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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에 나타난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어느 날, 밖에서 진상을 알리다가 젊은 수련생 한 명을 만나 약 두 시간 동안 교류했다. 그녀는 방금 병업관을 넘겼다며, 상태가 아주 나빴을 때 수련생들이 와서 발정념을 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상황이 처음 나타났을 때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발정념으로 부정했지만, 상황이 아주 나빠져 한동안 지속했다고 했다.

밍후이왕에 있는 ‘병업 마난’과 관련한 문장에서도 늘 이런 구절이 보인다. “어느 날, 신체가 갑자기… 당시 나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했다. 며칠 후, 통증이 심해졌고, … (어떤 상황이 나타났고), 나의 생활과 세 가지 일을 심하게 교란했다.” 이어서 “안을 향해 찾아 마음을 닦으며 발정념으로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했고, 그런 ‘가상’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견정하게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었다.” 수련생이 관을 넘은 경험은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신체에 문제가 나타났을 때, 수련생의 생각이 모두 아주 발랐는데, 어째서 상태가 갈수록 심해져 큰 관문이 되었을까?

나는 다른 수련생처럼 관을 넘은 경험이 없었으므로 단지 나의 견해로 분석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증상이 당연히 가벼웠다가 갈수록 심해졌는데, 수련생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생각을 거듭하며 다른 수련생의 생각을 유추했다. 이것은 구세력의 박해며, ‘가상’이니 인정하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상태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을 구세력의 박해로 확정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바로 명확하게 구세력과 자신을 게임에서 맞붙는 대결 상대의 위치에 놓는 거로 생각했다. 네가 ‘가상’으로 나를 박해하면 나는 너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구세력으로 인정하면 구세력은 정말로 온다. 구세력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 정도로 당신을 움직일 수 없다면 좀 더 강하게 해야겠다.’ 이 공간에서의 표현은 바로 갈수록 심해지고, 갈수록 틀어져 마음이 조마조마해지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가상’이 정말로 한판의 겨루기가 된다.

그 과정에서 구세력은 하려던 짓을 한다. 우리를 한바탕 배치하고 고험하며, 도대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보고, 이어서 구세력이 배치한 극본에 따라가게 한다. 이것은 그야말로 구세력의 배치에 따르는 것이 아닌가? 정념이 강한 사람은 넘기겠지만, 그래도 감당하지 않아야 할 고통을 스스로 감당하게 된다. 정념이 약한 사람은 병세가 짙어지고 시간이 길어지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구세력에 생명을 빼앗긴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구세력이 한 일을 나는 모두 부정하고, 나는 모두 승인하지 않으며, 대법제자가 이런 고통을 감당하게 하는 일은 더욱 마땅히 있어서는 안 된다. (박수)”[1]

이치에 따르자면 신체에 문제를 초래한 원인이 많겠지만, 여기에서는 비교적 일반적인 상황만 이야기한다. 한 가지는 개인 수련 중에 장기간 누락이 있어 구세력에 약점을 잡힌 것이다. 만약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이 우리를 잠깐 괴롭히는 데 그치지 않고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그것이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를 끌어내리는 구실을 잡으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마난 속에서 안을 향해 찾고, 법 속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신체가 즉시 호전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心性(씬씽)이 제고되어 올라오면 당신의 신체에 곧 큰 변화가 일어날 것”[2]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상황도 재차 말하고 싶다. 곧 정상적이고, 비교적 정진하는 수련 상태에서, 특히 올바른 일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신체에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생각은 바로 어떤 생각을 움직여 초래된 것은 아닌지 안을 향해 찾는 것이다. 만약 없다면 나는 그것을 ‘좋은 일’로 여긴다. 바로 소업, 정화, 제고, 공의 성장(몸이 몹시 괴로울 수도 있음)이다. 왜냐하면, 좋은 한 걸음이 다음의 좋은 한 걸음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며, 당연히 하나의 긍정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른 추리이며, 긍정적인 사유다.

