 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수련하는가?
3. 안으로 찾으니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
B 수련생을 말해보자. 우리는 법공부 장소를 세웠다. 그때 B 수련생은 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로 교란을 받고 수련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법을 읽는 속도가 비교적 빨랐고 때로는 졸기도 했다. B 수련생의 아들도 진지하게 법공부를 하지 않으며 늘 틀리게 읽고 심지어 대놓고 잠을 잔다. 늘 그가 읽을 차례가 되면 어느 페이지까지 읽었는지 모르고 건성으로 했다. 책을 다리에 올려놓고 벽에 기대고 산만했다. B 수련생의 강요에 배우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슬쩍 귀띔했지만, B 수련생의 아들은 고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나는 법공부 분위기와 효과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A 수련생의 법공부 장소는 누구나 매우 진지하고, 정신을 집중하고, 법공부는 거의 가부좌하고, 에너지가 매우 강했다. 그 때문에 나는 A 수련생 집에 가 법공부 하는 것을 더욱 좋아했다.
자신을 안으로 찾으니 나는 수련생에 대한 분별하는 마음을 찾았고 잠재의식 중에 B 수련생이 A 수련생보다 수련을 못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장점이 있으며 수련의 길이 다르다. 그뿐만 아니라 수련생의 진실한 수련 정황은 사부님께서만 아는데 나는 어찌 표면적인 상태만 보고 추측하는가?
분별하는 마음의 표현은 B 수련생과 소통할 때 나는 늘 나의 인식, 어떻게 졸리는 것을 돌파하고 어떻게 교란을 배척했는지 등등을 과장해 말했다. 그러나 A 수련생과 소통할 때 대부분 그의 말을 들었다. 또 한 점은 A 수련생은 지식수준이 높고 생각과 인식을 말하는 것이 비교적 깊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이런 분별하는 마음이 더욱 가중되었다.
현지 수련생 중에서 나는 이런 현상을 발견했다. 보기에 오랫동안 좀 정진하지 않는 수련생에 대해 어떤 수련생은 늘 그들에게 사정없이 ‘지도’하고 이것이 그녀의 제고를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하며 심지어 말투마저 무례하며 사람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다. 그러나 수련을 괜찮게 했다고 공인하는 일부 수련생에 대해서는 또 다른 태도이며 흔히 ‘강자가 약자를 깔보는’ 심리 상태를 가지고 있다.
B 수련생의 아들에 대해 나는 방법을 찾아 그가 법에서 인식하게 하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게 도와주지 않았다. 그가 나의 법공부를 교란하고 정력을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어떠한 이기적인 것인가! 이러한 마음을 품고 법공부하는 것이 좋은 효과가 있겠는가? 그 때문에 나는 이런 행동에 교란을 받고 법공부 할 때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늘 그가 또 자는지 보았다. 나의 뜻과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불편함을 느꼈다.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종래로 진지하게 찾아본 적이 없었고 다 타인을 보았다. 밖으로 구하고 상대방이 사부님을 존중하지 않고 법을 존중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종래로 자신을 찾지 않았고 이것이 나의 조급한 마음, 잘난체하는 마음, 타인을 깔보는 마음, 타인을 변하게 하려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 아닌가? 라고 찾지 않았다. 그가 산만해지고 보기에 사부님을 존중하지 않고 법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은데 나라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날이 추우면 법공부 하기 전에 때로는 물이 차다고 손을 씻지 않고 때로는 가부좌를 하지 않고 비뚤게 앉고 심지어 머리카락을 잡기도 하고 손도 발 위에 올리고(양말 신고) 다음 또 책을 들고 보았는데 나는 잘한 것이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은 그의 잘못을 왜 당신이 보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지 않는가? 그의 잘못이 왜 당신 마음속에서 그렇게 괴로운가? 그중에는 당신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닌가, 왜 그 일을 그리 크게 보는가? 여러 방면에서 무슨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모두 자신을 수련해야 하고, 자신을 봐야 한다.”[4]
이렇게 보니 문제는 정말 다른 사람에게 나타났는가? 법은 매일 배우지만 나는 시시각각 법을 생각하고 우리가 수련인인 것을 생각하고 법의 요구대로 하고 무조건 안으로 찾았는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내가 어찌 자신의 인식이 괜찮다고 여기고 B 수련생을 ‘훈수’했는가?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폭로되어 이것이 좋지 못한 마음임을 발견하고 좋지 못한 마음임을 분명히 알면 당신은 그것을 덮어 감추려 하지 말고 당신은 꼭 그것을 없애야 한다. 모순이 나타났을 때가 바로 내가 당신에게 그 마음이 나왔다고 알려주는 것이다.”[5] “그러나 수련하는 과정 중 자신의 의식은 명백해야 하는 것으로, 자신의 부족을 수련하여 없애고 자신의 좋지 않은 것을 억제하며 자신의 좋지 않은 것을 청리해야 하고 부단히 위로 향상하려는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수련하는 것이다.”[6]
나는 처음으로 교류문장을 쓰며 자신의 이 더러운 마음을 폭로하려 한다. 그것이 폭로하지 못하게 할수록 나는 더 써서 그것들이 우리 여기에 생존의 공간이 없게 하겠다. 나는 반드시 그것을 제거하겠다! 나는 사상이 많이 밝아지고 줄곧 답답한 마음속의 먹구름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A 수련생이 평안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집착을 찾았고 정념을 강화했다고 말했다. A 수련생을 보니 그런 도도한 느낌이 없어졌고 또 그런 이상한 정서도 없어졌다. 단지 그가 존경하는 수련생이라는 느낌이며 여러분처럼 모두 사부님의 제자라는 느낌이 있었다. 중공 불법 요원은 더는 B 수련생을 괴롭히지 않았다. B 수련생도 이번 소란을 통해 자신의 좋지 않은 상태를 조절하고 노력해 집착을 버렸다. 한바탕의 풍파는 그렇게 가라앉았다.
이번에 두 수련생이 수시로 악인에게 납치될 위험한 처지에서 자비로운 사부님께서는 ‘장계취계(將計就計)’[7]해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변하게 했으며 이 일을 이용해 제자의 심성을 제고하게 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나는 깨달았다. 오직 우리가 수련을 처음과 같이하는 마음으로, 사부님을 확고히 믿고 난상(亂象)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무조건 안으로 찾고 정체제고, 정체승화하고 사악이 빈틈을 탈 기회를 주지 않으면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주관하신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1]
수련이 매우 차하여 많은 집착심을 아직 버리지 못했다. 층차의 제한으로 법에서 깨닫지 못한 곳은 수련생이 자비로 바로잡기 바란다.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관점만을 대표할 뿐, 옳고 그름은 글쓴이 개인의 책임이므로 독자 스스로 헤아리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지설법3- 대뉴욕지역법회 설법’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미국동부법회설법’
[4]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미국서부법회설법’
[5]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캐나다법회설법’
[6]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지설법4- 2003년 애틀랜타법회 설법’
[7]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원문발표: 2021년 2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2/25/42133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