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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주(冠州)대지에 불광이 널리 비추다 1

-사부님께서 관현(冠縣)에 오시어 법을 전한 14주년 기념-

글:산동(山東) 관현(冠縣) 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2월 22일】

목차

머리말
1. 만세(萬世)의 인연 대법에 이끌려
2. 사부님께서 처음 관현에 오시다
(1)신의 자취
(2)공(功)과 법(法)을 전수
(3)사부님께서 제자 집에 가시다
(4)사부님께서 소성(蕭城)에 가시다
(5)사부님께서 대명(大名)에 가시다
(6)사부님께서 영암사(靈岩寺)에 가시다

머리말

1992년 11월과 1993년 5월 사부님께서는 두 차례나 관현에 오셔서 우주의 근본대법을 관현대지에 골고루 전하셨다. 대법을 널리 전하던 시기에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얼마나 많은 제자들이 이곳에 와서 교류하고 토론했던가? 1999년 7.20 이후, 이곳은 또한 사악이 중점적으로 박해하는 지역의 하나가 되었다.

1. 만세(萬世)의 인연 대법에 이끌려

관현은 지리적으로 루시평원(魯西平原) 서쪽과 연기(兖冀)중간의 로위(魯衛) 접경지대에 있다. 즉, 요순 시대 이래 기주(冀州)라고 불리던 지역이다. 주(周)나라 때에는 진관씨(晋冠氏)와 황읍(黄邑)이라고 했다. 춘추에는 진관(晋冠)씨의 읍이라고 했으며 한조(漢朝) 때는 청연현(清淵縣)이었다. 당나라 때는 고조(高祖)를 휘하여 청천현(清泉縣)으로 고쳤다[역주: 당나라를 개국한 당고조 이연(李淵)의 이름에 ‘연(淵)’이란 글자가 들어가는 관계로 이것을 피해 다른 글자로 바꿨다는 의미]. 송조와 금나라 때는 대명부(大名府)로 불렸고 원나라 때는 동창로(東昌路)에서 지원(至元) 6년에 관주(冠州)로 승격되었다. 명청(明淸)대에는 동창부(東昌府)에 속했으며 지금은 랴오청(聊城)시에 속한다. 동쪽으로는 마자허(馬頰河)를 사이에 두고 동창부(東昌府)와 인접해 있다. 서쪽으로는 웨이허(衛河)가 있고 허베이(河北)성의 관타오(館陶)와 이웃하고 있다. 남으로는 신현(莘縣)과 접해 있으며, 북으로는 린칭(臨清)과 접해 있다. 동서 길이는 약 40킬로미터, 남북은 약 50킬로미터이다. 면적은 1,150평방킬로미터이고 현재 인구는 약 70만 명이다.

관현경내에 고산준령은 없지만 그러나 예부터 하천이 많고 윤택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홍안강(鸿雁江), 사하(沙河), 황하(黃河), 청하(清河), 조왕하(趙王河), 마협하(馬颊河)와 고돈하(古屯河)는 경내로 흐르고 더욱이 청연(清淵), 교고(巧姑)[교여천(巧女泉)이라고도 한다], 엄산[弇山 청대에 『엄묘령천(弇庙靈泉)』이란 시가 있었다. 높은 엄묘에 파란연기가 감돌고 감천은 파도치고 비석에 새겼노라. 삼십육계를 알고 덕정에 감사를 드리니 단비는 촉촉이 산령에 기도드리네.(巍巍弇庙绕烟青,泉有澜兮碑有铭。卅六知时酬德政,甘霖底事祷山灵)] 등 맑은 샘물이 앞 다투어 솟아나고 한 갈래의 영험하고 수려한 기가 흐르는 듯 하늘땅이 풍요하고 수림이 우거져 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일찍이 공자가 만선향(萬善鄕) 왕단촌(王段村)에서 제자인 염자(冉子)를 문병차 방문하여 머문 적이 있다. 성(城)에서 동북쪽 6킬로미터 떨어진 장평촌(張平村)에는 맹자를 기념하는 사당과 효춘정(曉春亭) 유적이 있다. 맹자는 여기서 종횡가 경춘 대장부를 만나 마땅히 “부귀하더라도 음탕하지 말아야 하고, 빈천하더라도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위협과 무력 앞에서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주었다. 일찍이 두 분의 성인(聖人)이 이곳에 머물면서 글을 가르쳤다. 공자의 제자인 염자는 이곳을 사랑하여 죽은 후 이곳에 묻혔다. 지금의 만선향 왕단촌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관현 사람들은 글을 읽는 사람이 많고 남자는 농사짓고 여자는 옷감을 짜면서 효와 의를 아는 전통적인 마을이다. 당태종과 양연소(楊延昭)가 일찍이 이곳에서 말을 달린 적이 있고 목계영(穆桂英) 역시 이곳에서 적진을 크게 격파한 적이 있는데 당시의 군사 유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신불(神佛)을 공경하는 예절이 대대로 전해져 선남선녀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현 전체에 사원과 도관(道觀)이 널려 있다. 그중 유명한 곳만 도 40여 곳에 달한다. 예를 들면 성 동쪽의 자제사(慈濟寺), 천불사(千佛寺)[지금의 칠리불당(七里佛堂)], 국보사, 취보사(聚寶寺)[지금의 한촌], 태평사[지금의 개하두(開河頭)], 성 남쪽의 원조사(圓照寺), 삼청관(三清觀), 백탑사(白塔寺)[전설에 의하면 천신(天神)인 이정(李靖) 천왕의 백색보탑을 훔쳐 여기에 내려왔다고 한다], 백불사, 원통사(圓通寺), 석불당, 관인당, 성 북쪽의 불성사, 만선사, 정혜사, 만수사, 금강사, 벽가궁, 성 서쪽에 82개의 절과 72개의 당나라 시대 사원들이 있다. 현성(縣城) 내에는 여조당, 자제사, 자혜암(慈惠庵), 관인당, 자미관, 개리사, 숭명사(崇明寺) 등이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불(神佛)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예의와 양보는 습관이 되었고, 불도신(佛道神)을 믿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졌다. 신불이 이 비옥한 땅을 보호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일찍이 많은 중생들이 인걸(人傑)과 땅이 영험한 이곳 관현으로 와 대법이 홍전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명(明), 청(清) 시대부터 천재인화(天災人禍)가 끝없이 발생했고 예의와 신불을 공경함이 점차적으로 쇠퇴하여 사찰과 도관도 파괴되었다. 집을 지키기 위해 무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고 문맹도 많아졌다. 문화가 없으면 법을 얻는데 아주 큰 장애가 아닌가?! 어떤 방법으로 세인을 깨닫게 하겠는가?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언급해야 할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1883년 관현(冠縣) 류린(柳林)진 우장(武莊)에서 출생한 천고의 걸인──우쉰(武訓)이다.

