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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의는 정법수련에 있다

글/ 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2009년 11월 11일】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나는 1998년 10월에 대법을 얻은 남성 대법제자이다. 20살에 법을 얻어 지금은 31세가 되었는데, 개인 수련과 사부님을 도와 정법의 길을 11년간 걸어왔다. 이번 제6기 대륙대법제자 인터넷법회 기회에 내가 걸어온 길과 일부 감수를 적어 작은 총결을 짓고 동수 여러분들과 교류하려 한다.

수련의 희열

나는 1998년 10월 초 대학 1학년생 이었다. 한 번은 학교의 사회단체활동에 참가한 뒤 학교 앞 공터를 지나가는데 몇몇 학생과 일부 선생님들이 그곳에서 연공하는 게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파룬궁이었다. 나는 연공장 보도원에게 천서-『전법륜』을 청했다.

이 보서를 청한 후, 나는 단숨에 절반을 읽었고 법리에 깊이 움직였다. 책에서 이야기한 법리는 내가 봉착한 각종 인생의 곤혹을 해결했다. 나는 책에서 이야기한 일체가 모두 진리이고 진실한 것임을 알았다. 비록 일부 법리에 대해서는 완전히 인식하지 못했거나 감수하지 못했지만 『전법륜』천서를 얻은 첫날 밤, 나는 사부님께서 나에게 다른 공간의 각종 교란을 청리해 주심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신체의 각종 나쁜 요소를 청리해 주시어 나로 하여금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감격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사부님께서 나에게 새로 태어 날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을 알았다.

그때 나와 동수들은 함께 법 공부를 하고 연공을 하며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매일 연공하고, 저녁에 단체 법 공부를 하면서 모두가 한데 모여 앉아 책을 읽고 체득을 이야기했는데 그때의 느낌이 얼마나 아름답고 충실했던지. 대학생활은 비교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기 때문에 나는 매일 한 두 시간씩 책을 보았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 놓기 싫고 늘 좀 더 보고 싶었다. 길을 걸을 때에도 사부님의 설법오디오를 들었다. 매일 책을 보고 법을 들으며 나는 자비하고 위엄한 불법의 따사로움에 흠뻑 젖어 있는 느낌이었다. 종종 광망이 나의 신심의 어두운 곳을 비추고 오점을 깨끗이 씻어냈다. 내심은 늘 희열로 충만 되어 “사부님, 나는 대법을 수련하려 왔습니다. 나의 이 생애는 대법을 위해 존재하고 이것 외에는 나의 생명은 아무런 의의가 없습니다.”고 중얼거렸다.

학교생활은 비교적 단일하여 나는 사부님의 “쩐, 싼, 런” 교시와 법리로 자신의 생활을 지도하기에 노력했다. 숙사에는 모두 10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기타 동학들은 밤을 새우며 카드놀이를 하고는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잤지만, 나는 오로지 수건으로 눈을 막고 잠을 잤다. 그리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거의 대부분 물을 길어왔고, 길어 온 물을 기타 동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숙사 마루는 카드놀이를 하면서 먹고 버린 음식물로 매우 지저분했고 화장실도 아주 더러웠지만 그 누구도 청소하기 싫어했다. 나는 토요일 저녁을 이용해 숙사를 깨끗이 청소해 해놓으면 이튿날 동학들은 숙소가 깨끗한 것을 발견하고는 모두 미안해했다.

이런 생활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견지했다. 나는 법리를 알고 있었기에 나자신이 좀 힘들고 고생스럽더라고 내 마음은 조그마한 불평도 없었다. 학급 친구들은 아주 쉽게 나와 가까이 지내는 걸 즐거워했다. 나는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대법제자는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여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1999년 7.20 이후, 한 번은 담임이 학급회의를 열어 “우리 학급에 파룬궁을 연마하는 학생이 있는가?”고 물었다. 동학들 모두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숙사에서 늘 대법서적을 보는 것을 동학들 혹은 학급간부들이 보았지만 아무도 듣기 거북한 말을 하지 않았다.

