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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두시 파룬궁수련생 황민, 박해로 사망한 상황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쓰촨 보도) 1999년 7월에 중공(중국공산당) 장쩌민(江澤民) 집단이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한 후, 청두(成都)시 파룬궁수련생 황민은 파룬궁 수련을 견지한 이유로 여러 차례 박해를 당하다가 2007년 8월 15일에 박해로 사망했다. 당시 나이 겨우 54세였다. 황민은 생전에 박해에 참여한 악독한 경찰이 그에게 저우융캉(周永康)이 청두시 공안국에게 박해 명령을 내린 가장 높은 상사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黄敏生前的身份证照片'
황민이 생전에 찍은 신분증 사진

황민은 1954년 6월 7일에 출생해서 충칭(重慶) 대학 본과를 졸업했다. 청두시 중소기업관리국[전 청두시 향진(鄉鎮)기업관리국] 부국장이며, 2000년 11월에 퇴직했다. 황민은 99년 7월 20일 중공이 파룬궁 박해 이전에 기쁘게 대법을 얻어 대법 ‘진선인(眞·善·忍)’을 굳게 수련했다. 박해 후, 여러 차례 각급 악당에게 박해당해, 쓰촨성 여자노동교양소[쯔중(資中)현 난무사(楠木寺)에 위치했음]에서 19개월 동안 비인간적인 학대로 몸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었다.

황민은 박해로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어 딸과 함께 청두시 청화(成華)구 우예(五冶)의 셋집에서 살았다. 2005년 5월 19일에 청두시 솽차오(雙橋) 파출소와 푸난(府南) 파출소 경찰은 파룬궁수련생을 미행해 며칠 동안 잠복 감시를 한 후 푸난 파출소로 납치했다. 당시 경찰복을 입은 한 악인은 그녀가 양말을 신고 옷 갈아입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야만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리고 수갑을 채워 끌고 갔다.

5월 20일, 황민의 딸은 푸난 파출소에서 신진(新津)현 세뇌반으로 보내 불법 감금당했다가 7월 8일에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황민은 단식으로 항의해 생명이 위급하여 8월 26일에 석방돼 집으로 돌아갔는데, 100일 동안 박해당했다.

황민이 당시 집으로 돌아온 후 직접 빨간 펜으로 박해당한 내용을 기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5월 19일에 푸난 파출소로 납치되어 황민은 단식하고 물도 먹지 않았다. 5월 20일부터 7월 8일까지 황민은 신진 세뇌반에 불법 감금당했다. 그 기간에 강제적인 음식물 주입을 당했는데 강제로 기구를 투입하여 입을 여는 과정에 치아가 한 개가 부러졌고, 50일 동안 야만적으로 위에 호스를 꽂고 고문했다. 7월 8일부터 8월 18일까지 41일 동안 청두시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했다. 그 기간 중 7월 15일에부터 강제적으로 링거를 일주일 동안 맞은 후, 칭양(青羊)구 완허(萬和) 병원에 불법 감금당했다. 황민은 12일 동안 소량의 음식을 먹기 시작한 후 또 단식하고 물도 먹지 않았다. 그리고 8월 18일부터 8월 26일까지 9일 동안 칭양구 완허 병원에 불법 감금당했으며 푸난 파출소에서 전화로 가족에게 황민의 생명이 위급하다고 통지한 며칠 후 황민은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酷刑演示:野蛮灌食(绘画)
고문 재연
: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 (그림)

신진 ‘610’ 세뇌반에서 황민은 5, 6명의 악인에게 땅 위에 눌려 음식물 주입을 당하는 과정에서 치아 한 개가 부러졌다. 식도에도 호스를 꽂아 피가 났는데, 황민이 호스를 뽑아 버리자 그들은 또 꽂았다. 그들은 험악한 얼굴로 “뽑을 겁니까? 뽑으면 또 당신에게 꽂을 겁니다. 어쨌든 당신이 아플 것이니, 당신이 고통스러울 뿐이지요”라고 말했다.

5월 19일에 황민은 또 납치당했다. 가족은 사후인 7월 7일에 칭양구 검찰원이 비준하여 청두시 공안국 칭양구 분국에 제시한 체포통지서를 받았다. 게다가 2005년 7월 27일 호적에서 황민의 개인 정보는 이미 청두시 푸난 파출소에 의해 불법적으로 삭제당했다.

