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창춘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대법제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992년 5월 13일 사부님께서는 창춘 제5중학교에서 제1기 파룬궁 전수반을 개최하셨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제1기반에 참가한 제자로 운 좋게 사부님을 따라 28년 남짓 수련했습니다. 당시 제5중학교 계단식 교실에 참가한 수련생이 200명이 좀 안 됐으나 현재 대법은 전 세계에 널리 전해져 수련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오셨군요, 제1기라 얻기 어렵습니다! 제가 드리는 것은 오랫동안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는 법을 위해 왔고 중생을 위해 왔으며 비바람 속에서 넘어지고 엎어지며 28년을 지나 오늘까지 걸어왔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자비와 위대함을 목격했고 불법(佛法)의 신성함과 위엄을 목격했습니다. 아래에 사부님께 제가 걸어온 수련의 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관을 넘다
저는 올해 82살이며 남편은 84살입니다. 슬하에 2명의 아들과 딸이 하나 있습니다. 수련 전 저는 병원에서 병주머니로 불렸고 크고 작은 병이 15~16가지나 됐습니다. 연공 후 반년도 안 돼 이런 병이 모두 나았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심했던 것은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많은 치료비를 썼고 다리는 염증으로 휘었으며 약은 마대에 담아 먹을 정도여서 제가 먹을 약은 병원에서 특별히 남겨두기도 했습니다. 다리를 수술한 후 감각을 거의 잃었고 싱청(興城)에서 요양하기도 했습니다. 제3기 학습반에 참가했을 때 사부님께서 다 조절해주신 후 7~8차례 소업을 했습니다. 소업할 때마다 40도 고열에 시달렸고 다리는 열로 큰 자주색 물집이 생겨 자주색 가지와 같았습니다. 한번은 문화광장에서 홍법할 때에 소업했는데 저는 하던 대로 지체없이 나섰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없었고 열도 내렸으며 물집도 사라져 다리의 업력이 사라졌습니다. 점차 다리에도 감각이 생겼습니다. 정말로 병이 없이 홀가분한 상태로 걸음걸이에 바람이 일었습니다.
처음 수련을 시작해서 가부좌하니 정말로 바다가 뒤집히는 것처럼 이전에 일들이 모두 생각났습니다. 사부님께서 저에게 청리하고 조절해주신 후 점차 조용해질 수 있었으며 머리가 텅 비어 깊이 입정(入靜)할 수 있었으며 몸도 뜰 수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이란 계란 껍질 속에 있는 것보다 훨씬 미묘(美妙)했습니다.
박해가 시작된 후 저는 또 곤두박질쳤는데 이번은 소업이 아니라 사악한 마의 박해였습니다.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마가 제 생명을 해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분간할 수 있었습니다. 2014년 제가 큰 상가에서 진상을 알리고 문을 나서다가 넘어졌습니다. 그 당시 별다른 느낌이 없어서 훌훌 털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튿날에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고 전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화장실은 기어서 가야 했고 아플 때는 바닥에서 기어 다니며 울었습니다. 이렇게 침대에 20여 일 누워있었습니다. 자녀들은 “병원에 검사받으러 가요. 무슨 원인인지 알아봐야죠”라고 했으나 저는 “가지 않아도 괜찮다. 며칠 지나면 나아져”라고 대답했고 그러자 자녀들은 “주사를 놓지도 약을 드시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엑스레이 한 장 찍으면 돼요”라고 타일렀습니다. 저는 그 정도는 괜찮다고 했고 자녀들이 저를 병원에 데려다 검사했더니 요추디스크로 입원해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건 안돼, 이건 구세력이 소란을 피우는 것으로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서 집에 돌아가자, 속았구나. 수련인에게 무슨 병이란 말이냐?! 퇴원할 거야. 집에 돌아가 연공해야겠어”라고 말했습니다.
