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사당에게 참혹하게 학살당한 가정(2)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종합 보도) 지린(吉林)성 바이산(白山)시 장위안(江源)현 싼차쯔(三岔子) 임업국 정펀(正盆)가 장취안푸(張全福) 일가 4명 장취안푸와, 아내 자오융즈(焦永芝) 등은 모두 싼차쯔 임업국 삼림철도부에서 노동자로 근무하다 퇴직했고, 아들 장치파(張啟發)는 온수난방설비소(그후 건물관리회사로 변경) 노동자이며, 딸 장위란(張玉蘭)은 장위안현 합판공장 노동자다. 4명 가족 전원이 1999년 1월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여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모두 건강했다.
장취안푸는 근면성실해서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원망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직장에서 여러 차례 모범사원(선진근무자)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고된 일로 일 년 내내 심신이 피로해서 골 증식, 요독증, 류머티즘성 발목관절염 등 여러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각종 치료를 받았지만 낫지 않다가 운 좋게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게 되어 1개월도 되지 않아 모든 고질병이 사라졌다. 아들 장치파도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심신에 큰 변화가 일어났으므로 부자는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면서 모든 일에서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등 성실하고 선량했다.
(왼쪽) 부친 장취안푸(張全福), (오른쪽) 아들 장치파(張啟發)
중공사당이 파룬궁(法輪功)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 1999년 12월 중순 장취안푸 부자는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기차역에서 공안에 잡혀 그대로 돌아왔지만, 싼린 공안국정보과장 장위궈(姜玉國), 정보요원 장펑유(張風友), 위샤오광(遇曉光) 등에게 벌금형식으로 1천 위안(17만 2000원)의 현금을 강탈당했다. 그들에게 잡혀 송환되는 중에는 침대칸 차표를 사게 한 후 잠을 재우지 않고 장치파와 다른 한 파룬궁수련생은 복도 스팀파이프에 수갑이 채워져 밤새도록 서 있었다. 장취안푸는 침대칸에 수갑을 채워놓고 악경(사악한 경찰)이 “당신에게 50위안(약 8600원)의 벌금을 물린 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 떠벌렸다. 장위궈, 장펑유, 위샤오광 등은 수색으로 현금을 강탈당한 후 심한 구타를 당했다. 구타당한 그들은 복부 통증으로 계속 화장실을 가야 했다.
부자는 싼린(三林) 구치소에 감금되어 조사받은 후 15일간 구류처분으로 감금된 후 1일 15위안(약 2600원)의 급식비를 강탈당했다. 식사는 옥수숫가루 떡에 뭇국이었는데 국에는 진흙 찌꺼기가 있었다. 풀려날 때 급식비 450위안(약 7만 7500원)을 요구했다. 당시 장취안푸의 퇴직금은 460위안(약 7만9200원)이었는데, 1999년 12월부터 2000년 1년간 매달 200위안(약 3만 4500원)을 공제해 총2600위안(약 44만 8000원)을 뜯겼다. 정차(正岔) 노동보험부는 부친이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기 때문에 회사가 벌금을 물었다는 이유로 1000위안(약 17만 2000원)을 또 공제 당했다. 구류처분을 마치고 석방되었지만 장펑유는 계속 수사 중임을 고지하며 “전법륜(轉法輪) 1권을 제출하지 않으면 가택수색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왼쪽) 자오융즈(焦永芝, 장취안푸의 아내), (오른쪽) 장위란(張玉蘭, 장취안푸의 딸)
2000년 1월 8일 장위란과 어머니 자오융즈는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톈안먼에서 납치당해 베이징 주재 바이산 사무실로 연행된 후 1월 13일 현지로 이송되어 장위란은 임업국 구치소에 감금되었는데, 감금기간 악경은 275위안(약 4만 7000원)을 요구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장위안현 구치소에 감금되었는데 1일 급식비 20위안으로 총 300위안(약 5만 2000원)을 지불해야했다. 불법구류 후, 공안요원은 장위란에게 “이후 어디로 가든지 사전 공안국에 보고한 후 허가가 떨어지면 갈 수 있다”고 했다. 직장 상사는 “당신이 베이징에 갔기 때문에 회사가 모범회사의 평가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고 불만을 표했고, 담당 주임은 “당신 때문에 직장이 6천 위안(약 103만 원)의 발금을 물었으므로 당신이 출근하게 되면 매월 급료에서 공제하겠다”고 말했다.