1993년 5월 12일 점심때의 일이다. 관주호텔(당시는 현위원회 초대소)북쪽 식당에서 2,30명이 사부님을 뵙고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밥을 먹기 전에 사부님께서는 “관현에 온 것은 고향에 온 것과 같다.”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사부님의 고향은 장춘이 아닙니까?”라고 묻자, 사부님께서는 “이전 한 생에 내가 관현에 있었다.”라고 하셨다. 정확하게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모두들 더 여쭙지 않았고 사부님께서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사부님께서는 장춘제자들에게 사부님께서 관현에 사셨을 때 속인 중에서 동냥했다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진수(眞修)』라는 경문에서 말씀하시기를 “당신들은 아는가? 부처님은 당신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찍 속인 중에서 동냥하였다.” 사부님과 우쉰은 어떤 인연인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제도하시기 위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무수한 고생을 겪으셨다. 우리는 마땅히 이 만고의 기연과 사부님의 자비하신 고도(苦度)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2, 사부님께서 처음으로 관현에 오셨다

(1)신의 자취(神迹)

1992년 늦은 봄 관현 제1기 친목회가 열려 일부 외지에서 일하던 관현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중에는 중국 기공과학연구회에서 일하던 한위안(韓玉安)도 있었다. 당시 한위안이 만난 간부들이 아주 많았는데 그 중에는 양생의 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거나 유명한 기공사를 소개해 달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에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리훙쯔(李洪志) 선생님과 法輪功(파룬궁)을 소개하고 추천해주었다. 관현에는 당시 10여 가지 기공이 전해졌지만 몇 년간 연마해도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히 하는 방면에서 효과가 썩 좋지 않았다. 한위안의 소개를 듣고 法輪功(파룬궁)이 좋다는 생각에 사부님을 모시기로 준비하였다. 발기인으로는 장화이쉬안(張懷軒) 전 현지(縣志) 편집장, 안원빈(安文彬), 류시치(劉希奇, 체육위원회 교사),나중에 현위원회 부서기 스융자오(史永朝), 부현장 치위펀(齊玉芬)도 초청에 찬성했다. 후에 민정국(民政局)의 장루팅(張汝亭), 왕슈펑(王秀峰) 두 국장과 주위춘(朱玉春) 주임(당시에는 모 공파의 보도원이었다), 현 기공협회의 왕(王) 회장과 노간부국의 저우전다(周振達) 국장 등 여러 부문에서 연합으로 사부님을 초청했다.

사람이 병을 앓는다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부님께서는 당시 아주 바쁘셔서 한동안 관현에 오실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한위안에게 사부님께서 언제쯤 학습반을 여시는지 물었다. 대략 10월 25, 26일 쯤에 한위안의 전화를 받았는데 사부님께서 10월 30일에 북경에서 학습반을 여신다고 했다. 10월 29일 루라오루이(老瑞)와 메이룽(美容) 두 사람이 바로 북경으로 갔다. 그날 밤 라오루이(老瑞)는 평생 처음으로 부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꿈을 꾸었다. 한위안의 도움으로 라오루이와 메이룽 두 사람은 30일 오전 북경 대법제자 류(劉) 누이의 집에서 사부님을 뵈었다. 당시 그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사부님께서는 라오루이를 보고 아주 기뻐하셨다. 그를 위해 신체를 조정해주셨고 친히 法輪(파룬)배지를 달아주셨다. 사부님께서는 엄지손가락으로 라오루이의 천목 부근을 비트신 후 “돌지 않는가?”라고 하셨다. 라오루이는 ‘적화(赤化)’가 심해서 ‘돌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부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조금 힘을 더 주어 다시 한 번 비트셨다. 라오루이가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돌아갑니다”라고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웃으셨다. 그가 꿈에서 부처님을 만났던 일을 사부님께 말씀드리자 사부님께서는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될 거라고 하셨다.

대략 30일 오후 4,5시쯤 法輪功(파룬궁) 전수반이 2포병 부대 강당에서 열렸다. 11월 5일 오후 이번 기 전수반이 끝나갈 무렵 라오루이는 강당 뒤편에서 하루 빨리 관현에 오셔서 법과 공을 전수해주실 것을 사부님께 간곡히 말씀드렸다. 한위안도 옆에서 거들었다. 사부님께서는 매우 바쁘시지만 빠른 기일 내에 관현에 가시겠다고 대답하셨다.

11월 12일 자정 라오루이와 라오다이(老戴 가명) 두 사람은 라오루이의 전용차를 타고 한단(邯郸)기차역으로 향했다. 새벽 5시쯤 사부님과 일행 4명이 한단 기차역에 내려 라오루이의 차를 타고 지한공로(濟邯公路)에서 허우탕구베이(後唐固北) 길을 거쳐 관현으로 들어섰다. 약 7시가 넘어 사부님 일행은 홍기로(紅旗路) 중간쯤 다리 북쪽에서 하차하신 후 모퉁이 남쪽에 있는 작은 가게에서 관현에 도착한 첫 아침식사로 튀김과 콩국을 드셨다. 식사 도중 라오루이가 사부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겠다고 하자 사부님께서 동의하셨다. 식사 후 사부님 일행은 노간부 활동센터에 가서 유관부문 지도자들을 만나 학습반을 꾸리는 일에 대해 상의했다. 당시 회의에 참가한 공안국, 민정국, 노간부국, 체육위원회, 기공협회와 모 공(功) 보도소 등 방면의 유관인원들이었다. 회의 도중 사부님께서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몸을 조정해 주셨다. 11시 반이 넘자 라오루이는 사부님 일행을 점심식사에 초대했고, 노간부국 저우전다 국장과 라오다이가 와서 알현했다. 점심식사 때 사부님께서는 병을 보러오는 사람이 많을 것이니 번거로움을 끼칠 수 있다고 하시면서 라오루이의 집에는 가지 않기로 하셨다. 어떤 사람이 사부님을 현위원회 초대소 귀빈실로 모시자 사부님께서는 비싸다고 하시며 하루 저녁만 묵으신 다음 서쪽 2층에 있는 일반실로 옮겨 23일 아침 관현을 떠날 때까지 묵으셨다.

