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역병 기간에 외출할 수 없어 온종일 집에만 있어야 했다. 이치대로라면 이렇게 많은 한가한 시간에 마땅히 법공부를 많이 하고 법을 많이 외워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법을 많이 배우지 못했고, 책을 봐도 마음속에 넣지 못했다. 또한, 자꾸 속인 생활에 이끌려 영화와 TV를 봤고 인터넷에 접속했으며, 심지어는 이 기간을 이용해 붓글씨 연습을 하려고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가소롭기 그지없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시간을 들여 글씨를 연습하기만 하면 다소간 수확은 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창피하기 그지없다. 우리의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가? 속인들도 2012년은 대재난으로 예언했고, 영화도 ‘2012’를 촬영했다. 지금 시간은 모두 사부님께서 연장해 오신 것이다. 우리 잘하지 못한 사람들은 마땅히 시간을 다그쳐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만약 정말로 2012년에 끝났다면, 그때 우리는 어디까지 수련했을까? 세 가지 일은 얼마나 했을까? 게다가 글씨 연습은 속인의 관념이다. 글씨를 예쁘게 쓰면 호감을 쉽게 살 수 있지만 이런 것들은 사실 자신의 과시심이며,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고 싶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집착이다.
그해 졸업했을 때 바닷가 근처의 한 과학기술회사에 취직했다. 열심히 노력하고 분투하기만 하면 수확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거의 매일 연장근무를 했고, 주말에도 특근했다. 또 스스로 자료를 찾아 기술을 깊이 연구했다. 애석하게도 10년이 지났지만, 업무는 별로 개선되지 않았고 생활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10년 동안 단지 자신이 수련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을 뿐 세 가지 일은 거의 하지 않았고, 또 틈만 나면 나도 모르게 속인 생활에 빠졌다.
이전에는 줄곧 법을 읽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항상 모 항목의 기능을 위해 침식을 잊고 연습하느라, 우리가 오늘날 대법 수련에 들어설 수 있고, 또 우주의 창세주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수승(殊勝)한 일인지를 잊어버렸다. 틀림없이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오늘날 우리의 수련을 위해 다지고 준비했을 것이다. 오늘의 생활은 우리에게 수련하라는 것이며 속인 생활을 하라고 준 것이 아니다. 우리가 대법제자로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매우 큰 근기를 가졌거나, 어쩌면 방대한 한 천체의 대표일 수도 있는데, 아직도 속인 생활 속에 빠져 있으니 가소롭고 안타깝다. 우리는 본래 뭐든지 다 가지고 있었고 다 할 수 있었다. 다만 잠시 봉한 것으로 그것은 우리의 수련과 조사정법(助師正法)을 위해서였다. 우리가 사람 속에서 봉착한 일체는 모두 수련과 관련되어 있으며 속인의 생활을 안배할 여유가 없다.
황량일몽(黃粱一夢)은 인생이 여의치 않았던 수험생이, 한 노인을 만났는데, 노인은 그에게 베개를 주면서 누워 쉬게 하였다. 그 결과 꿈을 꾸었고, 꿈에서 그는 대갓집 규수를 아내로 맞았고, 벼슬길이 혁혁했으며 아들 손자들은 출세했다. 얼마나 완벽한 인생인가! 줄곧 이렇게 몇십 년 멋진 삶을 살다가 생명이 끝나 죽었다. 결국, 깨어나 보니 꿈이었는데, 옆 가게의 황량 밥[黃粱米飯, 찰기가 없는 조밥]은 아직 채 익지 않았다는 것이다.