아직 다 낫지 않았던 그때는 2015년이었고 박해 원흉 장쩌민을 고소하는 고소장을 써야 했습니다. 저는 침대 변두리에 베개를 몇 개 놓고 침대 가운데 앉아서 고소장을 작성했습니다. 몇 분 견지해 두 줄을 쓰고 나서는 바르게 앉지 못해 베개에 쓰러졌습니다. 조금 추스른 후 다시 일어나 앉아서 적었는데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해 고소장을 완성했습니다.
저는 수련인으로 매일 반드시 연공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설 수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저는 벽에 기대서 3분, 5분 하다가 좀 누워서 쉬다가 다시 이어서 연마했습니다. 아들은 제가 다시 넘어질까 봐 노인들이 허리를 지탱할 수 있는 작은 밀차를 구매해 그 중간에 서서 연마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제대로 설 수 없다면 벽에 기대어 연마하고 매번 2~3분씩 천천히 견지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렸습니다. 나중에 벽에 기대니 팔다리에 쥐가 났고 저는 이는 사부님께서 벽에 기대서 연마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으로 깨달았습니다. 언제까지나 외재적인 조건에 의지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벽에 기대지 않았고 점차 바르게 설 수 있었으며 서는 시간도 길어졌습니다. 1년 후 저는 연공을 1시간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 정상이 됐고 허리도 펼 수 있으며 또 혼자서 밖에 나가 진상을 알릴 수 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계시고 대법이 있다면 그 무엇도 저를 어렵게 할 수 없으며 제가 걷고 있는 건 사부님께서 배치한 길로, 넘기지 못할 고비가 없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2. 천안문 광장에 가다
1999년 ‘7.20’, 대법이 박해를 당해 저는 정말로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이렇게 위대하신 사부님이고 이렇게 좋은 대법이며, 각종 질병과 고통을 제거해주셨고 사람들의 생활에 행복과 즐거움을 주었고,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는데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저는 공정한 말을 해야 했습니다. 이른 아침 제가 성위원회에 가려고 문을 나서려는데 다른 성에 있는 20여 년이나 만나지 못한 친척이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하지? 저는 간단하게 약속을 잡고 성위원회 정문에 정좌하러 갔습니다.
경찰은 대형 버스에 태워 저희를 체육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고 각 지역에서 모두 왔습니다. 큰 파룬(法輪)이 하늘에서 회전했고 수많은 사람이 봤습니다! 이는 법을 실증하는 일로 저희는 옳았습니다. 밤에 집에 돌아오니 친척들이 저를 걱정했고 외삼촌은 저를 보면서 어려서부터 견해가 바르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맞는 말이었습니다. 대법을 수호하는 일과 가족정에서 사부님께서는 제 선택을 보셨습니다.
탄압은 계속되고 심해지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저는 반드시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서 공정한 말을 해야 했고 사부님의 명예를 되찾아야 했습니다. 그해 9월, 저희 몇몇 수련생은 의논을 거쳐 그날 밤으로 떠났습니다. 이른 아침 베이징에 도착해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전문(前門, 정양문)에 도착했습니다. 첫날에는 수련생과 연락이 닿지 않았고 신분증이 없었으므로 밤에 여관에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저희 몇몇 수련생은 어느 아파트 단지의 화단 옆에서 노숙했습니다. 9월의 베이징은 땅에 이슬이 있으며 공기가 찼습니다. 저희는 하늘을 이불로 땅을 침대로 삼았는데 온돌에서 자는 것처럼 따뜻했고 조금도 힘들지 않아 단잠을 잤습니다! 그건 사존께서 큰 손으로 저희를 받쳐주시고 저희를 보호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회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튿날 수련생과 연락이 닿아 그는 저희를 베이징 교외에 있는 집으로 안내했는데 30여 리 길을 걸어서 갔습니다. 얼굴은 땀범벅이었으며 옷은 물로 씻은 듯했고 발에는 물집이 생겨 절뚝이며 대마장(大馬場)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작은 사합원으로 기와집 4칸에는 각 지역에서 올라오신 수련생분들이 투숙했는데 약 130명 정도 됐고 바닥과 온돌에도 사람이 가득했습니다. 자리가 모자라 남자 수련생은 마당에 천막을 만들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집주인 가족은 모두 대법제자였고 매우 선량했습니다.
