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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일을 잘하여 용맹정진하자

글 / 중국랴오닝 대법제자 쯔구이(子歸)

【밍후이왕 2009년 11월 1일】 나는 1997년에 법을 얻은 노제자이다. 법을 얻을 때 17세였는데,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대법은 이미 나의 마음속 깊은곳에 뿌리내렸다. 금방 법을 얻었을 때 《전법륜》을 단숨에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 읽었다. 법을 한번 읽고 나자 나의 세계관은 즉시 모두 개변되었고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 한 시기 개인 수련의 시간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법을 얻은 지 12년이 되었고 이미 성인이 되었다. 사존님의 자비로운 가호 하에 한걸음 한걸음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비록 많은 곤두박질을 쳤으나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었기에 나는 그래도 한번 또 한번 일어설 수 있었고, 법정건곤의 홍대(洪大)한 순간에 자신의 자그마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만일 이 한 시기의 역사를 바르게 걸으려면 반드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인 법공부ㆍ발정념ㆍ진상을 잘하여 사람을 구해야 한다.

* 법공부

사부님께서는 여러 차례 설법에서 법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이는 대법제자가 일체를 잘할 수 있는 기초이다. 나는 평소에 대법을 실증하는 일에서 기술적인 일을 담당하고 있었고 게다가 속인의 일터에서 아주 긴장하다보니 상대적으로 법공부 시간이 아주 적게 되었다. 법공부를 좀 많이 하기 위해 매번 점심식사 시간 후에 나는 신속히 행동하였는데, 밥먹는 시간을 줄여 시간을 짜내어 전자책으로 법공부하였다. 출퇴근하거나 공공버스를 탈 때도 나의 법공부시간이었다. 법공부 환경이 그다지 조용하지 않기에 반드시 고도로 집중해야만 하였다.

정말로 불법은 무변하다. 법공부할 때 오직 나의 마음이 조용해지면 주위의 일체도 따라서 조용해지며 다만 대법만이 머리속에서 소용돌이친다. 나는 법공부하는 과정은 바로 대법의 에너지를 섭취하는 과정임을 느꼈다. 마음이 조용하지 않으면 법과 한 층의 무형의 장벽이 있으며, 법의 홍대한 에너지를 느낄 수 없고 더욱이 법의 힘을 섭취할 수 없다. 만일 법공부를 집중하여 하고 마음이 다른 곳으로 질주하지 않으면 자신의 모든 심신이 법속에 용해되는 느낌이 들며 법의 홍대한 에너지는 끊임없이 전신에 주입된다. 물론 법공부할 때 교란도 있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곤마의 교란형식이며 이때는 견정한 정념으로 교란을 제거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교란이 끊임 없으면 정념으로 제거하는 것을 끊이지 말아야 한다. 그다지 바쁘지 않을 때는 가부좌하고 허리를 곧추 세우고 법공부한다. 최대한도로 경사경법하여야 하는데, 내가 여기건대 이렇게 법공부하면 가장 좋으며 머리가 청성해질 뿐만 아니라 효과도 아주 좋다.

* 발정념

발정념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통법력이며 우선은 신사신법을 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자신이 볼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면 곧 작용이 없게 된다. 오직 기점이 법에 있고 정념이 족하면 반드시 효과가 나타나며 사악은 반드시 제거된다. ‘신선이야기’에 아주 많은 신선들이 신통을 운용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신선은 신통을 운용함이 아주 스스럼 없으며 마치 밥먹고 잠자듯이 자연스럽다. 나는 신통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스스럼없이 신통을 운용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다고 여겼다. 한 동수가 전에 마굴에서 뛰쳐나온 이야기가 기억난다. 그 동수는 붙잡혀 간수소에 납치되었다. 동수는 줄곧 어떻게 정확히 사악을 부정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한 악경은 기세등등하여 전기방망이로 동수에게 전기충격을 가하려고 했다. 동수는 위엄 있게 거기에 서서 발정념으로 악경의 배후 사악을 제거했다. 악경의 손에 들고 있던 전기방망이는 순식간에 터져버렸다. 악경은 풀이 죽어 다급히 다른 전기방망이를 들고 왔다. 그 결과 동수와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또 터져버렸다. 이렇게 연속 세 번을 거듭됐고 나중에 악경은 놀라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

