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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대법에서 주조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법연(法緣)

[밍후이왕] 나는 1997년에 법을 얻었다. 법을 얻었을 때 18살이 채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40대 초반이다. 대법을 실증하는 23년간 비록 잘 걷지 못했지만, 고생도 있고 즐거움도 있었다. 갖가지 난관을 넘고 시련도 있었지만,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에 무사히 걸어 지나왔다.

1. 법을 얻은 전후의 두 세상

나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병이 많았다. 허리 디스크, 맹장염, 혈압 저하 등 여러 가지 치료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었다. 햇볕을 쬐면 머리가 어지러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혈압이 낮았고 심하면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런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한 번에 30알 가까이 먹어야 했고, 이 병을 치료하기도 전에 약을 많이 먹어 위장이 손상되어 배가 자주 아팠다. 그래서 또 위염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병원에 다 갔는데, 그 결과 몇몇 병원의 의사들은 맹장염과 허리 디스크는 수술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에 나는 무섭고 놀라 5kg 넘게 빠졌다. 나는 다른 방법이 없어 소도(小道)의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엉망이 되었다.

1997년 여름,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친척이 나에게 “너는 대법을 배워라! 대법을 배우면 어떤 병도 다 좋아진다.”고 했다. 당시 나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시험 삼아 해보자! 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18살이었고 법공부 장소에 가 법공부했다. 아마 대법과 인연이 있는지 법공부 장소에 가 가부좌하자 마치 계란 껍질 속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몸의 병이 전부 사라졌다. 사부님은 나의 신체를 전부 정화해주셨고 나는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파룬따파(法輪大法)의 신기함을 목격했고, 대법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는 성대한 분위기도 목격했으며, 후에 또 대법이 먹칠당하고 박해, 탄압당한 것도 목격했다. 나는 반복적으로 파룬따파(法輪大法) 서적을 공부하며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가르침을 체험하고 깨달았다. 나는 대법의 요구대로 마음을 닦고 선(善)을 지향하고,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었고 더욱 좋은 사람이 되었다.

2.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

1999년 ‘7.20’ 중공의 장쩌민 집단은 파룬궁(法輪功)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좋은 공법이 무엇 때문에 이런 박해를 받는가? 하고 생각했고 반드시 베이징에 가 대법을 위해, 사부님을 위해 공평한 말을 하고 나의 체험으로 대법을 실증하겠다고 생각했다. 2000년 3월의 어느 날 한 수련생과 함께 차를 타고 베이징에 대법을 실증하러 갔다.

출발할 때 내 몸은 번개가 번쩍하는 것처럼 밝았다. 우리 둘은 베이징에 도착한 후 천안문 금수교(金水橋)에 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현수막을 펼치고 외쳤다.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 달라, 대법의 결백을 돌려 달라.” 외칠 때 신체는 다른 공간에 들어간 것 같았고 그 한순간에 빈 것 같았다. 2분도 채 되지 않아 사복 경찰이 달려와 우리를 바닥에 넘어뜨리고 현수막을 강제로 빼앗아갔다. 또 사복 경찰은 우리 두 사람을 경찰차에 태워 여관에 끌고 갔는데 안에는 많은 수련생이 있었다. 하루가 지난 후 현지 공안국에서 사람을 파견해 우리를 현지로 데려갔다. 구치소가 만원이었기에 나와 수련생을 산아제한 사무실로 끌고 가 감금했다. 내가 단식으로 항의한 이틀 후, 그들은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해 나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2000년 7월, 우리 6명은 다시 베이징에 가 법을 실증하려 했다. 그때는 어느 지역이나 미친 듯이 박해했기에 각 지역은 전부 계엄이었다. 특히 역 앞은 모두 지켰고 누가 베이징에 가면 즉시 납치했다. 우리 6명은 도보로 베이징에 가려고 준비했다. 지도에서 노정을 보면 베이징까지 약 1500여 리 떨어져 있었다. 길이 먼 것이 두렵지 않았고 밥과 옷을 갖고 출발했다. 우리는 길에서 ‘홍음(洪吟)’을 외웠고 머리가 한가할 틈이 없었다.

