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베이성 대법제자 파리즈
【밍후이왕 2009년 11월 1일 】
사부님 안녕하십니까!동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1996년 말에 법은 얻은 대법제자이다. 이번 인터넷법회를 빌어 나 자신의 수련노정 체험을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우리는 얻기 힘든 이번 정법수련 기연을 소중히 여기고 최후의 수련노정에서 참답게 “세가지 일을” 잘하여 사존의 자비하신 고도(苦度)에 부끄럽지 않게 역사가 부여한 위대한 사명을 완성해야 한다.
* 연분이 있어 법을 얻다
1996년 말에 나는 17세에 불과했다. 당시 독학으로 대학 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연구생 시험을 보려고 생각했다. 초중학교를 다닐 때 한 순수한 교사가 진수(進修)학교를 졸업하고 연구생 시험을 보았다고 하였다. 나는 그에게 편지로 경험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나에게 자신이 무슨 경험을 알려줄 수 있게느냐고 하면서, 오히려 일생의 운명을 개변할 수 있는 파룬따파를 알려 주었다. 그는, 대법에서는 쩐(眞)ㆍ싼(善)ㆍ런(忍)을 말하였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의 진실을 깨닫게 하고 심령을 정화시켜 준다고 하면서 당 지역의 가까운 공원에 가면 바로 연공장이 있을 것이니 한 번 찾아가서 요해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래 한 번 알아보자는 호기심에 가까운 곳 성시의 공원에 가서 알아보았는데 정말로 있었다. 연공장의 동수들은 바로 나에게 동작을 가르쳐 주고 법공부 장소도 알려주었다. 나는 그때부터 대법수련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대법은 얻기 전에 나의 성격은 괴팍하였다. 아주 많은 사소한 일들을 너무 중하게 여기면서 늘 내려놓지 못할 뿐더러 심지어 오랫동안 우울증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법공부를 한 후 인생의 목적을 알 수 있었고, 아주 많은 일들을 분석할 수 있었으며 내려놓지 못했던 일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 온 몸이 가벼운 것을 느끼면서 대법은 너무도 좋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나는 법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였다.
당시는 겨울이라 매일 5시가 좀 지나 아직 날이 밝지도 않은 상태에서 바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공원의 연공장으로 갔다. 우리는 동수들과 함께 플랭카드를 걸고 연공을 하였다. 이렇게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매일 법공부하는 동시에 매주 정기적인 법공부팀에 참가하였다. 알지 못하는 중에 나는 이미 점차적으로 도(道) 가운데 있게 되었다.
6개월이 지나 졸업을 하게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수련생이 없었다. 나는 혼자 여러 가지 곤란한 상황을 견정한 정념으로 헤쳐나가면서 수련을 견지하였다. 지난 6개월 동안 단체 법공부하고 연공했던 환경은 나에게 견정히 행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아 주었다. 나 역시 사부님께서 무엇 때문에 단체 법공부, 단체 연공장의 수련형식을 남겨 놓았는지 알 수 있었다.
* 풍운이 돌변
사부님의 1998년 《북미제1기법회설법》과 《유럽법회설법》 등이 연이어 발표된 후 본 지역의 동수들은 홍법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1998년 말에서 1999년 초에 하나의 홍법 고조(高潮)가 일어나 대량적으로 연분있는 사람들이 대법 수련의 길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사악 세력이 대법에 대한 박해를 잠시도 지체하지도 못하고 등장하였다.
1999년 ‘4.25 평화청원’이 시작되어 형세는 변하기 시작했다. 본 지역의 일부 법을 얻은지 얼마 되지 않아 법공부가 깊지 못한 수련생들이 두려운 마음에서 수련을 포기하였다. 그 후 1999년 7월 20일, 사악들은 대법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나는 당시 미망(迷茫)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악의 하늘에 사무치는 거짓말에 나는 무의식중에 거대한 압력을 느꼈다. 그러나 2년 동안 법공부를 많이 한 기초가 있었고 또한 내심으로 대법이 좋다는 것과 사부님은 청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사악의 선전을 믿지 않았다. 늘 어두운 밤중에는 홀로 앉아서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고 물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당시 박해의 압력 앞에서 마음을 어기고 굴복하였는데 수련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없었다. 이리하여 나는 오직 기회만 있으면 어둠속에서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하였다.