많은 사람으로 붐볐기에 5~6일 지나 저희는 다시 다른 곳으로 안내받았습니다. 떠나는 그날 집주인이 돌아왔는데 큰 키에 소박한 옷차림이었으며 매우 온화하고 선량해, 보는 순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가족을 만난 듯했습니다. 그는 저희 손을 잡고 “어머님, 언제 다시 오실 거예요?”라고 말하고는 먼 곳까지 배웅했습니다. 저희는 감동으로 눈물마저 흘렸습니다. 사부님께서 “대법제자는 정체(整體)”[1]라고 말씀하셨으나 저는 늘 이해하지 못해 무엇이 정체인지 몰랐습니다. 베이징 수련생 집에서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대법제자는 마음이 함께였고 마음으로 응집돼 정체를 이뤘으며 언제 어디서나 생각이나 행동이 같았는데, 이는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가게 된 곳의 지명은 기억나지 않으며 이곳에서 22일 머물렀습니다. 역시 각 지역 수련생들로 모여 있었으며 저희는 매일 청원하러 나갔습니다. 나중에는 붙잡혀서 수갑이 채워져 창춘으로 이송됐습니다. 큰아들이 기차역에 마중 나왔으나 경찰은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했고 직접 유치장에 보냈습니다. 큰아들이 눈물을 흘렸고 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괴로워하지 말라, 엄마는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은 가장 신성한 일이다. 너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사부님의 제도가 없었다면 엄마의 오늘이 없었고 또 우리 가족도 없었을 것이다. 사부님께서 모함을 당했으니 난 반드시 그 명예를 회복해야겠다.”
경찰은 저희를 바리바오(八里堡) 유치장으로 끌고 갔다가 다시 가도 판사처에 끌어갔으며 두 곳에 각각 1주일씩 갇혔습니다. 그것은 층층의 고비를 넘기는 과정이었고 저는 매우 확고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중점 인물’이 됐으며 모든 교란이 들이닥쳤습니다. 난관구 조직부, 가도주임이 반복적으로 저를 찾아 면담하면서 “공산당원은 파룬궁을 수련해서는 안 됩니다. 당을 선택할 것인가요? 아니면 파룬궁을 선택할 것인가요? 계속 파룬궁을 수련한다면 당적을 취소할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취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자원으로 탈퇴하겠습니다”고 말하고 즉시 탈당신청서를 작성했습니다.
나중에 교란이 더욱 심해져 날마다 찾아와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었으며 더욱이 제 다리를 묶어둘 수 없었습니다. 저희 4명 수련생은 다시 베이징으로 떠났습니다. 길에서 붙잡힐까 봐 열차를 여러 번 갈아타면서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저희 4명은 두 팀으로 나눠 현수막을 감아서 다시 팔에 감은 후 핀으로 옷소매에 고정하였습니다. 금수교 옆에는 모두 경찰이어서 현수막을 펼칠 수 없어서 저는 현수막을 지하철 입구 난간에 달아놓고 바람에 날려갈까 봐 현수막 옆에서 지켰습니다. 이때 단번에 여러 명이 몰려들어 구경했고 저도 사람들 속에 있었습니다. 경찰이 달려왔으나 누가 걸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 과정 중에 저는 매우 탄연했고 당당하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바로 법을 실증하고 가장 바른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매번 대법제자가 창작한 노래 ‘천안문 광장이여, 나에게 알려달라’를 들을 때마다 몇 번이나 베이징에 갔던 그 장면들이 떠올랐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정의의 목소리로 들려주었다네…… 얼마나 많은 현수막이 높이 들렸던가? 솔솔 부는 바람이여, 넌 가장 똑똑히 들었나니,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여전히 하늘가에서 맴돌고 있구나’, ‘천안문 광장이여 나에게 알려다오, 얼마나 많은 제자가 대법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를, 하늘의 흰 구름이 가장 똑똑히 보았나니……’ 저는 감동에 눈물이 흐릅니다. 사부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사부님, 저는 대법을 위해 왔습니다.”