첫날 걸을 때는 발이 괜찮아서 70, 80리를 걸었다. 저녁이 되자 발이 아프기 시작했고 이튿날 괜찮았는데, 다시 걷자 발에 물집이 생겨 걸으면 아팠다. 우리는 멈춰 물집을 터뜨렸다. 그러자 살이 아프고 발도 아파 걷을 수 없어 속도가 늦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견지하며 걸었다. 저녁에도 줄곧 걸었고 정말 자고 싶으면 도로변에서 자면서 피로를 풀었다. 특히 무더운 여름에는 날이 답답하고 더웠다. 저녁에는 길가에 모기가 특히 많았는데, 발은 아프고 또 잠을 잘 자지 못해 늘 가고 싶지 않았다. 매번 이런 정황이 나타나면 우리는 사부님께서 ‘전법륜(轉法輪)’에서 말씀하신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忍能忍, 難行能行).’[1]가 생각났고 계속 걸어갔다. 걷고 걷다가 발에 물집이 또 생기면 터뜨리고 다시 걸었다. 좀 지나면 또 물집이 생겨 터뜨리고 걸었는데 상처 난 부분이 갈라졌다. 이렇게 물집이 생기면 터뜨리고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러다가 7, 8일 후 물집이 더는 생기지 않았다.

날씨가 좋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고 땀에 젖은 옷은 갈아입고 강물이나 도랑을 만나면 씻었다. 길을 재촉하기 위해 빨래를 바닥에서 말리지 못하고 머리나 어깨에 올려놓고 말렸다. 그러나 우리의 체력은 하루하루 못해졌고 간혹 바닥에 앉으면 온몸이 아파 일어날 수 없었으며 두 다리마저 당기듯이 아팠다. 당시 수련생은 너무 아파 앉으면 일어나지 못해, 누가 힘겹게 일어나면 다른 수련생을 잡아당겼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전부 당겨서 일어났다. 이런 정황은 3일 되는 날부터 7일 되는 날까지 매일 이러했다. 우리는 여전히 견지해 걸었다. 낮에 아스팔트 위를 걸으면 햇볕이 내리쬐어 뜨끈뜨끈했고 땅바닥의 열기가 아주 높았다. 위로는 햇볕이 내리쬐고 아래로는 땅이 지지고 있어 마치 난로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이때 사람마음이 나왔고 고생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나와 너무 힘든 것을 느꼈다.

우리가 3, 4일 걸었을 때 지니고 갔던 음식이 떨어져 걷다가 음식 파는 곳이 있으면 좀 샀다. 때로는 하루 내내 마을 하나 만나지 못할 때도 있었으며 날씨가 더워 물을 많이 마셨다. 물도 도랑이나 작은 강을 만나면 병에 담았다. 병에 담은 물을 내려놓으면 위의 2/3는 물이고 아래의 1/3은 흙이어도 방법이 없어 마셔야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상황은 더욱 안 좋았다. 비닐봉투 파는 사람을 만나 통 같은 봉투를 사 낮에는 머리에 써 비를 막고 밤에 모기가 많으면 비닐봉투 속에서 잤다. 자는 것도 어려웠는데 길가에서 자동차가 소리를 내며 지나갔고 땅에서 자다가 흙덩이가 배겨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어느 날 길가에서 밭일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에게 어디로 가세요? 라고 물었다. 우리는 “베이징에 대법을 실증하러 갑니다.”라고 했다. 그들은 “아직도 차를 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라고 했다. 우리는 다만 빙그레 웃었다.

7일이 되기 전에 내 신이 닳아 떨어져 신발을 샀다. 우리의 길은 하루하루 험난했다. 발은 날마다 아프고 두 다리까지 아파 걸을 때마다 아팠다. 우리 6명은 모두 아파서 앉으면 일어나지 못했다. 서로 쳐다보니 모두 갈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모두 맥이 빠졌고, 그다음 며칠 동안은 쉬는 시간이 더욱 길어졌으며, 앉아 있는 시간이 짧으면 아파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고, 말하는 것도 힘이 없었다. 우리는 또 서로 격려했다. 사부님은 시시각각 우리 신변에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우리는 이 대법을 얻기 위해 온 것이며 역사상에서 무수한 고생을 겪었으며 오늘 이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정념으로 일어났다.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는 또 며칠 동안 꿋꿋하게 걸었다.

11, 12일 견지했을 때 우리는 더 아파도 베이징에 가는 것을 견지하자고 인식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응원하면서 마음속에 대법을 담고 사부님의 격려에 보름 되는 날 베이징에 도착했다. 우리는 마침내 견지했고 마침내 대법을 실증했으며 격동했다!

