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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유명 서화가의 실증 (상)

[밍후이왕] (밍후이 기자 지전옌 인터뷰) 산둥은 화하(華夏) 문명의 발원지 중 하나이며, 유가의 시조 공자(孔子)의 고향이자 ‘병성(兵聖)’ 손무(孫武)의 출생지이다. 많은 명인의 일화가 있고, 고대 수학의 태두 유휘(劉徽)는 이곳에서 ‘구장산술주(九章算術注)‘를 지었으며, 북송 문학가 범중엄(范仲淹)이 이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쓴 ‘악양루기(岳陽樓記)’는 천고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렇게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이곳은 ‘문화대혁명’ 때 약탈로 고서, 서화 등 역사 문물이 대량으로 파괴됐고, 1999년부터 현재까지 20여 년간 중공 사당이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 하는 파룬궁(法輪功) 수련생들을 박해한 가장 심한 지역 중 하나로 됐다. 박해당한 파룬궁 수련생 중에는 사회의 뛰어난 인재도 있었다. 오늘 여러분께 그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다.

왕젠중(王建中)은 올해 62세로 중국의 유명 서화가이다. 그의 서예와 중국화 작품은 중국 국가박물관에 전시됐을 뿐만 아니라, 홍콩, 도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전시된 바 있다. 제10회 프랑스 파리 중국문화예술교류전에서 금상을 받아, 국가급 미술 저널인 ‘중국 서화보’, ‘중국 서화계’, ‘중국수장’, ‘미술 대관’ 등에 그의 작품과 특집 탐방 시리즈 보도가 실렸고, 중국 저명 예술평론가 커원후이(柯文輝) 선생이 평론을 발표했다.

2000년 10월 왕젠중은 중국 서화계 선배들의 지원을 받아 빈저우(濱州)에 룽두(龍都)서화예술원을 설립하고 원장을 맡았으며, 톈진 미술가협회 주석이자 중국 서예가 협회 부주석인 왕쉐중(王學仲)이 소식을 듣고 흔쾌히 기념사를 지어 축하했다. 룽두서화예술원 설립 당일 시 위원회 선전부장, 문화국장, 문련주석, 서협주석 등이 참석해 테이프를 끊었고, 치루(齊魯)의 정계, 기업계, 문화계 등 각계의 유명 인사들과 시민들은 왕젠중의 서화를 앞다투어 소장했다.

'图1:王建中先生在巴黎卢浮宫参观游览。'
파리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한 당시의 왕젠중 선생.

사업의 전성기였던 2012년 말, 왕젠중은 미국에서 열린 중미문화예술교류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빌려 중공 사당의 박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치 망명의 형식으로 미국에 남을 수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왕젠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인생이 바뀌다

왕젠중의 이야기를 하자면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는 이미 여러 개의 국내 및 국제상을 받았다. 전국 및 지방 간행물에서 그의 작품과 보도를 자주 볼 수 있었으며, 이미 서화계의 유명한 사람이 돼 빈저우 현지에서는 각급 정부 요원의 귀빈이기도 했다. 그의 서예 작품은 독자적으로 감화력을 갖췄으며, 옛사람의 도리를 표현하고, 대자연의 진실한 감정과 선조의 지혜가 깃들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며, 그 글자를 보면 속뜻을 깊이 깨닫도록 하여 예술계 전문가와 학자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왕젠중은 말했다. “1998년 3월의 어느 날 출근길에 번화가에서 길을 건널 때, 한 젊은이가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데, 길을 건너기 전에 좌우로 살펴보니 차가 없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불쑥 들이닥친 오토바이에 치여 10여 미터나 나가떨어졌습니다. 행인이 저를 부축해 일으켜 정신을 차렸으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젊은이의 음주운전 사고였습니다. “사실 심하게 부딪혀 입에서 볼까지 찢어졌으며, 병원에 가서 여섯 바늘을 꿰매고 뇌진탕 진단을 받아 의사는 적어도 한 달은 입원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완젠중의 파룬궁을 수련하는 친구가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왔는데, 자신이 파룬궁을 연마해 좋은 점이 많았다며 연마해보라고 권했다. 친구의 말을 듣고 나서 완젠중은 퇴원해 집에 돌아가려고 결심했고, 집에 돌아와 바로 ‘전법륜(轉法輪)’ 한 권을 청해 법공부를 하고 연공을 했다.

'图2:王建中在阅读指导法轮功学员修炼的主要著作《转法轮》。'
완젠중이 파룬궁 수련생의 수련을 지도하는 주요 저작 ‘전법륜(轉法輪)’을 읽고 있다.

