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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동료, 가족이 대법의 은혜를 깊이 받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1994년 상반기, 겨우 한 달 사이에 우리 직장에서 직원 4명이 연달아 세상을 떠났다. 한 명은 죽기 전날 밤에 과음을 하고 기찻길을 건너다가 기차에 부딪혀 목숨을 잃었고, 한 명은 새벽에 일어날 때 넘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또 다른 한 명은 지병으로 장기간 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떠났고, 다른 한 명은 어떻게 죽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이 동료들의 죽음을 애석해하면서 망망한 상태에 빠졌다. ‘어제까지도 출근하던 사람이 오늘 없어졌다. 영원히 사라져 볼 수 없게 되었다. 인생이란 참으로 무상하구나! 어느 날 어떻게 될지, 또 얼마나 살지 누구도 모른다. 사람은 도대체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의의가 있을까?’ 나는 고통스러운 사색에 빠졌다.

그해 10월에 동료가 내게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소개해주었다. 그녀가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주었고, 나는 이틀 동안 카세트테이프 16장을 다 듣고서 매우 놀랐다! 내가 어둠 속에서 줄곧 찾던 것을 마침내 찾았다! 그 순간에 정말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나는 사람이 왜 사는지와 인생의 의의를 알게 되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허약했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조산아라고 한다. 그것은 1963년 초의 일로서, 사악한 당이 빚은 대기근을 갓 넘어서던 시기였고, 그때 부모님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었다. 그 해에 지린(吉林)의 농촌마을에서 외할아버지가 오셨다 돌아가실 때, 어머니가 산을 넘고 재를 넘으며 외할아버지를 배웅하셨다. 집으로 돌아오신 후에 어머니는 심각한 고열 증상이 나타났고, 극심한 영양 부족까지 더해져 달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내가 태어났다. 당시에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다. 나는 태어난 뒤로 줄곧 허약했으며, 부모님은 종일 나 때문에 마음을 졸이셨는데, 내가 언제 병으로 쓰러질지도 알 수 없었다. 한 번 누우면 며칠이 걸렸고, 심지어는 반달까지도 누워있었다. 일주일간 병이 없어야 부모님은 겨우 한숨을 돌리셨다. 더 심각한 것은 내게 지독한 신경쇠약, 비염, 저혈당, 관절염이 생긴 것이었는데, 열 손가락, 팔, 다리 관절이 다 아팠다. 여름에도 손에 찬물을 댈 수 없었고, 손을 씻거나 세수를 하려면 뜨거운 물을 사용해야 했으며, 치마도 입을 수 없었다.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다 듣고 이틀 후에 나는 온몸이 가벼운 것을 느꼈다. 모든 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해에 나는 31살이었다. 그 후부터는 정신 상태도 몰라보게 달라졌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시간만 있으면 진지하게 대법책 ‘전법륜’을 받쳐 들고 읽었다. 이 책 속에서 사부님께서 어떻게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더 좋은 사람이 되는지를 가르쳐주셨다.

대법을 수련하여 좋은 사람이 되다

나는 중등전문학교 교사이다. 수련하기 전에는 업무를 대충대충 보면서 교안도 거의 쓰지 않고 수업 준비도 하지 않았으며, 수업할 때는 교과서 한 권만 챙겼다. 중등학교 수업은 큰 수업으로 한 수업이 90분이다. 하지만 나는 30분 정도만 수업하고 남은 시간은 자습시켜 두고 교실만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때웠다. 다른 한 반이 수업을 마치면 나도 서둘러 수업을 마쳤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본래 수업시간보다 30분 이상 일찍 마친 셈이었다. 그 후에는 늦어서 좋아하는 음식을 못 먹을까 봐 바로 식당으로 직행했다. 나는 일주일에 수업이 딱 두 번 있었고, 이렇게 일주일, 한 달, 1년을 어물쩍 넘어갔다.