2000년 2월 17일 장취안푸 가족이 모두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톈안먼에서 납치돼 베이징 주재 바이산(白山)사무처에 감금됐을 때 2명의 장위안현 공안원이 무슨 물건을 가져와야 한다며 장취안푸를 대동했다. 그때 장치파가 대신 가려고 했지만, 그들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이 고의로 노정을 멀리 돌아오는 바람에 장취안푸가 심한 멀미를 해서 반 시간 넘게 누워 있어야 했다. 주재소 악경 쑨다리(孫大力)는 차표를 사야 한다면서 장 씨에게서 6백여 위안(약 10만 원)을 강탈했고, 또 송환할 때 침대칸의 표를 사야한다며 5백 위안(약 8만 6000원)을 강탈했다. 당시 송환된 사람은 장위궈, 장펑유, 위샤오광 등 3명이었다.
거주지로 돌아온 후 부자와 딸 장위란 등 3명의 가족은 15일간 불법적인 구류처분으로 감금되었다가, 4명 가족 모두 불법적인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는데, 부친 장취안푸 1년 6개월, 어머니 자오융즈 1년, 아들 장치파 2년, 딸 장위란 1년 6개월 등 각각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부자는 바이산시 노동교양소에, 모녀는 창춘(長春) 헤이쭈이쯔(黑嘴子) 노동교양소에 각각 감금되었다.
장취안푸와 자오융즈는 2001년 차례로 만기 출소했다. 그러나 자오융즈는 만기 된 후에도 풀려나지 못하고 35일간 감금 기간이 연장되었고, 돌아온 후에도 싼린 공안 정펀 파출소, 장위안현 싼차쯔 파출소 분국에서 늘 집을 찾아와 괴롭혔다.
2001년 7월 어느 날 정펀파출소 악경 2명이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취안푸 부부가 연마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연공 CD를 강탈한 후 장위안현 싼차쯔 파출소 분국의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자오융즈에게 차에 오르라며 “우리 소장이 당신에게 이야기할 게 있다니 가자”라고 했다. 자오융즈가 “나는 가지 않겠다. 나는 잘못이 없고, 할 이야기도 없다”라고 말했다. 악경은 “이 정도라도 당신을 마땅히 유치장에 보내야 한다”라고 했다.
며칠 후 장위안현 파출소에서 2대의 차에 7, 8명 경찰을 태우고 와서 교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오융즈에게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가야 한다. 헤이쭈이쯔(黑嘴子)에서 책임자가 왔는데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자오융즈는 가지 않겠다면서 “헤이쭈이쯔에서 사람이 왔고, 당신이 가기를 원하면 당신이 따라가라”라고 말하며 응하지 않았다.
장치파는 2001년 11월 말 창춘(長春) 차오양거우(朝陽溝)노동교양소에 감금되어 박해당했고, 2002년 2월 19일 불법노동교양처분기간이 만료되어 장취안푸가 마중하려고 하자, 싼린 공안국 정보과장 장위궈(姜玉國)가 또 100위안(약 1만 7000원)의 여비를 요구했다.
부자는 거듭된 노동교양처분 박해로 함께 열흘 내에 사망
장치파는 노동교양소에서 돌아온 후 직장에서 해고당한 것을 알았다. 2002년 3월 1일 부자는 직장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담당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정법위서기(정치법률위원회) 후위타오(胡玉濤)가 아직도 대법을 연마하느냐고 물었다. 부자가 “연마한다”고 대답하자, 후위타오는 “이렇게 됐는데도 다시 연마한다면서 또 직업을 찾으러 왔네. 그러니 두 사람을 다시 잡아넣어 밥 먹을 곳을 찾아주어야겠네”라고 말했다.
