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대륙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11월 17일]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전세계 여러 동수님들 안녕하십니까!
법을 얻은 지 8년이 되었다. 체험을 쓸 생각은 늘 하고 있었으나 여러 가지 교란과 나 자신의 태만함으로 몇 번이나 썼다가는 중도에 그만두곤 해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비록 이미 제2기 인터넷 법회 원고제출의 마감시간은 지나갔지만 그냥 이렇게 써낸다. 이 기회를 빌어서 동수들과의 교류를 통해 다그쳐 안으로 찾아 보고,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자신에 대해 엄격히 요구하여 원만의 길에서 굽은 길을 덜 걷게 하며, 세가지 일을 잘하고 용맹 정진하여 더욱 많은 세인을 구도하려 한다.
8년이 지났다. 대법의 법리와 사부님의 적시적인 점화가 있었기에 나는 지금까지 수련을 포기한적이 없고,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의심을 가져 본적이 없었다. 나는 “眞.善.忍”이 우주의 근본임을 확고히 믿으며, 대법제자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법시기의 대법 실증에 참여할 수 있게 된것으로 우리는 비할 바 없는 행운과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느낀다. 나는 깨우쳤다- 사부님께서 하신 일체, 쓰신 일체 책들은 모두가 법이다. 대법제자로서 만일 일사 일념이 모두 법 속에 있다면 넘지 못할 관이 없고 지나지 못할 난이 없으며 마난은 결국에 가서 마난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8년 동안을 회고해 보노라니 걸어온 길에서 좌절을 당할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가슴 속은 언제나 무한한 행복과 감격으로 차고 넘쳤다.
인연을 맺어 법을 얻었다
나는 70년대 초반에 사천성의 머나먼 한 농촌에서 출생하였다. 정서는 순박했지만 그래도 중공악당 역사의 “정치운동” 침식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비록 현재의 실증과학으로는 해석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많고 많은 불가사의한 일들을 겪었지만 어릴 때부터 중공악당의 무신론에 주입되어 미신으로 여겼으며 배척을 하였다. 그러나 기공이나 특이공능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선천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부님의 세심한 배치에 감사 드리며, 그랬기에 나는 법을 얻을 기연이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연구생으로 공부를 할 때의 교수님은 파룬따파 수련생이었다. 97년 5월 중순의 어느 날(수요일) 나는 교수님께 토요일에 공원에 나가 연공을 하겠다고 하니, 그는 매우 기뻐하면서 《전법륜》 책을 보라고 나에게 빌려주었다. 그날로 나는 단숨에 4강까지 보았다. 나는 책 속의 법리와 지혜에 탄복하였다. 잇따라 오후부터 설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실험실은 일 층에 있었고 화장실은 2층에 있었다. 나는 열 번도 넘게 화장실로 다녔지만 조금도 다리가 풀리거나 피로하지 않았다. 참으로 신기하였다. 사부님께서 내 몸을 정화시켜 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더 기다릴 것 없이 다음날부터 공원에 나가 5장 공법을 배웠다. 그로부터 행복한 수련의 노정에 올랐다.
불광이 널리 비추니 예의가 원만하고도 밝도다
97년도 겨울방학때 기차를 타고 사천으로 가던 중, 광한을 지날 때 한 무리 강도들이 차 위에 올라와 우리 기차 칸에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돈을 받아내고 있었다. 내가 앉아있는 줄에 왔을 때, 그들 중 조금 연령이 들어 보이는(40여세) 사람이 내 곁으로 와서 앉으면서 나에게 무슨 책을 보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정신을 몰두하여 《전법륜》을 보고 있었다. 나는 책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보다가 말하였다. “말씨를 들으니 당신은 내강(內江)의 한 고향 사람이구먼. 당신은 빼놓겠어!” 그의 다른 깡패들은 내 맞은편의 남자아이(18, 19세)에게 칼을 빼 들고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하였지만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잇따라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이때 그 강도가 도리어 10원을 꺼내 그 남자에게 주면서 성도(成都)에 간 후 차비로 쓰라고 하는 것이었다. 성도에 도착한 후 좀 두렵긴 했지만 마지막에야 사부님이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불광이 널리 비추니 예의가 원만하고 밝도다.”의 내포를 알게 되었고,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와 대법의 위력을 체험하게 되었다.
