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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의 은혜를 회억

글 / 창춘대법제자

【명혜망 2006년 1월 25일】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실 때의 간고한 어려움은 단지 각지에서 학습반을 열 때 신체적인 피로로 나타나는 것뿐만 아니라 심적으로 노심초사 하신데서 더 나타났다. 정말이지 “인간의 일에 속 태울 대로 태우고 하늘 위 고생에 마음을 쓸대로 쓰네(操盡人間事 勞心天上苦)”(《홍음–높은 곳은 춥기 마련》)과 같았다.

92년 9월 창춘 4기 학습반에는 비록 천명 이상이 참가했지만 입동(立冬)이 지난 후에도 견지한 연공장은 많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은 여전히 다른 공법을 섞어서 연마하여 사부님께서 넣어주신 파룬(法輪)마저도 모두 변형되게 만들었다. 연말에 사부님께서 창춘에 돌아오시어 이런 상황을 보시고는 몹시 상심하셨다. 그러나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고 파룬을 조절해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바로잡아 주셨다. 아울러 그들에게 파룬의 변형이 생긴 원인을 알려주셨고 앞으로는 주의하라고 하셨다. 내가 감수한 바로 사부님께서 가장 고통스러워하신 것은 바로 수련생들이 대법을 소중히 하지 않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확고하게 수련하는 수련생에 대해서는 고무하고 격려해주셨다. 어떤 연공장의 한 보도원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93년 3월 하순 어느 날, 자전거를 탄 한 젊은이가 그들의 연공장에 와서 전단지를 나눠주면서 모(某) 기공사가 와서 학습반을 연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동원하여 참가시키려 했다. 당시 연공장에 있던 8명은 모두 자신들은 오직 파룬궁만 연마할 것이며 다른 학습반에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젊은이는 화를 내면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자전거를 끌고 막 연공장을 떠나던 순간 8명의 수련생 중 7명이 모두 사부님의 법신께서 자신들 옆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당시 그들은 매우 격동되었으며 이것은 사부님께서 자신들을 고무격려하시는 것으로 자신들이 한 것이 분명히 옳았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이 일은 수련생들 사이에서 신속히 퍼져나갔고 이후 연공장에 연공하러 나오는 수련생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금방 백 명을 넘어 당시 창춘에서도 비교적 큰 연공장이 되었다.

이 연공장에는 류(劉) 씨 성을 가진 70여세의 한 할머니가 있었다. 10년이 넘게 중풍을 앓아 반신불수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부축에 의존해서야 학습반에 참가할 수 있었다. 3일째 되는 날 포룬을 연마할 때 할머니는 몸 한쪽으로 뜨거운 흐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관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후 그녀는 스스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병업 반응이 아주 심각했지만 확고하게 버티며 병원에도 가지 않았다. 내가 가서 보니 이미 고비를 넘었다. 그녀는 내게 사부님께서 고비를 넘는 과정에 자신을 고무 격려해 주셨고 사부님의 법신께서 줄곧 자신을 간호해 주셨으며 아울러 금빛 찬란한 6글자를 보여주셨는데 바로, ‘당신이 진정으로 수련하면 내가 진정으로 책임질 것이다(你眞修,我眞管)’였다.

이 할머니는 천목이 열린 상태에서 수련하고 있었다.

그러나 94년 쑹(宋)모 등이 사부님을 고소하면서 사부님께 아무런 공능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차를 타고 사부님을 환송하다가 교통사고가 났음에도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당시 사고는 아주 경미하여 차량만 약간 손상을 입었을 뿐 인명사고는 전혀 없었다. 만약 사부님의 보호가 없었다면 심각한 사고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차뿐만 아니라 사람이 죽었을 수도 있다.

