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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수련하여 근본 집착을 제거하다

글/ 산둥(山東)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남과 어울려 살아가면서 사소한 것에도 지나친 신경을 쓰며, 자기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강하다. 1996년 3월부터 대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는데, 2006년까지 진정으로 수련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 시간에 법공부도 하고 연공도 했지만 닦을[修] 줄 몰랐는데,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을 배웠지 법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인데,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하는지만 봤다. 또 사오한 사람을 만나 단번에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나중에 우연히 한 수련생을 만나 법공부 팀을 구성했고, 나는 다시 수련하기 시작했다. 이 수련생의 가장 큰 특징은 나이는 어리지만 일처리를 신중하게 했고 빈틈이 없었다. 특히 사부님에 대해, 법리에 대해 모두 이성적으로 대하고 인식했으며, 과하게 사람을 질책하지 않았다. 단지 함께 법공부하고 가끔 법에 대한 이해를 말했다. 혹은 어떤 일에 부딪혀 풀리지 않을 때 그녀의 인식을 한번 말했다.

2007년 다시 법공부하고 사부님의 각 지역 설법에 관한 공부를 강화했다. 점차 무엇이 수련인가에 대해 약간의 인식이 있었고 ‘걸어 나오다’에 대한 약간의 이성적 인식이 생겼다. 대략 2012~2013년, 한 수련생이 그녀와 함께 법을 외우자고 약속했다. 나는 그녀를 이기지 못해 마지못해 승낙했다. 법을 외워보니 나는 법 속의 표면 의미도 아직 잘 모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물질과 정신은 일성(一性)이다.”[1]를 외우는 과정에서 갑자기 생각났다. 원래 생각하는 것이 모두 물질이구나?! 나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렇게 조금씩 외우고 조금씩 깨달아 사람의 관념도 조금씩 바뀌었다. 한 번 외우는 데 1년이 걸렸는데, 지금까지 19번을 외웠다. 지금 일에 부딪히면 기본적으로 법의 요구에 따라 할 수 있고, 가늠할 수 있어 더는 맹목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내가 수련에 입문한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나의 근본적인 집착심이다. 2007년 다시 수련한 후 한번은 큰 심성관을 넘겼다. 배꼽에서 고름과 진물이 나왔는데, 심각할 때는 반년 동안 그랬다. 나의 마음은 증상에 따라 움직였고 마지막에 심각할 때는 고통스러워 밤에 잠도 이루지 못해 배를 안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책을 보려 해도 책을 들지 못해 컴퓨터를 켜서 컴퓨터로 보고 필사적으로 보았고, 밤에 가부좌하고 사부님의 한 단락 법을 외우고 밍후이왕 문장을 보았다. 때로 아주 신기한 것은 어떤 문제가 있으면 밍후이왕에 그런 문장이 발표되었다. 그때 나는 어떤 수련생이 등에서 고름 한 사발이 나왔다는 것을 보고, 속으로 그 수련생처럼은 아니니 문제는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 그 수련생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그 한 단락 법을 외우고 그에 따라 했다. 사부님의 병을 치료한다는 관련 법을 배우고 점차 병의 내원, 소업의 법리를 이해하고 병에 대한 관념(왜냐하면 나는 병에 대한 매듭이 심각해 심지어 죽을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을 타파했다. 마지막에 배꼽에서 노른자보다 작지만 노른자 같은 것이 배출됐는데, 비눗갑만큼의 고름과 피가 흘러나왔고, 배꼽이 모두 밖으로 드러났다. 나는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의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물었지만 모른다고 했다. 내가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때 바른 일념이 있었다. ‘상관하지 말자. 사부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다!’ 과연 이틀이 지난 후 배꼽은 저절로 안으로 들어가고 원래 상태로 회복했다.

그 사이에 한번은 벽곡(辟穀) 그 단락을 배울 때 “과거에 수련하는 사람은 밧줄을 타고 들어간 후, 밧줄을 끊어버리고 동굴 속에서 수련했는데, 수련해 내지 못하면 그 안에서 죽어야 했다.”[1]를 읽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 수련은 이렇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 큰 결심이 있어야 하는가? 그 한 차례 관을 넘기며 확실히 수련의 엄숙성을 체득했다. 조금이라도 진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때 아직 진심으로 부처를 믿지 않았고 무신론이 머릿속에 단단히 뿌리 박혀 있었다!)

20여 년 수련에서 이 집착심은 줄곧 나를 따라다녔고 속으로 줄곧 내려놓지 못했다. 조금 아프면 나는 두려워했다. 그러나 나도 느꼈는데 이전처럼 그렇게 강렬하지 않았다. 한번은 코가 막혀 연공하려 하는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사부님의 법상 앞에서 연공했는데, 나는 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저는 연공하고 싶습니다, 제 입을 닫게 해 주시고 코가 뚫리게 해 주세요, 연공할 때 뚫리지 않으면 힘듭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코는 곧 뚫렸고, 평소보다 시원하고 편안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오! 원래 정말로 병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병이 아니구나! 원래 정말로 생각하는 대로 되는구나! (이전에 얼마나 믿지 않았는가? 비록 입으로는 인정했지만 진정으로 믿지 않았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비록 이치는 알고 있었지만 아직 해낼 수 없었다. 사실 지금 보면 착실히 수련하는 과정이었다. 점차 일에 부딪히면 사람의 생각으로 가고 인식하면 다시 바로 잡는,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천천히 다리에 쥐가 나도 마음이 태연했다. ‘그것은 내가 아닌데 그것을 상관할 필요가 있는가? 그것을 상관하지 말자. 30초면 나아진다.’ 당신이 이 방면에서 마음을 내려놓으면 그것은 또 다른 부위에 가고 그런 증상을 나타나게 한다. 또 내려놓지 못하면 다시 노력해서 닦아버렸다.

