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노 대법제자로서 26년 수련 노정에 경험도 아주 많고, 사람 마음이 많을수록 우여곡절도 많다. 최근 자신의 신체에 온 고통을 법에서 더 똑똑히 인식하고 전반적으로 구세력의 박해를 부정한 경험을 수련생과 함께 나누며 격려하고자 한다.
99년 ‘7·20’이 다가오는 어느 날, 나는 녹음기를 들고 연공하러 갔다. 그때는 중공 박해의 폭풍이 막 터지기 전이라 환경은 이미 긴장되었다. 연공하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나 혼자 연공 했다. 그때 나는 소업중이었고 이미 3일째 밥을 먹지 못했으며 열이 나고 구역질이 났다. 터우첸빠오룬(頭前抱輪)을 할 때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원만은 불과(佛果)를 얻나니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1] 그러나 나는 탈진해서 손조차 들기 어려웠다. 나는 사부님께 “사부님, 제자는 왜 즐거울 수 없나요?”라고 말했다.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손이 가볍게 떠오르고 온몸이 상쾌해졌다. 모든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부님께서 나의 큰 한 덩이 업력을 없애주셨다. 연공 후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다. 3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았는데 활력이 넘쳤다. 도중에 다른 사람을 도와 언덕을 올라가는 수레도 밀어주었다.
나중에 사당은 전례 없는 대법에 대한 박해를 발동했다. 나는 99년 11월에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한 달간 불법 감금됐다. 2001년 학생에게 진상 DVD를 배포하다가 부모가 신고해 불법적으로 노동교양 1년을 받았다. 2004년 또 5년 형을 선고받았다. 매번 정신과 신체상의 박해를 겪었는데 모두 거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극한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개인 수련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자신의 심성과 업력이 시련을 초래했다고 생각했으며 정법 수련에 대한 인식은 모호했다. 감옥에서 박해 기간 자주 법을 외우고 법공부를 하여 나중에 자신이 사악에 대한 박해를 여태껏 묵묵히 소극적으로 감당하거나 혹은 하는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걸 인식했다.
의식한 후 나는 일사일념에서 자신의 사상을 바로잡고 갈수록 안으로 자신을 보았고, 자신의 사유에 큰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부정적 사유, 소침한 생각, 하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외래 정보의 교란 등 느낌과 감각으로 사물을 판단했다. 자신이 법으로 가늠하지 않으면 일어나는 마음은 모두 구세력의 사유다. 자신의 사상을 정말로 개변시켜야 한다!
낡은 우주의 생명은 우주에 법이 있는 걸 모르고 법을 실증하는 개념이 없다. 그러나 대법제자가 오늘 부딪히는 모든 문제는 우주가 훼멸로 나아가는 시기에 나타난 상태인데 변이된 사람 마음도 포함된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사부님만이 해결할 수 있고 대법만이 해결할 수 있다. 낡은 우주의 어떤 생명도 대법제자를 포함해 자신의 본래 지혜와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법제자가 부딪히는 문제는 오직 대법을 실증하고 신사신법의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기적이 일어나고 진정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한번은 감옥에서 ‘논어’를 열몇 번 외웠는데 자신이 뭘 외웠는지 몰랐다. 마음속으로 아주 괴로웠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기억해야 한다! 수련 자체가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라, 속인의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당신들이 명(名)ㆍ이(利)ㆍ정(情)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될 때, 당신들은 비로소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2] “어떤 사람은 감각에 의거해 연공(練功)하는데, 당신의 감각이 다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진정한 연화과정은 다른 공간에서는 극히 복잡하고 현묘하여 조금만 차이가 나도 안 된다. 마치 정밀계기에 당신이 다른 부속품을 하나 더 넣으면 바로 망가지는 것과 같다. 당신의 모든 각개 공간의 신체는 모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아주 현묘한 것으로서 조금만 차이가 나도 안 된다.”[3] 사부님의 법은 보고 갑자기 깨닫게 됐다. ‘사부님, 저는 너무 부족합니다. 사부님 말씀을 얼마나 이해하고 또 얼마나 믿고 있나요? 제자는 자주 자신의 감각을 믿고 현실을 믿고 사부님 말씀을 한쪽에 놓았습니다.’ 실천 중에서 법을 어떻게 실증하고, 사부님의 말씀이야말로 우주 진리라는 걸 실증해야 한다. 이 방면에서 거의 전혀 깨닫지 못했다. “보이면 믿고 보이지 않으면 곧 믿지 않는 이것은 하사(下士)의 견해이다. 사람은 미혹 중에서 업을 너무 많이 빚어, 본성이 미혹되었으니 어찌 볼 수 있겠는가. 깨달음(悟)이 먼저이고 보는 것은 나중이라, 마음을 닦고 업을 제거하여 본성이 나와야만 비로소 볼 수 있다.”[4] 사부님의 말씀이 우레처럼 들려왔다. 자신이 갈수록 어디가 부족하고 왜 법을 실증하지 못하는지 알게 됐다.