그는 회상했다. “‘전법륜(轉法輪)’을 처음 읽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읽기 시작하면서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고, 글자들이 마음에 닿아 제가 책 속의 법리에 녹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록 교통사고로 머리에 상처를 입었지만, 책을 읽을 때는 뇌진탕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이틀도 안 돼서 ‘전법륜(轉法輪)’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지요.” 나중에 연이어 몇 번 더 읽었다는 그는 “일주일이 지나자 건강이 완쾌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친지들은 이 일을 듣고 정말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기자가 그가 ‘전법륜(轉法輪)’을 연이어 여러 번 읽은 것에 관해 묻자 그는 말했다. “예전에 중공의 장기적인 선전에 세뇌당해 신과 귀신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전법륜(轉法輪)’을 읽으면서 마음이 트이고 성격이 밝아져 감격스러운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많은 이치를 단번에 알게 된 것 같았고 대법이 너무나 오묘해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왕젠중은 전에 다른 친구가 파룬궁에 대해 말했지만,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큰 사고를 당한 뒤에 대법과 인연을 맺고 수련을 하면서 전화위복이 되어 더욱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공법을 선량한 고향 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그들에게 이롭도록 왕 씨는 한 수련생과 함께 대법을 널리 알리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상황의 급변으로 천안문에 가 대법을 위해 청원, 대법 수련생의 장거를 목격하고 처참한 박해에 직면하다

그러나 정세가 급변해 1999년 ‘7.20’, 중공은 국력을 기울여 파룬궁에 대해 먹칠하고 박해했다. 완젠중은 10개의 연공장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파룬궁의 주요 구성원으로 간주해 바로 납치당했으며, 15일간 강제 세뇌당하면서 매일 중공이 파룬궁의 명예를 훼손하고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조작해낸 거짓 프로그램을 볼 것을 강요당했다.

세뇌반에서 나온 왕젠중은 꾸준히 법공부를 하면서 수련했다. 대법을 수련해 몸과 마음의 혜택을 받은 그는 중공의 박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파룬궁을 모함하는 거짓말이 천지를 뒤덮는 것을 보고 파룬궁과 사부님을 위해 올바른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2000년 12월의 마지막 날 그와 파룬궁 수련생 세 명은 베이징에 갔다.

1999년 7월 20일 중공 사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해서부터 각지의 수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은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의 억울함을 호소했으며, 연공에 대한 합법적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평화적으로 청원했다. 파룬궁의 박해를 전담하는 게슈타포 조직 ‘610 사무실’은 어떠한 대가를 감수하더라도 기어이 청원하러 가는 것을 막을 것을 각 지방정부에 하달했고, 베이징으로 향하는 길목은 엄밀하게 봉쇄되어 군대는 1급 전투 준비 상태에 진입했다.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은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또 심지어는 산 넘고 고개 넘어 베이징까지 갔다. 일부 사람은 베이징에 가던 도중 현지 공안에 납치돼 갇혔고, 일부는 베이징에 성공적으로 도착했다.

왕 씨는 20년 전 청원하러 간 것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당시 빈저우 교통 요지마다 경찰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요 감시대상이었기 때문에 수련생과 함께 인근 현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로 간 다음에 베이징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에 타자 모든 잡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마음속에는 이전에 느껴본 적이 없는 순정(純淨)하고 가뿐한, 아름답고 신성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2001년 1월 1일 오전에 천안문광장에 도착했다. “광장 입구에서 수련생 세 명이 경찰 검문에 걸려 납치됐습니다. 저는 그들 앞에서 걸어갔는데 경찰은 막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것은 우리가 준비한 현수막을 그들이 지니고 있었고, 저는 진상 자료만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는 회상하면서 말했다. “저는 광장 깃대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때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해는 두꺼운 구름에 가려져 반짝거리는 원반 하나로 보였는데, 정말 ‘검은 구름이 성을 뒤덮어 성이 무너질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수련생들이 연이어 나서서 현수막을 펼쳐 들고 진상 자료를 배포하면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치는 것을 봤는데, 정말로 마음을 사로잡는 감동이었습니다. 광장에는 경찰, 사복경찰과 무장경찰이 빈틈없이 배치돼 수련생이 공안과 사복경찰에게 난폭하게 구타당하고 있었으며, 한 여성 수련생은 구타로 인사불성 상태였는데,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50대로 보이는 남자 수련생은 경찰 두 명에게 두 팔이 잡힌 채로 경찰차에 끌려가고 있었지만, 끊임없이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쳤습니다.”