사부님께서는 모든 공능을 구비하고 계시지만 사람을 제도하러 오셨는데, 만약 함부로 공능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미혹을 깨뜨려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공능이 필요한 경우나 미혹을 깨뜨리는 일을 조성하지 않을 경우에는 사부님께서도 약간의 공능을 사용하셨다. 예를 들면, 한번은 창춘역의 부(副)역장이 북경에서 온 전화를 받았는데 사부님께서 어느 날 몇 번 차량을 타고 창춘에 오신다는 것이다. 부역장은 한 수련생을 데리고 사부님을 마중하러 역으로 나갔다. 그녀들은 각각 해당 객차의 앞뒤 출입문에 서서 사부님께서 오시길 기다렸으나 사부님을 뵙지 못했다. 사모님께 전화를 걸어보니 사부님께서는 바로 그 기차를 타고 집에 오셨다고 했다. 그녀들은 사부님께서 일부러 수련생들이 마중 나오는 번거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 당신을 보지 못하게 하신 것임을 알았다. 분명히 앞으로 지나가셨음에도 그녀들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내게 있어 1994년 12월 14일은 아주 특별한 날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날 사부님께서 우리 집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 날 오전 5시 나는 연공장에 가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다 굴러 떨어져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띵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큰 나무가 벽을 치는 것 같았고 발도 심하게 접질렸다. 당시에는 비록 통증을 참기가 힘들었지만 그러나 나는 대법제자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어 일어나 절룩거리면서 연공장으로 갔다. 머리 통증은 곧 소실되었지만 발은 걷기만 하면 아파왔다. 그러나 나는 그날 직장에서 할 일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출근을 해야 했다. 나는 통증을 참으면서 일을 마쳤고 법학습을 하기 위해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 식구가 내게 와서는 《전법륜》책에 나오는 사부님의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오늘 오전 8시 반경에 집에 왔던 그 사람이 사부님 같아요(그는 수련을 하지 않았기에 사부님을 뵌 적이 없다)” “그분은 키가 크고 검은 색 상의를 입었는데 태도가 아주 온화하고 예의가 발랐어요.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혹시 여기가 지린(吉林) 대학 화학과 교수님 댁인가요’라고 하시던데요.”

그분은 가족에게 교수님을 치료해드리러 왔는데 방 호수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이 그 교수님이 편찮으시니 좀 치료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는데 화학을 전공하시는 것만 알지 이름은 모르겠다고 하셨다. 그는 사부님을 돕고 싶어서 “혹시 그 교수님 성은 아세요?”하고 물었지만 모른다고 하셨다. 그러자 “화학을 전공하는 교수님도 많이 계시기 때문에 이름을 모르시면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부님께서는 미안하다는 말씀과 함께 폐를 끼쳐 죄송하다고 하시면서 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 특히 그 날짜만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굴러 떨어질 때 사부님께서는 내게 소업해 주셨는데 나 자신은 다리를 다쳤다고 해서 일에 지장을 주지도 않았고 또한 고비를 하나 넘긴 것이다. 가족은 사부님은 한번 뵙게 되었으니 이 또한 정말로 행운이었다. 그래서 나는 특별히 이 날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에게 그때 내가 집에 없었던 것이 너무나도 아쉽다고 말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찾던 사람이 분명히 같은 동에 사는 린(林) 교수임을 알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전에 그에게 병을 치료해주신 적이 있는데 그는 병이 나은 후에 우리 연공장에 와서 연공을 같이 했었다. 당시 그는 사부님께서 연공장에 나가 연공을 하라고 하셨다고 했는데 또한 몸이 좋아진 후에 회사에 자리도 생겼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격려하는 한편 퇴직도 했고 큰 병도 있는데 하필 다시 출근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우리 연공장에 와서 연공하세요 라고 했지만 며칠을 나오지 않더니 나중에는 아예 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병이 도지자 또 다시 사부님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사람을 제도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라 속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병이 낫고자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나중에 그 부인이 내게 말했다. “식구들이 각각 나뉘어 사부님께서 오실만한 길목에 배치하고 8시부터 9시가 넘도록 기다렸는데 사부님을 뵙지 못했어요. 분명히 8시 반에 오신다고 하셨는데.” 나는 그녀에게 “사부님께서는 정확히 8시 반에 오셨지만 집을 찾지 못하셔서 우리 집에 오셨어요.”라고 알려주었다. 당시 사부님께서는 분명히 앞을 지나가셨을 테지만 그녀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사부님께서는 바로 북경으로 가셨다.

