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이츠(尚水池), 남, 49세. 허난(河南) 위저우(禹州)시 우량(無梁)진 대법제자. 위저우 우량진 우량중학교체육교사. 상추이츠는 2001년 2월 20일경 박해 받아 사망했다.
1997년 상수이츠는 파룬궁(法輪功)과 인연이 있어 수련을 시작했는데 신체가 건강해지고 모든 병증이 사라졌다. 그는 사람의 도리를 더욱 잘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 그는 교사와 학생들의 호평을 받았다.
1999년 7월 20일, 장쩌민은 파룬궁에 대한 탄압박해를 실시해 거짓말로 공격하고 비방하며 모함했다. 상수이츠는 파룬궁이 마음을 선(善)하게 하고, 도덕을 향샹시키는 대법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불공정한 날조 선전을 바로 잡고자 그는 정부에 진실을 알리러 베이징으로 처음 청원하러 떠났다. 그는 천안문에 모두 네 차례 갔다.
두 번째는 2000년 설이 막 지나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진(鎭)610,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되어 위저우시 공안국제2수감소에 불법으로 4개월 이상 갇혀 있었다. 수감기간 그는 비인간적인 박해를 받았다. 경찰은 상수이츠를 장기간 죄수들과 함께 가두어 놓으며 계속 감방을 바꾸었는데 감방을 바꿀 때마다 박해를 받아 살가죽이 한 층 벗겨졌다.
죄수들은 그가 연공을 견지한다며 끊임없이 고발했다. 부소장 왕하이양(王海洋)은 상수이츠의 한쪽 손을 어깨 위에서 등 뒤로 당기고 다른 한 손은 등 아래에서 위로 당겨 그에게 수갑을 채웠고, 식사하거나 잠을 자거나 화장실을 갈 때도 풀어주지 않았다. 상수이츠는 팔을 쓰지 못하자 앉아서 결가부좌를 했다. 부소장 왕하이양은 발견하고 또 그에게 18근(약 9kg)짜리 족쇄를 채우고 마당을 돌라고 핍박했다.
마당을 돌 때 경찰 궈광린(郭廣林)은 뒤에서 빨리 가라고 손으로 밀고 발로 차며, 전기곤봉으로 충격을 주기도 하고, 고무 막대기로 때리기도 했다. 상수이츠의 발목이 족쇄에 마찰되어 피가 나고 뼈가 보였으나 학대를 멈추지 않았다. 상수이츠는 그 상황에서도 법을 외우고 연공을 견지했다. 경찰 리강(李剛)은 그가 연공하는 것을 보기만 하면 그에게 머리를 철문의 관찰구로 내밀라 했다. 이 관찰구는 아주 작아 일반인은 머리를 내밀기가 쉽지 않다. 내밀면 얼굴이나 귀가 긁혀서 피가 난다. 리강은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쥐고 밖으로 당기고, 날씨가 추우면 머리에 물을 붓고, 날씨가 더우면 뙤약볕을 쪼이고, 따귀를 때리기도 하고, 신발로 때리기도 했다. 경찰 궈광린(郭廣林)은 상수이츠에게 큰 족쇄를 채우고 발꿈치를 들고 꽃밭 변두리에 서게 했다. 그리고 족쇄를 힘껏 밟으면 상수이츠는 시멘트에 뒤로 벌렁 넘어졌다. 간혹 머리가 바닥에 심하게 부딪힐 때도 있었다. 상수이츠는 이런 잔혹한 학대를 연속 여러 번 받았다.
이성을 잃은 부소장 왕하이양은 수하에게 상수이츠를 중점적으로 감시하라 이르고, 죄수를 사주해 그가 진상을 알리거나 연공을 시작하면 구타하라고 시켰다. 욕하는 소리와 따귀를 때리는 소리 구타하는 소리는 다른 감방에서도 다 들렸다. 또 몇 사람이 그를 들고 머리를 벽에 박기도 했다.
한번은 저녁에 화장실 갈 때 경찰 펑(馮)모는 상수이츠에게 사부를 욕하라고 했다. 상수이츠가 욕하지 않자 매일 한 번씩 비워야 하는 요강을 비우지 못하게 하고 다시 감방으로 들고 오게 했다. 비우지 않으면 볼일을 볼 수 없기에 감방의 죄수들은 상수이츠를 끊임없이 욕했다. 감옥에서 나올 때 공안국부국장 리진량(李金亮)이 서명하고 2,000위안을 내지 않으면 석방하지 않겠다고 했다. 가족은 그를 구출해내기 위해 이리저리 사람을 찾아다니며 5천여 위안을 썼다.