1999년 7월 20일 사악은 파룬따파 및 대법제자에 대해 참혹한 박해를 발동했다. 학교는 갓 여름 방학을 했기 때문에 나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는데 사악한 얼굴과 입을 가지고 대법을 악독하게 공격하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괴로웠다. 물론 나는 그런 황당한 언론에 미혹되지 않았고, 나는 대법이 제일 좋다고 인정하여 책을 보며 법 공부를 했다. 나는 학교에 돌아가면 대법서적을 몰수당할까봐 『전법륜』을 옮겨 적어 갖고 다니면 쉽게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두터운 공책을 사서 쓰기 시작했다. 방학기간이 짧아서 시간이 모자라고 매개 글자를 될수록 정연하게 적어야 함으로 밤낮을 쉬지 않고 적어서야 드디어 방학기간에 『전법륜』책을 모두 쓸 수 있었다.

책을 옮겨 적는 것은 나로 하여금 대법의 법리를 깊이 이해하게 했다. 방학이 끝나 학교에 돌아간 후, 공개적으로 연공하는 환경이 없어졌고 숙사에는 많은 사람이 떠들어서 연공할 수 없었다. 나는 점심시간에 교실에 사람이 없는 틈을 이용해 문을 잠그고 커튼을 닫고 안에서 참선하거나 연공을 했는데 중간에 어떤 동학들이 문을 두드리거나 각종 교란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줄곧 이렇게 연공하면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견지했다.

법을 얻고 수련을 할 수 있은 것은 정말로 나의 생명의 거대한 조화이고 대법을 수련하는 수련자를 놓고 말하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수련 중의 난을 잘 넘다

나는 젊은 미혼 대법제자이기에 색욕의 고험표현이 아주 엄중했다. 나는 속인사회에서 대상을 찾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라고 여겼고 심지어 소유의 아름다운 감정을 갖고 싶은 갈망에 젖었는데 이런 나쁜 욕망을 더욱 방임했다.

수련초기, 저녁에 꿈에서 색욕 유혹관이 나타났는데 저항하기가 매우 힘들어 내가 연공인인 것도 잊고 깨어났을 때에는 후회막급이었다. 마음속으로 한번 또 한 번 사부님께 “나는 꼭 색욕의 정, 이 더러운 물건을 버리겠습니다. 이 더러운 물건은 나에게 속하지 않습니다.”고 했다.

그 후, 나는 책을 보고 법 공부를 견지했고 색마를 강의한 내용을 볼 때는 반복하여 여러 번 보았다. 매 번 발정념으로 자신을 청리할 때마다 모두 “소유의 더러운 색욕 정을 제거한다.”는 의념을 가하였다. 나는 일찍 사부님의 법상 앞에서 몇 차례나 정욕 관을 넘겠다고 다짐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과 이성을 “예의가 없이 홀시”하지 않도록 일깨웠고 어떠한 부정확한 염두와 의념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한 차례 또 한 차례 마음을 도려내고 뼈에 사무치는 고통으로 연마와 반성을 거친 후, 색욕지심이 이미 매우 담담해졌고 대다수 관을 잘 넘을 수 있었다.

최근 몇 년, 가족들은 줄곧 나에게 짝을 찾아 일찍 결혼할 것을 재촉했다. 방학마다 집에 돌아오면 늘 그렇게 할 것이라고 대답했는데, 지금 30살이 넘으니 집에서 더욱 결혼을 재촉하는 압력이 커져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늘 아무렇게나 결혼상대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속인이라도 연분의 배치에 따라야 하는데 하물며 연공인은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결혼은 색욕지심을 깨끗이 없애는가에 관계되며 진상을 알리는 데도 관계되며 자신의 금생과 전생의 인연과도 관계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는 마음을 내려놓고 자연스러움에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구도받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매일 시간이 모자랄 지경으로, 합당한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수련과 세 가지일을 잘하는데 교란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표면적으로는 가족들과 부모님의 재촉에 대답은 하지만 마음으로는 그래도 대법제자가 해야 할 세 가지 일에 투입하고 있다. 이런 것을 놓았을 때, 가족인 속인의 태도도 전변되고 나 또한 속인의 ‘적적’한 정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며 무형의 압력도 화해될 것이다.