사부님께서 학습반을 여실 때 종종 각종 교란이 있었지만 사부님께서는 항상 침착하게 해결하셨다. 아울러 그 일들을 통해 도리어 수련생들을 단련시키는 기회로 이용하셨다.

내 기억에, 1994년 창춘에서 제7기 학습반을 여실 때였다. 주간반을 연지 이틀 째 되는 날인데 사부님께서 막 강의를 하시려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우리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이를 어쩌지? 강의를 듣기 위해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1,600명이나 되는데 어떻게 법을 듣게 할 수 있을까?’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셨고 침착하고 온화하게 “당신들은 카세트가 있지 않은가? 건전지 몇 개만 사고 카세트에 있는 스피커 두 개만 있어도 할 수 있다. 오늘은 스케줄을 바꿔서 연공을 먼저 배운 뒤에 강의를 하도록 하자.”라고 말씀하셨다.

강당을 관리인원들에 의하면 그 시간에 정전이 발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교란임에 틀림없었다. 수련생들은 우리가 건전지를 사러 간 사이에 연공을 배웠다. 강당 직원들은 카세트 플레이어의 스피커로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들은 대법과 대법수련생들의 초상적인 능력을 직접 목격한 셈이다.

또 한 번은 우리가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보는 학습반을 열고 있었을 때 정전이 되었다. 때는 밤이라 완전히 캄캄했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정전되었을 때 어떻게 하셨는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한 동수가 관리인에게 연락을 하러 간 사이에 나는 시간을 내어 지역 수련생들이 경험했던 일부 수련 이야기를 해 주었다. 모두 아주 조용해졌으며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곧 전기기사가 와서 문제를 해결했고 학습반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부님과 법을 믿는 가 믿지 않는가 하는 고험은 수련 초기부터 존재한다. 교란은 두렵지 않은데 진정하게 수련하는 사람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집착심을 품고 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로 하여금 법을 얻을 기회를 잃게 할지도 모른다.

1993년 어느 작은 신문에서 사부님을 공격하면서 사부님의 ‘고급기공사’증이 유효한 것인지 의심했다. 이에 대해 논의한 뒤 수련생들은 사부님은 위대한 각자(覺者)이시며, 속인들이 수여한 타이틀에 관계없이 중생을 구하러 오셨다고 인정했다. 다른 수련장에서 온 한 여자 수련생이 말하기를, 자신의 연공장에 평상시 아주 괜찮아보이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신문기사를 읽은 후 대법수련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 일에 대해 사부님께서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그 작은 신문은 기공사들에게 신문에 광고를 내는 조건으로 찬조금을 받아 운영하는 한 부부가 발행하는 것인데 사부님께서 그들의 과도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사부님을 공격하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 무시하자 그것들은 제풀에 지쳐 버렸다.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누구를 위하여 수련하는가》 중에서 말씀하셨다,

“다른 한 면으로부터 이야기한다면, 수련은 속인을 초월한 것으로 누구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기공에 대해 비판하는데, 그것은 속인의 인식이 아닌가? 그가 불법과 수련을 부정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인류의 어떠한 조직이 신과 부처를 초월할 수 있단 말인가? 기공을 비판하는 사람이 부처를 지휘할 능력이 있단 말인가? 그가 부처가 나쁘다고 말한다 하여 부처가 나쁘단 말인가? 그가 부처가 없다고 말한다 하여 부처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1999년 7월 20일 이후, 파룬궁과 사부님을 공격하는 중공 정권의 거짓말과 비방은 천지를 뒤덮었다. 그러나 진수(眞修)제자들은 사부님과 대법에 대하여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줄곧 잘 걸어 지나왔다.