석사 연구생 공부기간에 나는 법공부 수련과 과학연구과제 및 생활의 관계를 잘 평형 시켰으며, 단체 법공부와 연공에 적극 참여하였다. 나는 졸업할 때 우수 졸업생으로 되었고, 1998년 5월에는 유명한 미국의 다국적 기업에 들어가 근무하게 되었다. 나는 깨달았다. 대법수련은 세상을 피해서 소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배우는 것이며, 순리에 따르면서 집착을 버리고 심성을 제고하면 당신에게 속한 물건은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98년 5월, 나는 남방의 X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도착한 다음날 아침에 공원에서 동수와 함께 수련장을 찾았다. 그 후의 일년 동안을 이 시의 주변구역에서 단체 법공부, 단체 연공, 단체 홍법을 하면서 우리는 법 속에 용해되어 신속한 제고를 가져왔다. 동시에 5년 동안 각종 병으로 고생하던 어머니가 98년 음력 설부터 수련하기 시작하여 반년이란 짧은 시간내에 신체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나의 부친도 매우 빨리 법을 얻었고, 사천 고향집에다 법공부 연공장을 건립하였다. 어떤 때는 사람이 너무도 많아서 앉을 자리조차 없었다. 대법은 널리 전해졌고 인심은 선을 향하였으며 수련장소는 우리 사천 농촌 고향 방방곳곳에 있었다.
중원은 재난 속에 휩싸이고 대법제자 정념정행하네
99년 4월 25일, 천진경찰이 사람을 붙잡는 일이 생겨 우리 그 지역의 수련생들이 서명을 하여 적극적으로 성원하였으며, 성(省) 정부에 가서 선의적으로 해명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갔는데 70, 80세 노인, 여섯 달 된 임신부, 어른, 아이 등이었다. 그때 당국은 방폭(防爆) 경찰을 출동시켰고 고함소리는 하늘을 진동하여 대법제자의 평화적이고 우호적이며 선량한 것과 선명한 차이를 이루었다. 그들은 대법제자들을 한 차 한 차씩 실어다가 교외지역의 먼 곳에서 내리게 하였다.
7월 22일 후, 나는 출장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북경에 가서 많은 대법제자들을 만났다. 몇 십 명이 근교에 집을 한칸 빌렸는데 고생이 막심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함께 단체 법공부를 할 때면 특별히 따사로웠다. 비록 당시 테러에 휩싸였고 거리에서는 수시로 경찰들이 외치면서 줄지어 지나갔지만 말이다. 나는 털옷 한 벌과 식품 한 상자를 남겨놓고 북경을 떠나 남방으로 돌아 왔는데 그날로 핸드폰을 잃어 버렸다. 나는 내가 하나의 기회를 잃었다는 것을 깨우쳤다. 그 후 매번 북경에 가면 천안문에 가서 발정념을 하였고 택시기사, 가게 일꾼, 호텔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려주었다.
2004년 7월 북경에 가기 전 고열이 났다. 이것은 사악의 박해로서 교란이란 것을 알고 낡은 세력의 배치를 견결히 부정하였다. 북경 수도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혼미해 지면서 바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호텔에 들어온 후 침대에 누우니 더욱 괴로웠다. 나는 일어나 앉아서 발정념을 한 후 연공을 하였다. 5장 공법을 다 하기도 전에 이미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때 나보다 젊은 직장동료가 감기에 걸렸었는데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았다. 나는 그 다음날 회의를 주최하였지만 그는 오전에 참여하지도 못하였다. 대조하여 볼 때 어느 것이 더 과학적인가? 대법은 “진정한 과학이며 설교와 유심이 아니다.”<정진요지, 실증> 대법이야 말로 더욱 높은 초상적인 과학이다.