이전 한시기 단번에 사부님의 법 “하나의 부동(不動)이 만(萬) 가지 움직임을 제약하는 것이다!”[2]에 약간의 이해가 있었다. 당신이 어디가 불편할 때 당신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당신을 제약할 수 없는데, 여전히 심성 문제다. 그러나 때로 아직 해내지 못한다. 이틀 전 수련생이 쓴 근본 집착심을 찾은 문장을 보았는데, 나도 사로(思路)를 따라 근본 집착심을 찾았다. 나는 내가 입문한 근본 집착심은 병 치료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또 단일한 것이 아니고 각 방면에 연결돼 있었다. 병 치료를 하려는 것은 편안하려고 생각하는 것인데, 편안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편안한 생활을 하려는 것이다. 편안한 생활을 하려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편안하고 안일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표면적인 것이고, 그것은 또 깊은 층차의 것이 있다. 사상 속에 여러 가지 집착심이 생겨나는데, 사실 인간 세상의 행복감에 대한 추구이자 명리정(名利情)에 대한 일종의 방종이다. 고통이 있으면 대항하려 하고 온갖 방법으로 그것을 극복하려 하는데, 수련의 법리와 정반대로 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흔히 우리 인류가 좋다고 인정하는 것이라도, 고층차에서 보면 흔히 나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속인 중에서 개인이익을 많이 얻을수록, 잘살수록 좋다고 여기는데, 대각자들이 볼 때 이 사람은 더욱 좋지 않다. 어디가 좋지 않은가? 그가 얻는 것이 많을수록 그는 다른 사람을 더욱 해치고, 얻지 말아야 할 것을 얻는데, 그는 명리(名利)를 중히 여김으로써 그는 德(더)를 잃어버릴 것이다.”[1]

사람의 관념을 바꾸지 않는 것, 이는 가장 큰 장애인데, 근본 집착을 줄곧 제거하지 못한 관건적인 원인이 거기에 있다! 오늘 사부님의 ‘2019년 뉴욕 법회 설법’에서 소업 문제를 명확하게 말씀해주셨는데, 나는 마음이 많이 놓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담이 작고 일을 하면 두각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피할 수 있으면 피했다. 특히 부대에서 ‘명령에 복종하고 지휘에 따르라’라는 교육을 받아 자신의 주견이 없었다. 무엇을 하라고 하면 곧바로 했는데, 스스로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런 근거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서 했는데, 게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책임질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거의 무엇이든 두려워했는데, 수련에도 반영되어 먼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문제가 없으면 내가 다시 했고, 문제가 생기면 나는 바로 하지 않았다. 99년 ‘7.20’ 박해 전 나는 이사를 했는데, 등기하는 것을 알지 못해 하지 않았지만 뜻하지 않게 일이 생기지 않았다. 직장에서 나는 중간 간부고 평소 말도 잘 하지 않고, 처세는 비교적 신중하고 온순해 전 부서는 모두 내가 연공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직장 노조 지도자는 단번에 잡아뗐다: “우리 직장에는 없습니다.” 위로 명단을 올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사부님께서 나의 심성이 제 위치에 있어 나를 도와 많은 번거로움을 없애주셨다. 그러나 수련함에 집착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나중에 자료를 만들고 배포하는 과정에서, 핸드폰 진상을 하면서 두려움이 좀 있었다. 지금 대면해서 진상을 알리면서 나는 두려운 마음을 제거하는 과정이 간단하고 신속함을 명확히 느꼈다.

근본 집착심이든 아니면 두려운 마음이든 기타 집착심이든 사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인한 것이다. 나에게 이런 이기적인 마음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 수련에 일부 기초가 있을 때 사부님께서 나에게 이기적인 마음을 제거하는 기회를 주셨다. 2018년 법공부 팀에 한 수련생(2011년부터 수련을 시작)이 있었는데 병업 상태가 나타났다. 도와줄까 말까? 나에 대해 이것은 큰 문제였다. 자신이 잘 수련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타인을 도울 수 있는가? 수련생은 나와 교류하고 싶어 했다. 다른 수련생의 요구로 가까스로 그녀 집에 가서 함께 법공부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정말 사부님의 고생스러운 마음을 깨닫게 됐다. 자신의 부족한 점과 이기적인 마음을 보았고, 다른 수련생이 병업 수련생을 도울 때 무사(無私)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처하며, 근본적으로 자아가 없는 것을 보았는데,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것은 수련 경지이고 사람이 인위적으로 해낸 것이 아니다. 하는 과정에서 사부님은 나에게 인식하게 하셨는데, 당신이 사부님을 굳게 믿고 법을 굳게 믿으면 당신이 능력이 있든 없든지를 막론하고, 감히 할 수 있으면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해낼 수 있게 하시며, 위덕을 수립하게 해 공을 자라게 하시어 제자를 성취하게 하신다.

20년의 수련 중 감동이 가장 깊은 이런 점을 교류했는데, 적절하지 않은 점은 시정해 주시기를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미국중부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0317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3/17/4025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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