직장에서도 적지 않은 관을 넘어야 했다. 2007년 5월, 나는 새로운 소프트웨어 공사에 옮겼는데 나는 기술적으로 동료보다 뛰어났다.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는 속인이라 체면을 차리고, 늘 나에게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다며 쟁론하거나 모르면서도 아는 척 허풍을 치며 나에게 어떻게 틀렸다고 하는 것이었다. 주변의 많은 동료들은 체면 때문에 나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아 나는 볼메어 “당신과 말하지 않겠다. 당신 스스로 해결하라.”고 했다. 근본적으로 내가 수련인임을 잊었기에 모순이 아주 컸다. 사실 당시에 내가 연공인임을 의식했고, 내가 넘어야 할 관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소위 “체면”을 놓지 못해 화가 날 때 참지 못했던 것이었다.

후에 사부님의 『오스트레일리아 수련생에 대한 설법』비디오를 보았다. 사부님의 매 한마디 말씀은 모두 나의 머리를 쳤다. 특히 어떻게 동수와의 관계를 잘 처리할 것인가를 말씀하셨을 때, 나 자신과 대조해보고는 매우 부끄러웠다. 그 후, 나는 매번 동료들과 문제를 토론할 때 모두 낮은 소리로 상대방에게 물었을 뿐만 아니라 될수록 선의로 목소리를 낮추어 문제를 똑똑히 설명해 주었다. 한 단락의 시간이 지난 후, 그 동료도 큰 소리로 질책하듯 말하는 걸 쑥스러워하면서, 이렇게 모순도 해결되고 동료와의 사이도 화목해 졌다.

내가 법을 얻기 전 19살 때, 일찍 각종 원인으로 다른 공간의 사악과 일부 사법을 연마하는 사람들의 교란과 박해에 봉착했다. 법을 얻은 후, 사부님께서 기본상 청리해 주셨지만, 후에 그리 잘 정진하지 않자 발정념과 연공할 때 늘 교란을 받아 잡념이 많아져 조용히 할 수 없었다.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사악이 틈을 탔고 사악이 다른 공간에서 나에 대한 박해가 커졌다.(이 중에는 혹시 여러 가지 업력의 인연관계일 수도 있다) 사악은 나쁜 에너지를 발했고, 심지어 나의 주변 속인을 교란했다. 나는 의념을 집중하기 시작했고 대량의 발정념으로 이런 사악한 것들을 제거했다. 매일 고정된 4번의 정념시간 외에도 출근 도중이거나 외출하는 시간을 이용해 정력을 집중하여 두 차례씩 발정념을 했다. 평소 길을 걷거나 출퇴근 할 때에도 사악을 제거하는 정념상태를 유지했다.

나는 매일 3시 50분 혹은 저녁 9시 50분에 두 시간씩 연공을 견지했다. 이렇게 일 년 남짓 고강도의 발정념과 법 공부, 연공을 통하여 사악은 이미 점차적으로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소실되어 다시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다. 법을 얻은 후 사부님께서는 줄곧 나를 보호하고 계셨고 나를 점화하시고 계셨는데 이것은 이생에서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다. 유일하게 대법제자가 해야 할 세 가지 일을 잘 하는 것만이 사부님의 고도지은에 보답하는 것이다. 최근 십 년래, 만약 사부님의 보호가 없었다면 나 스스로 걸어 올수 있었겠는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매 걸음마다 사부님께서 부추겨 걸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일부 발정념을 중시하지 않거나 발정념을 할 때 얼떨떨하여 교란을 받아 허튼 생각을 하는 대법제자들에게 반드시 청성한 이지로 발정념을 할 것을 일깨워 준다. 발정념이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거나 아무런 감각이 없다고 의심하는 동수들도 응당 중시를 돌려야 하는데 발정념은 확실히 강대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친히 체험했는데 대법서적을 만들던 프린트를 하든 혹은 인쇄된 책을 구입하든 모두 강대한 법력이 있다. 사악이 발출한 힘이 기타 물질은 꿰뚫을 수 있지만 대법의 책만은 꿰뚫을 수 없다. 사부님께서도 대법 책에는 층층의 불, 도, 신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동수들에게 일깨우고 싶은 것은 반드시 소유의 대법서적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지역의 자료제작과 기술지원 사업을 잘 하다