사부님은 일찍이 우리에게 일체 신통법력을 구비하셨다. 사용하고 안 하고 잘 사용할 수 있는지는 모두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발정념은 자신의 신통을 전용(調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역시 자신의 천병천장(天兵天將)을 전용하는 것으로 다른 공간에서의 표현은 바로 정사대전(正邪大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엄숙히 대하지 않고서야 되겠는가? 어떤 동수는(나를 포함하여) 발정념할 때 늘 얼떨떨하며 심지어 자고 있다. 전장에서 잠자는 후과는 어떠할지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여의롭게 신통을 운용하여 악을 제거함에 최근에 동수가 쓴 글 ‘신통을 사용하여 프린터의 색을 변화시키다’ 라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이 글에서 동수는 신통을 운용함에 ‘항심(恒心)’과 ‘믿음’이 있어야 하며 한번 혹은 여러 차례 잘되지 않는다고 포기해서는 안 되며 뿐만 아니라 ‘신통운용’을 일상생활 속에서 일종 ‘습관’으로 단련해내야 한다고 하였다.

이틀 전에 나는 한 가지 작은 일에 봉착했는데 나에 대한 계발이 아주 컸다. 그날 나는 집에서 머리를 감게 되었는데 머리를 적시고 아주 자연스럽게 샴푸병의 버튼을 눌러 샴푸를 짰다. 이때 아버지가 걸어오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 이 버튼이 눌러지네. 오랫동안 고장나 있었는데.” 나는 이 일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고 그냥 웃었으며 또 샴푸를 짰다. 내가 머리를 다 감자 어머니도 머리를 감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샴푸를 사용할 수 없었다. 어머니도 약간 놀라 나에게 말했다. “네가 쓸 때는 문제없었는데?” 이 일은 비록 작으나 나의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바로 발정념으로 신통을 운용하는 심태를 반영해낸 것이었다. 기실 이 샴푸병의 버튼이 고장난 것은 나도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바로 이번에 사용할 때에는 그것이 고장난 것을 ‘잊게’ 되었다. 잘 사용된다고 여겼기에 그것이 잘 사용되었다. 정말로 ‘좋고 나쁨은 일념에서 나오는데'(《전법륜》)였다. 한번은 동수와 발정념의 심태를 교류하면서 자신이 비록 매일같이 발정념을 하고 있으나 생각의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발정념은 가능하게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 문제는 아주 엄중한 것으로 직접 신사신법의 문제와 연관된다. 절대적인 ‘신사신법’을 할 수 없다면 기타의 것은 공리공담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금후로 반드시 깊은 층에 있는 이 ‘의심스러워하는’ 사상을 깡그리 멸하여 진정으로 자신으로 하여금 신통하게 할 것이다.

* 진상 알리기

나는 학교에 다닐 때에는 주로는 인터넷을 통하여 진상을 알렸다. 그때는 주요하게 PC방에 가서 메일을 보내고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진상을 알렸다. 학교를 다니면서 법공부와 연공 시간이 모두 아주 적었고 게다가 자신의 심성에도 누락이 있었다. 비록 사부님의 점화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그래도 자신의 고집대로 해나갔고 나중에는 사악에게 틈을 주어 붙잡히게 되었다. 일이 발생하기 전날 나는 학교울타리라는 사이트에서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를 열었다.(이렇게 되면 자신을 완전히 폭로하게 되는 것이다) 가기 전에 무언가가 나의 앞에 막아 나서며 가지 못하게 했고 뿐만 아니라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가로지르고 고집대로 나갔다. 뿐만 아니라 요행심리도 존재하여 잠깐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으로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다. 그러나 이튿날 바로 악경에게 붙잡혔고 이로써 학업을 잃게 되었다. 이번의 침통한 교훈은 나를 깨닫게 했다. 진상 알리기는 이지적이어야 하며 줄곧 앞으로 가로질러 나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정진이 아니고 법을 실증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은 자신을 실증하는 것이다. 고집으로 앞을 가로질러 나가지 말며 억지로 틀지 말아야 하고 자신을 실증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록 깨닫기는 하였으나 어떤 때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동료에게 진상을 알릴 때 늘 일종 변론상태에 빠져들어 표면적으로는 법을 실증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여전히 자신을 실증하고 있었다. 한 가지 일을 견주어 반드시 누가 옳고 그른가를 변론해내려 했고 변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말속도가 아주 빨라 입마저 떨리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중단하지 않았다. 보다시피 나의 이 집착은 정말로 작지 않았고 결과는 어떠할지 뻔했다. 상대방은 화가 났고 정면효과보다는 오히려 반면효과를 일으켰다. 내가 마음이 조용하여 진상을 알릴 때는 곧 아주 좋은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다. 비록 나의 말하는 속도가 느리나 상대방은 모두 들었고 기본적으로 모두 삼퇴를 했다. 상대방이 반박할 때 그의 정서의 이끌림에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 진상을 알릴 때 두 가지 사례가 있는데 하나는 실패한 것, 하나는 성공한 것이다.