1년 후 사부님의 신경문이 발표되었다. 나는 점차적으로 이번 박해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예전에 사악에 대한 보증류의 것들을 작패하는 엄정성명을 발표하였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에 따라 나는 진실을 알리며 세인을 구도하기 시작했다. 일부 동수들은 사악의 미친 듯 한 박해에서도 생사를 내려놓고 뻬이징(北京)으로 청원하러 갔다. 당시 저는 한 면으로 그들에 대해 탄복하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인해 감히 뻬이징(北京)으로 법을 실증하러 가지 못했다.
사악의 박해하에서 가족들도 나에게 수련을 포기하라고 핍박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기관에 출근하고 있었기에 제일 큰 일은 바로 젊은 나이에 앞길을 해야지 연공하면 밥이 나오느냐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에는 잘못이 없다고 하면서 견결히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하였다. 어머니는 성격이 사나왔는데 내가 연공하는 것을 보면 바로 화를 내면서 분노하였다. 그녀는 물건을 들어 마구 나를 때리기도 하였고 제인(结印) 동작을 하고 있는 나의 손을 벌려 놓기도 하였다. 내가 가부좌 동작을 하는 것을 보기만 하면 울면서 때리고 옷을 잡아당기고, 빗자루, 주전자 같은 것들을 마구 나의 몸에 던졌다. 당시 나는 오직 참고 견디었지만 마음속에는 도리어 바다가 뒤집히는 듯 수련은 어쩌면 이렇게도 힘든가 하는 느낌이었다.
당시 내가 어떻고 말해도 어머니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고 도리어 사부님께 불경한 말을 하였는데 나는 너무 안타까웠다. 남동생도 사당(邪黨)의 거짓말에 독해되어 나를 반대하였다. 당시 나의 마음은 위축되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대법은 생명의 근본이므로 긍정적으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온 하늘에 휩싸인 사악한 박해와 가족의 큰 압력하에서, 또 여러 지역에서 대법제자들이 연속적으로 박해받는 소식이 불시에 전해져 왔다. 나는 사악의 거짓말과 폭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매 1분이 모두 1년과도 같게 느껴졌지만 오직 대법만은 견결히 믿었다.
당시 심성이 높지 못한 상태에서 말하는 방식이 틀리고 언어에서나 이론에서 선(善)한 마음 또한 부족했으므로 나는 나중에도 어머니의 대법에 대한 편견을 개변시키지 못했다. 2003년 가을, 어머니는 불행하게도 불치병에 걸렸다. 나는 그해 겨울에 어머니를 모시고 뻬이징(北京)으로 병을 보러 가려고 하였다. 가기 전에 평화롭게 대법진상을 알렸는데, 어머니가 능히 대법을 수련하여 신체가 전변되고 또 어머니와의 원망도 잘 풀렸으면 하는 희망이었다. 나는 모친에게《전법륜》을 한번 읽어 주었다. 그는 듣고 배우려는 생각이 있기도 하였지만, 후에 또 돌아섰다. 나중에는 기연을 잃게 되었다.
작년초, 모친은 임종시 얼굴의 절반이 거의 변색하여 오관이 변형되었는데 너무도 보기 흉하였다. 돌아가기 1년 전에 줄곧 침대에서 고통을 겪었는데 얼마나 많은 죄를 감당했는지 모른다. 나의 마음도 역시 이따금씩 힘들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어머니는 나에게 당시 너에게 그렇게 한 것이 후회된다고 말하면서 당신을 대신하여 예전에 대법과 사부님께 불경하게 말했던 언행을 모두 작패하는 “정중성명”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임종전에 내가 어머니에게 “파룬따파 하오!”를 기억하라고 부탁했을 때 머리를 끄덕이었다. 나는 모친과의 원망을 선(善)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유감스러웠다.