2000년 여름, 위저우시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는 시위원회 면회소에서 세뇌반을 열었다. 상수이츠가 연공을 견지하며 각서를 쓰지 않아 다시 제2수감소에 갇혀 잔인무도한 박해를 받았다. 친지들이 그를 구출해낼 때 손목, 발목이 헐어 피고름이 흘렀으며 등에는 크고 작은 뾰두라지가 가득 나 있었다. 이번에도 공안국 리진량이 서명을 하고 1,000위안을 벌금을 내라고 했다. 가족이 4천여 위안을 쓴 다음에야 풀려났다.
2001년 1월 1일 전후, 공안국 정보과, 진(鎮) 파출소 경찰은 여러 번 집에 찾아와 사람을 잡아가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한번은 진 정법위서기 리진제(李進傑)가 10여 명을 데리고 또 진 파출소 소장 뤄둥쥔(羅東軍)이 경찰 5명을 데리고 상수이츠를 납치하러 갔다. 대문을 막아 놓고 상수이츠를 본 그들은 한꺼번에 몰려들어 팔을 비틀고 허리를 껴안으며 몇 층을 에워쌌다. 마을사람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사흘마다 와서 잡아가겠다고 소란을 피우다니, 이게 무슨 정부인가?” “상수이츠는 모두를 위해 길을 닦고, 일을 도와주었다. 당신들은 도둑은 안 잡고 왜 좋은 사람만 괴롭히는가, 이게 무슨 세상이란 말인가?” 리진제와 궈둥진은 형세가 불리하자 상수이츠에게 우선 집으로 가서 얘기하자고 했다. 상수이츠는 이 틈을 타서 지붕으로 뛰어나가 악마의 손에서 벗어났고 그때부터 도피생활을 하며 집이 있어도 돌아오지 못했다.
파출소장 뤄둥쥔은 상수이츠를 납치하려다 발목을 삐어 화풀이를 하기 위해 상수이츠의 부인, 큰 며느리와 다른 한 여인을 잡아 수감소에 가두었다.
2001년 설 전에 상수이츠는 다시 베이징에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리러 갔다. 출발하기 전에 그는 연로한 아버님께 “저는 대법제자입니다. 대법을 실증하는 것은 저의 책임입니다. 나가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문을 나섰다. 천안문광장에 도착한 그는 현수막을 펼치고 “파룬따파는 좋습니다(法輪大法好)”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경찰 몇 명이 그를 단번에 쓰러뜨리고 발로 차고 경찰차에 던져 넣었다. 베이징 차오양수감소 마당에 도착하자마자 무장경찰이 와서 사타구니를 걷어찼는데 상수이츠가 날아서 뚝 떨어졌다. 떨어지자마자 또 발이 날아왔고 수차례 걷어차인 그는 소리 없이 견디고 있었고 경찰은 ‘이 사람 대법제자답다’라고 했다.
감방에서 상수이츠는 항의하기 위해 8일간 단식했다. 경찰은 폭력적으로 소금물을 주입했다. 그들은 매 사람에게 하루에 소금물 3근(약1.5kg)을 주입했다. 상수이츠는 협조하지 않으며 이름과 주소를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정부는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수련생에게 연좌 정책을 실시하므로, 고향에 있는 각 정부부문과 회사, 가족이 연루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경찰은 외지에서 온 이름을 말하지 않는 대법제자를 모두 한 방에 가두고 방에 독가스를 방출했다. 하루가 지나도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자 먹는 빵에 독(만성독)을 넣었다. 상수이츠는 단식을 견지했다. 수감소는 스파이 한 명을 파견해 감방에 넣고 상수이츠에게 밥을 먹으라고 타일렀다. “밥을 안 먹으면 어떻게 집에 가겠습니까? 우리는 집에 가야지요.” 상수이츠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매일 두 끼를 먹었는데 옥수수가루 빵과 묽은 야채국이었다.