우리는 먼저 중난하이에 갔다. 한 할아버지가 나에게 “당신은 대법을 배우는 사람이죠. 여기에 법을 실증하려 왔죠?”라고 했다. 나는 “어떻게 아세요?”라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옷차림 보고 알았어요. 당신들은 가지 마세요. 방금 여러 차로 실어갔어요. 빨리 가세요! 가도 못 들어가며 들어가도 납치당해요.”라고 했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할아버지를 떠났다. 우리는 또 민원실(信訪辦)에 갔지만, 그 결과 하루 내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우리는 현지에 전화해 베이징으로 온 수련생들이 모두 어디에 가 법을 실증했는지 물어봤다. 그들은 “천안문과 중난하이에 간 수련생들은 모두 납치되었으니 당신들은 빨리 편지를 써서 해외로 보내 외국에 있는 사람들이 진상을 알고, 여기에서 받는 박해를 외국인들이 알고, 우리를 도와 반(反) 박해하게 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즉시 종이와 펜을 사고 또 복사지를 샀다. 한 부 쓰면 여러 부를 복사해 우리는 천안문 부근에서 많은 외국인에게 배포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3, 4일 배포했고 보이는 외국인에게 모두 배포했다. 마지막에 사부님의 보호하에 순조롭게 집으로 돌아왔다.

2002년 9월 좌우에 나와 두 수련생은 또 천안문에 가 법을 실증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순조롭게 베이징에 도착했다. 다음 날 오전 베이징 천안문에 도착해 보니 금수교에 사람이 제일 많아 현수막을 펼치고 큰소리로 외쳤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 달라.” 우리는 외친 후 되돌아가다가 사복경찰에게 납치되었다. 우리는 천안문 동쪽 한 곳에 감금되었고 후에 길 한가운데 버려졌다.

3. 정념으로 반(反) 박해하며 정법수련의 길을 걷다

2001년 여름, 나와 한 수련생은 임대한 집에 있었다. 20여 명의 경찰이 담장을 넘어 들어와 우리 두 사람을 파출소에 납치해 나를 철제의자에 강제로 매어 놓았다. 그들은 나를 협박하며 “솔직히 당신들은 몇 명이 같이 있었나요?”라고 물었다. 그들이 묻자마자 나의 호출기가 울렸다. 나는 수련생이 연락 온 것을 알고 조급해 마음속으로 ‘사부님, 호출기 휴대폰 번호를 빨리 없어지게 해주세요. 절대로 수련생이 박해를 당하면 안 됩니다.’라고 생각했다. 내가 내보낸 이 일념이 타인을 위한 것이기에 당시 그 한 층 법의 요구에 부합되어 사부님은 나를 도와 휴대폰 번호가 즉시 없어지게 했다. 경찰은 화가 나 호출기를 들고 보더니 나에게 “방금 온 전화번호가 왜 없어졌나요? 당신은 뭐라고 중얼거렸어요?”라고 했다. 경찰은 나를 보며 욕을 퍼붓더니 화가 나 말을 하지 못했다. 이어 나를 구치소에 보냈다.

구치소에 들어가자 한 교도관이 나에게 서명하라고 했다. 나는 서명하지 않았다. 교도관은 가죽 채찍을 들고 나의 등을 힘껏 후려쳤다. 여름이어서 나는 얇은 옷을 입었다. 당시 나는 ‘사악(邪惡)의 박해를 감당하는 것을 거절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채찍이 그의 몸을 때리라고 생각했다. 이어 등 뒤에 한 줄기 열기를 느꼈다.

당시 구치소에는 어떤 사람도 다 있었다. 그녀들은 나에게 “좀 세게 때렸지요? 가죽 채찍 소리가 왜 이렇게 울리지?”라고 했다. 그녀들은 내 등 뒤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았다. 나는 사부님이 또 한 번 나를 도와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가죽 채찍을 맞아 등이 피부가 찢기고 터졌을 것이다. 감동의 눈물이 나의 마음에 흘러들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이튿날 경찰은 나를 다른 방으로 불렀다. 그들은 사오(邪悟)한 사람 10여 명을 불러 교대로 나를 전향하게 했다. 그들은 외지의 사오한 사람마저 찾아왔다. 또 매일 나를 자지 못하게 하고 나에게 밥을 주지 않고 철제의자에 묶어놓고 온종일 괴롭혔다. 경찰은 내가 전향되었는지 늘 보러 와 이번에 당신을 전향 못 하면 노교소에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후에 며칠간 현지에서 10여 명의 수련생을 납치했고 수련생 11명을 노교소에 보냈다. 그들은 나와 다른 남자 수련생을 남겨 전향하려 했으며, 우리 두 사람을 전향한 후 다른 사람을 전향하려고 했다. 경찰은 노동교화 결정서를 내 앞에 놓으며 “당신의 노동교화 결정서가 이미 내려왔고 3년이라고 쓴 것을 보세요. 기다리세요! 당신이 전향하지 않으면 노교소에 보내겠어요.”라고 했다. “나는 볼 필요가 없어요. 그곳은 내가 갈 곳이 아니고 당신들이 갈 곳이에요.”라고 했다.