교감의 말에 따르면, 중등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공부를 좋아하지 않고 아무런 이상(理想)도 없으며 나이도 어려 부모들이 사회에 내놓기 걱정되어 이런 학교에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한 부류는 졸업장을 따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학교에 맡겨두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진학률을 따지지 않기 때문에 교사들은 수업할 때 압박이 없는데, 이런 환경에서 책임감이 있는 교사는 적으며, 대다수는 되는대로 대충 지낸다.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것은 내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나는 대법을 배웠다. 사부님께서 사회에서든 가정, 직장에서든 항상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나는 그때부터 출퇴근 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하고 교안을 작성했다. 그리고 수업을 할 때마다 수업 외 다른 내용도 일부 보충하면서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이해 능력을 강화해 주었다. 학생들은 “모 선생님은 정말 수업을 잘하세요.”라고 했다. 나 역시 개인 이익에서 지나치게 따지지 않았다.

대법을 배우고 얼마 안 돼 학교 교무과에서 나에게 학급담임을 맡으라고 해서 승낙했다. 학급담임은 피곤하고 고생스러운 일이기에 수련하지 않았다면 승낙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의 학생들은 관리하기가 어려운데, 마음이 공부에 있지 않고 무슨 연애, 싸움, 패거리를 만드는데 언제 패싸움을 일으킬지도 알 수 없고, 심지어 어떤 학생은 늦도록 숙소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학급담임이 된 후에 우선 책임감을 느끼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학생들과 학부모, 학교에 떳떳한 선생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은 학교 부근에 있어 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면서 우리 반 학생들의 전체적인 상황과 상태에 관심을 두고, 학생들을 친구 대하듯 했다. 그리고 품행이 단정한 학생을 심혈을 기울여 뽑아 반장을 맡겼다. 이른 아침, 나는 통학버스가 학교에 도착하기도 전에 우리 반이나 학생 숙소를 찾아가 항상 학생들과 소통하면서 무슨 문제든 즉각 해결했다. 그리고 오후에 선생님들이 다 퇴근하고 통학버스가 떠난 뒤에도 집에 가지 않고 늦게까지 자습하는 학생들과 함께 있었다.

한동안 지나면서 우리 반 학생들의 태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다들 공부를 좋아하게 되었고, 다시는 싸우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어린 나이에 연애하는 모습도 사라졌다. 그리고 공부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며 결석하는 일도 적어지고, 나와 마음속 말을 하는 학생이 많아졌다. 더욱 칭찬할 만한 일은 아침이든 저녁이든 자습 시간에 더는 내가 반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수업을 시작하기만 하면 누구도 잡담하거나 수업에서 이탈하지 않고, 모두 교실에서 조용히 있었다. 이런 일은 이 학교에서 전에 없던 일이었다. 다른 반은 자습할 때, 떠들거나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놀고, 심지어는 싸움이 번져 교실 밖까지 나와 싸웠다.

나는 새로 온 한 여학생의 태도가 정상이 아닌 것을 발견했다. 때로는 밤늦도록 숙소에 돌아오지 않고, 수업도 들어오지 않곤 했는데, 누구도 그 여학생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나는 그 여학생과 상담을 하다가 앞뒤 말이 안 맞는 것을 보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보았다. 나는 즉시 학생의 학부모에게 연락했고, 어머니가 서둘러 학교에 오셨다. 학부모의 집은 농촌에 있었다. 나는 이 학생의 어머니와 만나자마자 그 얼굴에 근심과 괴로움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학생의 어머니가 나에게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는데, 2년 전에 아이의 아버지가 고의로 딸을 욕해 딸이 상처받고 울다가 잠이든 적이 있었는데, 이튿날 아침 일어나서부터 정상이 아니었다고 했다. 부모는 여기저기 의사를 찾아다니며 약도 먹고 초능력이 있다는 사람도 찾아봤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 매일 근심과 고통 속에 살았다고 했다. 딸이 항상 밖으로 뛰어나가 가족도 단속할 수 없어 이 학교에 보낸 것이라고 했다. 학교에는 선생님이 있어 거두어들여 단속할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학생의 어머니에게 파룬따파를 소개하고 ‘전법륜’ 한 권과 사부님의 설법 녹음테이프를 주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진심으로 이 책을 읽고 녹음을 들으면 따님의 상태에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 어머니는 희망을 안고 책과 녹음테이프를 챙겨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가 와서는 기쁜 낯으로 “집에 돌아가서 매일 책을 보고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들었는데, 뜻밖에도 스스로 심한 담배 중독에서 벗어났어요. 매일 담배 열 갑을 피우고도 잎담배까지 피웠는데, 안 그러면 견디지를 못했지요. 여러 번 각종 방법으로 끊어보려 했지만 실패했는데,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듣고 며칠 만에 담배를 피우기가 싫어졌어요. 그리고 오랜 병도 나았어요.”라며 딸도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하루는 남편이 밤에 잠을 자다가 숨이 차서 죽기 직전까지 가서 이별의 말까지 했는데, 자기가 서둘러 대법책을 남편의 가슴 위에 놓고 “오직 이 책만이 당신을 구할 수 있어요.”라고 하니 잠시 후에 남편이 숨을 쉴 수 있었다고 했다. 온 가족이 대법과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학급담임을 맡으면 학생이나 학부모로부터 불가피하게 선물을 받곤 하는데, 나는 모두 완곡히 사절했다. 한번은 한 학부모가 나에게 줄 선물을 차에 많이 실어서 학교에 왔다. 내가 진심으로 그 학부모에게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사람입니다. 대법 사부님께서 저에게 좋은 사람, 다른 사람에게 선량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이 선물을 받을 수 없어요. 아이는 제가 꼭 잘 대해줄 겁니다.”하고 여러 번 사양한 끝에 학부모는 기분 좋게 선물을 가지고 돌아갔다.

