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랴오닝 대법제자 샤오치
[밍후이왕]
1. 현수막을 공안국 대문에 걸다
1999년 7.20 중공이 파룬궁 박해를 발동한 후, 한번은 유랑생활을 하던 외지 수련생이 현수막 몇 개를 가져와 저에게 하나를 주었습니다. 저는 이 현수막을 가장 눈에 띄는 곳에 걸어, 사악을 두렵게 하는 작용을 일으키게 하고 싶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공안국 대문에 이 현수막을 거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99년 마지막 날의 아침, 그날은 몹시 추웠고 눈도 내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깊은 잠 속에 있었지만 저는 쌓인 눈을 밟으며 현수막을 공안국 대문에 걸었습니다. 걸고 나니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고, 눈이 내려 발자국이 남을까 걱정되어 급히 길을 돌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제가 처음 진상을 전파한 일입니다.
그 당시 수련생들은 막연하게 대법이 좋다는 것만 알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몰랐습니다. 저는 색종이, 붓 펜을 사 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써서 양면테이프를 붙여 수련생에게 주었습니다. 그러한 여건과 환경에서 수련생들은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 말하며, 사람들에게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2000년 7.20, 저는 수련생과 함께 스프레이 페인트로 글을 써서 대법을 알리자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장소를 몇 군데 봐 놓고 다음 날 새벽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수련생 집에 묵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2시 반에 우리는 일어났습니다. 준비하고 출발하려 할 때, 문 앞에 누군가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났고, 30분 정도가 지나도 사람이 왔다 갔다 하여 더 기다리면 늦어져 더는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대문을 나설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수련생이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 위험을 최소화해야 한다.’ 저는 들고나온 스프레이 페인트를 모두 달라고 하여 제가 들었습니다. 수련생은 스프레이 페인트를 저에게 주었고,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가는 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먼저 미리 봐두었던 벽면에 ‘파룬따파하오, 파룬따파는 정법이다’ 글자를 뿌렸고, 동쪽을 향한 벽에는 붉은색으로 ‘파룬따파하오’를 정갈하게 칠했습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흰색으로 다시 썼는데, 날이 지나 햇볕이 쬐어 주황색으로 변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 몇 개의 큰 글자 ‘파룬따파하오!’는 여전히 어렴풋이 보입니다.
2. 8년 억울한 옥살이 동안 박해를 반대했다
2007년, 저는 납치되어 선양(沈陽)시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습니다. 구치소에서 저는 감옥 경찰의 요구에 협조하지 않았고, 감옥 규정을 외우지 않았습니다. 감독관에게 불려 나갈 때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쪼그려 앉아야 하고, 경찰이 일어나라고 해야 일어날 수 있으며, 길을 갈 때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야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심문받고 돌아오며 뒤에서 걷고 있는데, 경찰이 옆에 있는 경찰에게 물었습니다. “저 여자는 왜 손을 머리에 얹지 않는 거야?” 경찰은 “저 사람은 파룬궁(수련생)이야”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듣고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대법제자를 묵인하는 것은 구치소의 어떤 요구에도 응하지 않은 앞서 간 대법제자들의 피의 대가로, 심지어 생명으로 바꿔온 것입니다.
2008년 4월 저는 억울하게 8년 선고를 받고, 랴오닝성 여자 감옥으로 납치됐습니다. 감옥에서 저는 여전히 감옥 규정을 외우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다른 죄수에게 하루에 하나를 외우고, 한 달 동안 다 외우도록 저를 가르치게 했습니다. 저는 듣지도 않고 외우지도 않았습니다. 경찰이 “당신 감옥 규칙을 외우지 않고 어떻게 감옥 규정을 따를 거야?”라고 말하여 “나는 대법제자입니다. 저는 제 사람 됨됨이가 규범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도 흐지부지하게 됐습니다.
감옥에서 경찰이 죄수를 시켜 각종 방법으로 저에게 죄를 인정하라고 했습니다. 정사 대결을 몇 번 하고 나서 결국 그녀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을 하는 데 있어 아직 두려운 마음이 있어, 완전하게 비협조적일 정도로 하지 못하고, 매일 내키지 않아 하며 대충했습니다. 한번은 작업장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뒤를 돌아보니 다른 팀의 대법제자가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정념이 생겨서 하던 일을 놓고 항의했습니다.
대대장이 제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저 여자가 감옥 규칙을 따르지 않아 네게 영향을 끼친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제가 막 왔을 때 저 사람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감옥 규칙을 따르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니 대대장이 해결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더는 노동에 참가한 적이 없습니다.
어느 날, 대대장이 제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의자를 빼앗아갔습니다. 의자를 빼앗아가서 저는 정리 박스에 앉았습니다. 과장이 정리 박스를 빼앗아가 저는 과일 박스를 찾아 앉았습니다. 과장이 다시 과일 박스를 빼앗아가서 저는 판지 하나를 찾아 앉았습니다. 과장이 또 소대장에게 시켜 판지를 빼앗아가서 저는 바닥에 앉았습니다.
