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등 사의를 표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등 미안함을 표시하는 말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중국 대륙에서 이런 어휘를 사용하는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마음에서 우러나왔고, 순수한 선량함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일까? 다수는 남에게 도움을 청할 때, 혹은 쓸데없는 일을 벌이는 것보다 줄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때, 혹은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할 때의 교활한 마음가짐일 수 있는데,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 자신을 위해서다. 위선적인 것은 또한 스스로는 자질이 높고, 총명하며, 남에게 미움을 사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실제 마음속은 그 누구보다도 약다. ‘무골호인’은 정상적인 보편적 가치관이 있던 사회 변이 이후의 산물이다. 사실 ‘무골호인’은 누가 자기에게 나쁘게 대하고, 누가 자기에게 좋게 대하며, 누구는 친구로 사귈 수 있고, 누구는 다만 이익의 파트너일 뿐이라는 속셈이 매우 뻔하다. 하지만 자신은 누구를 위해 모든 것 혹은 전부를 바칠 수 있을까? 답은 세 글자로 요약하면 ‘불가능’이다.
속인은 이 부류에 속하지 않기가 매우 힘든데, 수련인도 사부님이 지옥에서 건져낸 것이다. 한때 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체면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남들이 자신을 교양이나 인품, 덕성, 문화, 소질이 없다고 말할까 봐 두려웠는데 모두 ‘두려움’의 장난이며, 모두 자신이 상처받을까 두려운 것이다. 다른 사람이 건드리는 것을 꺼리는 ‘가짜 나’가 애써 표면의 번지르르함을 유지하려 애썼고 꾹 참았지만 도리어 한 번도 자신이 잘못했거나 틀린 곳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은 모두 옳고, 자신의 것은 무엇이든지 최고이며, 누구도 비할 수 없으며, 그들은 모두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이는 모두 실수(實修)하지 않은 표현으로서, 팽창이 마지막에 가서는 폭발하며, 무슨 일이든 모두 남을 탓한다.
대륙의 사회 환경은 당문화가 모든 사람의 심령에 빈틈없이 침식해 있어서 이런 점에서 이미 충분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도리어 멍하니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어쩌면 목숨을 내팽개치고 그 ‘자신’을 ‘영원히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하다고 보호하겠지만, 본성의 전통문화의 정수는 도리어 당문화에 빼앗기고, 변이되고, 짓밟혀 면목이 전부 달라졌다.
진상을 덮어 감추는 사회에서 진리는 정통 문화와 함께 지척(심장)에 있지만 감히 바라지도 갈구하지도 못하고,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가슴을 만지는 것조차 쓸데없는 것으로 느낀다. 옛사람들은 항상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하다’로 신뢰도를 형용했으며, 주먹을 머리 위로 들고 맹세하는 것으로 엄숙성을 표현했지만, 우리는 이미 그 시대를 떠난 지 오래됐다. 지금 누가 진지하게 맹세하면, 참 귀엽고 촌스럽다는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너무 슬퍼서 정말로 울고 싶다. 하늘이 내게 이 마음을 부여해 주었지만, 나는 도리어 진정으로 인식한 적도, 소중히 느껴본 적도 없는데, 너무나 슬프지 않은가?