1999년 “7.20‘이후, 우리 연공장은 외부와의 접촉이 매우 적었다. 일부 동수들한테서 밍후이왕 및 실용대리 기술 인터넷 정보를 조금 얻었다. 나는 여유시간에 pc방에 가서 관련 기술 등을 찾아보았다. 연공장의 기타 동수와 선생님들 모두 컴퓨터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자료를 다운로드하고 자료를 프린트하고 신경문을 프린트하는 이런 일은 모두 계산기를 전공한 내가 했다.

초기에는 해외 메일 신문을 열독했고 보통대리, 사이트 대리, 대리발판으로 했다. 후에는 인터넷 돌파 삼검협(三剑侠) 소프트웨어를 사용했다. 조기에는 밍후이 신문을 보고 사람들이 발표한 진상 메일에 접속해 스스로 진상 사이트를 제작하는 등 이렇게 걸어왔다. 장기간 pc방에 가자니 많은 돈이 들었는데, 나는 학생이라서 돈이 모자랐다. 학교 선생님인 연공점의 보도원이 컴퓨터를 구입했고 전화선으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어 나는 규칙적으로 그의 집에서 인터넷에 접속하여 다운로드하고 자료를 프린트했다. 그 컴퓨터와 프린트에 의거하여 이전에 함께 연공하던 동수들 모두 제때에 신경문을 볼 수 있었고, 일부 진상자료를 만들어 외부에 배포할 수 있었다. 몇 년래, 부근의 동수를 만나 기술문제 즉 컴퓨터 설비구입, 인터넷 접속 설치. 프린트, 시디 굽기 등을 서로 교류하면서 배워서 해결했다.

2002년 말, 나는 직장을 얻어 돈을 벌자 노트북을 사서 진상 시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장악한 상당히 복잡한 대리발판기술에 의거해 밍후이왕과 방광명왕에서 비디오를 다운로드하기 시작했다. 당시 인터넷 접속은 교육망 내부에 있었기에 상당히 복잡한 대리복무기에 의거해야만 비로소 비디오를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다운로드하는 속도가 너무 느려 교육망 상해해외망의 위험성도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호로 상당히 많은 비디오 자료를 순리롭게 다운로드했다. 다운로드한 비디오는 또 격식을 전화해야 했고, 어떤 것은 비디오 편집소프트웨어로 새로 편집해야 했다. 시디에는 더욱 많은 내용과 더욱 전면적인 정보를 담을 수 있다. 나는 매일 밍후이에 접속하여 비교적 좋은 문장 혹은 일부 전형적인 사건을 수집함과 동시에 본 지역의 사악이 대법제자를 박해한 사례문장을 많이 수집한 후, 이런 문장을 정리하여 책을 만들고, 거기에 맞는 일부 만화를 만들어 인터넷 돌파 소프트웨어와 전자책, 사진 등을 시디에 한데 넣었다.

이렇게 시디 1장에 풍부한 자료를 넣어 사람의 각종 사상 장애의 힘을 타파하는데 족하도록 했고, 오직 사람이 참답게 보기만 하면 사람의 마음을 개변할 수 있도록 했다. 컴퓨터와 가정 VCD에 시디가 자동적으로 나오게 하려고 또 전문적으로 작고 민첩한 VCD방영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6년 동안 내가 제작한 각종 진상시디 마더보드는 78가지나 되며, 매 장은 모두 십여 차례의 갱신을 거쳐 완성되어 지금에 와서는 이미 내용이 상당히 완벽하고 충실한 상태다.