3. 대법을 실증하고 사람을 구하는 일이 급하다
다리는 제 것이며 입도 제 것으로 저는 어디에 가면 그곳에서 진상을 알렸으며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저는 ‘사해를 떠돌며’ 많은 대도시에 갔었습니다. 베이징, 상하이, 하얼빈…… 지방에도 갔었으며 자오둥, 두이칭산, 후란에도 갔었고 농촌에도 갔었습니다. 이런 곳은 모두 제가 진상을 알리는 곳입니다. 제가 사는 시의 큰길과 골목, 상가와 슈퍼, 버스 정류소에서도 대법의 아름다움, 사부님의 자비로움, 사당의 죄악 등 진상을 알렸으며 진상자료를 곳곳에 배포했는데 자료가 없으면 손으로 적었습니다.
한번은 상가에서 한 중년 여성을 만나 그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소개하고 사존께서는 사람을 구하러 오신 것이며 왜 삼퇴해야 하는지 알려줬고, 삼퇴하면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이치를 말해줬습니다. 그녀는 대법을 매우 인정하고 삼퇴했습니다. 저는 또 그녀에게 호신부를 선물했습니다. 그녀는 즐거운 모습으로 말했습니다. “언니는 참 좋은 사람입니다. 제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이 보석 반지를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습니다. 저는 “이건 안 돼요! 대법 사부님께서 구하신 것이에요! 감사를 드리려면 사부님께서 감사드려야 해요. 저희는 어떤 재물도 받지 않으며 오직 상대방이 구원받으면 됩니다.” 헤어질 때 그는 떨어지기 아쉬워했으며 거듭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상가를 지나가는 길에 의자에 한 농민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사용했습니다. 저는 매우 예의 바르게 그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파룬궁이 박해당한 일과 삼퇴하면 평안을 얻는다는 진상을 말했습니다. 그는 들어본 적이 있으며 소선대원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럼 탈퇴하세요”라고 하자 그는 “네!”하고 바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호신부를 주면서 진심으로 9자 진언(眞言)을 외우라고 당부하고 호신부가 당신을 평안하고 행복해지도록 보증할 것이라고 알려줬습니다. 그는 기쁘게 받았고 자신은 ○○지역에 살고 있는데 외손자를 돌보러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며칠 지나서 집에 다녀올 때 저에게 무농약 쌀과 밀가루를 가져다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며 말했습니다. “저희는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 재물을 받지 않습니다. 그 마음만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그럼 전화번호를 교환합시다.” 저는 “좋지요!”라고 말하고 작은 노트에 전화번호를 적었습니다. 바로 이때 한 남성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뭘 적고 있어요?”라고 하며 제 노트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내가 뭘 적던지 당신이 관여할 일인가요?” 그는 내가 매우 엄숙한 태도인 것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습니다. 사실 상가에는 많은 사복경찰이 있었으나 사부님께서 말씀해주신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두려워하면 그놈은 붙잡을 것이요 생각이 바르면 사악은 무너지리라”[2]
그해 초겨울 어느 날, 작은 눈비가 내리고 바람이 꽤 세찼습니다. 저희 몇 명은 약속하고 진상을 알리러 나갔으나 한 시간 남짓해도 차가 오지 않았습니다. 옷은 눅눅히 젖어 들었고 걸음을 걸으면 신발 모양으로 구멍이 패고 신발 주위의 눈을 다 녹여도 발이 얼어드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저는 정류소에서 진상을 알려 3명을 삼퇴시켰습니다. 그중 한 명은 다른 지역 사람으로 양손에 큰 물건을 들었으며 비닐주머니가 비에 젖어 물이 흘렀습니다. 저는 그에게 큰 손가방을 주어 물건을 모두 그곳에 옮겨 담았습니다. 그제야 차가 와서 저희는 함께 차를 탔습니다. 그는 감격해서 말했습니다. “오늘 정말 좋은 분을 만났습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어요.” 