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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후 200년간의 미술에 대한 해석 (3)

글/ 아르노 H.

[밍후이왕] 화려한 르네상스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영향력은 역사의 한 장에 나오는 황종(黃鐘), 대려(大呂)처럼 업적이 매우 위대하다. 이번 인류문명의 미술은 르네상스 시대에 성숙해졌고, 향후 200년간 서양 미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르네상스 이후 200년은 각종 상생상극의 요소가 격렬하고 미묘한 갈등을 겪으면서 음양의 균형이 점차 무너지는 단계였다. 무수히 많은 관련 요인과 배후의 심원함은 필자가 한두 편 문장으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은 개인의 얕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당시 서양 미술의 일반적인 상황과 그 역사 시기가 사람에게 준 일정한 시사점 등 몇 가지 측면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전편에 이어)

과학적 사상의 만연과 종교 신앙의 쇠약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이유는 미술사에서 새로운 물감의 발명, 조색액의 사용, 미술 이론의 갱신, 혹은 미술 주제의 변화 등은 그것과 관련됐기 때문이다. 역사의 오랜 기간 과학의 발전은 줄곧 반 침체 상태에 처해 있었다. 옛날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과학을 발전시키려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없었기에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극소수에 한정돼 당시 물질세계에 오늘날과 같은 과학연구 환경이 존재하지 않았다. 평화로운 시대에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대부분 평온하게 지내고 전통적인 일을 하며 교회에 가서 신앙에 충실히 하는 등 현대 과학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개신교는 교리에서 교정을 우회해 개인과 하느님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하기 때문에 성직자를 통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신도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길 바랐다. 그러나 16세기 보편적으로 문맹인 유럽 각국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따라서 개신교 국가들은 교육부터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민중의 문맹률을 낮추는 데 주력했다.

국민의 낮아진 문맹률과 문화수준의 보편적인 향상은 지식인을 더 많이 만들었고, 이들 중에는 경건한 신자들이 평생 자연계의 신비를 탐구하면서 신의 창조가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는 신자들이 많았다. 이런 밖으로 찾는 태도는 원시 기독교의 내수(內修) 원칙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점차 일종의 이념적 흐름이 형성됐다. 과학자들이 대대로 끊임없이 노력해 과학의 신속한 발전을 추진했다.

개신교 민중의 지식수준이 보편적으로 향상할수록 자연적으로 천주교는 더욱 압력을 받았다. 만약 개신교 지식인들이 신교가 좋다고 청산유수처럼 말하는 것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면 천주교는 어떻게 신도들을 끌어들이겠는가? 천주교 고위층의 지시로 16세기에 종교개혁에 대처하는 예수회(Society of Jesus)가 역할을 맡아, 학교를 설립해 교황청에 충성을 다하는 성직자와 천주교 지식인 양성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 역시 과학의 발전을 촉진했다.

신앙이 비교적 순수한 상태에 있을 때면 과학발전 자체가 신앙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알다시피 인류 역사상 많은 저명한 과학자들은 경건한 종교 신자이며 과학 지식이 풍부하다고 해서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앙이 불순할 때 다른 요소가 섞여 들어가면 신앙을 더욱 파괴할 수 있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많은 과학실험 결과가 공개되고 발표돼 사람들은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더 믿었다. 이로 인해 사람의 진정한 신앙은 과학으로 대체되고 종교는 인류문명과 사회학 개념으로 인식됐다.

사람 마음의 변화와 종교의 쇠약은 종교 교의 자체와도 직결됐다. 당시 많은 과학적 연구가 기독교의 핵심사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신학이론을 뒤집었다는 사실을 상세하게 보여줬다. 예를 들어 기독교 신학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적지 않다. 피사의 사탑에서 동시에 던진 두 개의 서로 다른 무게의 공이 동시에 착지했다는 사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서로 다른 무게의 물체 낙하 속도가 다르다는 이론을 뒤집을 때 신학에 대한 일부 사람들이 의구심이 생겨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질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역사를 조금 아는 사람은 모두 아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독교 신자가 아닌 기원전 384년부터 기원전 322년까지의 인물이며, 사후 300여 년 만에 예수가 태어나서야 제자들이 기독교를 세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초기 일부 선교사들이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기독교 교의 타당성을 논증할 때 기독교 이론체계에 포함시킨 것으로, 엄밀히 말하면 일종의 외래적 존재로 종교 교의 순수성을 훼손한 것이다. 이들 이질적인 사상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종교에 작용하는 폐해가 드러났고, 시대의 발전에 따라 그 부작용은 더욱 뚜렷해졌다.

이에 대해 일부 사람들의 ‘성경’에 대한 부정도 있었다. 주지하듯이 ‘성경’은 여호와는 물론 예수의 친필이 아니라 후세 사람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유전, 전술, 회상, 서술 및 번역 과정에서 오차가 많이 생길 수 있고 사람들이 각자(覺者)들께서 고층차에서 하신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기도 어려워 글을 쓰면서 의미의 편차가 생길 수 있으며, 심지어 사실을 잘못 기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각자들께서 말씀하신 ‘하늘’은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하늘’과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그러나 인간의 편협한 논리에서 비롯된 낮은 지혜로 과학과 신학이 점차 대립됐다. 과학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어려우며 사람들의 잠재의식에서는 과학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여긴다. 더욱이 갈수록 심해지는 성직자들의 부패와 일삼는 전횡이 사람들을 반감이 생기게 했으며 유물론적 이성적 사고의 발전을 야기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의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은 중세기에 기독교 신학에 추가돼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의 모습을 보여줬고 학문적 전통을 추구하는 천주교회의 지원으로 크게 발전했다. 물론 이 과정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교도라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학문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렸든, 아니면 아무 다른 이름으로 불렸든 그 정신은 이미 넝쿨처럼 끊임없이 자라났다.