생활의 어디서나 진상을 밝히고 세인을 구도

2000년부터 2003년까지 기간에 각종 컴퓨터 설비가 상당히 비싸 구입하기 어려워 구체적인 상황에서 가능한 방법을 생각해 진상을 알렸다. 2000년 초 어느 날 저녁, 나는 마을 가가호호에 모두 춘련을 붙인 것을 보고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곧 빨간 종이 한 장을 펴고 붓으로 일부 진상 표어와 주련을 써서 저녁에 자전거를 타고 마을의 일부 주요한 도로변에 붙였다. 이튿날은 설날이라 오가는 사람이 아주 많았는데 표어를 보고 모두 놀라는 기색이었을 뿐만 아니라 속으로 대법에 대해 감탄하기 시작했다.

2001년에 졸업한 후 일을 시작한 뒤, 혼자 몇 개 성시를 오가다 보니 나는 돈이 없어서 설비를 구입할 수 없었고 동수들에게 배포할 진상자료를 공급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사업 환경이 좋아 각종자료와 시디 모두 수월하게 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 자료를 배포할 시간은 도리어 충족하지 않았다. 평소 매일 출퇴근할 때, 거리에 사람이 많아 진상을 하려해도 쉽지 않다. 이전에 줄곧 지폐도장을 만들어 진상문자를 새긴 후 지폐에 찍으면 아주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이 방면의 기술을 모르고 자금이 부족하여 줄곧 도장을 새기는 기계를 사지 못했다.

2008년 중반, 한 노동수가 자금을 지원해 드디어 광민 도장기계와 일부 광민 도장소모품을 구입했다. 반년간 기회를 보아 몇 십 개의 광민 도장을 다른 기타 동수들이 상용하도록 했다. 도장이 있으니 수시로 몇 개씩 가지고 다니면서 물건을 살 때, 지폐의 빈 공간에 찍기만 하면 되었는데 초간에 진상지폐가 나왔고 큰 금액의 지폐는 작은 금액의 지폐로 여러 장 바꾸어 계속하여 찍을 수 있어 진상하는데 아주 편리했다.

도장은 글씨가 작고 또렷해 사용하기만 하면 거절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부 노년 동수와 자료를 제작하기 불편한 동수들은 도장을 보고는 아주 기뻐했는데, 이것을 법기로 여기고 아주 편리하게 고효율의 진상사업을 했다. 후에 나는 도장이 지폐에 찍는 데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응당 기타 공공장소에도 찍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큰 글자의 도장을 새겨 출퇴근하거나 고향에 놀러갈 때, 외출하여 여행할 때를 막론하고 나무걸상 뒤, 교실의 책상위에 흰 교각이거나 인행천교 난간, 거의 어디에나 다 사용했다. 도장의 글자가 작고 정교하여 건물의 미관에 영향을 주는 부면작용을 일으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 초 동안 찍을 수 있고 사람들에게 발견될 위험도 없었다. 그러므로 유람객이 많은 관광 구에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 대법제자 모두 대법의 진상표어를 쓰거나 찍어놓는다면 필연적으로 대량의 사악이 소멸되고 인연 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구도될 것이다.

생활 속에서 우리가 수시로 진상을 열심히 한다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실 것이며 우리에게 환경을 개척해 주실 것이다.

수 만장의 진상시디를 대학교에 뿌리다.

2002년 초, 나는 지금의 성시에 왔는데 이곳은 초대의 성시이고 인구가 매우 많다. 여기에는 익숙한 동수가 없고 서로 연계하기도 불편했지만, 나의 기술력으로 자료점을 건립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개인 자료점을 건립했다. 경제능력이 좋아져 각종설비 즉 컴퓨터, DVD 시디버너, 절제기, 도장 찍는 기계 등 모두 구매했다.