직장 전체가 복을 받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이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발동하면서 하늘땅을 뒤엎을 듯 대중을 현혹하는 거짓말이 전국 방방곡곡 널리 퍼졌고, 각 회사에도 문건이 하달되어 직장 내 모든 사람에게 강제로 태도를 표시하게 했다.

나와 남편(수련생)은 직장에서 관리자와 동료들이 인정하는 좋은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에서 누구도 양심을 속이고 우리를 다른 눈으로 보지는 않았으며, 다들 여전히 우리를 신임해주어 압력이 줄었다.

어느 날 오후, 전달할 문건이 있다며 전체 교직원 회의가 열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분명 파룬궁을 모독하는 내용을 전달하려는 것임을 알았다. 나는 가고 싶지 않아 “전달할 내용은 분명 TV와 같은 것일 겁니다. 전부 거짓말과 모함입니다. 저는 안 갈래요!”라고 했다. 그러자 동료가 “그래도 갑시다.”라고 했다. 나는 ‘가보자. 어떻게 거짓말을 퍼뜨리는지 들어나 보자.’라고 생각했다.

회의가 시작되었고, 교장은 서두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 교감이 문서를 기계적으로 읽었는데, 대법과 사부님을 모함하는 내용이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전부 사람에게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신 것인데, 문서에서는 사부님의 원래 말씀을 인용하지 않고, 글자를 더하거나 빼거나 말을 지어내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완전히 사부님의 원래 말씀과 의미가 아니었다. 사부님의 법을 본 적이 없다면 현혹되어 속아 넘어갈 것이다.

나는 매일 법공부를 하기 때문에 설법이 꽤 익숙해 어느 구절에서 사부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교감이 일단 글자를 더하거나 빼먹어 왜곡하면 나는 즉시 큰 소리로 말을 끊고 엄숙하게 바로 잡았다. “틀립니다!” 대법 사부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이어서 사부님의 원래 말씀을 한 번 외웠다. 그러자 다들 장내가 떠들썩하게 웃었다. 이어서 교감이 다시 문서를 읽으면 나는 또 바로 잡아줬고, 다들 또 장내가 떠들썩하게 웃어댔다. 이렇게 수차례 반복했다. 마지막에는 교감이 말문이 막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한 글자도 뱉어내지 못하고, 문서도 다 읽지 못한 채 서둘러 회의를 마쳤다.

사악한 당은 파룬궁을 박해하면서 연좌제 방식을 사용했다. 어느 회사에서 파룬궁수련생이 베이징에 청원을 가면 그 회사의 책임자는 좌천이나 처분을 당하고, 회사를 평가하는 데 있어 영향을 주었다.

나는 1999년 10월에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납치되어 현지 구치소로 끌려 와 박해를 당했다. 상부의 압력을 받은 시 위원회 서기는 베이징에 갔던 파룬궁수련생들을 직장에서 해고하라고 직접 명령을 내렸다. 우리 학교 교장과 동료들은 나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걱정했다. 교장과 사무실 주임은 나를 보러 직접 구치소까지 왔다가 초췌한 내 몰골을 보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식사는 잘하는지 폭행을 당했는지 관심을 두고 물어봤다.