이때 소대장이 저와 한 조인 ‘행동팀’의 죄수를 찾아 위협했습니다. “저 여자가 계속 앉아 있으면 너의 점수를 깎겠다.” 감옥에서 죄수의 점수는 감형과 관련되어 매달 점수를 얼마나 받는지를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깁니다. 그 죄수는 돌아오자마자 울었고, 저는 자초지종을 안 후 소대장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일을 안 하는 것은 제 개인의 일입니다. 그 연세가 많은 할머니를 왜 연루시키는 겁니까?” 소대장은 “이것은 나의 일인데, 내가 일을 어떻게 하는지를 네가 상관해?”라고 물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앉지 않았습니다. 매일 다른 사람이 일하면 저는 계속 일이 끝날 때까지 서서 기다렸습니다. 열 달을 서 있다가 감옥 내 인사이동이 있어 대대장이 바뀌어서야 저는 의자가 있게 됐습니다.
가끔 과장, 소대장이 바뀌게 되면 저의 두려운 마음은 또 올라왔습니다. ‘새로 온 과장은 나를 모르는데, 내가 일하지 않는 것을 보면 트집 잡아 나를 박해하지 않을까?’ 이때 저의 정념이 다시 나왔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그들이 좋은 사람을 감옥으로 잡아 왔으니 그들이 도리에 어긋난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마땅히 미안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두렵지 않았습니다. 2010년부터 2015년 감옥을 나서는 마지막까지 저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는 죄수에게 물건을 사지 못하게 하는데, 경찰이 죄수를 벌하는 일종 수단입니다. 감옥에 갇힌 8년간 저는 한 번도 먹을 것을 사지 않고 TV를 보지 않았습니다.
3. 검은 굴에서 벗어나 정체(整體)에 용해되어 사람을 많이 구하다
2015년, 저는 8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끝내고, 랴오닝성 여자 감옥 이곳 검은 소굴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예전의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딸도 결혼해 아이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병을 고치기 위해 저축한 돈을 다 쓰고 집도 팔았습니다. 저는 딸이 저에게 준비해준 작은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이런 것은 제가 세 가지 일을 하는 마음을 조금도 흔들지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저는 즉시 진상을 알리는 일에 녹아들었습니다. 2015년 연말, 수련생들은 모두 농촌에 내려가 집집마다 다니며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하며 달력을 주었습니다. 중생이 구도된 후의 기쁨은 우리를 언제나 눈물짓게 했습니다. 한번은 여자아이가 우리가 준 호신부를 받더니 좋아서 울며 말했습니다. “이제 됐어. 나를 대법이 보호해 줄 거야. 나는 이제 두렵지 않아.” 한 할머니는 우리가 준 진상 소책자를 보더니 울면서 “이렇게 좋은 것을 나는 읽을 줄 모르다니”라고 말했습니다. 마을 사람에게 진상을 다 알리고 다른 사람이 할머니에게 “저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가요?”라고 물었고, “사람들에게 평안한 비결을 알려 줍니다”라고 할머니는 대답했습니다. 우리들도 중생이 구도되어 기뻤습니다.
그 당시 수련생이 자주 교란, 고발, 납치당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농촌에 내려가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들어도 우리는 여전히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했습니다. 한번은 한 마을에 도착하여 예전처럼 두 명씩 마을 동, 서쪽으로 나누어 진상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한 수련생은 마을 동쪽 끝이었고, 다른 두 명의 수련생은 마을의 서쪽 끝이었습니다.
전날, 이 향에서 수련생이 납치당했습니다. 열 몇 집이 남았을 때 서쪽에 있던 수련생들이 달려와서 경찰차가 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한마을에 모여 있으면 쉽게 눈에 띄니, 두 분이 다른 마을에 가서 진상을 알리고 있으면, 우리가 남은 열 몇 집에 가서 진상을 다 알리고 찾아갈 테니 그곳에서 만나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남은 집에 찾아가 이야기를 다 한 다음 그 마을을 떠났습니다. 만약 그때 경찰차가 왔다고 급하게 떠났다면 남은 열 몇 집은 구도 될 기회를 잃었을 것입니다.
농촌에 내려가지 않고 큰길에서 진상을 알릴 때도 있습니다. 인연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진상을 알려주고 삼퇴를 권합니다. 말을 다 하면 소책자 한 권을 건네고 탈퇴에 동의하면 우리가 일부만 이야기했으니 소책자를 보면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탈퇴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에게 소책자를 주며 “제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소책자를 보시고 다시 결정해 주세요.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이니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해줍니다.
2017년 자료점 인원 조정으로 저는 자료점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거의 혼자 일하지만 저는 조금도 외롭지 않습니다. 저는 일하면서 법을 외웁니다. 때로는 바빠서 온종일 걸릴 때면 저는 밥솥에 국수를 삶았고, 간장에 말아 먹기도 했으며, 짠지랑 같이 먹거나, 가끔은 아무것도 없으면 소금을 조금 넣어서 먹었습니다. 어떠한가를 관계하지 않고,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며, 마음은 항상 뿌듯했습니다. 나는 대법제자이고 대법이 만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원문발표: 2020년 4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4/10/4036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