3월 6일 오후 8시경 싼린 공안국 정펀 파출소에서 2대의 차에 7, 8명 경찰이 타고 와서 울타리를 뛰어넘어 정원에 들어왔을 때 자오융즈는 어린 손녀와 잠들어 있었고, 자우치안푸 부자는 주방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당시 장치파가 풀려난 지 15일째 되는 날이었다. 악경이 창문을 두드리며 “공안국에서 왔다. 문을 열어라”라고 말했다. 문을 열지 않자, 문을 부수고 고함치며 난입해서 부자를 납치한 후 강도처럼 녹음기,CD 등 금품을 강탈했다. 자오융즈가 “우리 가족 두 사람이 어제 저녁에 붙잡혀 가지 않았나?”라고 말하자, 그들은 “우리도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계통”이라고 말했다. 납치 당시 압수수색영장 등 어떤 증명서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자행했다. 장 씨네가 납치당할 때 거주지에는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15일간 불법적인 구류처분으로 감금당한 후 3월 11일 그들에게 이끌려 귀가했는데, 악경은 “연공을 하지 않는다”는 보증서를 쓰라고 했다 부자가 쓰지 않자, 곧이어 부자를 임업 구치소로 보내 불법적인 형사구류처분으로 다시 감금한 후 당일 오후 4시경 정펀파출소 장펑유(張風友) 등 몇 명의 악경들이 들이닥쳐 가택수색으로 사부님의 설법 CD, 서적 등을 강탈했다. 그러면서 “노부인, 당신이 말해보라. 파룬궁의 누명을 벗을 수 있겠는가? 누명을 벗을 수 있다면 당신에게 이 물건을 돌려주겠다”라고 조롱했다.
중공사당 요원은 대법책을 수색해 낸 것을 증거로 거듭 장취안푸 부자에게 불법적인 1년의 노동교양처분으로 5월 15일 창춘 차오양거우 노동교양소에 감금시켰다.
노동교양소에서 장취안푸는 고문 학대를 당했다. 경찰의 감시지시를 받은 죄수에 의해 말하지 못하게 한 후 밤낮 작은 걸상에 앉기 고문을 가하며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강제노역을 시켰다. 처음 노동교양소 5대대에 감금되었을 때 1시간 쭈그려 앉기, 머리를 벽에 부딪치기, 무릎 감싸기 고문 등을 당했고, 무릎과 발끝을 벽에 붙이도록 한 후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발길질을 했다. 그런 상태에서 장취안푸의 한쪽 다리에 강판을 달아 더욱 다리를 굽힐 수가 없었다. 이토록 악경 마오(毛)는 또 거듭 장취안푸에게 발길질을 했다.
그 후 장취안푸는 6대대로 이송 감금되어 매일 작은 걸상에 앉기 고문을 당했다. 아침 식사 후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 이후까지 고문당했는데, 어떤 때는 10시가 지난 후까지 고문을 당했다.
6개월이 되지 않는 사이에 장취안푸 몸에 ‘옴’이 생기고 손등 상처의 딱지가 찐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하루 동안 나무 걸상에 앉아있으면 솜바지가 축축했고, 체중은 30kg도 되지 않았는데 매일 음식물을 죽지 않을 만큼 조금만 주었다.
2002년 11월 차오양거우 노동교양소에서는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백일공견(百日攻堅)’이란 구호로 박해를 했다. 장취안푸가 수시로 생명 위험에 처해 있었으나 노동교양소에서는 석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고문 박해를 가중시켜 매일 오전 5시부터 한밤중 12시까지 고문을 가했다. 한 번은장취안푸가 교도관실로 끌려갔다. 악경 왕타오는 “아직도 연공을 하겠느냐?”라고 물었고, 장취안푸는 “내가 숨이 붙어 있는 한 대법을 끝까지 수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악경 왕타오는 극도로 흥분하며 뜨거운 물 한 컵을 그의 두 손 위에 부었다. 금방 두 손은 살갗에물집이 생기고 또 벗겨졌다.