이 기간에 ‘보증서’를 쓰라는 공안국의 무리한 요구에 내가 줄곧 비협조적이자 장기간 감금시켰다. 나는 반년 감금되어 있었으며, 나중에 단식과 단수로 박해에 항의하다 5일 후에 구치소에서 벗어났다. 직장 동료들은 잇달아 나를 찾아왔으며, 교장은 내 손을 잡고는 진심으로 “우리 학교에서 자네 부부가 나쁜 사람이라면, 그러면 좋은 사람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네!”라고 했다. 학교연구실 동료는 나와 딸아이를 데리고 나가 바람을 쐬도록 해주고, 나를 배웅해주었다. 나는 이미 해고되었고, 앞으로는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2년 5월 이후, 나와 남편은 박해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어 학교의 한 직원이(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다) 매달 남편의 월급을(그때는 아직 월급카드를 쓰지 않았다) 내 여동생에게 보냈고, 여동생이 나중에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지명수배를 받아 공안국, 안전국 관계자가 학교에 가서 조사를 하고 소위 죄상을 늘어놓거나 학교 관계자에게 단서를 제공받아 나를 쉽게 잡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교장부터 일반교사까지 전체 교직원은 모두 나를 위해 좋은 말을 해주었다. 그들은 내가 좋은 사람이고 수업도 잘하며 다재다능하다고 했다. 시 공안국 관계자는 또 교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 남편을 해고하라고 했다. 그러자 교장을 그를 질책하며 “당신들은 양심이 있는가 없는가? 그 집에는 아이가 둘인데, 당신들이 강요해서 우리는 이미 한 명을 해고하였소! 그런데 또 그러라고? 사람을 못 살게 하려는 거요?”라고 했다.

2007년, 나는 납치되어 또 모함을 당하고 선고를 받았다. 어떤 동료들은 나를 보러 314km 가까이 떨어진 감옥까지 와서 감옥에서 쓸 돈을 저축해주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는 울었고, 나는 감동해서 울었다. 억울한 옥살이가 만기 되어 돌아왔을 때, 교장을 중심으로 동료들이 나를 위해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내 딸이 결혼할 때도 다들 식장에 와서 축하해주었다. 거의 전 직원이 나와 남편에게 관심을 두고 동정하면서 이 관건적인 시각에 파룬궁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가졌기에 그들 모두 복을 받았다.

우리 학교는 작은 중등전문학교이면서 성인들도 다니는데, 그 해에 전체 시에서 이런 중등전문학교는 거의 다 문을 닫았다. 유독 우리 학교만 계속 운영하다가 승급까지 되었다. 그리고 시에 위치한 한 전문대학 등 유명 학교 몇 곳과 합병되어 정규적이면서 대형인 국가급 중등전문학교가 되었다. 학교의 직급은 부처급에서 본처급으로 올랐으며, 교장은 부원장이 되고, 그 외 동료들도 직급이 높아졌다. 사무실을 정리하는 노동자 두 명도 모두 새로운 부서에서 과장으로 승진했다.

온 가족이 대법 속에서 수혜를 입다

내가 법을 얻고 몇 달 후인 어느 날 밤, 어머니가 앉아서 TV를 보는 것을 보고 “가부좌를 해보지 그래요?”라고 말해봤다. 어머니는 비교적 뚱뚱하고 다리가 좀 굵은데, 뜻밖에도 정말로 가부좌를 하셨다. 내가 6살 딸과 사부님의 경문을 읽고 있는데, 잠시 후에 어머니가 “아이고! 어째서 팔이 없는 것 같지?”라고 하셨다. 나는 “좋네요! 계속해 보세요.”라고 했다. 잠시 후에 어머니가 또 “아이고! 어째서 다리가 없는 것 같지?”라고 하셨다. 나는 “굉장히 좋네요! 계속해 보세요. 혹시 머리나 몸도 없는 것 같지 않아요?”라고 말하고는 딸과 함께 잠들었고, 어머니는 여전히 거기에서 가부좌를 하셨다.