그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은 정말 좋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진상 CD와 호신부도 주면서 호신부를 잘 간직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진상을 알리면서 또 여러 차례 경찰이나 사복경찰을 만났으나 저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수련생과 함께 진상 CD를 배포하려고 정류소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중년 남성이 보이길래 그에게 “안녕하세요! 당신도 차를 기다리시는군요!”라고 말을 건네면서 CD 한 장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받아서 호주머니에 넣으며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세요?”라고 질문했습니다. 저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경찰이시군요! 우리 집에도 경찰이 있습니다! 경찰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지요! 집에 돌아가 제가 드린 것이 무엇인지 잘 보세요. 장쩌민의 희생양이 되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그의 태도는 부드러워졌습니다. 저는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천안문 분신자살은 가짜입니다. 거짓말로 수많은 사람이 해를 입었습니다!” 그는 저의 선한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아주머니, 오늘은 저 같은 사람을 만났으니 다행이지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붙잡혀서 큰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날씨가 이렇게 춥고 바람이 세차니 집에 들어가세요! 이후에는 만년이나 잘 보내세요!” 그는 먼저 차를 타고 떠나면서 손을 흔들어 저에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중생을 구함에 날씨가 춥고 땅이 얼어들어도 가치가 있습니다!
여름에 한 수련생이 옥수수를 구워 팔았는데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먹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다가가 한 여성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혹시 삼퇴하면 평안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그는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곧 그에게 호신부를 건넸습니다. 장사하던 수련생은 저에게 눈치를 주었는데 뜻인즉 그녀가 경찰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경찰이라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려 대법이 널리 전해진 사실과 장쩌민이 박해운동을 발동한 일을 알려 나중에는 삼퇴를 받아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감옥장이라며 자신은 그곳의 감옥경찰이며 파룬궁 수련생(박해)을 관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파룬따파는 불법(佛法)입니다. 반드시 파룬궁을 좋게 대해야 하지 절대 박해에 가담해서는 안 됩니다!” 그녀는 “알겠습니다. 당신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덕을 쌓고 선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후 만나게 되면 언제나 반갑게 인사했고 저를 큰언니라 불렀습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저랑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올해 봄, 저는 아파트 단지에서 70여 세 할아버지와 만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이미 모두 삼퇴해서 이 할아버지에게 호신부를 건네주면서 잘 간직하라고 당부했더니 상의 호주머니에 소중히 넣었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또 그와 만났는데 저를 보고 웃었습니다. 저는 알아보지 못해 “낯이 익으신데요!”라고 했더니 그는 “잘 알아보지 못하겠어요?”라고 하며 상의 호주머니에서 호신부를 꺼냈습니다. “이건 알아보시겠죠?” 우리는 같이 웃었습니다. 수년간 저는 진상을 알리며 호신부를 대면해 많이 배포했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었고 싫다는 사람에는 주지 않았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잘 간직하며 그것이 당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알려줬습니다.