12일 오후 현위원회 부서기 스융자오(史永朝), 부현장 치위펀(齊玉芬)이 합동으로 관현 직속 국장급 간부 몇십 명에게 통지해 노간부 센터에서 함께 회의를 했고, 사부님께서 관현에 오시어 경을 전하고 보배를 가져다주신 것을 열렬히 환영했다. 여러 사람들에게 法輪功(파룬궁)을 알리기 위해 사부님께서는 13일 오전 관현 영화관에서 한차례 파룬궁 보고회를 열기로 결정하셨고 노간부 센터에서 병 치료를 3일간 해주셨다. 저녁식사는 관주 영빈관 서남쪽 작은 식당에서 드셨는데, 민정국에서 사부님을 청하신 것이다. 이때 사부님을 모신 사람들은 국장 장루팅, 부국장 왕슈펑, 사무실 주임 주위춘과 공안국 경찰 간부 2명이었다.

11월 13일 오전 8시가 지나자 사부님께서는 극장에서 파룬궁 보고회를 진행하셨다. (한위안도 참가) 오후에는 노간부 활동 센터에서 병치료를 해주셨다. 16일까지 바삐 보내시고 오후에는 저녁 강의를 위해 노간부 센터에 가지 않으셨다.

사부님께 병 치료를 하실 때 기이한 일과 기적이 많이 나타났다. 이런 형식을 통해서 사람들은 대법에 대해 초보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 병치료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병이 나으면 10위안을 받았고 당시 효과가 분명하지 않으면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일반 노간부 활동센터에 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중의(中醫)나 양의가 치료하지 못하는 난치병 환자들이었다. 그들은 여기에 와서 운이나 한번 만나려고 한 것인데 반신불구 환자들도 적지 않게 왔다. 예를 들면 현 병원 직원인 자오위셴(趙玉顯)은 밤중에 귀가하다가 서문 밖에 있는 리민(利民) 다리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졌는데, 강물이 말라있는 상태였기에 머리가 땅에 부딪혀 윗부분이 마비되어 목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손발도 움직이지 못해 밥도 가족들이 먹여 주었는데, 몇 년 동안 가족들이 많은 고생을 겪었다. 그러던 그가 사부님의 치료를 받은 후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 이런 효과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4일 오전 날씨가 좀 쌀쌀했고 북풍이 약간 불었다. 8시 무렵 노간부 활동센터에는 병치료를 하러 오는 사람들로 끝이 없었다. 그 중 한 중년부인은 몇 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4년째 병으로 직장을 쉬고 있었지만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혼자서는 생활조차 할 수 없었고 앉거나 설 때도 너무나 어려워 가족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그녀의 남편이 여러 차례 휴가를 내어 병원에 가곤 했다(제일 긴 휴가는 약 일 년)랴오청(聊城) 전문병원, 성(省) 제 1병원, 성 제 2병원, 성 중의병원, 성 노동개조병원, 88병원, 90병원, 북경 셰허(協和)병원 등 내노라하는 병원에 가서 모두 치료해 보았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병세는 갈수록 심해져 종종 쇼크가 발생했고 몸은 나뭇가지처럼 말랐다. 약 160센티미터의 키에 55킬로그램이던 체중이 32킬로그램으로 빠졌고 매일매일 고통 속에서 죽음의 문턱에서 몸부림쳤다.

10시쯤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서쪽 방문 앞에서 그녀를 보면서 무슨 병이 있는지 물으시면서, 눈을 감고 윗몸을 약간 구부리라고 하시고는 오른손으로 머리에서 발까지 한 번 두드리셨다. 그 소리는 매우 컸는데 약 20분 정도 지나자 이 부인의 불그레한 얼굴에 땀방울이 많이 맺히면서 각종 병이 다 없어졌다! 사부님께서 그녀에게 눈을 뜨라고 하신 후 무엇을 보았는지 묻자 그녀는 눈앞이 깜깜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사부님께서는 그녀에게 눈을 감았다 다시 떠보라고 했는데, 그녀는 많고 많은 다른 공간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다. 그녀는 사부님의 불체(佛體)를 보고는 즉각 사부님께서 사람을 제도하려 오신 것임을 알았고 부처님이 세상에 계심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는 그녀에게 자전거를 타라고 하셨고(그녀는 4년이나 자전거를 타보지 못했다)그녀는 바로 자전거에 올라갔다(오성이 좋아 사부님께서 시키는 대로 한 것이다). 사부님께서 빨리 타보라고 하셨고, 류 씨 아주머니도 빨리 탈수록 좋다고 하자 그녀는 뜰 중앙의 큰 연못을 돌면서 자전거를 탔는데 마치 어린 아이 같았다. 뜰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위해 박수를 치면서 격려해 주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도 매우 많았는데 모두들 너무나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기쁨에 들뜬 그녀를 보고 무어라 말씀하셨지만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갔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간 후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춤을 쳐봤다. 그녀는 춤을 추며 사부님께서 자신의 병을 치료해 주셨는데 나는 사부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했다. 15일 아침 일찍 그녀는 4년 동안 타지 않았던 자전거를 찾아 사부님 곁에서 봉사요원으로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바퀴에 바람이 빠져 있어서 남편더러 바람을 넣게 한 후 자전거를 타고 사부님을 뵈러 갔다.

15일 하루는 자전거가 좋았는지 두 번이나 오가며 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6일 오후에 보니 앞바퀴에 바람이 없었다. 남편이 반나절이나 바람을 넣어도 들어가지 않아 살펴보니 안의 고무바퀴가 없었다! 그래서 뒷바퀴를 보니 역시 안에 고무바퀴가 없었다. 부부는 깜짝 놀랐고 아주 신기한 것을 체험했다고 했다.

3일 동안의 자문(咨询)치료 중 신기한 기적이 많이 나타났다. 심각한 심장병, 암, 뇌혈관 질환, 고혈압 등도 치료된 예가 아주 많았는데 여기서는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다.