무리한 체포
99년 말 우리 10여명 사람들이 공원에서 교류하다가 경찰에게 미행당하여 무리하게 체포되었다. 그들은 어떠한 이유와 절차도 없이 우리를 파출소에 가둬놓았고 동수들의 대법책을 빼앗았으며 동수들을 때렸다. 내가 아이를 데리고 온 동수를 위로하는데도 경찰의 폭력적인 위협과 질책을 당하였다. 우리는 파출소에서 <홍음>을 외웠고 포룬 연공을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바깥에서 보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 비밀리에 간수소로 보내졌다. 거기에서 동수들은 야만적인 음식주입을 당하였고, 한 동수는 며칠 내에 박해 받아 사망했다.(명혜망에 발표되었음)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작은 전등알이 꿰인 것을 입혀서 채색등으로 사용했는데,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서있게 하였다. 다른 한 동수와 나는 간수소에서 서로 고무 격려하였다. 그들이 심문하고 모욕하고 거짓말을 주입시켜도 우리는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을 조금도 개변하지 않았다. “사람마음을 덜면 악은 스스로 패하리라.”<홍음2, 슬퍼하지 말라> 7일 후 나는 무조건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대법의 길 바로 걸어 가정의 정(情) 관을 넘다
이 일이 지난 후, 나는 고향에서 여전히 수련을 하고 있는 부모님들께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 함께 수련하던 아내가 압력과 공포로 수련을 그만 두었다. 가정의 압력은 상당히 컸는데 아내는 나에게 그녀와 대법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내 마음은 극도로 고통스러웠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부님께 말하였다- 사부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저는 꼭 견지해 나갈 것입니다. 그 무엇도 저의 수련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점점 명석해 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떠나기 싫소. 나는 잘못한게 없고 대법도 잘못이 없소. 만일 당신이 정말로 나하고 헤어지려고 한다면 난 당신을 축복해 주겠소. 아내는 몹시 울면서 나에게 또 무슨 위험이 생길까봐 그런 것이며 모두 나를 위해서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내 싸두었던 보따리를 땅바닥에 던지면서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정을 내려놓고 대법의 위치를 바로 놓으니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하에서 또 한 관을 넘었다. 후에 한번은 진상 CD을 이웃집에다 보라고 주었는데 돌려줄 때 아내가 받게 되었다. 그는 매우 화를 내면서 그것을 태워버렸다. 그리고 딸을 데리고 이혼하려고 하였다. 나와 부모님은 발정념을 견지하면서 아내 배후의 사악한 인소와 낡은세력의 교란을 제거하였다. 우리는 깨달았다. 구두 진상의 힘을 더욱 가강 할 필요를 느꼈다. “대법제자 진상을 알리거늘 입 속 예리한 검 일제히 뿜어내네. 썩은 귀신의 거짓말 폭로하고 다그쳐 구도하세. 빨리 알릴지어다.”<홍음2, 빨리 알리세> 멈추지 않고 발정념을 하여 이 일은 후에 원만히 해결되었다. 아내는 더욱 많은 진상을 알게 되었고 나와 나의 부모님이 법공부하고 연공, 발정념하며 진상을 알리는 것을 간섭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택시 안에서 진상할 때면 나와 협력하여 함께 말해주곤 하였다.