중생은 모두 구원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4. 사존께서 자비롭게 보호하시다
수년간 시시각각 사존께서 자비롭게 보호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베이징에서 붙잡혔을 때 저는 대법 책을 지니고 있었으나 감출 곳이 없었으며 경찰이 몸을 수색하려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저는 저희가 갇힌 방에 바늘과 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책을 옷 속에 기워 넣었습니다. 경찰은 수색해내지 못했으며 대법 책이 보호됐습니다. 그 방에는 전국 각 지역의 많은 수련생이 갇혔으며 어떤 사람은 경찰의 구타로 코피가 흘렀고 얼굴이 퍼렇게 멍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법 책을 잘 간직하지 못해 저는 그 책을 제 가방에 넣었지만, 경찰은 저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창춘으로 압송될 때 열차에서 저는 대법 책을 슬그머니 꺼내서 다른 주머니에 넣은 후 큰아들을 만났을 때 주었습니다.
2002년 설 전날, 제가 집에서 연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웃이 숨을 헐떡이며 문을 두드렸습니다. “언니 집에 계세요? 집에 계세요?” 문을 열어보니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습니다. “경찰이 추옌의 집을 포위했고 좀 있으면 이곳으로 올 거예요. 어서 피하세요!” 추옌 수련생은 우리 집 앞 건물에 살았습니다. 저는 경찰이 대법제자를 붙잡으러 온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웃은 수련하지 않았으나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으며 그도 진상을 알았습니다. 저는 대답하고 물건을 챙겨 집을 나서려 했습니다. 남편이 물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할까?” “절 따라오세요!” 저는 말을 마치고 문을 나섰으며 아파트 단지에서 빠져나갔습니다. 남편이 4층까지 내려왔을 때 경찰과 정면으로 마주쳤으나 경찰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택시를 타고 떠났으며 에돌아서 아들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들 집에서 삽입방송 소식을 알았습니다. 창춘 ‘305’TV에 파룬궁 진상 영상을 삽입방송해 사악을 크게 진압하자 시에서 큰 수색과 체포가 시작된 겁니다. 그때 창춘에서 5천여 명의 대법제자가 붙잡혔고 공포적인 유혈탄압이 시작됐습니다! 이번의 난에서 저는 피해 갔고 나중에 이사해서 많은 시끄러움에서 벗어났습니다.
한번은 자료점에서 자료를 갖고 나오는데 경찰과 정면으로 마주쳤고 서로 스치며 지나갔습니다. 그 경찰은 대법제자를 붙잡으러 온 것이었는데 결국 자료점이 수색당해 큰 손실을 보았으며 수련생이 붙잡혀 불법적으로 1년 반 감금됐습니다. 이렇게 시간차로 저는 박해에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7.20’ 이후 수련환경이 파괴돼 법공부할 곳이 없었으며 함께 법공부하기를 매우 바랐는데 이는 사부님께서 남겨주신 것입니다. 저는 집에 법공부 팀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가족은 큰 압력을 느꼈고 이웃도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두렵지 않았으며 2003년부터 지금까지 이미 17년을 견지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밍후이왕이 “이 과정 중에서, 문제가 나타나지 않는 자체가 바로 사악에 대한 가장 큰 타격이다.”[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련생은 이지적이고 명석했으며 정념정행으로 이 법공부 장소를 수호했습니다. 법공부, 발정념, 자료전달, 정보교환 등을 모두 법공부 팀에서 완성했습니다. 법공부할 때 많으면 7~8명, 적으면 4~5명이었습니다. 이웃은 다 알고 있었으며 “집에 손님이 많이 오시네요!”라고 했으나 누구도 밖으로 말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법공부하면서 여러 번 경찰의 소란이 있었으나 모두 정념으로 대해 시끄러움이 나타나지 않았고 손실이 없었습니다.
17년간 저희 법공부 팀은 사부님의 보호, 가족의 지지, 수련생의 정념, 이웃의 보호로 사악의 눈 밑에서 무사히 지나왔습니다.