한번은 한 동료에게 진상을 알렸다. 그날 우리는 한창 뉴스를 보고 있었다. 내용은 중국의 식량 생산량이 작년에 비하여 얼마나 증가했다는 보도였다. 나는 이 뉴스를 빌어 말했다. “현재 중국의 식량 생산량은 아직 송나라 때의 식량 생산량보다 부족하다. 지금의 뉴스는 모두 헛소리이다.” 그러자 동료가 말했다. “그럴 수 없다. 송나라의 농업이 얼마나 낙후한 것인데 현재의 식량 생산량보다 많을 수 있겠는가?” 내가 말했다. “송나라의 식량 생산량은 긍정코 지금보다 많았다. 나는 그런 소식을 보았다.” 그 동료는 여전히 나의 말을 믿지 않았고 나중에 내기를 하자고 하여 나는 한마디로 응했다. 후에 내가 말한 것이 옳다는 것은 증명되었으나 동료는 여전히 불복했다. 나는 이 기회를 빌어 동료에게 중공사당이 여하하게 나쁘며 어떻게 백성을 농락하는지를 알렸다. 동료는 한마디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나를 반박해 나섰다. 나는 그래도 말했고 입은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내가 틀렸음을 점화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와 같이 실패한 예는 몇 번이 되며 그때마다 나의 상태는 거의 일치했는데, 바로 상대방을 일종 변론의 상태에 빠뜨렸다. 쟁투심과 일을 빨리 이루려는 마음이 전부 이끌려 나왔는데, 기점이 바르지 않으니 결과도 좋을 수 없었다.

진상을 알리기에 성공한 예도 있다. 나는 설계 일을 하고 있으며 늘 내장 공사하는 사람들과 거래했다. 내장 공사 사람들 대부분은 비교적 순박하다. 그리하여 오직 자신의 심태만 안정되면 내장 공사 사람들로 하여금 진상을 명백히 알게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아주 쉽다. 한번은 내가 전기공에게 진상을 알렸다. 나는 우선 그에게 션윈 CD를 보여주었다. 이튿날 내가 그에게 션윈이 어떠한지 물었더니 그는 오히려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CD가 별로 즐겁지 않아 기본적으로 빨리 감기로 보았다고 했다. 나는 이것은 그에게 CD를 줄 때의 나의 심태와 상관됨을 알았다. 그때 나의 생각에 스쳐 지나기를, ‘그의 문화수준이 차하여 아마 션윈같이 우아한 예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바로 이 일념으로 그가 션윈을 보는 것을 교란했다. 이 전기공이 션윈에 대하여 특별히 좋은 평가를 하지 않자 나는 그에게 계속 진상을 알리기가 겸연쩍어졌다. 나중에 나는 심태를 안정시키고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주제로 들어갔다. 나는 현 중국 대륙 관리들의 탐오와 부패부터 이야기했고 중공사당의 죄악을 하나하나 폭로했다. (폭로하는 과정에서 평상심을 유지하고 한 가닥의 원망하는 마음도 있어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하면 효과가 좋게 된다) 다시 중공사당이 어떻게 대법제자를 박해하였는지를 이끌어냈다. 전반 진상 알리기 과정에서 나는 모두 천천히 세심한 어조를 유지했고 매 하나의 글자마다 상대방이 똑똑히 알아듣도록 했고 빨리 끝내려고 하거나 속도를 추구하지 않았는데, 그러면 기대한 효과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진상을 알리는 심태가 점점 안정되었다. 나중에 상대방은 아주 시원스럽게 삼퇴에 대답했고 파룬따파가 좋음을 기억하게 되었다.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심태와 어조는 자신의 수련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좋은 수련상태가 나오려면 법공부와 발정념을 반드시 잘 해야 한다. 그리고 연공을 견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 연공