2)공(功)과 법(法)을 전수

11월 16일 저녁 7시, 法輪大法(파룬따파) 관현 제 1기 학습반이 관성(冠城) 진 회의실(지금은 존재하지 않음)에서 진행되었다. 사람이 많아 두 번째 강의는 관현 양조 공장 회의실(지금은 창고로 쓰고 있음)에서 열었다. 17일 저녁 무렵 제자들은 차로 사부님을 양조 공장 회의실로 모셨고, 사부님께서는 강의가 끝난 후 걸어서 관주 여관으로 가셨다. 마지막 날까지 사부님께서는 모두 걸어 다니셨으며 완고하게 제자들이 차로 모시지 못하게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매일 일찍 출발하셨는데 홍기(紅旗) 거리를 따라 십자로에서 동쪽으로 돌아 관현 양조 공장까지는 약 400미터 가량 된다. 모퉁이에 인민 이발소가 있었다. 즉 지금의 ‘하오둬메이(好多美)’ 양장점이 있는 곳이다. 당시 사부님께서는 이곳에서 이발을 하셨다.

제자들은 모두 매일 일찌감치 양조 공장에서 사부님을 기다렸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셨는데 많은 사람들은 끝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사부님께서 공개적으로 법을 전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제자들은 아직도 무엇이 수련인 줄 잘 몰랐고 허스(合十)하는 예절조차 몰랐다. 그저 사부님은 공이 높으신 기공사인줄만 알고 마음속으로 아주 친근함을 느꼈을 뿐이다. 어떤 제자들은 사부님과 악수하면 공이 빨리 자란다는 생각을 가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생각은 아주 유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매 번 일찌감치 문 앞에서 기다리는 제자들과 악수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얼굴에 자비한 미소를 띠신 채 여러 사람들을 보셨고 어떤 때는 제자들과 몇 마디 말씀을 하신 후 강의실로 향하셨다.

사부님께선 1992년 5월 장춘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法輪功(파룬궁)을 전수하셨다. 2차례 학습반을 꾸리신 후 북경에서 1기를 꾸리셨는데 그 다음 4번째 강의는 10월 14일 태원 광산기계공장 초대소에서 진행했다. 라오루이가 참가했던 것은 북경 제 2기 학습반이어다. 사부님께서는 그 후 바로 관현으로 오신 것이다. 관현은 사부님께서 공개적으로 법을 전하신 4번째 지역으로 전국적으로는 6번째 학습반이 열린 곳이다. 이것이야말로 관현 최대의 영광임을 당시 관현 제자들은 인식하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학습반에서 강대한 공을 내보내 많은 사람들이 피곤하고 더운 것을 느꼈다. 19일 저녁 사부님께서는 회의실 벽조차 빛을 방사한다고 말씀하셨다. 공을 가르치실 때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의 손이 몸에서 20센티를 넘지 말게 하셨고 그 안에서 치지(氣機)를 찾으라고 하셨다. 나중에 제자들이 이런 것들을 말할 때면 모두 감개무량해 하며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사부님의 자비하신 고도를 보답할 길이 없어한다. 오직 견정하게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수련의 길을 걸어가고 사부님께서 가르쳐 주신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만이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리라.

한 번은 사부님께서 강의하시기 전에 말씀하셨다. “이 법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데 어떤 부체(附體)는 아주 깊이 숨어 사람들과 함께 들어왔다. 당신은 빨리 나가 사람 몸으로 전생하여 이 법을 얻어라. 잠시 후에도 가지 않으면 제거해 버리겠다.” 사부님께서 말씀을 마치자 5, 6명의 수련생들이 구토하려는 것을 참지 못하고 문밖으로 나섰고 부체들이 가버렸다. 그 몇 사람은 돌아온 후 아주 정상적이었고 마치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듯했다.

당시 모든 기공사들은 다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것을 말했지만, 사부님께서는 고층차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을 말씀하셨다. 어떤 제자들은 고층차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사부님께 노자나 혜능(慧能) 그런 층차인지 물었다. 어떤 제자의 기억에 의하면 사부님께서는 천정을 가리키시면서 노자와 혜능도 모두 법을 듣고 있다고 하셨다. 어떤 제자들이 이 공은 얼마나 높이 수련할 수 있는지 묻자 사부님께서는 “만약 여래 이 층차가 있다고 한다면 그는 막지 못한다.”라고 하셨다.

매 사람의 근기가 같지 않아 학습반에서의 반응도 같지 않았다. 어떤 수련생은 4번째 강의 시간에 왔는데 그는 다른 사람이 제인하고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고 그도 따라했지만 곧 천목이 열렸다. 사부님이 계신 강연대에는 산이 있고 물이 있고 정자와 누각이 있었으며 마지막에 보니 사부님께서는 큰 부처님이셨다.(이 수련생은 후에 개봉에서 교류회에 참가할 때 실내에 크고 작은 法輪(파룬)이 꽉 차있는 것을 보았다.)

이번 기 관현 학습반을 원래 열흘 예정이었는데 주최 측에서 시간이 길다고 하여 나중에 7일로 줄였다. 사부님께서 수련생들의 신체를 조절할 때 내보내신 공은 에너지가 크고 맹렬하여 어떤 제자들은 강의를 들을 때 혼미하여 잠자는 상태라 사부님께서 강의하시는 것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이후 법공부를 통해 차츰 사부님의 위대함과 자비를 인식하게 되었다.

학습반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부님을 뵙고는 아주 익숙하고 전혀 낯설지 않다고 했다. 어떤 수련생은 강의를 들은 후 사부님을 따라 초대소로 가는 도중에 자신이 며칠 전 꿈에서 어떤 사람이 도와준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사부님께서는 당시에 바로 해답해주셨다. 사부님께서는 학습반에서 말씀하셨다. “3년 전부터 당신들을 관계하였다. 당신이 이 학습반에 참가한 것은 삼생(三生)의 행운이고 조상에서 德(더)를 쌓은 것이다. 세상을 떠난 당신의 친지들도 포함하여 모두 덕을 본다.”

22일 오후 사부님께서 강의를 끝내시자 식사 시간이 되었다. 저녁 7시에 또 강의를 하셔야 했는데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일부 수련생들과 사진을 찍으셨다.

이번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는데 제자들은 매 사람마다 40위안의 학비만 냈고 중간에 들어온 사람들은 20위안만 냈다. 또 일부 입장표와 수련생 증을 수여했다. 마지막 날(22일)저녁, 사부님께서는 친히 매 제자들에게 수료증을 발급해주셨는데 증서의 글은 모두 사부님께서 친히 쓰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문답에서 제자들이 사부님께 다시 한 번 학습반을 꾸릴 것을 간절히 요청드리자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강의를 마치는 날, 사부님께서는 친히 관현 보도소에 깃발을 증정해 주셨다.