5. 불광이 천지를 비추다
한 사람이 연공하면 가족이 이로움을 얻습니다. 딸이 뇌하수체 종양으로 수술을 했는데 의사는 임신 가능성이 3분의 2로 특별히 낮아진다고 했습니다. 결혼 후 8년이 지나도록 딸은 임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1992년으로 저에게는 딸의 상태가 마음의 병이 됐습니다. 아이가 없어서 부부 사이가 금이 갈 것 같았습니다. 저는 사부님 집으로 찾아가 딸을 좀 봐주실 것을 바랐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딸을 설법반에 참가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92년 8월 26일, 사부님께서는 항공클럽에서 제3기 학습반을 개최하셨고 모든 수련생의 신체를 조절해주셨습니다.
저는 딸과 가족 모두를 데리고 참가했습니다. 한 달 후 딸은 꿈에서 새 한 마리가 자신의 품에 날아들어 놀라서 깨어났는데 이후 정말로 임신했습니다. 1994년 봄, 저는 밍팡궁에서 사부님의 제7기 학습반에 참가해 법을 들을 때 천상에서 한 소녀가 내려와 제 무릎에 앉는 것을 보았습니다. 점심에 집에 가보니 사위가 말했습니다. “출산했습니다. 딸입니다.” 가족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이 아이는 사부님께서 주신 것임을 모두 알았으며 사부님께서는 제 가족에게 어린 선녀를 주셨는데 대법은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아이는 매우 총명해 3살 반부터 ‘전법륜(轉法輪)’을 읽을 수 있었고 ‘논어(論語)’를 외울 수 있었습니다. 사부님을 특별히 공경했고 늘 사부님께 무릎을 꿇고 인사드렸습니다. 5~6살 때 저는 손녀를 데리고 농촌에 있는 친척 집에 갔습니다. 저는 손 글씨로 진상 전단을 만들어 마을에 붙였습니다. 손녀가 말했습니다. “외할머니, 제가 망을 볼 테니 잘 붙이세요.” 어린 나이임에도 이런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손녀는 26~27살이 됐으며 사부님께서 경문을 발표하실 때마다 손녀를 불러서 “사부님께서 경문을 발표하셨어. 어서 봐!”라고 알려줬습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사부님에 대해 매우 존경하고 서로 친하게 지냅니다. 특히 딸은 누군가 대법이 나쁘다고 하면 그 사람 면전에서 옳고 그름을 따집니다. 제 손에 자료가 있으면 빼앗아서 배포합니다. 딸은 사부님을 여러 차례 뵈었는데 역시 인연입니다. 딸은 ‘전법륜’을 한번 베꼈습니다. 둘째 며느리도 한번 베꼈습니다. 모두 매우 착실히 적었습니다. 큰아들은 ‘전법륜’을 2번 읽었으나 그들은 모두 연공하지는 않았습니다. 셋이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글자를 적었는데 제가 그것을 잘 간직해두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신사신법(信師信法)하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매번 저를 보러 올 때면 과일을 사다가 사부님 법상에 올렸습니다.
저희 집에는 경사경법(敬師敬法) 이야기가 매우 많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일은 설날입니다. 섣달그믐날 제가 사부님께 과일을 올리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3명의 아들딸과 손녀들은 사부님께 절을 올리는데 자발적으로 합니다. 절을 올리고 제 옆으로 다가와 세뱃돈 주기를 기다립니다. 예전에는 20위안을 줬고 나중에는 50위안을 줬으며 최근에는 200위안을 주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경사경법하고 신사신법하니 저는 즐겁기만 합니다! 가족 모두 복을 받는 일이 줄줄이 있었습니다. 큰손녀가 말했습니다. “할머니 방에는 태양도 있고 달도 있어요.” 둘째 손녀는 직장을 찾아 면접을 볼 때 호신부를 지니고 갔는데 200명 중에서 20명을, 그리고 다시 20명 중에서 4명을 뽑는 자리였습니다. 손녀는 합격해서 은행에 다니고 있으며 누구도 부정한 수단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사부님의 어린 제자로 설법반에 참가했으며 어려서부터 법공부하고 연공해 천목도 열렸고 사부님께서 지켜주고 계십니다!