만약 나타난 상황을 ‘좋은 일’로 여긴다면, 이때 우리는 마음이 평온해 저항하거나 배척하지 않으며,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수련은 각기 다른 층차에 다른 상태가 있는 것이며, 각 층차에서 신체에 나타나는 상황을 평온하게 대하는 것이 옳다. 좋은 느낌이 있으면 기뻐하고, 이상한 느낌이 있으면 두려워하며 배척하는 등으로 마음에 파동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만약 나타난 상황을 구세력이 가한 교란으로 여긴다면 우리의 공간장(심신)이 어떻게 평온할 수 있겠는가? 정신이 긴장되고 육체가 고통스러운 상태는 다시 이어지는 반응을 초래해 자신의 몸을 조화롭지 못한 마당에 놓이게 한다. 그러나 이 일체는 오히려 자신의 일념으로 불러온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이 어느 층차에 있든지를 막론하고 스스로 잘 수련하겠다는 염원을 가지기만 하면 사부님께서 일체를 관할하시고 우리에게 일체를 배치해 주신다. 그럼, 우리가 바른 일을 하고 있을 때, 신체에 갑자기 문제가 나타난다면 그때는 사부님께서 관할하시지 않고 구세력이 받아서 관할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대법제자들이 모두 ‘사부님의 말씀에 따른다’고 해놓고 어째서 상황의 초기에 구세력부터 생각하는가? 내 생각에는 여전히 ‘신체의 고통’을 좋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그런 좋지 않은 일이 나타난 것을 자신에 대한 박해로 여기고, 구세력의 배치로 여기면서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신체의 고통이 나쁘다’라는 사람의 관념, 고생을 피하려는 사람의 마음, 이런 상황의 결과를 몰라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스스로 이런 ‘가상’을 ‘박해’로 여기며 배척해 결국 구세력의 박해를 초래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법신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시지 않는가? 왜 구세력이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구해서 온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 우주 중에는, 그 자신이 추구하고 자신이 가지려 하는 것을 일반 정황에서는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없다는 이치가 있다.”[2] 우리가 자신을 수련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본 것은 자신이 감당한 것이지만, 우리가 보지 못한 더욱더 많은 것은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감당하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정념을 움직였다면, 당신은 이 모든 것이 가상(假相)이고 구세력의 교란이라고 하며, 내가 이처럼 여러 해 수련했는데, 이 정황이 나타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당신이 정말로 내심에서 우러나온 일념이라면, 즉시 아무것도 없다.”[3]

이전에 나는 ‘병업 가상’에 관한 사부님의 설법을 전혀 원용(圓容)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원용’이라는 단어에 대해 (개인의 시각에서) 어떻게 해석하든 모두 통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진상을 분명히 몰라 가상도 꿰뚫어 보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증상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한들 어떻게 그것을 ‘가상’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전에 나는 사부님께서 구세력이 배치한 일체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므로 구세력의 배치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으니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줄곧 그것의 존재가 법과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시각에서 구세력의 배치를 ‘가상’으로 여기며 발정념으로 부정해 왔다. 이제 나는 ‘병업 가상’에 대해 현재의 층차에서 비교적 원용한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바로 우리가 일반인 신체 표면의 ‘궤양, 종양, 염증’을 보듯이 이것은 가상이며, 진상은 더욱더 깊은 공간에 누워 있는 하나의 영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나타난 ‘신체적 고통’인 가상의 배후에 있는 진상은 무엇일까? 정화이고, 공이 자라는 것이며, 사부님의 격려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올바른 일(대법제자가 해야 할 ‘세 가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사부님께서 우리가 제고할 관(서로 다른 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각 층차에 배치하신 고험이기도 하며, 또한 구세력의 농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구세력은 당신의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 당신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고험하려고 할 때, 그것은 여전히 당신에게 원래 병이 있던 부위에 병이 있는 아픈 감각을 있게 하거나, 혹은 병이 있는 반응에 이어 증상까지도 똑같게 해서, 당신이 대법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를 본다.”[3]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그것을 ‘역이용’하신다. 진실과 거짓이 섞여 헷갈리는 가운데 깨달은 것은 곧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아야 하며, 고험을 통과하면 위로 제고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상한 상태’가 보이는 즉시 넘길 수 있고(많을 때는 정말 분, 초를 다툰다), 어떤 바른 일도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낮은 층차의 관이 한층 높은 층차의 생명에게는 고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 차례 제고하는 과정이며, 수련 중의 얻음이 아니겠는가?!