(3)사부님께서 제자 집에 가시다

1. 도가공(道家功)을 연마하는 한 할머니가 보다 높은 사부를 모셔 장래에 자신도 기공사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녀의 당시 생각은 병을 치료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층차였다. 그녀는 사부님의 강의를 듣고는 강의가 너무 높으며 사부님께서 겸손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녀의 대뇌가 감당하지 못한 것인데, 왜냐하면 이전에 연마하던 도가의 것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강의를 마치시자 그녀는 강단 앞으로 가서 사부님께 “좀 겸손하시게, 자네가 여기서 큰소리를 치는데 어쩌면 옆에서 고인(高人)들이 들을 지도 모르네!”라고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그녀의 말에 웃으시면서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녀는 줄곧 소도(小道)의 형식으로 사부님을 가늠했다. 하지만 대법수련은 사람 마음을 직접 가리킨 것으로 집착을 다 버려 누락이 없는 것이야말로 관건이다. 그녀는 또 사부님을 집에 청해 다시 말했다. 그럼에도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웃으시면서 대답하지 않으셨다. 결국 그녀 역시 천천히 명백해졌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차례 그 할머니 집에 가셨다. 사부님께서는 이 할머니에게 중임(重任)을 맡기셨지만 또 일부 문제들을 보셨기 때문에 관현을 떠날 때 두 제자로 하여금 뒤에서 그녀를 돕게 하셨다.

2. 라오루이(老瑞)의 집 앞에 한 그루 오동나무가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손으로 살짝 두드리시면서 나무가 웃는다고 말씀하셨다. 라오루이가 밤에 가부좌할 때 이 나무가 빛을 발했다. 일전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라오루이는 이 나무를 뽑아야 했고 저녁에 향을 올리면서 사부님께 이 일을 알렸다. 그날 밤 꿈에 백양(白羊) 한 마리가 동남방향으로 달려갔다.

3. 현 인쇄공장 대문 서쪽에 작은 문이 있었는데 대략 19일 오전에 사부님과 리 씨 성을 가진 제자가 일이 있어서 그곳에 갔다. 그곳에는 일찍이 소도(小道) 중에서 소술(小術)을 추구하던 수련생이 있었다. 이 사람이 한 여인의 사진을 사부님께 보여드렸다. 미소를 짓고 계시던 사부님께서는 사진을 보시자마자 얼굴표정이 굳어지시면서 그 사람에게 당신은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바람을 불러오 비를 내리게 하는 자그마한 재주를 부릴 수 있었는데 이는 동물부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수련생도 깨끗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그 사람을 해치는 사령(邪靈)을 청리해주셨다. 그 수련생이 사부님을 배웅했는데, 사부님께서는 대문에서 다시 돌아가셔서 그 수련생에게 알려주셨다. “이미 이 마당 안을 완전히 청리했다!” 사부님께서는 그 수련생에게 많은 것을 주셨고, 그의 수련을 지켜보셨다. 비록 그가 일부 잘하지 못한 곳이 있었고 심지어 7.20이후 사부님과 대법에 미안한 일을 했지만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그에게 기회를 주셨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이 사람이 꼭 대법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다! 사부님의 자비! 제자들은 영원히 사부님을 공경할 것입니다!

4. 18일 오전 한 중년 부부가 사부님께서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를 갚기 위해 사부님을 집으로 초청했다. 그는 셋방에 살고 있었는데 집주인이 커다란 검은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다. 사부님 일행이 집안에 들어서자 사부님의 앞뒤 사람들에게는 짖어도 유독 사부님을 보고는 머리와 꼬리를 흔들며 땅에 엎드려 조용히 있었다.

사부님 일행이 들어서자 집에는 사부님을 뵈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중 어떤 사람이 자신의 근기가 어떤지 사부님께 여쭈었다. 사부님께서는 “근기가 괜찮으니 잘 수련하세요.”라고 하셨다. 또 다른 사람도 묻고자 하다가 그만두었다. 사부님께서는 몇 명의 수련생들을 보더니 말씀하셨다. “상사(上士)는 도(道)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합니다.”

식사할 때였다. 반찬은 그런대로 풍성하다고 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반찬 맛이 어떤지 묻자 사부님께서는 어떤 것을 먹어도 모두 같은 맛이라고 하셨다. 반찬을 집을 때 사부님께서 왼손으로 받치는 것을 보고 여러 사람들은 사부님께서 행동으로 직접 법을 전하신다고 이해했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면, 사부님께서 관현에서 법을 전하실 때 입으신 스웨터는 기운 자리가 있었고, 하루 세끼 식권을 사서 식당에서 그대로 식사를 하셨다. 식권은 류 씨 아주머니가 보관했다. 류 씨 아주머니는 사부님을 처음 따라 왔는데 사부님께서 이렇게 고생하시는 것을 목격했다. 사부님께서 드시는 것이 너무나 간단하자 어느 날 아침 스스로 계란을 하나 샀다. 사부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셨고 또한 그녀에게 한 단락의 법을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 관현을 떠나실 때 남은 식권은 남겨두었는데 아침과 점심 식권이었다.

식사를 마치신 후 사부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사진을 찍어 기념으로 남기셨다. 단체사진이든 사부님과 단독으로 찍는 사진이든 막론하고 사부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모두 만족시켜 주셨다. 매 번 이런 것을 생각할 때면 나는 가슴이 짜릿해지면서 따뜻한 감을 느낀다.

학습반의 마지막 날 오후, 사부님께서는 류 씨 아주머니와 겅(耿) 씨 아주머니에게 지시하여, 4명의 수련생에게 사부님께서 길림대학 명방궁에서 가부좌 연공하시는 법상(法像)을 주라고 하셨다. 당시 한 제자가 “저는 이미 신청했습니다.”라고 하자 겅 씨 아주머니는 “사부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것입니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개인 명함까지 남겨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부님께서 관현 제자들에게 얼마나 간절하고 커다란 기대를 거셨는지 알 것 같다.(사부님께서는 또 다른 두 제자의 집에도 가셨는데 그들의 최근 정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4)사부님께서 소성(蕭城)에 가시다

금요일 오전(11월 20일) 제자들은 미니버스로 사부님을 모시고 소성으로 떠났다. 사부님께서는 그해에도 이 길로 소성에 가신 적이 있다. 이 길은 관현 성(城)의 서북쪽에 있으며 만선향으로 통하는 향(鄕) 사이의 길이다. 차가 길에서 흔들거렸다. 제자들이 사부님께 관현의 풍토 인정과 전고(典故)를 말씀드렸다. 류 씨 아주머니는 “길옆에 깃발이 휘날리고 있으며, 토지 신, 지방 신과 다른 공간의 중생들 모두 길 양옆에서 사부님을 환영하네요.”라고 말했다. 그 당시 한 제자가 감개무량하여 사부님께 왜 이런 작은 관현에 오셨는지 여쭙자 류 씨 아주머니는 “여기에 사부님께서 제도하실 사람이 있다.”고 했다.