초기의 과학은 세계 각국에서 모두 독립된 학과에 속하지 않고 신학, 신비학, 신앙 등의 요소와 하나가 됐다. 예컨대 천문학은 먼 옛날의 성상 이론과 점성술, 화학은 연금술에서 탈바꿈하는 것 등 과학의 은밀한 발전과정에 아랍권의 고도로 발달한 연금술과 점성술이 유럽에 전파되면서 무슬림 세계의 일부 종교이론이 뒤섞여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를 개변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과학지식이 대체한 것 같지만 과학연구의 길은 종교에서 점차 발전된 것이다.

종교개혁 후 만인제사장설[萬人祭司長說, priesthood of all believers-모든 신자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으므로 제사장(사제, 중재자)은 필요 없다는 주장-역주]라는 이론은 많은 개신교 과학자들이 자연과학 연구를 하느님의 조물을 탐구하는 제사장 활동으로 간주했고 17세기에는 철학적 풍조를 이루기도 했다. 그래서 비밀 단체의 각 방면의 지원으로 원래의 자연철학은 점차 오늘날의 물리학으로 탈바꿈했으며 과학은 신학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신학을 발밑에 뒀다.

종교 세력의 행위도 이런 신앙의 전환에 촉매제가 됐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가 1543년 태양 중심설(지동설)을 발표해 신학의 지구 중심설(천동설)에 도전하자 교회는 관대한 태도를 취했고 로마교황청은 70여 년간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를 금지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갈릴레이(Galileo Galilei) 저서가 학설을 세운 시대에는 교황청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브루노(Giordano Bruno)가 불에 타 죽은 것이 과학과는 무관한 사례였던 것과 달리, 갈릴레이가 1633년 종교재판소에서 가택연금 종신형을 선고받은 것은 지동설을 지지하는 것과 관련됐다. 많은 관련 과학 문헌도 17세기 초 금서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에 등재돼 인쇄와 수입, 판매가 금지됐다.

폭력을 통한 압살은 외형적으로는 교황청의 위엄을 지켜냈지만 민중의 사상이 점차 활성화되는 시대에는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종교는 사람이 진심으로 믿는 토대 위에 세워졌지만 일단 사람들이 종교를 믿지 않고 겉으로만 교회가 장악한 무력에 굴복해 교회에 복종할 수밖에 없게 되면 종교는 더는 사람 마음을 가르치지 못하게 돼 실질적으로는 쇠락한다. 성주괴멸(成住壞滅)과 음양정부(陰陽正負)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

부정적 요인의 성장은 물질적 측면에서도 나타났다. 과학의 발달로 17세기 활강 총과 부싯돌 총의 발명으로 인류의 최대 냉병기 갑옷인 판갑옷의 방호력은 총기의 가볍고 강력한 살상력을 이기지 못해 점차 방치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에 따라 파멸의 힘이 방어의 힘을 능가해 인류의 괴멸로 가는 추세가 날이 갈수록 뚜렷해졌다.

사상 분야에서 계몽운동(The Enlightenment)이 등장하면서 이전 사회에서의 좋고 나쁨의 균형이 깨졌다. 실증과학의 발전을 토대로 유물론적, 이성적 사고를 신봉하는 계몽주의자들은 날카로운 논리와 빠른 사변은 쇠약해진 상태의 종교적 권위를 뒤흔들었다. 17세기 유물론적 성향을 띤 ‘자연신론(Deism)’의 등장으로 당시 종교계가 ‘이단’을 부르짖었다면 무신론의 이론화와 시스템화는 더더욱 각 교파의 분노를 샀다. 그러나 은폐됐던 프리메이슨(Freemasonry), 일루미나티(Illuminati, 광명회), 사탄주의(Satanism), 루시퍼주의(Luciferianism) 등 적대적인 세력들은 이미 커져 전통적인 종교는 의식 분야에서 대중의 사상을 통솔할 능력이 없어졌다. 많은 성직자의 덕행이 부족하고 도덕적인 호소력이 부족해 사람들을 설득시키지 못했으며 오히려 적지 않은 반대자들이 구실로 삼아 종교를 공격했다. 어릴 적에 예수회에서 공부한 볼테르(Voltaire)의 경우, 성인이 되자 교정에 충실하기는커녕 평생 기독교에 대해 욕설을 해대며 상류사회에서 잘 지냈으며 명예와 재물을 함께 얻었고 심지어 죽은 뒤에도 청사에 이름을 남겼다.

신과 전통을 반대하는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의 도덕은 부지불식간에 무너졌다. 개인의 자유와 과학의 이성을 치켜세우는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기적인 부분이 부풀어 오르게 했으며, 신을 믿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남을 침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계몽운동에서 ‘백과사전(Encyclopédie)’의 발행은 과학 보급이라는 명의로 시사 논평까지 했으며, 표어 밑에 주객이 전도된 반종교적 관점이나 정치적 선전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천지 만물에 대한 해석도 당시 낮은 과학수준에 의존해 무신론이나 유물론을 목적으로 멋대로 정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허점투성이지만 근대와 현대 인류의 전반적인 사고방식을 형성했다.

계몽운동은 당시 정상적인 전통사상을 가진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세뇌 운동으로 실증 과학지식과 무신론 관점을 통해 의식 형태에서 종교 신앙을 대체하려 하며 전통적인 사회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 세뇌 선전을 통해 사람의 올바른 믿음을 타파하고 18세기 말부터 기획된 일련의 대규모 살인혁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겠다는 의도였다.(자세한 내용은 ‘제1차 파리코뮌과 신고전주의 미술 (3)’ 참조)

(계속)

 

원문발표: 2020년 9월 11일
문장분류: 천인지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9/11/4115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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