일부 교란은 수련생 내부로부터 발생했다. 1993년 한 잡지사에서 사부님의 삶, 수련과 법을 전하신 과정을 설명한 문예형식의 책자를 발행한 적이 있다. 이것이 대법과 사부님의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 것을 본 일부 수련생들이 총보도소에 이에 대한 ‘대(大) 비판(批判)’ 활동을 요구했다.(이것은 분명히 중공 당문화의 사유방식을 반영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차례 그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작가의 의도는 좋았지만 그가 단지 강의를 두 번 들었고 글을 쓰려는 목적을 가지고 강의를 들었기 때문에 진정하게 법을 인식하지 못한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 밖에 문예작품이란 것은 본래 생활에 기초한 것이지만 실제생활보다 더 과장될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허용된다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그들에게 그것(문예작품)을 법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되며 무슨 ‘대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이에 관해 나중에 회의에서도 여러 번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부님께서 이렇게 하신 후에서 비로소 수련생들은 활동을 중지했다. 이 일을 처리하시는 사부님의 방식은 나로 하여금 사부님의 관용, 자비와 박대(博大)한 도량을 보게 해 주었다.

사부님께서는 늘 우리 이 한 법문(法門)은 속인 중에서 창립한 것으로 우리는 최대한 도로 속인사회에 부합하는 상태에서 수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문장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당시에 사부님께서 하셨던 일부 일들을 서서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나는 일부 수련생들이 정법시기가 곧 결속될 것이라고 추측하고는 속인 중에서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단지 원만을 기다리는 것을 보았는데 결과적으로 그들의 생활에 아주 큰 어려움을 초래했다. 사실 이것은 모두 “최대한도로 속인사회에 부합되게 수련하라”(《휴스턴 법회에서의 설법》)는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하지 않은 것이다.

대법은 천추만대(千秋萬代)로 영원히 전해 내려갈 것이며, 사부님의 언행(言行)은 미래 인류에 대하여 모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미국에서의 설법》 중에서 “왜냐하면 내가 설법을 하는 것 역시 몸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런 조그마한 거동이 있게 되면, 심지어 내가 옷을 입고 모자를 써도 어떤 사람은 다 배우려고 하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크고 작은 일을 몹시 중요시한다. 정법을 전할 뿐만 아니라 나는 사람 역시 몸이 곧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한 언행에 매우 주의하셨다. 예를 들어 나는 여러 번 사부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하는 행운을 가진 적이 있다. 나는 사부님께서 고기를 드시긴 하지만 아주 조금만 드시는 것을 주의하게 되었다. 내 생각에 사부님께서 고기를 드신 것은 인류에게 육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고기를 조금만 드신 것은 우리 수련자들은 고기에 집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속담에 흔히 무슨 일이건 첫 시작이 어렵다고들 한다. 파룬궁도 시작에는 아주 어려웠지만, 그 아주 빨리 발전했다. 초기에, 사람들에게 파룬궁을 알리기 위하여 사부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병을 치료해주셨다. 내 친구들 중에도 많은 사람이 이런 영광스러운 행운을 경험했다. 예를 들면, 내 친구 중 한 명은 류머티즘이 있었고 그녀의 남편은 위축성 위염(위암초기라고도 한다)을 앓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그들을 한 번 치료해주셨는데 완전히 회복했다.

사부님 댁에는 늘 병 치료를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고생이 많으셨는데, 그래도 아침이면 공원에 가시어 연공하고 홍법(洪法)을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사부님을 따라다녔으며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여 자신들의 병을 고쳤다.

예를 들면, 내 친구의 장모는 목에 계란만한 종양이 있었다. 의사는 이것을 암으로 진단하고 수술해서 제거하라고 했다. 친구는 장모를 수술시키기 위해 창춘으로 모셔왔다. 수술하기 전에, 친구는 그녀를 사부님께서 연공하시는 곳으로 데리고 왔고 연공을 따라 배우게 했다. 그러자 그녀의 종양이 없어졌다. 사부님께서는 개인적으로 그녀를 치료하지도 않으셨는데 치유된 것이다. 동수들은 “종양이 사부님의 에너지 마당을 견디지 못하고 분해 되었거나 아니면 도망쳤을 것이다.”라고 했다.