남편도 변하고 있는데 수년간 사악한 박해에서 저를 따라 두려운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하지만 늘 저를 지켜줬고 수련생들이 우리 집에서 법공부하는 것을 지지했으며, 각종 형식의 박해를 저지했고 바른 것과 사한 것을 잘 분간했습니다.
현재 가족은 4대가 살고 있으며 아들딸의 친척들, 지인과 친구 모두 대법을 인정합니다. 이웃에게도 진상을 제대로 알려 삼퇴해야 할 사람은 모두 삼퇴했습니다. 매우 오래된 동료나 친구에게도 빠짐없이 진상을 알려 대법 진상을 알고 있습니다.
최근 정법이 표면으로 다가올수록 저는 에너지가 더욱 강한 것을 느낄 수 있으며 에너지장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큰 파룬이 천정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연공만 하면 몸이 뜨겁습니다. 올해 설날 집에 등을 끌 수 없었습니다. 밤낮으로 켜져 있어서 아이들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수리공을 불러 수리하려 했으나 어떤 문제도 없었으며 이웃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해줬습니다. “괜찮아, 에너지장이 강해서 등이 모두 켜진 거야. 만물에는 모두 영성이 있어! 내가 법공부를 하도록 비춰주는 거야. 모든 것은 자연히 바르게 잡힐 거야.” 갑자기 어느 날 등이 스스로 꺼졌고 정상으로 됐습니다.
맺음말
지난 28년 수련의 길을 더듬어보면 걸음마다 영화를 보는 것 같으며 사부님께서는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저희를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지불하셨고 저희가 한 일은 너무나 적습니다. 사존의 요구와 비하면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28년 사존의 보호하에 엎어지고 넘어지며 오늘까지 걸어왔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련 중에 이미 가장 어려운 데에서 걸어 지나왔다. 최후의 길을 잘 걸어야 하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소중히 해야 한다! 쉽지 않다. 당신들은 걸어 지나왔다. 이것은 역사상 유례없는 이런 마난에서 걸어 지나온 것이다. 당신들은 반드시 소중히 해야 한다.”[4] 사부님께서는 설법에서 수차례 ‘소중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을 쓸 때 뒤돌아 자신이 걸어온 수련의 길을 돌이켜봐서야 사부님께서 저희에게 ‘소중히’ 하라고 말씀하신 뜻과 그 무게감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해 법을 얻을 때 사부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의 그 단전(丹田) 등 부위에 물체를 넣어주어야 하는바, 씨앗처럼 만 가지가 넘는 것들을 생기게 하고, 장래에 또 당신들을 지옥에서 제명해 주어야 한다. 이는 당신들에게 알릴 수 있는 것이며, 또 더욱 많고 더욱 많은 것들을 당신들에게 해주어야만 당신들은 진정으로 수련할 수 있고 대법(大法) 중에서 진정으로 수련해 낼 수 있다.”[5]
사부님께서는 또 저희를 종자같이 인간 세상에서 재배하셨고 28년의 비바람을 지나 뜨거운 불 속에서 단련하여 마침내 성숙했습니다.
최후의 최후에 저희는 반드시 잘 걸어갈 것이며 사부님의 기대와 자비로운 제도에 어긋나지 않고 원만으로 향해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여래(如來)’ 글로 수련생과 함께 격려하고 싶습니다.
여의진리(如意真理)를 지니고 와
소탈하게 온 천하를 거니네
법리를 세간에 널리 뿌려
중생 가득 실은 법선 띄우네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미국중부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시: ‘홍음2-두려울 것 뭐냐’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10-밍후이왕(明慧網) 10주년 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8-2008년 뉴욕법회 설법’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휴스턴 법회 설법’
(밍후이왕 제17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원문발표: 2020년 11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0/11/27/415601.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20/11/30/1885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