* 사부님을 도와 정법
박해가 시작된지 2년 후, 현에서 영도 간부들을 조직하여 공개적으로 선발하여 시험을 보게 하였다. 나는 이론시험과 면접시험에서 모두 1등을 하였다. 그러나 사당 조직이 조사를 했는데, 내가 수련한다는 이유로 자격이 취소되었다. 이번 시험은 전체 과정이 사회에 공개되었으므로 나중에 일어난 나에 관한 뜻밖의 결과는 전체 현에 대한 악영향이 아주 컸다. 나는 당시 속인들이 보았을때 아주 전도가 유망한 사람이었지만, 수련을 선택하여 바로 속인들이 추구하는 명리와 모든 전도를 잃은 것이었다. 이 역시 생사관으로서 내심으로 모순이 많았다. 고민 끝에 나는 그래도 대법을 선택하였고, 결코 명리에 의해 사악과 타협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수련인은 반드시 속인의 명리정을 내려놓아야 하며 속인의 일체 집착, 부귀영화, 전도 등은 모두 수련인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4년 초, 기관의 월급이 적은 관계로 나는 그곳을 떠날 생각을 하고 바로 뻬이징(北京)으로 일자리를 얻으러 갔다. 집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동수들과 접촉할 수도 없었고 또 자료 내원도 없다 보니 오직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하면서 기회가 있으면 대면하여 사람들에게 대법의 진상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1년 후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역시 막벌이 일을 하는 동수를 만나게 해 주셨다. 그는 시장에서 컴퓨터와 흑백 복사기를 구매하였다. 능히 적은 양의 일부 자료를 만들 수 있어 나에게 일부를 주면서 배포하게 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나는 천천히 인터넷에 들어가는 것을 배웠으며 그리하여 돌파 사이트로 밍후이왕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얼마 후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에게 한 대의 복사기를 주었다. 나는 한 대의 컴퓨터를 구매하여 배우게 되어 능히 자료를 만들 수 있었다.
2006년, 나는 하나의 판매원 일자리를 얻었는데 늘 외지로 출장을 다녔다. 매번 출장시 나는 항상 대법책을 가지고 다녔다. 진상자료가 적었으므로 나는 출장갔을때 접촉하는 사람이 많은 기회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했다. 비록 많이는 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일보일보 성숙되었다. 어디로 가든지 막론하고 나는 항상 자신이 대법제자라는 것을 명심하고 세인을 구도하기 위해 큰 거리에서 오고가는 중생들을 볼 때마다, 아주 많은 세인들이 사당(邪黨)의 독해로 인해 구도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에 마음이 아주 괴로웠다.
나중에 사부님의 세밀한 안배하에 한 외지 동수의 도움으로 또 몇 명의 젊은 대법제자를 알게 되었다. 여러 동수들은 함께 주말에 단체 법공부하고 교류를 하였는데 모두들 제고가 아주 빨랐다. 나도 능히 독립으로 진상자료를 만들 수 있어 수시로 만들고 배포하였다. 나는 동수에게서 “9평” 책자와 신운CD를 가져다가 배포하였다. 동시에 법공부를 많이 하고 부단히 정진하여 사악한 환경에서도 자신을 제고하였다.
작년 뻬이징(北京) 올림픽 전야에 내가 투숙한 지역의 파출소에서 인터넷 정보의 감시를 이용하여 나를 발견하였다. 4월 중순 어느 날 갑자기 나의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와 파룬궁 인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였다. 나는 당시 이미 집을 옮겼으므로 악경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모르고 있었다. 이리하여 나는 뻬이징(北京)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원래의 기관에 출근했다.
고향의 환경과 사람들은 모두 비교적 익숙하였다. 그런데 이곳에는 지금 수련을 견지하는 사람이 얼마되지 않았다. 나는 돌아간후 가정 자료점을 꾸리어 현지의 동수들에게 자료를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제때 사부님의 신경문, 명혜주간, 진상자료를 얻을 수 있게끔 보증하였다. 당 지역에는 협조인이 없었다. 직접 현성에 연결하기는 불편하여 내가 주동적으로 협조인 사업을 짊어지고 하나의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할 일을 열심히 하였다.