1992년 5월, 사부님께서 첫 학습반을 여셨을 때는 약 200명이 참석했다. 당시 그렇게 큰 학습반을 가르치기는 정말로 어려웠다. 사부님께서는 6월 중순에 창춘에서 두 번째 학습반을 끝내셨고, 그 다음에는 베이징에서 학습반을 열기 위해 떠나셨다. 8월에, 다시 창춘에 오셔서 세 번째 학습반을 여셨다.

나는 지린 성 당위원회 강당에서 열린 네 번째 학습반에 참가했다. 이것은 1992년 9월 8일부터 9월 17일까지 열렸다. 누군가 강당이 1000명 정도를 수용한다고 했는데, 좌석이 모두 다 찼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파룬궁의 신속한 발전에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요추에 심한 손상을 당해 마비가 온 한 중년 여인이 강당에 실려 왔다. 그녀는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왔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다. 사부님께서 몇 분에 걸쳐 그녀를 치료해주시자, 그녀는 일어나서 강당을 세 바퀴나 돌았다. 그 후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매일 파룬궁을 수련하러 공원으로 나갔다. 그녀의 일이 신속히 퍼져,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수련하기 위해 공원으로 왔다. 1992년 9월 14일, 사부님께서는 그들의 연공장에 가셔서 그곳을 청리해주셨다. 그녀가 연공하던 장소는 그 날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1992년 9월 17일은 네 번째 학습반의 마지막 날이었다. 사부님께서는 그날 저녁 다른 곳에서 학습반을 여시기 위해 기차로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날 아침 사부님을 우리 연공장으로 모셨는데, 사부님께서 오시자마자 50, 60명이 찾아와 자신들의 병을 치료해달라고 사부님께 부탁을 드렸다. 사부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동의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여러분들 줄을 서 주세요. 나는 사람마다 병을 한 가지만 고쳐주겠습니다. 당신이 완전히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파룬궁을 수련하러 오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날부터 우리 연공장이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사부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주시느라 매우 피곤하셨을 것이다. 그 날 강의가 끝난 후, 사부님께서는 기차를 타셔야 했다. 사부님께서는 전국을 다니시며 2년 반 동안 54개의 학습반에서 가르치셨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는 동안 받으신 고통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창춘에서 학습반을 여실 때를 제외하고는 사부님께서는 거의 집에도 오시지 않으셨다.

창춘에서 학습반이 열릴 때, 사부님께서는 저녁에는 강의를 하셨고 아침이면 각 연공장에 가셔서 수련생들의 연공을 지도해주셨고 수련생들의 신체를 청리해주셨다. 때문에 늘 신(新)수련생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한 친구가 내게 자신이 경험했던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젊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高熱)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종종 40도가 넘는 고열이 났는데, 항생제(또는 해열제 주사)를 맞아도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호르몬제를 먹으면서 버텼는데 전에는 병이 위중해서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다. 한마디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녀가 군에 있던 남편을 방문했을 때 군의관이 지어준 한약을 먹고 열이 떨어졌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같은 약을 먹어도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나는 그녀를 동정해서 파룬궁을 한번 수련해보라고 제의했다. 그녀가 처음 공원에서 연공을 시작하던 날, 마침 사부님께서 우리 연공장에 오셨다. 그때 그녀는 제2장 공법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몇 번 주위로 무엇인가가 돌다가 가버렸음을 느꼈다. 그녀가 눈을 떠보니 사부님께서 그녀 옆에 서 계셨다. 나중에 그녀는 사부님께서 자신의 신체를 정화해주셨고 원인을 알 수 없었던 고열을 일으키던 다른 공간에서 오는 교란을 제거해주셨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내게 말했다. 그 이후 그녀에게는 단 한 번도 문제가 나타난 적이 없으며 그녀의 건강은 날로 좋아졌다.