소성(蕭城)은 관현 베이타오(北陶)진 남동쪽으로 5리 쯤 떨어진 웨이허(衛河) 동쪽 연안에 있으며 비교적 보존이 잘된 완전한 군마고성(軍馬古城)이다. 『송사(宋史)』,『요사(遼史)』의 기록과 성내 유적지에서 발견된 명대융경(明代隆慶) 시기 산서(山西) 안찰사 양사진(楊師震)의 묘지명에서 안 사실에 의하면, 이 성은 요나라 태후인 소연연(蕭燕燕)이 송나라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때문에 그녀의 성을 따서 ‘소성[또는 말이 휴식하는 성이라는 의미로 헐마성(歇馬城)이라고 한다]’ 이라고 한다.

이곳은 그다지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 곳은 아니다. ‘산해(山海)’, ‘가욕(嘉峪)’ 두 관(關)과 같이 지형이 험하고 웅장하며 기교가 정교하지 못하고, 더욱이 고대의 수도인 장안이나 변량(汴梁)과 같이 명성이 높고 역사가 유구하여 무수한 관광객과 문인들을 불러오는 곳도 아니다. 그러나 중국 역사상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곳이다. 저 유명한 전연의 맹(澶渊之盟)은 이곳에서 치른 한 차례 전투에서 달성되었다.

서기 1004년 겨울,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연의 전투’ 중에서 적의 군정을 잘 아는 소태후(蕭太后)가 친히 출정하여 3군을 통솔하여”[오늘날 소성 서쪽인 낭장(郎莊)에 천년 된 홰나무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소태후의 말을 매어놓았던 곳이라고 한다] 멀리 중원을 공략했다. 소성을 진공하여 공격도 하고 퇴각할 때 수비할 수도 있는 전선의 보루로 삼은 것이다. 송나라 대신 구준력(寇准力)은 조정의 왕흠약(王钦若), 진요수(陳堯叟) 등이 도망가야 한다는 주장을 물리치고 송 진종(眞宗) 황제가 친히 출정하게 했다. 형세의 압박을 받은 진종은 친히 북경(오늘날의 하북성 대명현 북동쪽)까지 갔다.

양연소(楊延昭)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거란(契丹)이 전연을 격파하고 북쪽 경내의 천리 길에서 강탈한 물건을 말 위에 싣고 다니므로 사람과 말이 다 피로하여 무리가 많아도 격파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정예 군대인 위호군(威虎軍)을 이끌고 성 위에서 쇠뇌를 쏘아 소태후의 동생 타란을 죽였다. 이렇게 요나라의 사기를 꺾었고 승세를 타 추격하여 관현에서 요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소성을 점령했다. 결국 소태후를 핍박하여 사절을 보내 전연[澶渊 오늘 하남성 푸양(濮楊)현서남쪽]에서 정전협약을 맺었다. 역사적으로 이를 ‘전연의 맹’이라고 부른다.

오늘 소성에 올라 13미터 가량의 높은 성 위에 올라서니 소성 안팎이 한 눈에 들어오고 “전마(戰馬)는 포효하고 금패는 울리고”, “차가운 빛이 갑옷을 비추”는 감각이 들었다.

사부님께서는 서문에서 하차해 소성 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셨고 성곽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향해 성곽 가장 높은 곳에서 사방을 바라보셨다. 사부님께서는 공능으로 시간의 대문을 열어 요나라 군대의 장막을 보셨고 전쟁포로를 매장한 만인갱(萬人坑)을 보셨다. 사부님께서 중가(中街)에서 하차하시자 현지 사람들이 사부님께 1950, 60년대에는 대낮에도 마을 밖에서 선녀를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마을 서북쪽에 있는 2장이 넘는 높이의 점장대(장수들을 점검하던 곳)에서 공능을 이용해 과거의 여자 사령관이었던 소태후를 보셨다. 그녀는 가죽신을 신고 몸에 전포를 둘렀으며 머리에는 꿩 털을 꼽고 위무당당하게 장군대에서 요나라 군대를 검열했다. 사부님께서는 류 씨 아주머니와 무언가를 자주 말씀하셨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천목으로 일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사부님께서는 천천히 푸른 소나무와 비취빛 측백나무로 둘러싸인 점장대에 올라 제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셨다.

점장대에서 내려와 북쪽으로 북쪽 성곽까지 간 후 둘러봤다.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이르자 제자들이 사부님께 대명(大名)에 가서 점심을 드시자고 말씀드렸고 사부님께서도 응락하셨다.

(5)사부님께서 대명(大名)에 가시다

차는 둥구청(東古城)진 동쪽 106번 국도 앞을 달려 다리를 넘어서면 금탄진[金灘鎭 송나라 때는 금사탄이라고 불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예전 쌍룡회때 양대랑(楊大郎), 양이랑(楊二郎), 양삼랑(楊三郎)이 여기서 전사했고, 또한 목계영(穆桂英)이 백팔진을 크게 돌파한 마지막 진(鎭)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양가로(楊家路)를 보았다. 낭량(娘娘)묘와 순도점(順道店)도 있었고 길옆 집의 대문 안 담벽 중앙에는 대부분 신감(神龛)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대부분 관공이 있었다. 여기서 제자들은 처음 사부님으로부터 남방 사람들이 관공을 재물 신으로 모시고 있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다.

대명(大名)의 역사는 유구하며 기남(冀南)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중심지이다. 위하(衛河), 장하(漳河), 마협하(馬頰河)가 경내를 지난다. 성급 문물보호단위로는 당나라 시대 적인걸(狄仁傑) 사당비석, 나양(羅讓) 묘비, 후진(後晋) 마문조(馬文操)의 신도비, 송대 오례기(五禮記)비와 송대에 주희(朱熹)가 경을 쓴 비석 등이 있다.