‘거짓되고 과장되고, 헛된’ 환상(당문화, 黨文化)이 오히려 공개 석상의 새로운 유행으로 되었다. 거짓되고 가식적인 것이 바로 신조류이고, 누가 따라가지 않으면 바로 타격의 대상이 됐다. 정말 좋은 사람이라도 허위적으로 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허위야 말로 시대 형세를 잘 파악하는 똑똑한 인물이기에, 동류합오자(同流合汙者)들의 사회질서를 흩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가짜를 진짜로 연기하려 하는데 중생을 미혹시켜, 최후엔 황당무계한 논리가 진리로 되고, 마침내 흰색을 검은색이라 성사시키는 것이다. 정통문화의 신용을 굳게 지키는 것을 ‘일언당(一言堂)’으로 바꾸었고, 죽어도 굽히지 않는 것을 ‘죽어도 뉘우치지 않는다’로 바꿔치기 했으며, 좋은 사람과 좋은 일은 ‘당의 영도 아래’라고 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을 자신의 양심과 격리시켜, 당신이 심장(마음)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만들었다. 심장(마음)이 없으면 당연히 살 수 없으며, 그것은 본래 당신을 죽게 하려 한 것이다. ‘봉신방’ 중의 비간도 사실은 살 수 있었다. 하늘이 가엽게 여겨 살려주었는데 믿었다면 살 수 있었다. 더 이상 우매하지 말고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오늘 경문 ‘불성과 마성’을 베끼는 과정에서 법에서 점화하기를 자신이 늘 남 탓을 하며 생활 중의 작은 일들도 모두 이러했다. 하지만 본인은 외관상으로 볼 때 평온한데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특징이 있는데, 바로 일이 지나가면 끝났고, 점점 스스로 소화했고, 다음 날이면 마찬가지로 즐거웠다. 왜냐하면 무언가가 마음속에 막혀있으면 고민하고 아무래도 불편하기 마련인데, 구태여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있는가? 하지만 수련했는데도 이렇게 대한다면 옳지 않은데, 불편한 그 마음을 파내어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나와서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체면이라는 이 집착심이 승낙하지 않기 때문인데, 체면(명을 구하는)의 마음은 모든 집착심 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형제’는 여전히 자라고 있다, 체면과 증오는 한 뿌리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탄과 붉은 악마는 바로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게 세뇌하며 사람의 정신에 주입시켜 당신을 만성자훼(慢性自毀) 시킨다.
그동안 법공부를 매우 중시했고, 스스로 오성도 나쁘지 않으며, 법리도 조금은 터득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전부는 아니며, 대법의 전체 법리를 깨닫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대법은 정말로 너무 크고 너무 홍대하며 너무 위대하고 너무 자비롭기 때문이다. 늘 여전히 법공부 하기를 좋아하고 법을 베끼고 외우기를 좋아했다. 그랬지만 여전히 한 층의 무언가가 진아(真我)와 법을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항상 한 층, 또 한 층 또 한 층 여전히 한 층이 있었는데 바로 ‘당문화’였고 변이된 외적 물질과 변이된 자신의 물질이었다. 수련의 기점조차 변이를 혼합시켰는데, ‘나’는 근기가 좋고 ‘나’는 선량하며, ‘나’는 지혜롭고 ‘나’는 대법을 배울 수 있으며,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자아는 모두 가짜이고, 전부 ‘가짜 나’이다. 수련한 지 10년, 20년 됐어도 아직도 이러하니, 도대체 수련한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수련했는가? 정말 가소롭고 가소롭다. 오늘에 와서 이 글을 쓰고서야 막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데, 마음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속세의 조롱에 감금됐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총애하여 기르던 ‘가짜 나’에 봉쇄됐다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구하는 것은 수련인의 금기이다. 세간의 모든 좋은 것을 구하는 것은 이미 틀렸다. 남에게 있는 것을 자신도 갖고 싶고, 남에게 없는 것도 갖고 싶으며,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이 있으면 나도 한몫 갖고 싶은데 이것이 바로 집착이 아닌가? 속인의 모든 것은 하늘로 갖고 갈 수 없다. 수련인은 원만을 추구하는데 원만은 무엇인가? 천국에 가서 행복을 누리려는 것은 속인 중의 기득이익과 같지 않는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반드시 보답을 위함인데 보답 없는 대가라면 무엇 때문에 대가를 치르겠는가? 보답을 위하지 않는 대가라면 왜 지급하는가? 이는 바로 속인이다. 틀림없이 그것은 바로 구우주 생명의 본성이다.
개인 체득으로 타당하지 못한 부분은 자비로 시정해주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0년 7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문장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0/7/24/40949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