성시에는 컴퓨터 텔레비전 등 설비가 아주 보편적으로 공급되어 있어서 나는 될수록 진상시디를 많이 제작하여 배포했다. 2003년 경 나는 늘 일부 학교의 사원 아파트에 시디를 배포하고 일부 아파트에 배포했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많은 우체통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몇 개에 하나씩 시디를 놓았다. 어떤 때에는 누나 집에 갈 때 아파트 집집마다 배포했다. 주의력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나는 일반적으로 손에 광고 책 혹은 신문을 들고 광고를 배포하는 사람으로 가장했다. 매번 저녁에 비가 올 때면 마음속으로 진상자료를 배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여겨 우산을 들고 가방을 메고 길을 떠난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외출하는 사람이 적고 우산으로 자신과 우체통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시디를 우체통에 넣을 수 있다. 어떤 때에는 시내버스에 앉아 자료를 배포하고 돌아 올 때는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전세 집이 교구에 있어서, 이곳에서 치안이 난잡하기로 소문난 늘 멀지 않은 곳에서 약탈하거나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사부님께서 보호하고 계셨기에 어디를 가나 마음이 든든했다.

시디를 많이 놓으면 그 구역의 보안이 공황에 빠지기도 한다. 한번은 저녁에 퇴근하여 어느 구역을 돌기위해 바깥 길을 걷고 있는데, 한 보안과 경찰이 달려와 강제로 나의 가방을 뒤졌다. 나는 그런 상황에 처음 봉착했기 때문에 놀랐지만 아주 빨리 진정하고 높은 자태로 그 두 놈을 직시했다. 때마침 그날은 소량의 시디를 옷 호주머니에 넣었고 가방에 넣지 않은 날이었다. 두 놈이 계속 나의 가방을 뒤졌지만 나는 당당하게 그들을 훈계했다. 어찌하여 마음대로 남의 물건을 뒤지는가? 했더니 아무것도 찾지 못한 두 놈은 슬그머니 달아났다. 나도 재빨리 거기를 떠나 돌아오면서 좀 무서웠지만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하시어 자료를 몸에 건사했던 것이다. 이후 나는 나가서 시디를 배포할 때 만약 가져간 것이 모자라면 시디를 옷 호주머니에 넣고 가방 측면을 천으로 덮는 방법을 썼다.

작은 구역의 보안은 갈수록 엄했고 낯선 얼굴을 보면 특히 주의했으며 시디도 배포하기 쉽지 않았다. 후에 나는 진상시디를 각 교실과 학생에게 주면 효과가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이가 젊어 보이고 학생처럼 보여 교실에 드나들기가 편리했다. 학생들이 비록 사당 문화의 독해를 깊이 받았지만 학생들은 접수능력이 강하고 호기심이 강하다. 학생들이 시디를 가져가면 후에, 한 기숙사씩 온 학급의 학생모두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컴퓨터가 있는 학생이 비교적 많기에 시디를 가지고 보기를 즐긴다.

이곳에는 고등학교가 매우 많은데 학교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어 다른 학교까지 가려면 시내버스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나는 먼저 건축물을 검사하고 일부 공공 교실을 찾는다. 대부분의 아파트에는 경비가 지키고 있어서 나는 떠나기 전에 발정념으로 다른 공간의 사악을 제거했다. 일반적으로 한 교실에 시디 한 두 개씩 배포하는데 대다수 학교에는 교실에다 CCTV를 설치하여 촬영하고 있다. 자료를 배포할 때 저녁에 교실에 많은 학생이 있어 배포하기 힘들었는데, 아침 6시경 차에 앉으면 가능하게 일부 호기심이 있는 학생들의 주의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모 학교구역에는 늦게 가는데, 점심과 저녁식사 시간을 기다렸다가 학생들이 식사하러 간 뒤 교실에 사람이 적을 때 다시 자료를 배포하기 시작한다.