수련인으로서 한정적인 수련 시간 안에 빨리 제고하고 싶다면 수련과정에서 신체의 변화가 많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런 변화가 가져오는 우리 신체의 느낌도 각양각색일 것이며,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은 모두 정상일 것이다.

한번은 다른 수련생 한 명을 만났는데, 그는 내가 기침하고, 목이 쉰 것을 보고는 그것을 부정하고, 인정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무엇을 부정하고, 무엇을 승인하지 않느냐고 하니 그가 “아, 구세력을 부정하고, 구세력을 인정하지 말아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신체 정화를 ‘좋은 일’로 여겼으니 구세력과는 상관이 없었다. 나중에 나는 ‘하나의 현상인데, 나와 그 수련생은 왜 다르게 보았을까?’라고 생각했다.

이런 말도 들었다. “신체에 문제가 나타나면 개인 수련 시기에는 소업이지만, 정법 시기에는 바로 대법제자에 대한 구세력의 박해이니 인정해서는 안 된다.” 나는 ‘대법의 수련 원칙은 변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기본 과정은 법공부, 연공, 마음 닦기, 소업, 공의 성장이다. 이들은 구세력이 나타났다고 해서 변할 수 없다. 구세력의 존재는 단지 대법제자의 책임을 더 크게 하며(그것들이 중생을 훼멸하니 대법제자가 중생을 구도해야 함), 수련환경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우리에 대해 법의 요구를 더욱 높일 뿐이다.’고 이렇게 생각했다.

수련 초기에 법공부를 통해 도리를 깨닫는 가운데 나는 명확한 일념(확신)을 하게 되었다. ‘어떤 일이든지를 막론하고 일반인이 비정상이라 여길수록 수련인에게는 더욱더 정상이다.’ 나의 업력이 몹시 중하고 집착이 너무나 크다는 걸 깊이 이해했으니 그렇다면 한정된 시간 안에 제거하기 위해서는 (심신의) 변화가 있는 것이 바로 ‘좋은 일’이다. 그래서 각종 ‘이상한 상태’를 배척하지 않았다. 상태가 많이 나빠지면 곧 크게 소업하고, 큰 변화와 큰 제고가 있는 것이다.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은 바로 한 걸음 더 청리하고 정화하는 것이다. 가끔은 내가 감당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많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신체에 어떤 상황이 나타났을 때, 나는 당시에 어떤 상태에 처해있든지를 막론하고(층차마다 서로 다른 요구 표준이 있다), 법 속에서 안을 향해 찾으며, 자신을 바로잡고 사부님과 법을 견정하게 믿으며, 사부님께서 승인하지 않으신 것을 단호히 인정하지 않고, 수련인에게 병이 없으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며, 그것이 나타난 것을 내가 다시 제고하는 ‘좋은 일’로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성이 도달하면 증상은 즉시 소멸한다. 구세력 같은 것을 많이 생각하지도 말고, 생각이 ‘구세력’ 주변에서 맴돌지 않아야 한다. 입으로만 ‘구세력을 부정’한다고 말하지 않고 행위로 ‘부정’해야 한다.