구치소에서 그들은 나를 전향하려고 끊임없이 사람을 교대했지만 3일이 되도록 나를 전향 못 시킬 줄을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은 약이 바싹 올라 나를 세뇌반에 끌고 갔다. 세뇌반에서 20여 명의 사오한 자들이 교대로 나에게 강변과 사설을 주입했다. 하루도 되지 않아 나는 사부님께 말했다. ‘사부님, 제자는 이러다 감당하지 못하겠어요. 그들이 나를 전향 못 하게 나가겠어요.’ 내가 이렇게 생각한 후 그녀들 중 한 사람이 “오늘 머리를 좀 쉬게 해줄게요. 우리말이 맞는지 생각해 보세요.”라고 했다. 그녀들은 또 “여기 유리창을 닦으세요.”라고 했다. 나는 “좋아요.”라고 말했다. 창문을 닦을 때 나는 창문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나가게 배치한 거로 생각했다. 나는 ‘당신들이 빨리 여기를 떠나야 내가 나가지’라고 생각했다. 이어 그들은 마당으로 갔다. 오후 5시 좌우에 나는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당시 마당 입구에는 대문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사부님께 나를 보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머리를 들고 대범하게 밖으로 나와 감옥을 벗어났다.

감옥을 벗어나자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고 한동안 걸은 후 지쳤다. 이미 나흘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기에 길가에 앉아 있었다. 길가에는 상가가 있었고 상가 앞에 시멘트 통을 조금 높게 쌓은 것이 있었다. 이때 날이 어두웠고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나를 찾아다녔다. 나는 시멘트 통 뒤에 숨어 사부님께 그들이 나를 보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지나갔다. 나는 사존을 견정히 믿고 대법을 견정히 믿었다. 한 차례 박해가 사부님의 보호로 해체되었다. 나는 온 밤 앉아 있다가 날이 밝자 부근에 있는 수련생 집에 갔다.

2002년 어느 날 저녁 나는 수련생 3명과 함께 방에서 현수막을 만들고 있었다. 갑자기 20여 명의 경찰이 난입했다. 나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라고 높이 외쳤다. 경찰은 나의 입을 때렸고 경찰 2명이 나를 들어 차에 던졌다. 이때 나는 마치 솜 위에 떨어진 것 같았다. 경찰은 우리 4명을 강제로 분국에 끌고 가 철제의자에 앉혀놓고 수갑을 채워놓았다. 나는 자신을 찾았다. ‘무슨 마음이 박해를 조성했는가, 일을 하는 마음이다.’ 그때 수련생들은 구도 중생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기에 요구하는 현수막이 많아 법을 실증하는 것을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길어지자 법공부하는 시간이 없고 사악이 빈틈을 탔다. 그러나 나는 기왕에 왔으니 정념으로 대하고 박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나는 철제의자에 밤새 수갑을 찬 채 앉아있었다.

이튿날 경찰은 또 우리를 현지 구치소로 끌고 갔다. 구치소 경찰은 나를 가리키며 “이 사람은 심문할 필요 없이 그냥 처리하면 돼. 어차피 그녀의 입에서 한마디도 들을 수 없어.”라고 했다.