대명은 또 대명부(大名府)라고도 부른다. 서주(西周) 때는 위(衛)에 속했고, 춘추 시대에는 진(晉)나라에 속했으며 전국 시대 때는 위(魏)나라에 속했다. 진(秦)나라 때는 한단군(邯鄲郡)과 동군(東郡)에 속했고, 한(漢)나라 때는 원성(元城)현이었다. 당나라 때는 원성을 없애고 귀향(貴鄕)에 들어갔으며 건중(建中) 3년에 대명부로 개명했다. 북송(北宋) 경력(慶歷) 2년에 대명을 북경(北京)이라 칭했으며 북송 희녕(熙寧) 6년에(서기 1073년)에 폐지했다. 소성(紹聖) 2년(서기 1095년)에 다시 복명했고, 정화(政和) 6년(1116년)에 남악진(南樂鎭 지금의 하북 대명현 남쪽)으로 옮겼다가 금나라 때 원래대로 회복하였다. 청나라 건륭(乾隆) 22년(175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관현은 오대, 송, 금나라 때 대명에 속했다.

당나라 시기 유명한 재상이었던 위징[魏徵, 『신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위징은 위주(魏州) 곡성(曲城)사람이다. 지금의 관도(館陶)현 사람이다]이 이 일대에서 도사(道士)로 있었다. 한나라를 찬탈한 왕망의 조상도 원래 원성에 적이 있었는데 즉 지금의 황진디(黄金堤)향이다. 양가장(楊家將)도 일찍이 이곳에 주둔한 적이 있다. 북경으로 승급된 후 대명의 정치적 지위는 크게 올라갔고 군사적으로는 거란의 침략을 방어하는 북방의 중요한 진이라 재상 구준(寇准)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군(東郡)의 팔다리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북문의 요새 하늘을 잠그네.”

차가 대명 현성에 도착하기에는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아 있을 때 길 남쪽의 사람들이 폭죽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마치 바로 옆에서 터지는 같은 느낌이 들었고 차까지 흔들렸다. 류 씨 아주머니는 이것은 “사부님께서 오신 것을 환영하는 것이다”라고 알려주었다. 차는 작은 강을 건너 시내로 들어갔다. 대략 1시에서 2시 사이에 차는 길 북쪽에 있던 막 개업한 식당 앞에 섰다.(그 당시의 식당은 지금은 사라졌다)

제자들이 막 2층에 자리를 잡자 안내원이 메뉴판을 가져왔다. 제자들이 사부님께 첫 메뉴를 주문하시도록 요청하려고 보니 사부님께서는 그때까지 오지 않으셨다. 1층에 내려가도 보이지 않으셨다. 좀 지나자 사부님께서는 구운 닭 한 마리를 들고 오셨다. 제자들이 서로 어떻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사 오시도록 했는지 원망하자 사부님께서는 “기사에게 사주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차를 이용할 때 소성에 간다고 했지 대명까지 간다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 기사가 힘들어 한다고 사부님께서 친히(류 씨 아주머니더러 가지 못하게 하셨다)가셔서 구운 닭을 사다가 기사를 위로하신 것이다.(또 기사에게 法輪(파룬) 뱃지도 드렸다)또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일은 제자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잊을 수가 없다.

식사를 마친 후 차를 돌려 대명성 밖 거리에 멈춰 섰다. 사부님께서는 이곳에 한참 서 계시면서 거리와 성문을 둘러보셨다. 사부님과 류 씨 아주머니는 천군만마가 성문에서 쏟아져 나와 사부님 뒤를 돌아 이 문으로 대명 고성의 거리로 향한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여기서 기념사진을 남기셨다. 왜냐하면 성곽에 오르는 문이 잠겨 있었고 직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성곽에 오르지 못하시고 남쪽을 향해 한 단락 가신 후 되돌아와 대문 북쪽에 한참 서 계셨다. 사부님께서는 이 문은 명청(明淸) 시기에 생긴 것으로 송나라 때 성은 여기에 있지 않았다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에게 송나라 때 대명이 위치했던 자리를 찾아 보라고 하셨다.(오늘 제자가 일부 역사 자료를 봤는데 『중국고대 성시사전』에 대명고성은 청 건륭 22년에 만든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역사자료와 완전히 들어맞았다. 당시 제자는 아무것도 몰랐다).

차가 소인하(小引河) 다리에 서자 사부님께서는 제자의 사진기에 사부님의 필름을 넣으셨다. 소인하는 장하, 위하의 지류로 대명성 동쪽 교외에서 남북으로 흐른다. 차는 계속하여 동으로 향하다가 북으로 접어들었다. 대략 3킬로미터 정도 갔을 때 대가(大街)향 교선(敎善)촌에 들어섰는데 이 부락은 사람들에게 일종 원시적인 역사감을 주었다. 이 촌의 위치는 옛 대명성 서쪽 성벽 밖에 있었다. 차는 시골 길을 따라 북으로 조금 향하다 촌 북쪽 교외로 간 후 동쪽으로 약 1킬로미터 가량 간 다음 더 가지 못하고 밀밭 중간에 섰다. 사부님께서 차에서 내리셨다. 작은 북풍은 미미하게 사부님의 머리카락을 나부꼈는데, 사부님께서는 사방을 바라보시고 구름과 안개가 마치 과거의 일체를 감싼 것 같았다. 푸른 나무 몇 그루가 마치 과거의 일부 소식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북쪽에 강을 사이에 두고 의연히 어린 수목이 자란 높은 언덕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북경의 송나라 시대 명성 옛 성의 서북쪽 담의 일부였다. 사부님께서는 밀밭에 서서 류 씨 아주머니와 무언가 말씀을 나누셨다.──사부님께서 송대 명성과 그 번영하던 거리, 우뚝 솟은 성루와 성 위의 위풍당당한 양가병(楊家兵)을 보셨던 것이다. 우리가 떠날 무렵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약 고고학자들이 모두 공능이 있다면…….”

차에 탄 한 수련생은 어릴 때부터 담배를 피우던 악습이 있었는데 커서는 사람들의 작은 병을 볼 수 있었고 또 술독에 빠져 매일 알콜에 잠겨서야 편안함을 느꼈다. 이 사람의 실제 행위는 사람 이하로 사람의 표준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무량한 자비로 강대한 공을 내보내 이 사람을 청리해 주셨다. 이 사람은 평소 하루에 한갑이 넘는 담배를 피웠는데 그 날은 담배 피울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기사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도 생각나지 않았다. 사부님의 가지 하에서 이 사람은 담배와 술을 끊어버릴 수 있었다. 지금 이 동수는 매번 사부님을 회억할 때면, 특히 『사부님 은혜에 감사합니다』란 남성 독창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차는 밀밭의 작은 길에서 되돌아왔다. 남쪽을 향해 3리 정도 가자 포장된 길로 올라왔다. 이 동서로 난 길은 당송 대명 옛성의 중가(中街)였다. 지금은 큰 거리로 변했다. 동쪽으로 위하(衛河) 서안의 옛 동문(東門)까지는 약 10여리 길이다. 차가 동쪽을 향하다가 얼마 안 가 길 남쪽에 “적(狄)공의 주막”이 있었고 서쪽 대가(大街)향 파출소 맞은편에 “적인걸 사당비”가 있었다.(원래는 비석만 있고 정자는 없었는데 96년에 정자가 세워졌다.)사부님께서는 차에서 내려 밀밭에 싸여있는 비석 앞으로 가셨다.