2007년 3월 3일 오후 5시쯤, 황민은 또 초당 북쪽 길 인근의 거리를 걷다가 거듭 청두시 국가보안과 칭양구 공안분국의 경찰에게 납치당해 청두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했다. 3월 29일, 칭양구 법원에서는 정상적인 절차 없이 억울하게 청두시 공안국 칭양구 분국에 비준을 내려 황민을 납치해 청두시 구치소에 감금했다.

2007년 6월 상순(즉 납치해 3개월 후)에 칭양구 법원 악인은 비로소 가족에게 전화로 통지했다. 황민을 붙잡아 칭양구 신화(新華)지역 사회 위생 서비스 센터에 가뒀는데 병원에서 병이 위급하다는 통지가 왔다고 말했다. 가족이 황민을 면회를 요구하자, 악독한 경찰은 ‘체포통지서’를 꺼내 가족에게 서명하도록 핍박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황민의 둘째 여동생은 핍박에 못 이겨 서명했다.

황민은 납치당할 때부터 단식하여 생명으로 항쟁해 박해에 참여한 자의 양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를 바랐다. 황민은 그 후 칭양구 병원(그 후 칭양구 신화 지역 사회 위생 서비스 센터로 개명했음)에 불법 감금당했다.

황민은 방문이 꼭 닫힌(악독한 경찰이 문을 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음) 면적이 10여 평방밖에 되지 않는 한 방안에 불법 감금돼 두 손과 두 발은 무게가 몇십 근인 쇠고랑으로 중간 침대 위에 채워졌고 손톱은 20~30mm로 길었다. 그리고 바지는 벗겨진 상태로 (납치당할 때부터 황민은 머리 감고, 목욕하고, 손톱 깎고, 치아를 닦지 못함) 하반신은 시트로 덮여있었다. 시트는 매우 더럽고 얼룩덜룩했다. 방안에는 일인용 침대 세 개가 있었는데 양쪽은 황민을 감시하는 여자 죄수가 있었고, 방 밖에는 또 전자 감시카메라 설치와 7~8명의 구치소 인원이 있었다.

가족은 황민에게 일용품을 넣을 수 있도록 요구했으나 악독한 경찰은 단지 수건, 칫솔, 세숫비누와 갈아입을 옷을 허락했을 뿐이다. 물건을 모두 검사했고, 가족이 황민에게 음식물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 여성 간수가 황민을 면회한 가족예게 “옆방 자오중링(趙忠玲)은 이곳에 온 1개월 만에 사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족이 황민에게 “전혀 인간성이 없이 생명을 살해하는 자들 앞에서 단식할 가치가 없어요.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생명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황민은 더욱더 견강하게 살아야 함을 인식하고 다시는 단식하지 않았다. 가족은 구치소 경찰에게 전화 걸어 황민의 몸 상황을 알려 달라고 하자 경찰이 대답했으나 가족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가족이 떠날 즈음 되어 경찰은 가족을 핍박해 단식으로 사망했다고 쓴 ‘사망원인서(死因書)’에 서명을 요구했으나 서명하지 않았다.

2007년 6월 중순 칭양구 악당 법원은 가족에게 전화로 병원에 갇힌 황민이 6년 노동교양처분을 선고받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떠한 서명통지도 하지 않았으며 황민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를 가족은 몰랐으며, 법원 측도 범죄 사실을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

2007년 6월 하순에 가족은 칭양구 법원에 가서 황민의 면회를 요청했다. 황민이 음식을 먹고 상태가 좋아져 몸무게가 약 50kg이 된 것을 보았다.

8월 15일, 가족은 전화로 황민이 그날 아침 7시 30일에 사망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청두시 구치소 의사는 가족에게 청두시 구치소로 가서 수속을 밟으라고 전화로 통지했다.