이어 나를 철제의자에 수갑을 채워 놓았다. 갓 바뀐 대대장이 나를 보고 날뛰었다. “나는 이전에 형사대 경찰이었으며 얼마나 되는 사람이 내 손에 죽었는지 몰라. 당신은 젊은데 비협조적이면 나에게서 벗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납치되면서부터 나는 단식하기 시작했다. 이튿날 대대장은 병원 간호사에게 나에게 억지로 음식물 주입을 하게 했다. 나는 협조하지 않았다. 다른 한 경찰이 잔인하게 나의 가슴을 한 대 때리자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20대가 넘은 2명의 청년이 나에게 수갑을 채우고 강제로 쓰러뜨린 후 머리카락을 밟고 간호사에게 억지로 음식물을 주입하게 했다. 나는 사부님께 빌었다. ‘나는 이렇게 더러운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들이 음식물 주입을 못 하게 해주세요. 얼마 들어가면 그만큼 나오게 해주세요. 사부님이 나의 주관자가 되어주세요.’ 그리하여 뿜어져 나왔다. 의사는 “강제음식물 주입을 못했어요. 다 나왔어요.”라고 했다. 매일 한 번 음식물을 주입하면 나는 이렇게 정념정행 했다. 연이어 3일간 주입했다. 대대장은 늘 내가 타협했는지 보러 왔다가 타협하지 않은 것을 보고 화가 나 악인에게 나를 때리게 했다. 그들은 나를 차가운 땅바닥으로 끌고 가서 얼렸다. 때로는 쇠고리 위에 수갑을 채워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또 다른 경찰은 “당신은 뭘 잘 먹나요, 내가 슈퍼마켓에 가서 사줄게요.”라고 좋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고 집에 돌아가 집밥을 먹겠어요.”라고 했다. 잘 대해줘도 말을 듣지 않자 이어 무력을 썼다. 정말 강온양책을 겸비한 사악함의 극치였다. 그들은 저녁에 방송국 사람들을 불러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내 얼굴을 녹화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그들에게 협조하지 않았고 속으로 ‘카메라가 작동이 안 돼 찍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대대장은 나에게 3번이나 음식물을 주입해도 소용이 없자 나를 병원에 데려가 돼지기름을 주입하려 했다. 나는 의사가 1.2kg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또 사부님께 ‘이런 더러운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들이 주입하지 못하게 해주세요.’라고 간청했다. 여전히 들어가는 만큼 나오고 즉시 전부 토했고 괴로워 눈물이 나왔다. 의사는 “안 되겠다.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또 나를 구치소에 다시 끌고 왔다. 구치소에 돌아온 후 경찰은 또 사오한 자에게 나를 ‘전향’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괴롭히고 자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10일째 되던 날 나는 ‘사부님께 더는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 병업 가상이 나타나게 해주세요.’라고 간청했다. 당시 이렇게 생각하자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곧 온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경찰은 구급차를 불러 나를 병원에 데려가 검사했다. 의사는 “오랫동안 먹지 못해 혈압이 90이 안 된다”고 했다. 그들은 나를 강제로 병원에서 치료받게 하고 경찰 2명을 배치해 지키게 하고 링거 주사를 놓았다. 나는 맞지 않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내 손을 누르며 의사에게 주사를 놓게 했다. 나는 ‘내 신체는 내가 주관하며 바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손목을 30분 가까이 찔러 온통 주사바늘 자국이었지만 주사를 놓지 못했다. 의사는 이어 “장기적으로 먹고 마시지 않아 탈수상태가 나타나 주사바늘이 들어가지 않으며 혈관도 찾지 못하겠어요”라고 했다. 대대장은 여전히 나를 향해 큰소리로 떠벌렸다. 이번에 “신념을 포기하지 않으면 화장해 버리겠다. 당신은 나갈 생각을 하지 말라.” 그는 화가 나서 나의 양손을 뒤로해 침대 난간에 수갑을 채웠다.

의사는 경찰에게서 내가 12일 동안 먹고 마시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병원에서 오랫동안 있어도 이런 일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의사는 생명이 위험할까 봐 두려워 경찰에게 “우리는 여기에 그녀를 남겨둘 수 없어요. 다른 곳에 가세요!”라고 했다. 그는 경찰에게 계약서에 서명하라고 했고 병원은 책임을 감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당시 경찰들도 생명 위험이 나타나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 나를 감금하고 박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나는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하에 또 한 번 위험에서 벗어나 12일 후 집으로 돌아왔다.

4. 자료점을 건립하고 심성을 닦다

2000년 베이징에서 돌아온 후 현지 두 수련생이 나를 찾아와 “지금 밍후이 교류문장을 보았는데 우리 중국 제자는 민중에게 진상을 똑똑히 알려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때 각 지역에는 기본적으로 자료를 만드는 곳이 없었고 나는 자료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출근했기에 사직했다. 임대한 집은 들락날락하면 안 되고 반드시 안전에 주의해야 하며 집은 또 방음이 잘 돼야 했다.

우리 몇몇 수련생은 협조하면서 만들었는데, 일반적인 것은 모두 할 줄 알았다. 그때는 필요한 모든 것은 할 수 있었는데, 주로 사람이 필요했고 또 공급할 곳이 많았다. 집을 찾아야 하고 또 소모품을 사야 하며 또 자료를 출력해야 했다. 갓 시작했기에 모르는 것은 속인에게서 배워야 했다. 어느 물건은 어떻게 쓰고 어디에 설치하는지 알아야 했고 자료를 만들어 낸 후 안전히 보내야 했는데, 밤낮 진상자료를 만들어 법공부 시간이 매우 적었다. 당시 한 지역에 몇 사람만 일할 수 있었다.

