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밍후이왕 정기 간행물에 실린 글을 읽으며 ‘대륙소식’에서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를 폭로하는 글이나 ‘수련교류’에서 대법제자가 교류한 수련 심득을 막론하고, 나는 자신이 주인공 역할로 몰입되어 들어갔다. 자신의 현재 층차의 법에 대한 인식을 결합해 수련생의 경험에서 바른 면의 교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아주 쉽게 이런 박해가 발생한 배후의 요소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일부 대법제자는 수련 중에서 갑자기 나타난 엄중한 병업 가상이 나타난 후 신사신법(信師信法)하고 온갖 고초를 겪고 여러 차례 뼈를 깎는듯한 고통스러운 시달림을 당한 후 끝내 ‘병업’ 생사관을 넘었다고 말했다. 수련생이 안을 향해 찾고 수련 상태를 바로잡을 때 이 생사관이 나타난 이유는, 최근 한동안 안일심을 구하고 자신을 느슨히 해 속인과 혼동했으며 속인의 드라마를 보았기 때문임을 발견했다. 이렇게 보면, 이 생사관은 완전히 자신이 추구해 온 고생이 아닐 수 없다.
유사한 예는 ‘수련교류’에도 매우 많고도 많다. 자신이 ‘추구해서’ 생긴 생사관을 넘었고 자신이 ‘추구해서’ 생긴 각종 박해를 넘었다. 비록 최후에 사부님의 보호로 넘을 수 있었지만, 이는 심성 층차의 제고에서 얼마나 많은 이로움이 있었을까? 예를 들어 안일심을 ‘추구한다’면, 이는 수련인이 제거해야 할 집착심인데, 누가 주겠는가? 오로지 다른 공간의 구세력의 사악한 요소가 줄 수 있고 당신에게 이 마음이 생기기만 하면 그것들은 즉각 이 마음을 잡고 그것을 강화시킨다. 당신에게 수련의 고달픔과 시달림을 느끼게 하고 사상 속에서 붉은 공포의 압력을 증폭시키는 등으로 대법 책을 들지 못하게 한다. 여전히 속인의 나날이 편안하다고 느끼게 하고 마음이 우울하게 한다. 어쩔 수 없이 점차 본인을 속인과 혼동하며 결국에는 생사관과 각종 박해를 추구해 오게 만든다.
또 원한심, 쟁투심, 과시심, 두려움을 갖고 제거하지 않으면 반복적으로 마의 교란을 ‘추구하게 된다’. 세간에서의 표현은 바로 각종 번거로움인데 예를 들면 경찰의 소란과 박해다. 사실 우리가 만약 일체 속인의 관념과 인식을 내려놓을 수 있고 법에서 이 세계를 명석하게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지금의 속인이 얼마나 가련한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 최근에 이러한 한 가지 장면이 나타났다. 사악한 마가 끝에 핏방울이 맺힌 무수하고 가느다란 관으로 속인마다 감싸고 있었는데 그들의 머릿속에 사악한 현대 관념과 행위를 주입하고 있었다. 동시에 속인의 정수(精華)를 채집하고 있었다. SF 영화 ‘스타워즈’에서 외계인의 기계가 속인을 핍박하며 피를 흠뻑 적시는 장면과 유사했다. 속인 중에서 표현은, 고개를 숙이고 틱톡을 검색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속인은 바로 이렇게 통제당하고 미혹과 무지 속에서 서로를 다치게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사악에 통제당해 직접 대법제자를 박해하고 있다.
만약 이런 장면이 실제로 속인의 현실로 나타난다면, 바로 당신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그들을 원망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또 이익 때문에 그들과 다툴 것인가? 당신은 또, 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가련한 속인을 향해 무엇을 과시할 것인가? 박해를 발생시킨 요소가 다른 공간에서 속인을 조종하는 사악한 마인 것을 보고도 당신은 그런 사악한 마들을 두려워할 것인가?
‘고달픔’은 속인을 놓고 말할 때 나쁜 일이지만 수련하는 사람을 놓고 말하면 오히려 지극히 진귀한 것이며 진짜로 ‘보배’다. 왜냐하면, 다른 공간에서는 고생할 수가 없어서 수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대법제자는 속인 속에서 수련하고 있고 대법제자가 항상 고행하는 승려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대로 집착심을 내려놓은 후 당신의 생활 상태는 속인을 초월하게 되고 당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복을 누릴 수 있다. 대법은 수련인이 정공을 연마할 때 달걀껍질 속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미묘한 상태를 요구한다. 마치 당신이 생사에 관한 생각이 없으면 죽음은 당신을 멀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당신 사상 속에 고통에 관한 생각이 없을 때, 당신은 비로소 수련의 편안함과 미묘함을 느낄 수 있는 것과 같다.
물론 이는 수련 중에서 집착심을 포기해 자연스럽게 도달된 상태이고 추구하려 해도 추구할 수 없는 것이다. 일부 대법제자는 심득체험에서 정공을 연마할 때 다리에 통증이 없어 층차의 지속적인 돌파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 수련 중에서의 수많은 고달픔은 모두 집착심을 안고 내려놓지 않아서 추구해 온 것이다. 아울러 이런 추구해 온 고달픔은 진정한 심성 제고에 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최근 개인의 수련에서의 깨달음이고 만약 적절치 못한 곳이 있으면 자비롭게 시정해주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0년 6월 2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6/23/4080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