계속 악독한 고문 박해를 당한 장취안푸의 몸은 점점 나빠졌다. 고름과 혈변이 나왔다. 뜨거운 물에 덴 손은 감염되고 몸은 피골이 상접했지만, 음식물을 먹을 수 없었다. 밥을 먹으려면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는데, 잘 걷지 못하자 바오자가 욕설을 퍼부으며 다리를 잡고 질질 끌고 가며 무차별 구타했고, 돌아올 때도 그랬고 돌아온 후에도 폭력을 가했다. 결국 음식물을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악경대장 리중보(李中波)는 꾀병을 부린다며 2명의 바오자에게 식당으로 업고 가게 했다. 장취안푸는 사망하기 전날까지도 걸상에 앉기 고문을 당했다. 악경이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 병원으로 보내 응급처치를 했지만, 그날 저녁 결국 사망했다.
2003년 1월 8일 장취안푸는 65세에 차오양거우 노동교양소 6대대 2중대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장위란과 어머니가 노동교양소로 측에 “무엇 때문에 사람을 고문하고 구타해 죽였느냐?“라고 묻자, 6, 7명 경찰은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대며 “당신 아버지의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약간의 일도 시키지 않았다”라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다. 그중 한 경찰은 “임업 공안에서 우리에게 보내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람을 구타해 죽일 수 있었겠는가? 당신은 어디든 신고하라. 그럼 우리가 함께 가겠다”라고 빈정거렸다.
장위란은 오빠 장치파의 면회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석방을 요구했다. “오빠는 피골이 상접하고 몸에 심각한 옴이 생겨나 발을 절뚝거리며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오빠는 건강하고 건장한 사람이었다.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를 당해 딴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니 1개월이라도 앞당겨 석방해주기 바란다”라고요구했다. 관리과장은 여러 가지 수속과 절차를 이행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라 안 된다며, 설 전에 석방한다고 했다.
당시 장치파는 차오양거우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를 당해 온몸에 모두 부상을 입은 흔적이었고, 피부는 검고 딱딱한 궤양이 생겨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렵고 고통스러웠다. 두 다리도 고통스러워 걸을 수 없었고, 호흡도 어렵고 발음도 똑똑하지 못했으며, 배설이 안 되는 등 생명이 위험한 상태였다. 장치파는 2003년 1월 19일 풀려나 집에 돌아온 지 2일 후 억울하게 사망했다. 당시 나이 겨우 38세다.
장위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월 15일 노동교양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는데 18일 그를 데려가라고 했다. 토요일인 당일 혼자 차오양거우 노동교양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오빠가 업혀 나왔다. 오빠가 이미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50여 세 한 경찰이 불만이 가득한 모습으로 오빠를 차에 실어 창춘 정거장까지 실어다 주고, 차비로 27위안(약 4700원)과 그동안 집에 전화 연락한 비용 73위안(약 1만 3000원)을 챙겨 돌아갔다.”
“18일 3시경 나는 오빠를 업었고, 어머니가 뒤에서 부축해서 방안에 뉘었다. 오빠가 말하기를 ‘그곳에서 밤낮 작은 나무 걸상에 앉는 고문을 당하면서 잠을 재우지 않았고, 말도 하지 못하게 하면서 계속 죄수의 감시를 받았다. 여름에 힘든 일을 시키면서 밥을 조금밖에 주지 않았다. 세끼 밥이 두 끼 밥의 양도 안 되었다. 채소 국에 기름과 소금도 넣지 않은 것이었다.’ 오빠의 말은 매우 미약했고 발음도 똑똑하지 않았으며, 밥을 먹을 때 손으로 젓가락을 잡지 못하고 줄곧 떨었으며, 배뇨도 하지 못했다. 원래 하얗던 피부가 이미 검고 굳어져 온통 딱딱한 가시가 생겨나 있었다. 두 다리에 작은 찐빵 크기의 딱딱한 혹이 생겼으며, 무릎 두 곳에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이튿날, 오빠는 이미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말을 할 수 없었으며, 전신이 가렵고 고통스럽다고 했다. 결국 오전 11시 30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 38세였다.”
장치파의 딸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한번 보려고 했으나, 장위안현 파출소 싼차쯔 분국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는 그때 겨우 13세여서 친척과 이웃이 도와주러 왔을 때 2대의 경찰차가 집 문 입구를 가로막으며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악경 궈중산(郭中山)은 이웃집에 가서 소위 탐문 수사를 하면서 장 씨에게 불리한 증거를 잡으려고 괴롭혔다.