사부님과 대법을 믿으면서 정법수련의 길을 바르게 걸어왔다
2000년 여름 발정념을 갓 알게 되었을 때다. 내가 사는 구역의 길 옆의 벽에 대법을 비방 모욕한 선전게시판이 있었다. 내가 그것에 대해 발정념 한지 이틀 후에 그 벽 곁에 자라던 큰 나무가 넘어져서 삼각형으로 절반 벽이 떨어져 나갔는데 곧 바로 대법을 모욕한 그 부분이 무너지면서 부서졌다. 이 일은 나와 동수들의 발정념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확고하게 해주었다. 금년 여름에 나와 가족들은(5식구 모두 수련함) 그곳에 가서 이 신기한 현상을 견증하고 이미 수리한 벽을 사진 찍었다.- 끊어진 한 쪽은 여전히 보아낼 수 있었다.
2001년 회사에서는 러시아에 사람을 파견하여 시범운행 방법을 배워오도록 하였는데 부문 고층 지도부에서는 나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사악이 비집고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었던 때였다. 회사 공회에서는 반드시 보증서를 쓰고 파룬궁 수련생이 아니라는 증명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나는 기회를 찾아 동료들, 상사(프랑스인과 미국인) 및 인력 자원부 경리 등에게 정황을 설명하고 진상을 알렸다. 후에 나는 이번 출국기회를 포기할지언정 수련의 길에 명예롭지 못한 필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2004년 6월 내가 독일 베를린에 가서 국제 학술회의에 참가할 때에는 사악들이 그전처럼 그렇게 창궐하거나 무리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증명서를 쓰라거나 혹은 보증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프랑크프르트에 갔었는데 공원에 가서 해외 대법제자들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나는 독일어를 모르지만 그러나 컴퓨터에서 독일어 진상자료를 복사하여 길가는 사람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베를린에서 동수를 만나 함께 연공하고 교류하였었는데 그때 아주 행복한 감을 느꼈다. 현지의 한 여자동수는 법회에 여러 번 참가하여 사부님을 만나 뵈려 했지만 모두 만나지 못하였다가 대륙에서 온 동수를 만나자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다.
2002년 나는 처음으로 회사에서, 성(省) 소재지에 있는 학교에서 초청하는것에 관해 책임지는 일을 하게 되었다. 초청자료 속에서 대법제자에 대한 내용을 발견하였다. 교원이 요구하는 학생 표준에 대한 한 규정에는 파룬궁 수련을 하는 학생을 추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명성이 자자한 미국의 독자(獨資) 대 회사도 장씨 사악 정권에게 꽁꽁 묶여 사악과 배합하여 나쁜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발정념 하는 동시에 스스로 추천표준을 고쳤고 그 단락 요구를 빼버렸다. 2003년 이 규정의 요구는 회사 전체 범위 내에서 취소되었다.
이 6년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도시로 출장 다녔는지 모른다. 대부분의 중국은 거의 다 돌아 다녔으며 (대략 26개 성, 직할시) 한국, 필리핀, 독일에도 갔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기회를 이용하여 진상을 직접 입으로 말하였고 재료를 배포하였다. 시사에 맞춰서 말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사스, 인도양 해일(쓰나미), 탐관오리, 사람과 사람관계, 자녀교육 등이다. 부장 경찰, 중공아가씨, 기사, 장사꾼, 교수, 호텔 청소부, 종업원, 웨이터, 농사꾼, 외자회사 고위급 경리, 백인, 흑인 등등 많고 많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들이 이로부터 진상을 알게 되어 나는 정말로 너무도 행복하다고 느낀다. 사부님의 배치에 감사 드린다. 발정념 하려 하고 동시에 사부님의 가지를 청하면서 혹은 자신의 신의 일면에게 “신” 같이 되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즉각 대화의 화제가 생겼고 천안문 분신자살의 문안, 9평, 삼퇴 등 면으로 끌어 올렸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매우 적을 뿐더러 많은 사람들은 진상을 알게 된 후 감사를 표시한다. 많은 당원들은 몇 년 혹은 십 몇 년씩 당비를 내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탈당을 하려 하거니와 대법이 박해 받는 진상도 알게 되었다.
