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프랑스 대법제자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프랑스 서남부 대서양 피레네산맥 지역에 사는 저는 1년 전, 홍법 활동을 보고 법을 얻게 됐습니다. 대법 연공 음악에 이끌려 저도 공법 동작을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수련 체득을 쓰기 전에 자신을 대법 ‘진선인(真·善·忍)’ 중에 녹아들게 했습니다. 어느 방면의 심득을 적어야 할까요? ‘과시심’이 떠올랐습니다.
어떻게 해야 과시심 없이 과시심을 교류할 수 있을까요?
어려서부터 저는 어른들을 제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용감하게 도전하고, 인생 중에서는 뛰어난 사람, 승리자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을 다른 사람 앞에서 이야기했고, 어떤 사람은 직접 자신을 과시했습니다. 자연히 저도 그들을 따라 하며 업무 환경을 바꾸고, 생활환경을 바꾸었습니다. 과시할 소재가 없으면 저는 협력 파트너를 바꾸었습니다. 과시심은 자극을 주고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그때 저는 이것이 과시심이라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마음을 갖고 저는 대법 수련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으로 ‘전법륜(轉法輪)’을 읽을 때 “이런 과시심리는 곳곳마다 모두 체현될 수 있으며, 좋은 일을 하면서도 과시심리가 체현될 수 있다.”[1]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교류 문장을 쓰려고 준비할 때, 다른 생각이 머릿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심득을 읽을 때 사람들이 제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즉시 이 생각은 순정하지 못한 과시심이 제 교류 문장에 들어오려고 한다는 걸 의식했습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떤 효과가 있을지를 상상하는 이런 것은 모두 과시심을 반영한 것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라는 생각에 교란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처음 연공 동작을 배울 때 저는 두 번째 공법이 매우 좋았습니다. 30분을 견지했는데 제게는 아주 큰 도전이었지만, 한 수련생이 대단하다고 해서 저는 정말 기뻤습니다.
이어서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저는 다섯 번째 공법 가부좌를 끝까지 견지했습니다. 비록 다리가 너무 아프고 마음도 조용하지 못하며 똑바로 앉아 있지 못했지만, 저는 다른 사람에게 제가 가부좌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에 대해 아주 자랑스러웠습니다. 게다가 발정념하는 것을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저는 가부좌를 하고 싶었습니다.
강한 과시심이 있어 단번에 저는 온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가부좌를 하지 못했고, 이 상태는 한 달간 지속했습니다. 이런 결과로 저는 표면에서 인식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속인이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여기고 목적을 달성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가부좌하지 못하는 그 기간에 저는 입정(入靜)에 전념했습니다. 이것 역시 제가 줄곧 도달하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단체 법공부 후 교류할 때 제게 몇 번이나 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제가 한창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진 그 시각 저는 강한 표현하려는 욕망이 있었고, 또 이렇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생각이 나타났습니다. 그 시각 저는 마치 필터 하나가 과시심을 막고 있는 것을 보는 듯했습니다.
진상을 알리는 중에 과시심이 폭로되다
어느 날 오전 단체 법공부 때, 저는 늘 한 글자를 빠뜨리고 읽는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이미 세 번째나 이 글자를 빠뜨렸습니다. 이 단락은 어떻게 공을 전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매번 이 단락을 읽으면 의문이 생겨, 나는 ‘파룬따파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낼 수 있을까?’라고 자신에게 반문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오전, 저는 이것은 안으로 찾으라고 저를 점오해 주는 것임을 인식했습니다.
제가 자신의 층차에서 초보자에게 파룬따파를 소개할 때 그들은 매우 흥미를 느꼈습니다. 저는 신경을 써서 말하지만 말하다 보면 과시심이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적게 말하며 책을 보고, 대법 사이트에 들어가 보라고 했습니다. 이때 저는 ‘진선인’ 중에 있습니다. 그들이 질문한 문제가 많을 때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평소 집에서, 직장에서, 친구 사이에서의 역할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가치 있는 상담을 해주며, 늘 그들에게 건의해주고, 그들을 도와 문제를 해결해줬습니다. 사실 이것은 모두 비자각적인 과시심입니다.
길에서 진상을 알릴 때 저는 늘 유머 있는 방식으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왜 이런 방법이 좋다고 느껴질까요? 저는 진상을 알리는 배후에도 과시심이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농담하는 방식으로 제가 알릴 진상 내용의 무거운 느낌을 감소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나온 사람들은 중공사당(中共邪黨)의 사상 관념이 가득 차 있어 자기도 모르게 극단으로 갑니다. 이 잘못된 관념은 하나의 칸막이입니다. 구세력이 나에게 강제로 준 것이고, 목적은 제가 수련해 제고하는 것을 교란하고 저지하기 위함입니다.
진상을 알릴 때 나온 과시심은 다른 사람 앞에서 “내가 얼마나 훌륭한가?”를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상이 자동으로 반응해 끊임없이 자아의 가치를 표현하고 싶고, 표현이 갈수록 미묘하고 바르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고 자신만 생각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인식하고 나니 더는 과시하고 싶은 관념이 없었습니다. 과시심이 있을 때 제가 한 말과 행동은 아무리 좋아도 더는 공(功)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인식한 그날 오후 ‘전법륜’을 조금 읽은 신 수련생이 제게 “저는 여쭙고 싶은 문제가 많습니다.”며 전화했습니다. 그녀는 아직 진정한 연공인이 아니기에, 저는 그녀에게 제가 이 방면에서 과시심이 있었다는 것을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온화하게 선의로 그녀에게 말하며, 자신의 집착심을 과감히 제거했습니다. 한참을 말하고 나니 그녀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겠어요. 저더러 ‘전법륜’을 보라는 것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재미있다고 느껴졌지만, 과시심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두세 가지 질문을 해, 저는 그녀에게 책에서 답을 찾고 스스로 깨달으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만족하며 이 책은 마치 폭탄처럼 에너지가 가득하며, 손으로 만져도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법에서 자신의 잘못된 관념을 제거하고, 정념으로 공간장을 청리하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법은 일체 사악을 타파할 수 있으며, 법은 일체 거짓말을 타파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히 할 수 있다.”[2] “무릇 연공(煉功) 중에 이런 교란, 저런 교란이 나타나면, 당신이 아직도 무엇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지 당신 자신이 원인을 찾아야 한다.”[1]
저는 더욱 중시해 제 경지 중에서 대법에 동화하겠습니다. 저는 정신을 집중해 ‘전법륜’을 읽겠습니다. 저는 자신의 공간장을 청리할 때 끊임없이 이 과시심을 제거하겠습니다.
이것은 저의 현재 층차에서의 이해입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교란을 배제하자’
(프랑스 인터넷 법회 교류원고)
원문발표: 2020년 5월 2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5/26/40681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