사람은 난(難), 업력이 조성한 ‘병업’의 고통, 업력, 각종 어려움, 모든 불편한 느낌, 정, 모순, 사(私), 속인 사회의 모든 경험 중에 사람의 사유는 어디에서 온 것이고 마음이 움직이는 목적과 동기는 무엇인가? 사람은 복잡한 환경, 복잡한 느낌 속에서 이지적이고 명석하게 알지 못하며 자신의 사유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 마음과 관념, 낡은 우주의 강화된 작용으로 자신의 진아(真我)와 본성을 찾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길을 잃게 된 원인이다. 대법은 미혹을 타파하며, 대법제자의 사상이 법에 있지 않으면 바르지 않는 사상과 사람 마음, 관념, 나쁜 생명을 불러오고, 자신 표면의 주체와 법의 진선인(眞·善·忍)과 격리된다. 아울러 바르지 않는 생명 요소는 갈수록 두껍게 쌓인다. 갈수록 진아와 본성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법에서 갈수록 멀어진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맹렬한 박해다. 내가 법공부팀에서 법공부를 할 때 갑자기 독가스가 심장을 공격하는 유사한 증상이 나타났다. 강렬한 고통에 나는 스스로 일어나기 어려웠고 법공부, 연공, 발정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 자전거를 끌고 나온 뒤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고통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고 사람을 절망하게 한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똑똑히 알고 있다. 이것은 사부님의 배치가 아니다. 자신이 승인하면 구세력과 한패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부정하는가? 우선 자신을 절대적으로 이지적이고 청성하게 유지해야 한다. 나는 누가 배치하고 집행했는가를 보고 이렇게 배치한 최후 생명에게 “당신들이 만약 구도되고 싶으면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데 참여하지 말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대법제자를 고험할 자격이 없고 누가 하면 누구에게 죄가 있다. 동시에 자신의 사람 마음과 관념을 분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은 지속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겁난을 겪을 때 믿음을 잃고 실망하며 절망에 이르러, 곧 타협하게 되고 어쩔 수 없어하며 사악의 자기에 대한 박해와 배치를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난과 고통의 크고 작은 것은 구세력의 배치와 박해를 타파할 수 있는 것과 관계없고 관건은 대법제자가 자신과 구 우주 생명과의 관계를 잘못 놓은 것이다. 대법제자와 그들은 구도와 구도 받는 관계고 박해와 박해당하는 관계가 아니다. 이 관계를 장악하지 못하면 자신을 박해당하는 위치에 놓는데, 그러면 사악은 당신을 가만둘 수 있는가? 대법제자는 신이고 낡은 생명은 도태되는 생명이다. 이런 패괴한 생명이 신을 제약할 수 있는가? 사람이 신을 박해하려고 생각하면 이미 도태될 대상이 된다. 대법제자는 수련자로서 구세력이 마음대로 조종하고 배치하게 하면 안 된다.
이런 관계를 똑똑히 안 후 기뻤다. 나를 박해한 가장 마지막 배후의 생명에게 말했다. “당신이 배치한 이 겁난은 나의 의지를 무너뜨리게 하고 대법과 대법 사부님에 대한 신심을 잃게 하고 어쩔 수 없이 당신의 배치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전혀 당신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니 당신의 가소로운 배치를 취소하라. 당신이 한 이 모든 짓을 배로 당신 몸에 돌려주겠다.”
사람과 신은 일념의 차이다. 결과 고통은 즉시 사라졌다. 심장을 공격한 독가스는 폐기로 변해 밖으로 배출됐다. 몸은 곧 비할 바 없이 편안해졌다. 이것은 내가 가장 명석하게 법을 실증한 한 차례 경험이며 사악의 배치를 부정했다.
대법제자가 평소 엄격하게 자신의 사상을 관리하지 않고 각종 사람 관념이 장기적으로 존재하면 아주 많은 나쁜 생명을 불러오고 자신이 법에서 이탈하게 되므로 구세력의 배치를 걷게 된다. 이것은 정진하지 않는 것이고 엄격한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하지 않아 불러온 난이다.
그러면 높은 표준은 무엇인가? 아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을 것이다. 물론 대법제자마다 법에서 깨닫는 것은 다르다. 최소한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직 할 수 있다. 개인의 이해로, 사람은 하나의 착각이 있는데 표준이 높을수록 더 해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는 실천 중에서 발견했는데 오히려 반대다. 표준을 더 낮출수록 불러오는 난은 더욱 크고 고생은 더욱더 많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사실 수련 자체는 어렵지 않다.”[5]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할수록 법의 힘은 더욱 크다. 왜냐하면, 우리 이 법문은 법이 사람을 연마하는 것이고 자신이 무엇을 가지려 하는가는 자신이 하는 것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홍음-마음고생’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진수’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왜 보이지 않는가’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1-싱가포르불학회 설립식 설법’
원문발표: 2020년 8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8/3/40992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