모녀가 지속적으로 박해를 당하다
딸 장위란은 1년 6개월의 불법적인 노동교양처분을 받고 창춘 여자노동교양소에 감금되어 온갖 고문박해를 당했다. 늘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초과근무를 밤중까지 했다. 그리고 전기봉, 체벌, 죄수에게 감시당했는데,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해진 형기가 7개월 17일 동안 연장되어 2002년 4월 9일 석방됐다. 그녀는 2년 동안 가족을 보지 못했다. 불법적인 감금기간에 부친 장취안푸가 두 번씩이나 먼 길의 면회를 왔지만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임업 공안 장위거는 장위란이 돌아오자 “당신은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앞으로 당신은 장위안현 파출소에서 관할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장위란이 집에 돌아왔으나 집에는 노인과 어린애만 남아있어서 그지없이 처량했다. 장위란이 부친을 만나보고 싶어서 우여곡절을 거찬 후 겨우 만났다.2명의 경찰이 옆에서 지키고 있었다. 2년 만에 처음 보게 된 아버지는 많이 수척했고 수염과 머리가 길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으며 두 손이 수갑에 채워진 모습이었다.
장위안현 공안국 싼차쯔분국 공안원 위룽신(於榮鑫), 궈산(郭山) 등이 늘 집으로 찾아와 시끄럽게 괴롭혔다. 2002년 11월 1일 오후 8시 30분경 싼차쯔 분국 자오(趙) 국장이 경찰관 5, 6명을 대동해서 2대의 차량으로 자오융즈의 집으로 왔다. 그들은 울타리를 뛰어넘고, 문과 창문을 부수고 난입해 집안의 물건을 뒤지기 시작하면서 장위란에게 “아직도 연마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자오 국장은 “당신이 반항하네. 끌고 가!”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장위란을 방에서 끌어내려 두 손을 뒤로 비틀었다. 장위란이 신발을 신으려고 해도 허락하지 않자, 어린 조카딸이 헝겊신을 신겨주었다.
장위란이 납치되어 큰 사무실로 끌려왔을 때 사무실 안에 30여 명의 경찰들이 앉아 있다가, “파룬궁을 연마하는 두목이 왔다”라고 소리쳤다. 장위안현 정법위서기(정치법률위원회) 녜싼쉬안(聶三弦)이 그곳에 있다가 장위란을 조사하며 한나절이나 들볶았지만 장위란은 일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크게 화를 내다가 새벽 1시 경 장위란을 장위안현 구치소에 감금시켰다. 자오는 “보증을 쓰지 않으면 큰 감옥에 가둬, 한평생 감옥살이를 하게 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장위란은 첫 번째 5일간 단식으로 항의했으나 현 공안국은 강도 높은 신문을 하면서 석방하지 않았고, 두 번째 20일간 단식항의를 했을 때 12월 10일 풀려났다. “매번 남편, 아들과의 이별은 어머니에게도 정신적인 심각한 상처가 되었다. 당시 어머니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 오빠가 곧 만기 출소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자가 고문 박해로 사망한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생활의 경제적인 대책도 더욱 암울했다.
대법을 굳게 믿고 공정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행복했던 한 가정은 중공사당의 악독한 박해로 집과 가족을 전부 잃게 되어 단지 고아가 된 아이와 과부만 남았다. 그래도 중공사당은 가만두지 않고 여전히 교란, 가택수색, 납치와 고문 박해를 가했다.
2007년 6월 8일 장위안현 국가보안 ‘610’ 악도는 자오융즈, 장위란을 거듭 납치해 구치소에 불법 감금한 후 모녀가 힘들게 저축한 1만 위안(약 172만 원)의 저축통장도 강탈해 갔다. 장위란은 구치소에서 4일간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해 6월 11일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장위란은 매일 구치소에 감금되어 있는 어머니 자오륭즈의 석방을 요구했다. 자오융즈는 감금당한 지 18일째 되던 날 갑자기 쓰러져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 모녀는 함께 국가보안, ‘610’에게 강탈당한 돈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악경은 돌려주지 않았고, 장위란을 위협하면서 그녀를 감시했는데, 장위란이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누구와 만나는 것까지 일일이 감시했다. 모녀는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떠나 유랑생활을 했다.