왕젠중은 감격하면서 말했다. “그때 천안문광장에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외침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하면서 너무나 감동됐습니다.”

“오후 3시쯤 되어 저는 더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진상 자료를 사람이 많은 곳에서 배포하면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真善忍好)!’를 외쳤는데, 외치는 순간 머리는 아주 명석하고, 아무런 속세의 잡념이 없어져 미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순식간에 무장경찰 다섯 명이 달려와 저를 잡으려 했지만 저는 가볍게 피하면서 잡히지 않았는데, 나중에 인파 속에서 겨우 저를 잡았습니다.”

그는 나중에 밍후이왕의 보도에서 그때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파룬궁 수련생들은 정부 관리, 군인, 지식인, 학생, 자영업자, 어린이부터 백발노인까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쓰촨(四川), 윈난(雲南), 헤이룽장(黑龍江), 신장(新疆) 등 먼 곳에서 온 농민도 있었고, 평생 한 번도 먼 길을 떠나본 적이 없는 농촌 부녀자도 의연히 천릿길을 걸어 청원하러 가는 기나긴 여행길에 올랐다.

그 뒤 몇 달간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수련생은 가장 많을 때는 30만 명이 넘었고, 베이징 근교에 장기적으로 청원하러 온 파룬궁 수련생은 약 70만 명에 달했다. 중공 내부 소식에 따르면,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파룬궁 수련생은 2000년 초부터 2001년 말이 가장 많았으며, 베이징 공안국이 찐빵 소모량 증가 수량으로 추산한 바로는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파룬궁 수련생은 절정기 때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2001년 4월까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파룬궁 수련생 중 납치당한 사람은 이름이 기록된 것만 83만 명인데, 이름을 말하지 않은 수련생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이다. 왕젠중도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단식 반(反)박해로 잔혹하게 탄압받고, 정념을 지켜 감옥에서 빠져나오다

왕젠중은 말했다. “무장경찰이 저를 무장경찰 버스에 잡아 천안문 간수소에 잠시 가둔 다음 청원하러 온 시민들을 감금하는 주징좡(久敬莊)으로 보냈습니다. 그때 통상 50~60명을 가두는 방 두 칸에 200여 명에 육박하는 파룬궁 수련생을 가둬 모두 바짝 붙어있어 틈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사부님의 ‘홍음’과 경문을 외웠는데,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천지를 뒤흔들고 지붕이 뚫릴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나중에 대법제자는 베이징 곳곳의 간수소로 이송됐습니다. 저는 차오양(朝陽)구에 있는 베이징시 제1간수소로 보내졌는데, 이곳은 수감자들을 잔인하게 대하는 것으로 알려진 간수소였습니다. 간수소 대문을 들어서면 원격 조정문이 또 하나 있는데, 대문 양쪽은 대리석 담장으로 튼튼해 보였습니다. 들어가는데 으스스하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왕젠중은 베이징시 제1간수소는 악명이 자자한 베이징 7처(치안과 형사 안건 담당 부서)이며, 형을 선고당한 베이징 파룬궁 수련생들이 모두 7처에 갇혀 박해당했다고 말했다. 이 간수소의 사건은 모두 베이징 공안국 7처에서 심사하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7처’는 베이징 제1간수소의 별칭이 됐다. 7처는 중공 독재에 협조해 시민들을 억압하고 박해하는 독재의 도구로 됐으며, 중공국 특유의 소위 ‘정치범’ 감금 특수임무가 있었다.

1999년 중공이 파룬궁 수련생 단체를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7처는 또다시 박해에 참여해 아주 불미스러운 역을 연기했다. 주요 관계자로 간주하거나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며, 610이 박해를 가중하고자 지목한 파룬궁 수련생들은 모두 구(區) 간수소로부터 7처에 보내져 7처에서 심문과 수사를 했으며, 짧게는 2개월, 길게는 6개월 수감당한 뒤에 다시 구 간수소에 돌아가 형을 선고했고, 일부는 7처에서 직접 형을 선고했다. 나중에 일반인에게 10년 이상의 형을 선고했다. 박해 초기에 원 파룬따파연구회 관계자 리창(李昌), 왕즈원(王治文), 지례우(紀烈武), 최초로 장쩌민을 고소한 홍콩 파룬궁 수련생 주커밍(朱柯明), 왕제(王傑) 등은 모두 7처에 보내져 박해받고 중형을 선고당했다.