자료점 생활은 간고했다. 때로는 만두와 짠지를 먹었고 잘 먹을 때는 볶음요리를 만들었다. 만두를 사면 며칠 먹을 것을 샀다. 때로는 만두가 시큼하고 곰팡이가 나도 먹어야 했으며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 옷은 모두 수련생이 가져온 낡은 옷을 입었고 오랫동안 새 옷을 산 적이 없었다. 때로는 집안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 놀라 심장이 두근거렸고 두려운 마음이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때로는 억지로 ‘나의 모든 것은 사부님이 주신 것이고 이것은 사부님이 하라고 하신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면 두려운 마음이 없어졌다.

때로는 밖에서 일을 처리하느라 바빠 식사를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정오에 간이식당에서 소를 넣은 만두를 먹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급히 먹으려고 앉자 식사를 하던 한 남자가 물주전자를 들고 일어나더니 나에게 물을 부어주었다. 당시 나는 놀랐다. ‘모르는 사람이 왜 나에게 물을 붓지’ 아마 그는 내가 밥을 먹은 후 빨리 가는 것을 아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세 가지 일을 잘하는 데 마음을 쓰면 어떤 일도 초상적이며 사부님께서 나를 격려하시는 거로 생각했다. 때로는 너무 바쁠 때는 이틀에 한 번 식사했다.

또 한 번은 자료점에서 나는 두 수련생에게 밖에서 일을 보겠으니 안으로 문을 잘 잠그라고 했다. 이런 문은 반드시 안으로 잠가야 하기 때문이다. 일을 마친 후 나는 돌아와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렸는데 그들은 안에서 일하느라 듣지 못했다. 나는 문 앞에서 거의 반 시간 서 있었다. 그러나 안에서는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지? 나는 들어가야지, 밖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자 문이 자동으로 열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방안의 두 수련생은 놀라 나를 보고 화를 냈다. “왜 문을 두드리지 않고 벽을 넘어 들어왔어요?” 나는 “문을 두드려도 당신들은 듣지 못하고 내가 들어가겠다고 생각하니 문이 열렸어요”라고 했다. 두 사람이 열쇠를 보니 정말 열렸다. 그들은 사부님이 나를 도와 문을 열어준 것을 알고 화를 풀었다.

후에 경문을 출력할 줄 아는 수련생이 납치되었다. 신경문을 출력해야 하는데 나는 해본 적이 없어 컴퓨터를 아는 수련생을 두 번이나 찾아갔지만 찾지 못했다. 모두 사부님의 경문을 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지? 나는 사부님께 ‘사부님, 도와주세요.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겠으니 사부님께서 나의 머리를 지휘해 출력하게 해주세요.’라고 간청했다. 결과 아주 빨리 사부님의 경문을 출력했다. 나는 감동했고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한 번은 한 수련생과 함께 자료를 배송하러 가다가 검문소까지 갔다. 그날은 날씨가 좋지 않아 먼 곳이 잘 보이지 않았고 검문소에 도착하자 멍해졌다. 그곳에는 서너 명의 경찰이 서 있었고, 경찰차가 멈춰 있었으며, 난간 하나가 가로막고 있었는데, 그 위에 주차검사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사부님께 ‘지금 내 머리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게 하고 우리가 안전히 지나가게 해주세요.’라고 간청했다. 결과 정말 이러했으며 또 우리 차를 검사하지 않았다. 우리는 목적지에 순조롭게 도착했다.