한동안 나는 연공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연공은 세 가지 일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겼고 게다가 자신의 시간이 많지 않아 연공은 이틀건너 사흘을 쉬었다. 그리하여 일정한 시간은 늘 정신상태가 부진했고 뿐만 아니라 잠을 아주 많이 자게 되었다.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고 안일함을 추구하는 마음도 틈타고 들어왔다. 안일함을 추구하는 마음은 현재 우리로 말하면 또 하나의 아주 큰 집착심이며 주변의 많은 동수들은 모두 부동한 정도로 안일한 마음을 추구하고 있다. 연공을 견지함은 바로 이 안일한 것을 구하는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다. 일정한 기간 수련상태가 좋고 나쁨은 연공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심성을 잘 파악하고 세 가지 일을 잘하면 연공할 때 잡념이 아주 적게 되며 뿐만 아니라 에너지 마당이 아주 강함을 느낄 수 있고 정공을 하는 시간도 길어지게 된다. 최근 들어 정공을 연마할 때 일종 감각이 있는데 만일 며칠간 심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세 가지 일을 잘하지 못하면 가부좌할 때 가슴에 뭔가 막혀 괴롭워 얼마 앉아있지 못하고 그만두게 된다. 만일 며칠간 무엇이나 다 잘하면 가부좌할 때 마음이 아주 편하고 앉는 시간도 길어지게 된다. 바로 평소의 수련상태가 직접 연공속에 반영되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연공인인데 연공하지 않고서야 어찌 되겠는가?

* 고비를 넘다

나는 젊은 대법제자이며 봉착한 첫 고비가 바로 색욕관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색욕관을 비교적 잘 넘겼고, 있더라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사회에 나와 일하기 시작한 후부터 색욕심은 이전보다 뚜렷이 많이 강해졌다.(혹은 색욕심이 진정으로 나온 것이다) 색욕관을 넘기는 일도 이전보다 빈번해졌고 심지어 한 달에 몇 번이나 넘겨야 했다. 물론 이는 자신이 매번 모두 착실히 넘기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 번이나 넘기지 못했고 잘 파악하지 못함은 자신이 조성한 것이다. 색정적인 것을 응당 보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직접 중생을 훼멸시키는 것임을 알면서도 늘 자신을 제약하지 못하고 가서 보았는데 마치 마약흡입자와 같았다. 매번 자신을 제약하지 못할 때는 모두 자신에게 요행을 바라는 마음에 호기심이 가해져 있었고 뿐만 아니라 자신은 ‘진흙 속에서 나와 물들지 않는다’로 되어야 하기에 ‘진흙 속에서 단련을 거쳐야 함’이 수요된다고 여겼다. 이것은 완전히 사오(邪悟)인 것이다. 스스로 자그마한 틈을 보이면 뒷수습은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악도 놓아주지 않는다. 자신이 조금만 느슨히 해도 사악은 즉시 줄곧 아래로 끌어내리려 한다. 색욕지심에 대해서는 절대로 결코 조금의 느슨한 심리도 가져서는 안 된다. 반드시 자신의 일사일념을 파악해야 하며 한 가닥의 바르지 못한 염두가 나오면 즉시 부정하고 제거해야 한다.