2007년 11월 28일 오전 11시경 바이산시 장위안구 국가보안대장 쑨징후이(孫景輝)는 8, 9명의 경찰을 거느리고 집에서 장위란을 납치함과 동시에 불법적인 가택수색으로 ‘전법륜(轉法輪)’ 서적과 명혜주간 등을 강탈했다. 악경은 지난번 가택수색에서 1만 위안이 들어 있는 통장을 강탈했지만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장위란은 다시 노동교양처분을 받고 창춘 헤이쭈이쯔 노동교양소에 감금됐다.
2015년 7월 27일 장위안구 ‘610’, 정법위, 국가보안의 지시로 5, 6명 경찰이 장위란을 납치한 후 가택수색으로 2권의 대법서적을 강탈했다.
2016년 9월 17일 바이산시 장위안구 정펀파출소 경찰은 장위란의 집에서 대법책을 강탈했고 장위란을 납치했다. 집안에는 70여 세의 노모만 남게 되어 보살펴줄 사람이 없었다.
2017년 10월 25일 오후 4시 30분 장위란은 외출했다가 돌아와 집으로 들어가던 중에 장위안구 공안국 경찰 장전보(張振波), 자오창(趙強), 한 젊은 경찰 등이 장위란의 집에 들이닥쳐 대법서적을 강탈한 후 그녀를 납치해 장위안구 공안국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공안국에서 불법적으로 지문, DNA 검증, 신체검사를 받은 후 바이산 헤이거우(黑溝) 구치소에 감금되었다. 구치소에서 죄수복을 입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방 영창에 갇혀 악경 미이빙(米易兵)에게 뺨을 3, 4대를 맞았으며, 6일간 구류처분을 받고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다.
2018년 3월 23일경 장위안구 파출소에서는 파룬궁수련생 리슈전(李秀珍), 장위란, 왕춘링(王春玲) 등을 납치해 바이산 헤이거우 구치소에 불법적으로감금했다.
2019년 7월 10일까지 밍후이왕에서 중공사당의 각계 봉쇄를 돌파해 수집하고 확인한 자료, 파룬궁수련생이 고문박해로 사망한 사례가 4천322건, 납치 8만 6050명, 불법적인 노동교영처분 2만 8143명, 불법적인 징역형 1만 7963명으로 집계됐으며, 납치되어 세뇌반에 감금 1만 8838명, 그 외 정신병원 감금 809명, 고문 박해를 당한 사람은 연인원 51만 8940명이다. 이 수치는 실질적인 인원수보다 훨씬 적다. 중공사당의 박해는 수많은 파룬궁수련생에게 실직, 수입상실, 장기간 정신적 박해, 가정파괴, 상해와 불구, 사망을 초래시켰다. 당시 장취안푸와 마찬가지로 차오양거우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를 당한 노인은 파룬궁수련생 위둥후이(鬱東輝-랴오위안(遼源)시 위원회 당 간부학교의 부교장)이 노동교양소에 들어갔을 때는 건강이 매우 좋았지만, 온갖 고무구타로 1년도 안된 상태에서 ‘옴’이 생기고 전신부종이 나타났다. 소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다가 결국 쇼크를 일으켰다. 악인들은 즉시 병원에 보내지 않고 먼 랴오위안의 가족에게 전화로 연락했고, 가족이 오자 3천 위안(약 51만 7000원)의 보증금을 요구했다. 위둥후이는 2002년 3월 15일 시장에서 야채를 사고 집에 돌아오다가 대기 중이던 사복경찰에게 납치되어 3년의 불법적인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위둥후이는 2008년 5월 12일 다시 납치되어 불법적인 9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쓰핑(四平) 스링쯔(石嶺子) 감옥에 감금되어 고문박 해로 생명이 위급해져서 집으로 돌아왔으나 풀려난 지 40일째 되는 2011년 12월 17일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67세였다.
원문발표: 2020년 4월 10일
문장분류: 대륙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4/10/40353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