자료점에서 장기적으로 법공부하지 않고, 또한 할 일이 많고, 게다가 집의 수련생이 의지하는 마음이 중해, 완제품이 필요하면 스스로 하지 않고, 밖의 몇몇 수련생이 공급하는데 의지했는데 시간이 길어지자 사악이 빈틈을 탔다. 2008년 경찰이 임대한 우리 자료점까지 미행했다. 두 수련생은 자료를 배송하러 갔다. 경찰이 문을 두드리자 나와 수련생은 경찰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과단성 있게 담장에 오른 후 이웃집으로 뛰어내렸다. 이웃집에서 나오면 반드시 마당을 지나야 했다. 그들은 사람이 들어갈까 봐 담벽에 삼각철을 빙 둘러 설치했다. 우리는 다른 방법이 없어 올라간 후 다시 뛰어내리고 다음 다시 맞은편에서 다시 뛰어내려야만 나갈 수 있었다. 다른 수련생이 연세가 있었기에 나는 그녀가 먼저 올라가게 밑에서 밀어 올렸다. 그러면 삼각철에 살짝 찔리고 그녀는 뛰어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담 벽을 올라가야 하기에 힘이 들었다. 손으로 위를 눌러 올라가야 하기에 누르면 피가 났다. 담장에 오르자 손, 팔, 다리가 삼각철에 찔려 피가 났다. 팔뚝에 살점이 긁히고 다리가 찔려 바지에 큰 구멍이 세 개 뚫렸고 피가 아래로 흘렀다. 다시 한번 더 뛰어내리면 길목에 도착한다. 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몸에 전부 피인데 우리가 큰길로 가면 사람이 보고 놀란다. 우리 두 사람은 옥수수밭에 도착했다. 옥수수밭에 들어가니 땅에 여름옷이 있었다. 나는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다. 아니면 어떻게 새 옷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옥수수밭에 좀 앉아 있다가 계속 걸었다. 슬리퍼를 신었기에 신이 어디서 없어졌는지 맨발로 밀 그루터기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기계로 밀을 베서 뿌리를 남겨둔 것인데 한동안 밟아도 발이 조금도 아프지 않았고 찔리지도 않았으며 신발을 신은 것과 같았다. 우리는 아주 빨리 밀밭을 벗어나 수련생 집에 도착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한 수련생과 접촉했다. 그녀는 줄곧 미행당했지만 나는 몰랐다. 그녀와 만난 후 나는 공공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한 남자가 신문을 들고 계속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어느 버스에 오르면 그도 따라 오르고 내가 세 번째 버스를 갈아타려고 오르자 그는 또 따라 올랐다. 나는 그가 나를 미행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 생명은 정말 가련하다. 당신은 절대로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말라.’고 생각했다. 나는 마음이 환해졌고 모든 것을 억제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이 남자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사부님께서 또 한 번 나를 보호하신 것을 알았다.

대형 자료점은 사고가 너무 잦았다. 출입이 명확히 눈에 띄고 인원도 많아 출입하는 것이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게다가 요구하는 자료의 양이 갈수록 많아 시간이 길어지면 일이 생긴다. 일이 생긴 후 재건해야 하며 재건한 후 안정되고 질서 있게 잘 안배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기에 정말 매우 어렵다. 사부님은 너무 자비하다. 바로 이때 밍후이왕은 작은 자료점이 도처에 꽃을 피우는 것에 대해 교류했다.

소형 자료점을 만드는 수련생은 보통 컴퓨터와 프린터를 사용할 줄 모르고 인터넷을 접속하는 것은 몰라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그때는 50세가 넘은 수련생이 많았다. 나는 필요한 물건을 사놓고 먼저 그들에게 자료를 출력하는 것을 배우게 했다. 어떤 수련생은 1, 2시간이면 배우지만 어떤 수련생은 한 달, 두 달이 걸려야 배웠다. 늦게 배우는 사람을 보면 나는 때로는 급한 마음이 나왔다. 또 결과를 구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늦게 배우는 수련생도 마음이 급해 왜 아직도 모르지? 하고 안으로 자신을 찾으면 매우 빨리 배웠다.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은 사람마다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며 어떤 집에는 초고속 인터넷이 있고 어떤 집은 없으며 대부분 인터넷을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새로운 소책자가 나오면 가서 그들의 컴퓨터에 복사해주어야 했다.

배운 후 프린터가 늘 고장 나 수리해주어야 했다. 프린터의 모델은 끊임없이 바뀌었고 수리를 조금 할 줄 알면 또 다른 모델로 바뀐다. 시간이 길어지자 수련생은 나와 많이 접촉하기에 문제가 생기면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작은 고장은 수리할 수 있는데 크게 고장 나면 수리를 못 한다. 하지만 어떤 프린터는 본인의 심성에 문제가 나타난 고장이다. 때로는 안으로 찾으면 사부님은 나를 도와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어떤 수련생이 나에게 프린터를 수리해달라고 하자 건드리지 않았는데 정상이 되었다. 어떤 프린터는 덮개를 열자 움직이더니 정상이 되었다. 수련생이 수리한 부분을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수리하지 않고 단지 건드려 봤는데 좋아졌다고 말했다. 어떤 수련생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그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두 자비로운 사부님이 하신 거로 생각했다.