춘하추동 엄동설한 무더위에도 6년 동안 수많은 주말과 휴가를 이용해 시내버스에 앉아 각 학교 구역을 왕래하면서, 얼마나 많은 학교와 교실을 오갔는지 모른다. 어떤 땐, 겨울에 새벽에 일어나면 게으름이 나와 나가기 싫었지만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나고 구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각나서 이를 악물고 가방을 메고 나갔다. 늘 가는 어느 큰 대학에는 건물이 많아 건물 사이를 걸어 다니려면 상당히 고생스러웠고 잠그지 않은 공공 교실을 찾아야 했다. 너무나 많이 걸어 다녀야 했는데, 어떤 때는 한낮이라 햇볕이 너무도 뜨거웠고, 어떤 때는 저녁이라 달과 별이 가득하고 찬바람이 불었다. 어떤 때에는 텅 빈 거리를 걸으면서 이미 배포한 시디를 생각하며 묵묵히 아직 배포하지 못한 가방속의 시디를 생각하면 머리위의 하늘 주위공간의 광야를 보면서 마음속에는 남다른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진상 시디가 만들어져 배포됨에 따라 학생들 사이에도 갈수록 널리 전해졌고, 사악은 크게 당황해 안절부절하면서 일부 우스운 행동을 하기도 했다. 한동안 그들은 학교교문에서 임의로 출입자들의 가방을 검사했고, 출입증을 갖고 교문을 출입하는 등 현상이 나타났다.

한번은 어느 교사가 이미 포장한 주머니를 끌고 가는데 무리하게 검사를 요구해 그 교원가족은 아주 흥분해 욕을 퍼부었다. 무슨 세상인가, 당신들은 강도인가, 당신들은 수색증을 갖고 검사하는가, 보자고 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나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나는 일찌감치 무인지경에 들어가 할 일을 다 했던 것이다. 어떤 학교는 더욱 우스웠는데 매번 학생들이 교실에서 나가고 나면 즉시 학생회의 사람을 배치해 교실 뒤에 앉아 지키게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모습은 완전히 학생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학교에서는 아주 큰 CCTV를 교문에 설치하고 경비가 눈을 크게 뜨고 지키고 있는데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여봐란 듯 마음대로 드나들며 그런 장식품들은 아예 나를 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6년 동안, 개인이 제작하고 배포한 시디가 5천장 가량 된다. 학교에 매년 새로운 학생이 입학하면 10여개 고등학교의 학생이 몇 만 명이 되는데 진상을 안 학생들은 매 개인이 모두 산 매체가 된다. 후에 사악은 정말 방법이 없게 되자 대부분의 학교 교실 문을 다 잠그고 소량의 교실을 열어 학생들에게 자습하게 했다. 사악은 정말 나쁘다. 학생들이 진상을 얻을 수 있는 대문을 닫아버려서 시디를 배포하기 쉽지 않았다.

물론 법을 실증하는 법보는 매우 많다. 예를 들면 큰 글로 새긴 도장은 쓰기가 매우 편리해서 길을 걸으면서도 적당한 곳이 있으면 찍을 수 있다. 이렇게 컴퓨터가 없는 사람도 진상정보를 볼 수 있고 인연이 있는 사람들도 알 수 있다.

결속어

내가 생존하는 의의와 목적은 바로 대법을 수련하고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며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1년의 수련과정에서 사부님을 협조하여 정법하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고 많은 여의치 못한 후회와 교훈이 많지만 이런 것들은 이미 모두 지나갔다. 그러나 훗날에 나는 계속 온건하고 이지적으로 세 가지 일을 잘 하여 많은 중생을 구도하여 사부님께 합격된 답안을 바치기를 원하며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도지은을 저버리지 않겠다.

(밍후이왕 제6기 중국대륙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http://www.clearwisdom.net/html/articles/2009/11/30/112714p.html)

문장발표: 2009년 11월 11일

문장분류: 정법수련 >대륙인터넷법회글 >6회

문장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09/11/11/2118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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