'黄敏被迫害致死的通知书'
황민이 박해로 사망한 통지서

'黄敏的身份证'
황민의 신분증

가족은 청두시 구치소에 도착하자 업무 지원팀 4명이 현장에 들이닥쳐 가족에게 황민이 ‘단식으로 사망했음’을 승인하고 서명하기를 요청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신을 해부하겠다고 했다. 가족은 단호히 서명하지 않았고, 또 시신을 조사하도록 요구했다. 현장의 4명 업무직원은 모두 남성이었는데, 한 사람은 법을 집행하는 인원이라고 자칭하고 사복을 입었고, 한 사람은 기록 인원이었으며 한 사람은 청두시 구치소의 의사라고 자칭했다. 다른 한 사람은 거의 흡연을 멈추지 않았다.

8월 15일 오후 1시쯤, 의사라고 자칭한 사람과 담배를 피운 경찰은 각각 한 대의 경찰차를 몰고 가족을 데리고 청두시 사완둥(沙灣東) 1로 1호 안푸위안(安撫園) 시신 냉동실 5호로 가서 시신을 보여주었다.

황민의 시신은 매우 가벼웠고 표정은 극도로 고통스럽게 두 눈을 약간 뜨고 있었고 머리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입은 매우 크게 벌어져서 윗니가 완전히 밖으로 드러났고, 입술 중간 부위 아랫니 한 개가 적었으며, 전체 구강, 치아와 입가에는 분명하지 않은 황색 물질이 얼굴 부위에 퍼져있었다. 게다가 매우 심한 약 냄새가 났다. 손가락은 완전히 굽었는데, 단단히 엎어서 잡고 있었다. 두 손, 아래 팔 위의 몇 곳에는 지문 같은 어혈 흔적이 있었다.

가족이 황민의 시신을 사진 찍자 현장에 있던 4명의 사법계 악당이 즉시 손으로 가족을 밀어냈다. 담배를 피우던 그 경찰은 손가락에 태우던 담배를 끼운 채 황민 시신 위를 막으며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했다. 가족이 엄숙하게 사망자를 존중하라며 몇 번이나 그에게 담배를 치우라고 말했다. 그는 그제야 마지못해 담배를 치우고 즉시 5호 냉동실을 잠그라고 명령했다.

악독한 경찰은 가족이 사진 찍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가족에게 시신을 돌려주지 않았으며, 시신을 바로 화장하라고 핍박했다. 게다가 황민에게는 어떠한 유물도 없다고 말했다. 8월 15일 오후 3시쯤, 황민의 시신은 모판산(磨盤山) 청두시 장의사에서 화장했다. 황민이 화장당한 후의 골회에서는 농후한 서약 냄새가 풍겼다.

가족에게 시신을 받으라는 통지하고 화장하기까지 전 과정에 3명의 공안이 감시하고 가족의 휴대폰을 강제로 빼앗아 가족이 시신을 사진 찍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영향이 좋지 않다고 했다. 경찰 번호가 070892인 사람이 전 과정의 기록을 책임졌고, 경찰 번호가 002935인 사람은 청두시 구치소의 의사라고 자칭했으며, 경찰 번호가 003016인 사람은 줄곧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며 옆에서 감시했다.

청두시 칭양구 인민병원(이미 ‘칭양구 신화 지역사회 위생 서비스 센터’라고 개명했음)은 청두시 구치소 지정 병원으로, 경계구를 설립해 학대로 생명이 위급한 파룬궁수련생을 감금했고, 총을 멘 무장 경찰이 24시간 보초 서며 지켰다. 10여 명의 파룬궁수련생은 이 ‘병원’에서 학살당했다. 그중에 이름을 아는 사람은 장촨성(張川生, 청두대학 부교수), 팡셴즈[方顯智, 쓰촨 교통청 네이허(內河) 탐사설계원 엔지니어], 황리사[黃麗莎, 어메이산(峨眉山)시 룽츠양(龍池楊)촌 푸메이광(鋪煤礦) 인사과 과원임], 후훙웨[胡紅躍, 신두(新都)현 오일펌프 오일 주입구공장(油泵油嘴廠)의 노동자임], 구촨잉[顧傳英, 청두시 훙광(紅光)전자관공장 수석엔지니어임], 선리즈(沈立之), 천구이쥔(陳桂君), 돤스츙(段世瓊), 덩젠핑(鄧建萍), 자오중링(趙忠玲), 황민(黃敏), 저우후이민(周慧敏)이다.

원문발표: 2020527
문장분류: 대륙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5/27/40689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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