나는 보통 차에서 진상을 말하거나 자료를 주는데, 안전하고도 편리했다. 그러나 사악한 낡은 세력의 배치는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다. 진상 알릴 때 흔히 교란이 있다. 예를 들면 핸드폰이 울리거나 혹은 곁에 경찰차가 나타나는 등등이다. 발정념으로 사악을 없애고 계속하여 진상을 알린다. 사심 즉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일방 천지를 더 많이 구도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무릅쓰고 내려온 주, 왕들이 진상을 명백히 알면 인연을 맺어 대법에 동화된 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집착을 다시 버리다
지난 일년 동안 나는 사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연공, 법공부, 진상 알리기를 늦추었다. 금년 4월에 손님의 집에서 식사할 때 진상을 알리었는데 이 손님은 회사에 나를 고발하였고, 회사 지도부 및 세 개 부문 사람들이 나를 찾아 담화하였다. 회사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은 계속되는 나의 권고를 듣지 않고 여전히 공안국에 나를 고발하였다. 비록 적발 편지에는 사실에 근거하여 나를 위해 좋은 말을 많이 써넣었다. 예를 들면 특출한 사업업적, 상을 수상한 상황 등등이다. 나도 기회를 틀어쥐고 진상을 알렸으며 동수와 식구들도 함께 발정념하여 사악의 교란을 철저히 제거하였다. 이미 짐을 싸놓고 피난을 떠나려던 나는 후에 동수의 집에서 법공부를 가강하고 교류하면서 이것은 사악한 낡은 세력의 배치이며 우리는 오로지 사부님이 걸으라고 하신 길만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다. 나는 그날 저녁으로 집에 돌아왔고 다음날에는 출근을 하였다. 나는 사업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노임이 대폭으로 올랐고 7월과 9월에 또 연속 회사에서 여러 항목의 상도 받았다.
그때 이 일은 나의 동수인 부모님께도 거대한 고험으로 되어서 그들의 두려운 마음도 아주 많이 없어졌다. 그 외 나의 아내도 또 다시 대법의 편에 서게 되었고 다시 수련을 시작하여 나를 지지하고 고무격려 해주고 나를 도와 발정념을 하였다. 사부님의 자비에 만분 감사드린다. 아내의 닫혔던 천목도 다시 열렸다. 우리 온 가족이 제일 곤란할 때에 사부님은 우리 식구들에게 극히 큰 격려를 주셨다. 이번의 관을 넘으면서 사업에 대해 너무 집착하였고 그로 인해 명리와 회사의 정에 대한 강대한 집착이 생겼으며, 실제상 아직도 대법과 사업, 생활의 관계를 바로 놓지 못했고, 진정으로 법을 첫 자리에 놓지 못하였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일사 일념을 모두 법에 놓을 수 있다면 사악은 저절로 소멸될 것이다.
후기 : 이전에는 수면 부족으로 몽롱하면 다음날 사업에 영향 줄까봐 늘 근심했었다. 며칠
전, 면접시험관및 도시 초빙 책임자로서의 나는 회사의 이틀간의 초빙 면접관 역활을 거의 20시간에 걸쳐 하였고, 저녁에는 이 심득체험 초고를 새벽 3시까지 썼다. 수면이 부족할까봐 두려워하는 집착을 버리게 되니 그날 저녁 조금도 졸리지 않았고 다음날도 주관 시험관으로서의 나는 면접 시험 때 아주 정신이 났고 결과는 상당히 이상적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수 시로 봐주시고 보호해 주시어 나는 수련체험을 쓰는 것과 동수와의 교류의 위력과 중요성을 더욱 명백히 일게 되었다.
(제2차 대륙대법제자수련심득서면교류대회교류문장)
문장완성 : 2005년 11월 15일
문장발고 : 2005년 11월 17일
문장갱신 : 2005년 11월 16일
문장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5/11/17/114619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