파룬궁 수련의 신기한 효과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을 수련하러 왔다. 1994년 초, 우리 연공장의 수련생 숫자가 200명으로 늘어났다. 장소가 좁아서 일부 수련생들이 근처에 있는 큰 광장에다 새로운 연공장을 열었다. 1994년 6월, 그 연공장에는 5, 6백 명의 수련생들이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단지 우리에게 법을 가르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곳곳에서 사부님의 행위를 통해 대법의 정신을 체현하셨다. 나는 다행히 사부님과 가까이 있을 기회를 많이 갖게 되었다. 나는 사부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모두 법의 체현임을 느꼈다. 한 번은 사부님께서 창춘에 학습반을 열기 위해 오셨다. 당시, 다른 많은 종류의 기공들은 쇠락해가고 있었지만, 파룬궁만은 더욱더 인기가 높아졌다. 시 기공협회에서 사부님을 초청하여 좌담회를 열었는데 나도 초대를 받았다. 회의에서 다른 기공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가 많은 것을 믿고, 사부님께 아주 불손한 태도로 말을 했다. 사부님께서는 처음 얼마 동안은 아주 겸손하게 설명하시고자 했으나 나중에 그들이 계속 터무니없이 행동하는 것을 보시고는, 일어나서 회의를 진행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시고 떠나오셨다. 사부님께서는 그런 사람들과 논쟁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 사람들이 질투심 때문에 문제를 만들려고 애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실 때면, 또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법을 가르치셨다. 1994년 8월 19일, 우리는 사부님께서 옌지 시로 떠나시는 것을 보려고 공항으로 갔다. 공항 대기실에서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셨다. 나는 사부님께서 한 층의 법을 설명해주셨다고 믿는다. 당시 사부님께서 해주신 이야기는 1976년 9월 9일이었는데, 사부님께서는 군대에서 당직을 서고 계셨다. 당시 중공 지도자 마오쩌둥이 그날 죽었고 일체의 오락 활동이 금지되었다. 도시가 매우 조용했다. 그런데 사부님의 총이 갑자기 발사되었다고 한다. 이 말씀을 듣고, 사악한 중공이 얼마다 잔인한지 잘 아는 우리 모두는 사부님을 걱정했다. 나는 당시 조급하고 급한 마음에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라고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직접 대답하시는 대신 다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별 것 아니야, 그냥 그렇게 당신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잃는 것뿐이야!” 나는 이 말씀을 특별히 마음속 깊이 기억하고 있는데, 내 생각에 그것은 내포가 아주 컸다. 때문에, 나중에 어떤 사람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야단칠 때도, 나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고 내 마음은 동요되지 않았다.

나는 자신이 아주 운이 좋다는 것을 깊이 느낀다. 파룬궁을 수련한 이후, 나는 어떤 약도 먹은 적이 없다. 내 나이는 올해 72세이다. 비록 세 번에 걸쳐 총 860일 동안 “불법으로 감옥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사부님의 자비하신 보호 하에 나는 여전히 아주 건강하다. 나는 진심으로 자비하신 사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허스!

창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다른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1993년 12월에 일어났었는데, 사부님께서 동방건강박람회에 참석하시기 위해 베이징에 계실 때의 일이다. 사부님 댁이 있는 건물에 큰 화재가 났다. 그것은 4층 건물이었고, 불은 사부님 댁과 붙어 있는 이웃집에서 시작되었다. 사부님 댁 양옆에 있던 집들은 모두 불이 났지만, 가운데 있던 사부님 댁만은 안전했고 단지 몇 가지 물품이 불을 끄는 도중에 물에 젖었을 뿐이다. 소방관들이 사부님 댁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그들은 책 선반에 불상이 있고 보살 사진 (사부님께서 손수 만드신)이 벽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곳을 떠난 후, 그들은 곳곳에 다니며 그 집은 부처와 보살을 모시는 집이라 부처님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화재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가 지금 회억해 볼 때, 이것은 낡은 세력으로부터 온 교란이었음에 틀림없고, 사부님께서 이를 제거하신 것이다.

“천신만고 십오 추라

정법의 고생과 시름 누가 알랴

오로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함이거늘

홍미(洪微)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으리라

(홍음 II, 어려움〈難〉)

 

정말이지 위 시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부님께서는 너무나도 많은 고생을 겪으셨다!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6/1/25/119335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