작년 결혼하기 전 저녁에 내가 밖에 나가 진상자료를 배포한다는 것을 알게된 여자 친구가, 내가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얼굴을 붉히면서 화를 내었는데 심지어 한마디로 떠나겠다고 하면서 가버렸다. 그녀는 내가 법공부하는 것은 이해하였지만 진상자료를 배포하는 것은 나의 안전에 불리하였기에 근심하였던 것이었다. 그때는 마침 결혼준비를 할 때였는데, 나의 마음은 또 일정한 파동이 생겼다. 그러나 나는 한 대법제자로서 중생구도는 나의 사명이므로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정(情)에 대한 마음을 내려 놓았다. 결혼은 연분이다. 나의 것이면 바로 나의 것이고 나의 것이 아니면 나는 구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면 만약 그가 진정으로 자료배포로 인하여 나를 이미 떠나버렸다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기회가 온다면 그녀에게 “나는 좋은 일을 하고 있으며 사람을 구도하는 큰 일을 하고 있으니 당신은 마땅히 나를 지지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도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알려 줄 것이다. 내가 마음을 내려놓으니 그녀도 나를 더이상 상관하지 않아 모순도 없어졌다. 그리고 기쁜 것은 금년 상반기에 그녀도 대법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지금 본 지역의 많은 동수들은 자료배포를 하였는데, 몇 년간 배포한 자료가 적지 않다보니 계속 배포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흥취가 잃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고 있으니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배포하기 원하지 않았다. 일부 노년 동수는 눈이 좋지 않아 아주 적게 나가 배포한다. 나의 자료점에 있는 진상자료는 대면하여 진상하는데 보조적 작용을 할 수 있다. 지금은 환경이 변하여 사악들은 느슨해 졌으며 세인들이 점차적으로 능히 대법을 인식하고 있는데 자료배포가 적어서는 안 된다. 비록 내가 그들과 자료 문제에서 여러 번 교류하였지만 줄곧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이곳은 본래 동수가 적은데다 지금은 많은 동수들이 자료배포를 하지 않고 있는데, 외지 동수에 의지한다는 것은 될 말이 아니라 나의 마음은 역시 아주 조급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자랐다. 졸업한 후 또 여기에서 사업을 하다보니 이 지역의 사람들은 비교적 거의 익숙하다. 그들 대부분은 모두 선량하고 순박한 사람들로서 역시 구도를 기다리고 있지 않는가! 이리하여 나는 기다릴 수 없으며 의지할 수는 더욱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다만 살고 있는 촌에 배포하고, 나중에는 10여 일간 처음으로 주변 농촌 마을에 가서 자료를 배포하였다. 사람들이 잠든 후의 시간을 이용하였는데 홀로 오토바이 몰고 나가면 한 번에 능히 100부 이상 배포할 수 있었다.
밝거나 혹은 어두운 야밤에 마을에서 매번 나갈 때 중생을 구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사부님께서 신변에 있는 감각이었으며, 내가 하는 일은 제일 바르고 제일 의의가 있는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처음 저녁에 밖에 나가 자료배포를 끝내고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시동이 걸리지 않았는데, 오히려 논밭머리에서 3킬로미터 넘은 길을 잘 빠져 나왔다. 나는 사부님께서 내가 하는 일은 가장 올바른 일이라고 격려해 주셨다는 것을 알았다. 한 정법시기 대법제자라면 오직 중생을 구도하는 일에 있어서 대법에 유익한 일이면 바로 주동적으로 가서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협조하는 일에서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 보니 동수들의 정체제고를 추진하는데 아주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뒤돌아보면 수련한지 이미 12년이 되었다. 연분이 있어 법을 얻게된 것은 나에게 비할 바 없는 행운이다. 바로 자존의 자비로운 보호하에서 위대한 대법중에 오늘까지 평온하게 걸어왔다. 정법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서 우리들은 느슨히 해서는 안 된다. 오직 부단히 정진하면서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 을 잘 해야만 자존의 자비로운 고도(苦度)를 저버리지 않고 대법제자의 위대한 사명을 완성할 수 있다!
이상은 자신의 경험이니 부당한 곳이 있으면 동수들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다시 한 번 위대하신 사존님께 감사 드립니다!
모든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동수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밍후이왕 제6기 중국대륙대법제자 수련체험교류회)
문장발표:2009년 11월 1일
문장분류 : 정법수련 > 대륙인터넷법회투고 > 제6기(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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