적인걸(607─700)의 자는 회영(懷英)이며 당대 병주(幷州) 태원(太原)사람이다. 측천무후가 즉위한 초년에 그는 지관시랑(地官侍郎)과 봉각란대평장(鳳閣鸞台平章)을 맡았다. 나중에 래준신(來俊臣)에게 모함당해 옥에 갇혔고 풍택령(彭澤令)으로 좌천당했다. 만세(萬歲) 통천(通天) 연간(696년)에 거란이 기주를 함락하여 하북이 진동하자 조정에서는 적인걸을 위주(魏州)자사로 임명했다. 거란은 이 소문을 듣고 물러났다. 그는 일을 할 때 올바르고 백성을 사랑했기에 백성들의 깊은 존경을 받았고 아울러 그를 위해 비석과 사당을 세워주었다. 적인걸의 사당은 전란을 겪고 수리를 하지 않아 훼손되었는데 특히 문화대혁명 때 모두 파괴되어 이 비석만이 남았다. 사부님께서는 여기에 오랫동안 서 계셨다.

이때 한 중년 남자가 사부님께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대명현에서 ‘적인걸사당비석’ 동쪽 약 100미터에 길 북쪽에 ‘대명 비각(碑刻)박물관’을 세우려고 한동안 이 비석을 파내 거기로 옮겨가려 했다. 하지만 깊이 파지도 않았는데 비석 좌우로 누런 흙탕물이 나왔고 팔수록 흙탕물이 많아져 비석을 파던 사람들이 조를 나누어 돌아가면서 한밤중까지 팠지만 파내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비석 주변에는 흙탕물이 온통 차 있어서 할 수 없이 포기했고 이 비석은 원래대로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 이 일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라고 했다.

차가 동쪽으로 약 100미터가량 가자 길 북쪽 소택지 중간의 높은 곳에 몇 장(丈)이나 되는 큰 비석이 있었다. 속칭 ‘왕강비(王强碑)’라고 했는데 일설에는 ‘위박(魏博) 절도사 하진도(何進滔)의 덕정(德政)을 찬양하는 비석’이라 했고 일설에는 ‘송대오례기비(宋代五禮記碑)’라고 했다. 비석 머리에 적힌 8개의 전서(篆書)를 보니 마지막 설이 믿을 만하다.

사부님께서는 자세히 일부 비석에 새겨진 글과 큰 비석 아래에 있는 큰 자라를 보셨다. 그때 류 씨 아주머니는 “이 큰 비석 안에는 또 작은 비석이 있다. 언젠가 큰 비석이 풍화되면 작은 비석이 세상에 나타날 텐데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수수께끼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사부님께서는 제자들과 ‘오례기비’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셨다. 한 제자는 비석 앞 구덩이 위에 누워 기념사진을 찍었다. 돌아오는 길에 금탄진(金滩鎭)을 건너 비스듬한 상점과 남반(南盤 소 태후 당시의 군영)을 지나, 신윤장(申尹莊) 북쪽 길에서 동쪽으로 향하다 남관(南關)에 이르러 북쪽으로 방향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가 사부님께, 성 동남쪽에 청천(清泉)이 있는데 강남 사람들이 압수했으며, 이 샘을 찾기 위해 성 남쪽에 벽돌공장을 세웠다고 알려드렸다. 사부님께서는 “보았다. 지금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지만 나중에는 사용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내 기억에 사부님께서는 관현 사람들의 많은 질병은 이 검은 강물이 흘러가는 것이 원인이며, 다른 공간의 좋지 못한 물건을 사부님께서 청리하셨기에 이 강이 수로를 바꾸면 곧 좋아질 거라고 하셨다. 그때는 청량한 샘물이 다시 관주 대지를 적실 것이다. 저녁에 강의하실 때 사부님께서는 대명에 가셨던 일을 말씀하셨다.

(6)사부님께서 영암사(靈岩寺)에 가시다

23일 아침 일찍 사부님께서는 곧 관현을 떠나셔야 했다. 일부 수련생들은 사부님께 작별인사를 드렸고 일부 수련생들은 사부님을 배웅해드렸다. 라오루이가 자신의 전용차를 몰고 왔고 사부님께서는 그의 차에 오르셨다. 라오루이가 “영암사에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라고 묻자 사부님께서는 “오늘은 당신이 배치하시오”라고 하셨다.

차는 마협하(馬颊河)를 건너 랴오청(聊城) 옛 성에 도착했다. 고대 건축물 확장공사를 10월에 시작해 아직 개방하지 않아서 사부님께서는 건축물에 올라가지 않으셨다. 사부님은 밑에서 광악루(光岳楼)를 한 바뀌 돌면서 말씀하시기를 건물 위에는 부처가 한 분 있다고 하셨다.

차가 랴오청을 떠나 계속 달리던 중 사부님께서 동작을 취하시자 곧 한 도사가 나타났다. 몸에는 자색도포를 입었고 백발의 긴 머리가 가슴 앞에 흩어져 있었으며 손에는 총채를 쥐고 길옆에서 가부좌 하고 있었다. 어떤 수련생은 사부님을 영접하려고 나온 줄로 생각했는데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영접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내가 샤오레이(小蕾, 당시 차에 타고 있었다)의 사부를 구한 것입니다. 그의 사부는 빙천(氷川)에 있는 것이 아니라(샤오레이가 빙천에 있다고 했음)냉궁(冷宫)에 있었습니다.” 사람을 제도하기란 얼마나 힘든가!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 올리셨을 뿐만 아니라 또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하시며 우리의 생생세세 은혜와 원한을 선해(善解)하셨을까? 부처님의 은혜 그지없으니 제자들은 그 무엇으로도 보답할 길이 없다. 오직 엄격하게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부님께서 가르쳐주신 세 가지 일을 잘하여 원만하여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영암사(靈岩寺)는 태산 북쪽 기슭 장청(長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