밍후이왕은 21년간 중공의 엄밀한 정보 봉쇄를 돌파하면서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대량의 원천 자료를 수록했다. 왕젠중이 공개한 내용은 이 노동교양소가 행한 죄악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는 말했다. “처음에는 납치된 모든 파룬궁 수련생들이 일반 감방에 감금당했습니다. 경찰은 우리에게 겨울옷을 벗고 속옷만 입을 것을 강요하고, 영하 10도 정도의 기온에도 양 창문을 모두 열었습니다. 침대에는 이불이 없었는데, 북방의 엄동설한에 차가운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으며, 10여 명에게 작은 담요 하나만을 줬습니다. 우리는 똘똘 뭉쳐 사부님의 홍음과 경문을 1박 1일간 외우면서 확고하게 견지했습니다.”

“24시간이 지나 우리는 일반 감방으로 이송됐습니다. 경찰은 죄수들을 부추겨 대법제자들의 이름과 집 주소를 말하게 강요했습니다. 제가 갇힌 감방에는 대법제자가 저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수들에게 파룬궁의 진상을 알렸으며, 이름과 주소를 말하라는 경찰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하루 지나서 저를 징역 1년을 선고받은 감방에 감금했습니다(사실 베이징 제1간수소도 감옥입니다). 나중에 소위 1년 형기의 죄수들은 사실 모두 중범자이며, 살인범도 있고, 어떤 이들은 때려 부수고 강탈해 잡힌 흉악한 폭도였는데, 부정한 방법으로 사법부서를 매수하여 1년이라는 가벼운 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경찰은 이런 죄수들을 시켜 제가 이름과 주소를 말하고, 대법 수련을 포기토록 압박하게 했습니다.”

“경찰의 사주를 받은 사악한 죄수들은 공을 세워 형기를 줄이기 위해 강온 양면으로 유혹과 협박을 일삼으면서 번갈아 때렸는데 저는 바닥에 쓰러져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13일간 진행된 혹형 박해에 단식농성을 했습니다. 단식 12일 되는 날에 흐리멍덩한 상황에서 아주 분명한 꿈을 꿨습니다. 고대 전쟁터에서 저는 겹겹이 포위당했는데, 적들의 포위망은 아주 촘촘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돌파구를 찾아 예리한 검을 휘두르면서 포위망을 탈출했습니다. 깨어나 생각해보니 간수소를 탈출할 가능성이 있지 않나 싶었지만, 불가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감방의 죄수들이 흉악하고, 경찰이 엄밀하게 관리하고 있고, 담장이 두 겹으로 아주 높고, 담장에 전기 망이 있는데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까?”

결국, 14일째 되던 날, 간수소 경찰이 다시 한번 이름과 집 주소를 캐물었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그들에게 지닝(濟寧)시라고 말했다. 그래서 베이징 주재 지닝시 사무소의 공안이 차로 나를 간수소에서 데려갔습니다.

“지닝의 공안이 저를 그들의 사무소 뜰에 데려갔습니다. 한 아파트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은 화장실에 가겠느냐고 물어 저는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수갑을 제거해줘 저는 독립된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왕젠중은 들어가서 서쪽 벽 상부에 50cm 되는 작은 창이 있는 것을 보고, 즉시 창문에 올라가서 옆의 다른 뜰로 뛰어내렸고, 이어서 50~60m 되는 뜰을 지나 맞은편 아래층 쪽 계단을 이용해 4~5m 높이 담장을 넘어 또 다른 뜰로 들어갔다. 대문을 통해 바라보니 차량이 붐비는 시내 거리가 보였다.

“그때 저는 하늘을 나는 작은 새처럼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그때의 정경을 회상하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하면서 말했다. “그때 저는 정신을 가다듬고 혼잣말로 ‘라오왕(老王)이 성공적으로 탈출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의 왕젠중은 이미 10여 일을 굶은 상태였고, 그 순간 그는 심장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계속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거리에 나가니 택시가 보여 바로 잡아타고 천안문광장으로 갔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몸에 지녔던 단돈 100위안(약 17,000원)을 찾았지만 없었는데, 다른 손님이 택시를 타려 하고 있어 기사는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나를 차에서 밀어냈다.

“차에서 내려 그 100위안을 찾았습니다. 저는 적어도 20위안(약 3400원)인데 왜 차비를 받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문득 사부님께서 저를 도와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그 기사가 차비를 받았다면 저는 집에 돌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집으로 돌아가는 차비는 98위안(약 16,660원)이었습니다.”

“빈저우에 돌아온 다음 집이 엄밀하게 감시당하고 있을 것을 알고 있기에,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근 현에 있는 수련생 집에서 며칠 묵었습니다. 그때 설날이 다가와서 저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계속)

 

원문발표: 2021년 1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1/15/41854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