상수이츠는 이틀 먹고 머리가 어지러워 사흘째는 먹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중독된 그는 코 양 옆이 파랬다. 더 심하게 중독된 파룬궁 수련생은 손톱까지 검게 변했다. 경찰은 대법제자의 중독된 상황을 살피려고 그들의 피를 뽑아가서 검사했다. 그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중독이 심하면 베이징 교외의 마을 없는 곳으로 싣고 가, 중독된 대법제자 스스로 차에서 뛰어내리게 했다. 그리고 뛰어내린 후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경찰은 상수이츠의 외투를 빼앗고 맨발로 얇은 옷차림으로 뛰어내리게 했다. 그는 차에서 뛰어내린 뒤 방향도 없이 걷다가 기다가 그렇게 앞으로 비틀거리며 갔다. 당시 베이징은 눈에 뒤덮여 도로가 얼어 있었다. 영하 10여 도의 저온에서 그는 철길을 따라 톈진(天津)시외의 한 기차역 근처에 도착하여 눈밭에 쓰러졌는데 다시는 일어날 힘이 없었다.
이튿날 아침, 당직 철도 직원이 상수이츠가 눈밭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것을 본 철도 직원은 상수이츠를 역 앞 여관에 데려갔다. 상수이츠가 깨어나니 한 노인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는 일하러 온 사람이라고 했다. 노인은 “당신 같은 사람을 많이 봤네. 당신은 중독됐네. 당신은 파룬궁을 수련하기에 박해 받아 이렇게 되었네.” 상수이츠는 이름과 주소를 말했다. 그의 큰 아들이 찾아왔을 때 그는 혼절했다 깨어났다 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걷지는 못했다. 다리는 부어서 내복도 벗을 수 없었고, 발바닥과 발가락은 모두 뻣뻣하며 검은색이었다. 얼어서 이렇게 된 것 같지는 않았다. 피부가 얼어서 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가락과 가까운 발바닥에 깊이 패인 자국이 있었다. 마치 양쪽 발이 벌겋게 달아오른 철판에 지져진 것 같았다.
톈진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차를 여러 번 갈아탔는데 그때마다 아들이 상수이츠를 업고 다녔다. 집에 온 뒤 상수이츠는 비할 바 없이 강인했다. 신음소리 한 마디 내지 않았고 고생스럽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혼미해 있는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보다 많았다. 그는 배고픈 줄은 모르고 계속 물만 달라고 해서 마셨다. 소금물을 너무 많이 주입 당했기 때문이다. 깨어난 뒤 그는 부인에게 “만약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았더라면 베이징수감소에서 죽었을 겁니다. 그곳의 경찰은 정말 흉악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고 말했다. 상수이츠는 집을 떠나서 다시 돌아오는데 30여 일이 걸렸다. 집에서 그의 발가락은 모두 썩어 들어갔고 발가락 뼈가 한절 빠졌으며, 호흡이 갈수록 약해졌고 말할 때 입은 움직이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가 인사불성일 때 아들은 그를 위저우시 제일인민병원외과에 입원시켰다. 가족은 간호할 때 폐에서 마찰소리가 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검사해보니 왼쪽 늑골이 4대나 부러졌고 폐가 심하게 감염되었다. 썪은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발바닥은 고름이 나오고 있었으나 여전히 검고 단단했다. 나중에 다시 쳰징(淺井)향 병원 바(扒)촌 분원으로 옮겨간 상수이츠는 하루도 되지 않아 사망했다. 이는 그가 톈진에서 돌아온 지 18일째 되는 날이다.
2001년 2월 20일경, 상수이츠는 미소를 띄며 세상을 떠났다. 사망 3일 후 그를 묻을 때까지 그의 시신은 굳지 않고 줄곧 미소를 띄고 있었다.
상수이츠가 집에 막 도착했을 때 시공안국 정보과, 진파출소는 그를 잡으러 갔다가 상수이츠의 상태를 보고 아무 말하지 않았다. 며칠 뒤 또 잡으러 갔었고 사진도 찍었다. 나중에 공안국은 상수이츠가 혼자 산굴에 숨어 있어서 굶고 얼어서 이렇게 됐으며, 양을 몰던 목동이 그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갔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어도 그들은 여전히 거짓말을 날조하여 사람들을 속였다.
1999년 7.20 이래, 위저우시 공안국 부국장 리진량(李金亮), 정보과장 장관린(張冠林), 지도원 샤위샤오(夏玉霄)를 필두로 한 경찰은 현지 대법제자를 미친 듯이 박해하고, 구타했으며, 벌금을 부과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구류하고, 노동교양을 시켰으며, 판결까지 했다. 위저우 우량진 우량중학교 체육교사 상수이츠는 박해로 사망했다.
갱신일: 2010년 8월 22일 11:41:00
원문위치: http://library.minghui.org/victim/i156.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