일 때문에 나는 늘 속인의 인터넷에 접속하여 일부 소재를 검색해야 한다. 현재의 사이트에는 정말로 무엇이나 다 있으며, 특히 색정적인 것이 곳곳마다 있어 당신이 보지 않으려 해도 안 될 정도이다. 이전에 매번 색욕의 교란을 받을 때, 그 시작은 모두 인터넷으로부터 시작되며 늘 모두 자신이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였다. 일부 자신의 일과 무관한 속인 사이트에 호기심이 생겨 점차 적지 않게 색정적인 내용을 담은 사이트에 유혹된다. 게다가 자신의 주의식이 강하지 못해 마성이 크게 발작하여 아무것도 돌보지 않고 주동적으로 그런 색정적인 사이트를 찾아 검색한다. 그러면 곧 수습할 수 없게 된다. 사악은 한걸음 한걸음 나를 아래로 끌어내렸기 때문에 평소 이러한 세부적인 세심한 것에 주의해야 한다. 길을 걸으면서 잘생긴 이성은 보지 말아야 하며 절대 보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한번 더 쳐다보아도 자신은 곧 오염된다. 날이 가고 달이 바뀌면서 쌓여 가면 곧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한번은 나의 여동생이 나에게 그의 남자친구 이야기를 했다. 여동생의 남자친구가 길가에서 나의 여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동생이 눈앞에 다가왔어도 남자친구는 여전히 여동생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여동생은 화가 났고 남자친구는 해석하기를 그는 큰길에서 종래로 여자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여동생의 남자친구는 속인이다) 이 이야기는 나의 마음을 크게 촉성시켰다. 속인사회의 일부 속인마저 이 정도로 해내는데 하물며 우리 대법수련자임에랴! 어떤 때는 정말로 이러한 말에 식은땀이 나게 된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삿된 마음으로 남을 보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사람에 대한 요구이며 대법 수련자에 대한 요구는 이것보다 훨씬 더 높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주요하게 현지 일부 기술일을 책임지고 있으며 늘 일부 컴퓨터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기술을 연구하려면 늘 아주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여야 한다. 기술 연구의 순리로운 정도는 자신의 심태에 의하여 결정된다. 특히 최근에 이러한 상태가 더욱 뚜렷하다. 나는 스스로 깨달았다. 기술을 연구하는 과정은 조급해서는 안 되며 환희심이 생겨서도 안 되며 늘 ‘평상심’을 유지해야 한다. 이러면 효과가 아주 좋게 되며 두뇌가 더욱 청성해지고 끊임없이 대법이 부여한 지혜를 얻게 된다. 예를 들면 최근에 사이버공간 기술을 연구하였는데, 전에는 이러한 기술에 접촉하지 않았고 게다가 사이트 기술에 대한 소개에 있어서도 이러한 기술에 대한 소개 자체가 많지 않다. 많은 것은 모두 스스로 하나씩 모색해나가야 하며 시작했을 때 정말로 한발 내디디기가 어려워 아주 많은 시간과 정력을 지불해야 했다.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에 대한 교란이 가장 심한 것은 조급해 하는 마음이었다. 만일 어떤 어려운 지점에서 긴 시간을 소모하게 되면 조급해 하는 마음이 곧 나타나 잇따라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러한 마음은 나오기만 하면 문제가 더욱 많게 되었으며 근본적으로 진행해나갈 길이 없었다. 이러한 상태가 나올 때 앞으로 맞받아 나가서는 안되는데, 잠도 자지 않고 그것을 해내려 하는 것은 정진하는 상태의 반영으로 볼 수 없다. 바로 앞을 가로질러 나가는 것으로 심하게 말하면 마성의 상태이다. 조급해하는 마음에 대하여 나는 즉시 발견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모두 능히 제때 자신의 심태를 조절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반드시 어찌 어찌 해야겠다’는 마음을 버릴 수 있었다. 조급해하는 마음에 비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것이 환희심이다. 매번 연구과정에 조금의 진전이 있으면 즉시 환희심이 나오며 어떤 때는 심지어 저도 모르게 자신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이럴 때마다 즉시 나빠졌으며 심지어 1초도 지나지 않아 연구해낸 결과가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번은 내가 한 동수의 집에서 한 가지 기술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아무리 해도 연구해낼 수 없었다. 반복적으로 문제가 발생했고 동수는 나에게 한마디 했다. “당신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평상심이 있어야 한다.” 이 말은 단번에 나를 깨우쳐 주었다. 그러했다, 평상심. 속인도 ‘교만과 조급함을 경계’하는데 나는 대법수련자가 아닌가?

수련의 체득을 질량껏 조리있게 써내려고 했으나 층차의 제한으로 여기까지 쓰고 나니 조금 흐트러진 것 같다. 그러나 이것도 자신의 수련과정의 일부 체득으로 써내어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동수 여러분 감사합니다.

문장발표: 2009년 11월 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제6회 대륙법회
문장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09/11/1/21135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