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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제자가 질투심, 색욕심을 다시 논하다

글/ 둥베이 대법제자

[밍후이왕] 요 며칠 동안의 법공부와 연공을 하면서 또 새로운 내포를 느끼고 자기의 부족한 점을 찾아냈다.

나는 올해 본래 대학교 2학년이 되어야 하는데, 학교에서 내가 대법을 수련하는 것을 알고 나를 제명했다. 학교에서 나온 후, 나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밤새우고 깊은 밤에 눈물을 흘리며 인생이 왜 이렇게 고달픈지 생각했다. 낙심한 나머지 구세력의 박해에 빠져 정념을 잃었다. 그러나 지금은 매일 열심히 법을 배우고, 창구에 앉아서 서비스 업무를 보는 일자리를 찾아 점점 안정되고 있다. 그래도 나는 늘 슬픔을 느꼈다.

며칠 전에 연공했는데 갑자기 나에게 질투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나의 기쁘지 않은 마음이 상당 부분 이것에서 비롯됐다. 남의 생활을 부러워하다 보니 스스로 고달프고 힘들어 마음이 편치 않은 게 질투심 아닌가? 제명된 후 나는 밍후이왕을 통해 한 학우를 알게 됐다. 그도 수련생이고 나와 같은 학교 같은 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내 경험에 대해 들었고, 내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항상 나를 위로하고 수련의 법리도 교류해주었다. 또 속인의 방법으로 나를 기운 나게 해주고 사부님께서 보고 계신다면서 나에게 관심을 쏟아주어 내 마음을 가라앉히게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매일 힘든 일을 하고 있는데, 그는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피곤하면 기숙사로 돌아가 누워 쉴 수 있고, 책을 베껴서 책을 암기하고 호숫가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유유자적하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에 나는 더는 기쁘지 않았고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생활의 어려움을 모르는데, 그렇게 편안하고 편안하게 어떻게 수련할 수 있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문득 이것이 질투심 같았다. 마치 도화선이 벽을 폭파한 것 같았다. 나는 많은 세부 사항을 회상해보니, 내가 기쁘지 않은 것은 근본적으로 질투심 때문이었다. 이런 질투심, 극도로 감추어진 뿌리 깊은 것이 내 마음속에 여러 해 동안 숨겨져 있었다.

그런 ‘고통’은 사실 뿌리가 질투심이다. 사실 다른 사람이 잘사는 것은 그들의 복이고, 이런 것은 내가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 많은 수련생과의 교류를 통해, 나는 또한 ‘다른 사람을 깔본다’는 것도 사실 변이된 질투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한번은 부서의 한 수련생과 교류가 있었다. 나는 우리 집이 직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8시 30분까지 출근해야 하기에 버스를 타고 매일 6시 40분에 집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동북의 겨울은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아 어둡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즉시 말했다. “우리 집도 가깝지 않아요. 저도 6시 10분에 발정념을 하고 출발해 6시 40분에 직장에 도착해요(그는 자가용으로 출근함).”라고 했다. 그 말속에는 나보다 낫다는 그의 생각이 숨어 있는 것 같았고, 심지어 내가 늦게 가고 한가하다고 질투하는 것 같았다.

또 예를 들면, 한번은 수련생과 이 메일함 사용에 대해 교류한 적이 있다. 결국 밤 11시 40분이 넘었을 때 그는 매우 늦었다면서 잠을 자려 했다. 나는 좀 화가 났다. 어떻게 발정념도 안 하고 잠자려고 할까? 이 생각은 자세히 살펴보면, 결코 법을 위한 것이 아니고 정체를 위한 것도 아니며, 심지어 수련생의 정진 여부를 고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질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안일한가? 아침 7~8시에 일어나니 나보다 늦게 일어났고, 또 나보다 일찍 잤기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생각해 매우 화가 난 것이다. 이게 다 질투심이 아닌가? 다른 수련생의 수련이 어떠하다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질투심인 것이다.

사존께서 “속인 중에서는 일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많이 일하면 많이 얻으며, 적게 일하면 적게 얻고, 대가를 많이 치르면 마땅히 많이 얻어야 한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현재 상황에 만족해야 하며 법의 요구에 따라 성실하게 수련해야 한다. 나는 힘들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이고, 미래에 성취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면 내가 아직도 내려놓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지금 고생을 좀 해봐야 별것 아니니 모두 넘길 수 있다.’ 한번은 수련생이 쓴 글을 보았는데, 그는 점오 상태였다. 그는 20년 동안 수련했고,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이 그가 보기에 구름이나 연기 같고, 허무(虛無)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내가 이 문제를 깨달았을 때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또한 자신의 색욕심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쁜 사람을 보면 몇 번 더 보고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좋아했다.

