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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 속에서 자료점을 다시 세워 수련생들과 협력하여 사람을 많이 구하자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전염병이 시작된 후 우리 지역 수련생들이 사람을 구하는 일에 많은 장애가 초래됐다. 우리 진(鎮)의 협조인 2명은 평소 안전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는 휴대폰이 없음으로 우리에게 자료를 보내거나 특별히 발정념을 공지할 때는 수십 리 길을 직접 달려와서 전하거나 알린다. 그러므로 금번 우한 전염병이 창궐하는 관건적 시기에 원활하지 못한 협조 문제로 많은 불편함이 초래되고 있다.

우리 마을의 한 수련생과 이웃 마을의 부부 수련생이 진상 자료를 만들어 우리 마을 수련생들에게 매주 약간의 자료를 보내주어 사람을 구하게 했다. 그러나 이번에 도시와 마을이 봉쇄되는 바람에 우리는 모두 자료를 볼 수 없게 되었고, 밍후이(明慧)의 소식조차도 알 수 없게 되어 정말 완전히 봉쇄된 것이다.

나는 진상 화폐를 만드는 항목을 담당하고 있지만, 설이 지난 후부터 약간 느긋해졌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설 뒤 십여 일은 잔돈을 별로 쓰지 않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 둔 잔돈에 원하는 글자를 찍어 며칠 후에 보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올해는 달랐다. 전염병 때문에 봉쇄되어 며칠 내에 어떻게 가져다줄 것인가가 문제였다. 완전히 봉쇄되기 전 전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염병에 관한 내용을 프린트하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수련생이 이미 우편으로 보내 편지함에 도착해 있었다. 참 다행이었다.

나는 작년에 준비해놨던 많은 지폐를 “어떻게 하면 역병을 피하고 평안을 보장할 수 있을까?”라는 내용으로 만들어 놓았다. 음력 28일 남았던 지폐까지 추가해 만들어 총 몇만 위안이 됐다. 세 차례 걸쳐 십여 리 떨어진 한‘고객’에게 전해주었다. 봉쇄가 갈수록 심해진다고는 해도 중간지점의 마을이 느슨한 곳도 있었고 엄격한 곳도 있었다. 처음은 스쿠터로 오솔길로 돌아갔고, 후에는 밀밭 길로 돌아갔으며, 나중에는 자전거를 타고 갔다. 그렇지만 사부님의 협조로 모두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 흙더미를 기어오르고 큰 도랑을 건너면서 매일 오후 늦게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게 되면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는데 마치 한바탕 전투를 치른 기분이다.

그 지역 ‘고객’들이 모두 집에 갇혀 있는 데다가 더 광범위한 지역을 오갈 수 없어서 오직 그들에게 “사람을 구하는 이 ‘보배(진상 화폐)’를 배포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과 매우 친해져서 “즉각 돈을 주지 않아도 되고, 차용증을 쓰지 않아도 되니, 빨리 돈을 백성들의 손에 들어가게 해서 사람을 구하는 작용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했다. 그들은 모두 내 뜻을 이해했다.

그들은 보통 새벽 2~3시 시장에서 과일과 채소를 도매한다. 진마다 한두 집만 영업이 허용되기 때문에 다시 다음 마을의 지정된 판매점에 넘겨주어야 한다. 그들은 여러 마을의 과일, 채소 상인들을 만날 기회가 있다. 나는 ‘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면 배포는 더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들과 함께 도매시장에 가겠다고 말하자, 안주인이 “당신은 들어갈 수 없어요, 휴대폰으로 코드를 찍어야 해요”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를 도와주겠다면서 안심하라고 했다.

3월에 봉쇄상황이 좀 느슨해져서 다시 그들을 찾아가서 내가 쓸 수 있는 것만 남겨두고 진상화폐 전부를 교환해주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지불할 현금도 준비해 두고 있었다.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돈을 그들에게 부탁한 후에도 한가하게 보낼 수 없었다. 예전에 수련생의 건의를 듣지 않고, 좀 더 일찍 자료를 프린트하는 새 기계를 마련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몇 대의 낡은 기계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봉쇄기간 중에 사부님의 도움으로 우연찮게 우리 집 앞의 작은 문방구에서 6개의 프린터 용지를 살 수 있었고, 아이가 인터넷으로 1천개의 작은 지퍼 폴리백을 살 수 있었다. 나는 ‘밍후이 주간’,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늘 읽으면 왜 전염병을 치유할 수 있는가?’, ‘유백온비기(劉伯溫碑記)’가 역병을 피할 수 있는 진언을 명확하게 밝히다’, ‘어떻게 하면 우한 폐렴의 대난을 벗어날 수 있을까?’ 등의 진상 자료를 한 폴리백에 넣어 한 세트로 준비했다. 이 한 세트가 사람을 구하는 효과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매번 나갈 때마다 50~60개를 가지고 나간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근간 3대의 낡은 기기들이 10여 장만 프린트하면 곧 흰 줄무늬가 생기고, 나중에는 백지상태가 되므로 며칠간 자료를 만들지 못했는데, 오래된 낡은 기기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마을의 수련생과 십여 리 밖의 부부 수련생을 대신해서 앞으로 내가 사람들에게자료를 제공해줄 수 있다면 수십 리 떨어진 큰언니 수련생과 남자 수련생이 매주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전해주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내가 그들보다 가까이 있으니 내가 새 프린터를 장만한다면 그들을 대신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엄정 성명’을 쓴 노수련생은 97년에 법을 얻은 노년 제자인데 다시 돌아와 수련한다면 빠를 수 있을 것‘라고 생각한 후, 그에게도 자료를 제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후 여유가 있을 때 기기와 소모품을 충분히 준비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설령 다시 봉쇄된다고 해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 우리는 침착하게 사람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결국 이웃 마을 수련생의 도움으로 4일 만에 우리 마을에 자료점을 세워 새 프린터와 충분한 소모품을 비치했다.

나는 ‘정법의 최후 막바지에 우리 마을과 내가 접할 수 있는 마을의 수련생들과 협조해서 우리 지역에 진상 자료를 많이 배포하여 중생들을 구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문발표: 202044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0/4/4/4033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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