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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생을 도울 때 ‘자아’를 제거하는 것에 관한 작은 깨달음

글/ 중국 제자

[밍후이왕] 법학습 팀에 오랫동안 병업관을 넘지 못하는 한 노수련생이 있었다. 그를 돕기 위해 사람들이 잇따라 왔다.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해요…….” 다음에 오는 사람들도 말했다.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셔야 합니다.” 모두 이러쿵저러쿵했는데 아주 강성인 사람도 있었다. 결국, 이 수련생은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수련생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 며칠간 마음이 무거웠다. 안타까웠지만 그를 탓하는 마음도 지울 수 없었다. ‘오성(悟性)이 좋지 않아도 정념(正念)만 강했으면 가지 않았을 텐데.’ 몇 년 후 이 생각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줄곧 ‘자아’ 속에서 맴돌았다. 겉으로는 타인이 좋게 되길 바란다고 하지만, 사실 자기가 깨달은 것을 중하게 여겼기에 속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말만 들었어도 죽지 않았을 텐데.’ 나는 이러한 생각을 품은 수련생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업관을 넘거나 심성관을 넘고 있는 수련생과 교류하려면 반드시 기점을 바로 놓아야 한다. 자기를 의사처럼 여기면서 끊임없이 ‘처방’을 내려서는 안 된다. 이런 상태는 흔히 많이들 알아채지 못한다. 그래서 도움을 주려는 사람 자신이 청성해야 한다. 어려움에 부닥친 수련생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할까? 교류가 효과가 없다면 아무리 많이 말해줘도 효과가 없는 것이다. 수련인은 모두 누락이 있는데, 다른 수련생의 사소한 단점에 경악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수련에서 모든 것이 매끄러울 수는 없다. 관건은 무엇이 내 눈에 거슬리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마음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어려움에 부닥친 수련생은 스스로 바로잡아야 하므로 다른 사람이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렇게 행동했다. 누가 병업관을 넘지 못하거나 심성관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가서 방할(棒喝)하고 가르쳐주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나중에 왜 이런 마음이 생기는지 생각해봤는데, 찾아보니 다름 아닌 자아가 있었다.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순조롭게 수련해왔고, 몸 상태도 큰 문제가 있은 적이 없다 보니 수련생들에게서 ‘괜찮다’는 말을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이 괜찮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만하고 스스로 인격이 고결하다고 여겼으며, 수련생에게 결점이 있으면 내 장점과 비교했다. 어떻게 비교해봐도 내가 낫다고 하는 방식은 수련인에게는 금기이다.

대법은 끝이 없다. 자만하고 좀이 쑤신 것은 경박한 행동이다. 나는 타인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감히 방할하며, 심지어 10여 년간 줄곧 자신이 관을 넘은 일들을 생생하게 입에 올렸다. 이는 자기가 수련한 것이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수련인은 이 점을 알아야 한다. 세 가지 일을 얼마나 많이 했건 타인이 자기를 어떻게 우수하다고 말해도 대법의 지도와 사부님의 보호하에 지나온 것이다. 사부님께서 자비롭게 보호해주시고 점화해주지 않으셨다면, 제고는 물론 약을 달고 살았던 나는 일찌감치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련인의 일체는 사부님께서 도와주셨기에 이루어졌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춰야 제고가 빠르다. 꼭 자아를 제거하고 침착하고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하면 타인이 자기 말을 잘 듣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만이 자기 사상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분명히 보아낼 수 있고 사람마음도 빨리 제거할 수 있다.

타인을 돕는 것이 자기를 돕는 것이고, 타인을 성취시키는 것이 곧 자신을 성취하는 것이다. 수련생의 문제가 보일 때 가상일 수도 있기에 자기를 높이지 말고 다가가서 친절하게 “도와드릴 것이 있나요?”라고 한 마디 물을 수 있다. 따스한 말 한마디는 한 줄기 햇빛처럼 어려움에 부닥친 수련생의 신심을 북돋아 주고 재기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된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연약해진 수련생의 마음을 설상가상으로 만들어 잘못하면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수련생에게 방법을 짜주거나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인식은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다. 경지가 다르기에 논쟁하거나 동의할 필요도 없다. 상대는 수긍하지 않을 수 있는데 현재 있는 위치가 달라서이다. 만약 당신이 자기 말만 한다면 간격이 생기게 할 수 있다. 나는 왜 항상 교류해도 성과가 없는지 생각해봤다. 한나절을 이야기해도 상대가 수긍하지 않고 더욱이 압력을 느끼거나 고통스러워할 수도 있는데, 그럼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실패는 쉽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기 때문에 아마 다음에도 여전히 그런 식으로 말할 것이다. 교류하는 가운데 제고나 감동을 일으키지 못하면 시간을 낭비한 것과 같다.

나는 또 수련생을 도울 때는 수련생의 관점에서 도와야 한다고 깨달았다. 상대가 상태가 아무리 좋지 않아도 이해하고, 목소리를 높이지 말며, 눈을 보며 말하고, 내려다보듯 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분명히 당신에게 마음에 있는 말을 할 것이고 당신이 따뜻하고 신뢰할 만하다고 느낄 것이다. 특히 수련생이 부끄러운 일을 말할 때는 수구(修口)에 주의해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남에게 말하면 수련생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이고 그를 해치는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왜 죽을 때까지도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아무 수련생에게도 털어놓으려 하지 않을까?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소문이 퍼질까 봐 두려워서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개인의 얕은 인식이므로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다면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0년 12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0/12/21/4167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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