이튿날 아침, 내가 연공장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격동하며 나에게 지난밤 일을 얘기해주셨다. 지난밤에 계속 가부좌를 했고, 정말로 머리와 몸이 없어져 아주 편안함을 느꼈는데, 가부좌를 풀 때 기적이 나타났다고 했다. 바로 30년 넘게 어머니를 괴롭히던 안구 통증이 나은 것이었다. 어머니가 둘째 여동생을 낳을 때, 아버지는 직장에서 설립한 학습반에서 개조학습을 받았다. 선량한 할아버지가 사악한 당이 분류한 소위 ‘지주’에 해당되어 늘 비판 조리돌림을 받았는데, 아버지도 연루되어 항상 학습반에 가서 개조를 받아 매일 집에 돌아오실 수는 없었다.

그날 어머니는 가부좌를 풀 때, 눈이 매우 시원함을 느꼈고, 지난날의 그런 어지러운 통증도 없어졌다. 아침에 거울을 보다 눈 안의 얇은 막이 보이지 않았고, 정말로 눈이 시원해졌다. 10여 년 후, 60대가 되신 어머니가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의사가 “뇌출혈이 있었네요.”라고 했다. 이에 어머니는 “전혀 아닌데요.”라고 했다. 의사가 사진을 자세히 보더니, 혼잣말로 “오, 체내에서 굳었네.”라고 말하며 이어서 “심각한 심장병이 있었군요.”라고 했다. 이에 어머니가 또 전혀 아니라고 하자 의사는 또 혼잣말을 하며 “오, 이것도 굳어졌네.”라고 했다.

아버지는 오십견이 심하셨는데, 내가 법을 얻은 초기 한동안은 아버지가 매일 링거를 맞으셨지만 호전되지 않으셨다. 어느 날 밤, 나는 아버지께 ‘전법륜’ 몇 단락을 읽어보시게 했다. 이튿날 아버지가 잠결에 금색 원이 날아오는 것을 보았는데(사실은 파룬임), 돌고 돌다가 손등으로 오더니 손등 피부를 벗기고 안에서 고름 등 더러운 물질을 내보내고, 또 돌면서 손등 피부를 봉합했다고 하셨다. 눈을 떴을 때는 오십견이 이미 나아 아프지 않으셨다.

여동생은 무슨 일을 하든 주의를 잘 기울이지 못한다. 어느 날, 전기포트에 물을 넣고 콘센트에 꽂아두고는 시댁에 갔다. 이튿날 오후가 되어서야 플러그가 아직도 꼽혀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일단 물이 다 끓어버리면 불꽃이 튈 텐데, 이건 자기 집만 불타는 게 아니라 이웃과 건물 전체가 불에 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여동생은 너무너무 두려웠는데, 그때 갑자기 대법이 생각나 마음속으로 ‘괜찮아. 언니가 파룬궁을 수련하잖아!’라고 생각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전기포트 물이 아주 조금 남은 채로 전기가 꺼져 있었다. 여동생은 전기포트가 고장 난 줄 알고 다시 물을 넣고 작동시켜보니 제대로 작동했다. 이 전기포트는 자동 전원차단 기능이 없다.

하루는 남동생이 오토바이에 친구를 태우고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앞에서 한 소형 자동차가 가로질러 갔다. 남동생은 급정거했고, 강한 관성 때문에 친구와 함께 멀리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오토바이도 가로질러 멀리 튕겨 나갔다. 동생이 기어서 일어나 보니 다친 곳이 없었고, 오토바이도 멀쩡했다. 하지만 뒷좌석에 앉았던 친구는 갈비뼈 두 대가 골절되었다.

이 몇 년간 우리 가족이 수혜를 입은 사례는 많지만 일일이 다 열거하지는 않았다. 우리 가족은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끝없는 감사를 드린다!

2015년에 남동생, 여동생, 딸, 여조카 등은 모두 각자의 실명으로 헌법을 위반하고 파룬궁을 박해한 장쩌민을 고발하고, 고발장을 밍후이왕에 발표했다. 그들은 또 대법제자를 도와 세상 사람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했는데, 효과도 아주 좋았다. 또 설날이나 사부님의 생신 때는 NTD TV나 밍후이왕을 통해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문안을 드리기도 했다! 그들은 사부님께서 줄곧 자신들을 보호하고 계신다는 공통된 느낌을 받는다!

대법이 널리 전해지는 때에 태어나고, 또 혼잡한 이 인간 세상에 사부님이 계시고 대법이 있으니, 나와 우리 가족은 정말 비할 바 없이 행운이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원문발표: 2020512
문장분류: 5.13 경축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5/12/4049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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