다른 사람이 창구에 와서 업무를 보면 나는 외모를 보고 또 외모로 이 사람을 판단한다. 나는 예쁘거나 잘생긴 동료를 보면 잘 대해주고 그 동료와 말을 많이 하며, 보기 흉하고, 뚱뚱한 사람은 멀리 피한다. 심지어 내 관념에 맞는 ‘멋진’ 사람을 보면 그와 말할 때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느낌이 들며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오른다. 이것들은 모두 무의식중에 동화되어 때로는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할 때가 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버스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매일 잠을 적게 잤기에, 보통 출퇴근 시간, 버스 타는 시간에 잠깐 쉬곤 한다. 갑자기 옆에 서 있던 한 여자 핸드폰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그녀는 이어폰을 쓰지 않았고 소리가 꽤 컸다. 그리고 내용이 매우 좋지 않아서, 모두가 보통 사람들이 사회에서 자극을 찾는 것들이다. 나는 화가 나서 그녀를 한 번 보았다. 그녀는 나와 너무 가까워서 다리가 내 몸에 닿아서 그런 줄 알고 좌석 등받이 쪽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내 귀에 휴대폰이 가까워져서 더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나는 안으로 찾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어서 이런 것들을 듣게 되는지 생각했는데 역시 나의 색욕심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이성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훌륭한지 보여 주려고 명예를 구하고 이익을 얻으려는 여러 가지 집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무릇 연공(煉功) 중에 이런 교란, 저런 교란이 나타나면, 당신이 아직도 무엇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지 당신 자신이 원인을 찾아야 한다.”[1] 나는 사부님께 이것은 내가 아니고 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마음속에 좋지 않은 생각이 나오면 ‘몌(滅)’자를 외쳤다.

저녁에 량처빠오룬(兩側抱輪)을 할 때, 어깨와 목의 업력이 밖으로 발산되는 것을 느꼈다. 연마가 끝난 후, 몸이 홀가분했고 저녁에 피곤하지 않았으며 오후 업무를 볼 때 어깨, 목이 시큰하고 아픈 증상이 모두 나아짐을 느꼈다.

나는 청정실수(清淨實修)를 위해 단독으로 방에 거주하고 생활하기 시작했다. 처음 왔을 때는 하수구에서 냄새가 나서 목욕하지 않을 때는 비닐봉지로 하수구를 덮어야 했고, 방에 바퀴벌레도 있었다.

사존께 과일을 공양하고 향을 피울 때 사존의 표정이 엄숙함을 느끼게 됐다. 내가 색욕심이 심해서 자신이 늘 마음이 허전하고 박해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공을 들여 이 색욕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나 있었고 배척할 줄 모르면 스스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러면 연공을 견지할 수도 없고, 몸이 늘 어지럽고 어지러워 정신이 없다.

사존의 자비로우신 점화와 다른 수련생의 말, 꿈속, 신체적 반응, 교류 문장을 읽는 등을 통해 내 색욕심을 직접 지적하셨다.

나는 정신을 차렸다. 발정념으로 색마를 청리하고 깨끗이 제거해 지금은 안 좋은 생각이 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발정념해 그것을 소멸한다. 마음에 빈틈 없이 정정당당하고 용감하게 다시 걸어 나와 법을 실증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생각해 봤는데, 우리에게 딱 세 가지 일이 있지 않은가? 왜 아직도 잘하지 못하는가? 그래서 나는 진지하게 매일 정각 발정념을 중시하고 가급적 종소리를 사용한다. 또 때때로 차 안에서 이어폰을 끼고 잠들어 저녁 6시 알람 소리가 울리면 깨어나 발정념을 한다.

오늘 아침에 차를 타고 잠잤는데 하마터면 역을 지나칠 뻔했다. 눈을 뜨자마자 차가 본 역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서 바로 내렸다. 모두 사존께서 보고 계시고 사존께서 나를 깨우셨다. 그렇지 않으면 역을 지나갔을 것이다.

지금은 하수도를 덮지 않아도 방 안에는 전혀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매일 사존께 올리는 향긋한 순한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나 향기롭다. 바퀴벌레도 보이지 않고 잠을 적게 자도 낮에는 졸리지 않고 머리도 어지럽지 않다. 매일 사존 법상 앞을 지날 때마다, 사존께서 나를 향해 미소 짓는 것을 보면 참 기분이 좋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2]

수련이란 이런 것이며, 어떤 일이든지 모두 안으로 찾아야 한다. 이 뿐만 아니라 갈수록, 최후일수록 요구가 높아지고 길이 좁아져 곧은 한 갈래 선이다. 어떤 사소한 집착에도 발목을 잡히면 장애가 될 수 있다. 평소 남이 하는 말이 불편할 때, 왜 불편하게 느껴지는지 깨달아야 한다. 정말 자신이 억울해도 많이 참고, 더 많은 사람을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체득이나 수련생과 교류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서: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

 

원문발표: 2020년 1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6/39854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