한번은 갑자기 신체에 상황이 나타났는데, 내 생각에는 일반적인 심성 제고의 점화가 아니었으며, 정화되고 공이 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나 괴로웠고, 시간도 오래 걸려 한 시간이 넘었다. 나는 내가 구세력의 박해로 여기지 않아 발정념으로 부정하지 않았고, 늘 구세력을 방임해서 박해가 끝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곧 구세력을 겨냥해 발정념했는데, 갑자기 마치 텔레파시처럼 머릿속에 한마디 말이 들어왔다. ‘심해져서 정화가 아니라고 생각했나?’ 내 입에서는 “정화가 맞다”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나왔고, 즉시 증상이 완화됐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그것은 내가 진정으로 믿는지에 대한 고험이었다.

나는 스스로 너무 낙관적이지 않은지 자문했다. 확실히 심성의 원인을 제외하고 신체에 문제가 나타났을 때(나의 경우는 대부분 치통 형식의 점화였다) 즉시 안을 향해 찾고, 발정념하여 제고하면 넘을 수 있었다. 다른 경우에도 신체에 문제가 나타나면 거의 모두 신체가 정화되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정상적인 수련 상태에서 갑자기 문제가 생기면 더욱 박해로 인식할 수 없었는데, 이는 박해가 이유 없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 신체의 변화가 안에서 시작하고, 층층을 돌파해 표층까지 나온 것임을, 법 속에서 깨달았다. 우리는 미시적으로 발생한 일을 모르며, 이 공간에서 표현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육체가 이상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한 차례씩 경험할 때마다 심태가 평온하고, 관을 넘기는 감각(긴장, 근심)이 없으며, 단지 자신의 ‘인내력’과 ‘감당 능력’을 고험한다는 것만 느낀다. 감당하는 동시에 약간의 기대도 있는데, 왜냐하면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이후의 ‘좋음’이 이전의 ‘좋음’보다 더욱더 좋기 때문이다. 심태는 마치 큰 프로젝트의 추진 속도를 주시하는 것과 같고, 그 과정에서 신체 변화의 자세하고 미묘함을 체득하게 된다.

5년 전에 한번은 진상을 알리러 나갔다가 어떤 사람이 운동기구로 운동하는 것을 보고 나도 자리를 잡고 운동했다. 나는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두 발로 페달을 밟고 두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흔들었다. 나는 양다리를 동시에 앞으로 저으면서 동작을 보고 싶어 두 손을 놓았다가 몸이 뒤로 넘어가 시멘트 바닥에 떨어졌다. “쾅”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빨리 일어나자’라는 생각만 했다. 일어난 후, 나는 (나에게 문제가 없음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다시 올라갔고, 스스로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나?’고 물었다. 아, 그건 곧이어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이후 아무 지장 없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허리, 사타구니, 다리의 통증으로)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었다. 나는 ‘이번에 신체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몇 초 후에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오늘 저녁에 션윈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리에 앉자 뒷머리가 무거워졌다. 나는 이번 기회에 머리까지 청리하니 일거양득으로 생각했다. 나는 힘든 느낌을 무시하고 션윈을 봤는데, 머리가 무거웠던 감각이 언제 사라졌는지를 몰랐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나는 사악의 박해를 떠올리지 않았고(자신을 박해받는 위치에 놓지 않음), 그래서 심태가 줄곧 아주 느긋했다.

생각을 바꿨더라면 결과가 달랐을 거라는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돌발 상황’을 박해와 마난으로 여긴다면 그것을 수련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볼 것이며, 평온한 심태로 ‘좋은 일’이라 여긴다면 수련을 제고하는 ‘디딤돌’로 볼 것이다. 일이 생겼을 때의 그 일념이 몹시 중요하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경험이 달라지며 최후의 수확이 달라질 것이다.

이상은 이 문제에 관한 나의 생각이며 현 단계의 깨달음이니 편파적인 곳은 바로잡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2013년 대뉴욕지역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11-2010년 뉴욕법회설법’

 

원문발표: 2020년 12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20/12/14/4155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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