한 번은 한 수련생이 나에게 프린터를 수리해달라고 했다. 두 기어가 시계방향으로 회전하는데 지금 두 개가 맞붙어서 돌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당신이 보세요. 당신이 누구와 모순이 있어 대치하고 있는데 심성에서 찾으세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놀라더니 줄곧 어머니와의 관(關)을 넘지 못했다고 말하고 보니 프린터를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정상이 되었다.

또 한 번은 수련생의 프린터가 고장 나 저녁에 갔다. 한 가지 부속품을 해체해야 했는데 해체한 후 다시 설치하려고 하니 안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시 한번 설치했는데 여전히 안 되었다. 나는 ‘어떻게 하지? 사부님께 간청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큰 손 하나가 나의 손을 당겨 누르자 설치된 것을 느꼈다. 수련생은 “조금 전 손 하나가 당신을 도와 설치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네. 사부님이세요.”라고 했다. 사부님,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모든 것은 사부님이 하시며 우리는 단지 행동하고 말을 할 뿐이다.

5. 여러 가지 형식으로 사람을 구하다

나는 한 여 수련생과 함께 늘 향진(鄉鎮)에 가 진상자료를 배포했고 되도록 마을마다 빠뜨리지 않으려고 했다. 아침에 차를 타고 마을에 가 보통 300부 좌우를 배포한다. 저녁에는 스티커를 붙이거나 진상 현수막을 건다. 배포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현지 파출소 경찰이 “위에서 자료를 배포하러 두 사람이 오는데 그녀들을 찾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먼 곳에 가 배포할 때 우리는 한 수련생이 우리 두 사람을 태우게 하고 배포했다. 한 번은 우리는 큰 봉투를 갖고 다 배포하고 돌아왔을 때 수련생의 아내가 “이 오토바이 체인이 끊어졌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왔나요?”라고 물었다. 수련생이 다가가 보니 정말 체인이 끊어졌다. 자비로운 사부님이 보호하셔서 우리가 돌아온 것이다! 체인이 끊어지면 아예 가지 못하는데, 특히 우리 두 사람을 태우고 가지 못한다. 대법은 너무 초상적이고 사부님은 너무 자비롭다. 우리가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기만 하면 사부님께서는 시시각각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2016년 좌우, 나는 지방에 출근했다. 낮에 시간이 있었기에 대낮에 30여 개 마을에 한 차례 진상자료를 배포했다. 어느 날 내가 간 적이 있는 마을에 진상자료를 배포할 때 한 할머니를 만났다. 나는 그녀에게 진상을 알리고 소책자 한 부를 주었다. 그녀는 “당신은 나를 구하라고 신이 파견한 사람이에요.”라고 했다. 나는 “네. 우리 사부님이 당신을 구하라고 하셨어요.”라고 했다. 말이 끝난 후 나는 다른 곳에 배포하러 갔다. 할머니는 줄곧 내가 떠나는 것을 눈으로 배웅했다.

한 번은 수련생과 함께 진상 스티커를 붙였다. 붙이고 보니 감시 카메라 밑에다 붙였다. 당시 몰랐으며 다 붙이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명확히 보이는 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는 두려운 마음과 감시 카메라에 대한 문제가 없었기에 어떤 위험이 발생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 것이다.

23년간의 수련의 길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나는 사부님께 적지 않게 걱정을 끼쳤다. 사부님은 나를 위해 너무 많이 지불하셨다. 자신이 걸은 매 일보는 모두 법이 준 지혜이며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법의 점오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련 중에 이미 가장 어려운 데에서 걸어 지나왔다. 최후의 길을 잘 걸어야 하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소중히 해야 한다! 쉽지 않다. 당신들은 걸어 지나왔다. 이것은 역사상 유례없는 이런 마난에서 걸어 지나온 것이다. 당신들은 반드시 소중히 해야 한다.”[2] 사부님은 설법 중에서 여러 번 “소중히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원고를 쓸 때 자신이 걸어온 수련의 길을 돌이켜 보니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소중히 해야 한다.”라고 한 뜻과 무게를 더욱 느꼈다. 정법의 길이 아직도 얼마나 간고하고 험난해도 나는 반드시 확고히 사부님을 따라 끝까지 갈 것이다.

편폭의 한정으로 이만큼 쓰겠다. 법에 있지 않은 곳은 수련생이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법해’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8-2008년 뉴욕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1년 2월 1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2/13/4187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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