속인의 관념에 따라 문제를 ‘분석’한다면, 바로 속인 층차의 사상으로 표현을 대하는데 그러면 심성 위치에 따라 표면 현상을 연화할 수 있다. ‘상수심변(相隨心變, 상은 마음에 따라 변화한다)’이니까. 낮은 층차의 관념으로 문제를 보면 낮은 층차의 이치가 작용을 일으키며 우리를 제약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악경(惡警)의 소란에 직면했을 때 만약 정념이 강하면 정말 사악을 억제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의 관념으로 결과를 생각한다면, 구하고 있으므로 어쩌면 정말로 이런 결과일지 모른다. 우리 수련인은 마땅히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표상은 속인 사회의 규칙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우리가 세 가지 일을 하는데 유익한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수련인은 우연한 일이 없다. 속인 중에서 양성한 관념, 경험, 이른바 지식이 초래한 결과는 바로, 어떤 현상을 보자마자 대뇌는 자동으로 기억 속에서 검색하고, 대응책과 결과에 대한 예측을 찾으며, 심지어는 해결책이 대뇌에 바로 반영되기도 한다. 운동선수들이 훈련할 때 일부러 근육 기억을 조성하게 하는데, 왜냐하면 한 가지 현상에 직면해 분석한 후 다시 동작할 수 있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각종 현상에 직면했을 때 손은 저절로 라켓을 장악해 정확한 반응을 한다. 이 시스템은 살아있는 것 같은데, 상응한 일에 부닥치기만 하면 그것은 스스로 해결책을 찾게 되므로, 주왠선(主元神)의 생각을 거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표현은 같은 대뇌의 생각이기 때문에, 자신이 내보낸 사상인 줄로 여긴다. 사실은 아니다. 사람은 주왠선(主元神), 푸왠선(副元神)이 있으며, 또 다른 생명체가 이 대뇌를 좌우지할 수도 있다.
평소 속인 생활 중에서도, 사람과 사람 간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때, 상대방이 한마디 하면 무슨 뜻을 함유하고 있을까? 그는 무엇을 알고 싶어 할까?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며, 그의 함정을 피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은 바로 이른바 ‘노련(老練)’하거나 ‘사유가 민첩’ 한 사람이다. 우리 연공인은 만약 평소 항상 법에 있다면, 문제에 봉착했을 때 당연히 생각하는 것은 나는 수련인이며, 이런 일을 마땅히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다. 심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가능하게 잘 수련된 부분이 주도적 작용을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평소에 법에 있지 않거나, 혹은 대법에 동화된 것이 부족하다면 문제에 봉착했을 때 속인의 관념이거나 기타 생명체가 먼저 대뇌를 주도하는데, 내뱉은 말이나 한 일이 가능하게 수련인의 요구에 어긋날 수 있고, 나중에 또 후회할 것이다.
속인 중에 ‘신마유강(信馬由韁)’이라는 말이 있다. 대략적인 뜻은 고삐를 잡을 필요 없이 말이 스스로 뛰도록 맡긴다는 것이다. 어쩌면 ‘늙은 말이 길을 알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냥 사람을 태우고 위험한 지경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신마(信馬)’는 경험이 많고 노련한 말, 즉 속인 관념이 풍부한 말을 말한다.
우리의 수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직 일부 속인의 사상이 있다. 선택에 직면했을 때 만약 방향이 없다면 속인의 그 부분 생각이 작용해 속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길 바라는데 어쩌면 우리 수련인의 방향과 반대일 수 있다.
무엇이 ‘순리에 따르다(順其自然)’와 ‘신마유강’인지를 분명히 가려내야 한다. 개인적 이해는 ‘순리에 따르다’는 연공인의 요구에 따라 심성을 제고하고 일을 하지만 사물의 발전 방향과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집착’이란 속인의 사상이 기대하고 있는 것을 말하며 ‘구함’을 체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공인의 기준에 따라 자기의 언행을 요구하고 이렇게 해내기만 하면 된다. 결과가 어떻게 발전할지는 상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출발점은 부동한 층차의 이치로 우리를 요구하기 때문에 사물도 당연히 이런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신마유강’의 개인적 이해는 선택에 직면했을 때, 짧은 시간에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데, 이때 머릿속에서 생각이 하나 떠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생각은 외부에서 온 것인지? 법에 있긴 한지? 주원신은 법으로 가늠해 판단하지 않고 그냥 그 생각에 따라갔다. 하지만 ‘순리에 따름’은 법에 부합된 것이다.
우리는 바로 하나하나의 병(瓶)으로서, 오직 축적된 경험지식(사실은 더러운 물건이다)을 털어내야만 아름다움을 담을 공간이 있으며, 떠오를 수 있다.
함께 노력합시다. 허스
원문발표: 2020년 9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0/9/6/4114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