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메이롄(美蓮)
[밍후이왕] 내가 8살 되던 해이다. 저녁에 밥을 먹은 후에 나는 문 앞의 한 곳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쓸고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땅에 앉았다. 머리를 들고 하늘을 보았는데 휘영청 밝은 달 옆에 한 쌍의 곱슬머리 인형(수련한 후에 그것이 천사라는 것을 알게 됐다)이 나타났다. 나는 속으로 ‘나는 왜 여기에 왔을까? 내가 만약 하늘의 작은 인형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내가 한 마리 새라고 해도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는데’라고 생각했다.
힘든 삶
나는 1964년 허베이(河北)성의 한 시골에서 맏이로 태어났고 밑으로 동생이 3명 있다. 어머니는 늘 몸이 아프셨고 성격도 따라서 나빠져서 말이 아니었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 있기만 하면 날 때리고 욕하곤 하셨다.
15살이 되던 해에 나는 장티푸스에 걸려 꼬박 7일 동안 열이 나 국물도 먹지 못했다. 나중에 몸이 좀 괜찮아지자 강변에 가서 빨래했다. 그 당시 빨래하려면 판이 있어야 했는데 나는 판이 항아리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옆에는 자전거가 있었는데 항아리보다 조금 높았다. 판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몸이 허약해서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깨어나서야 내가 자전거 위에 넘어진 것을 알았다.
그 몇 년간 동생들은 일할 수 없었고 어머니도 병상에 계셨기에 나만 아버지와 함께 농사일하고 집안일도 했다.
결혼할 나이가 되자 부모님은 나에게 몹시 가난한 고아를 소개해주셨다. 나는 그 남자에게 시집을 갔고 바쁜 생활이 또 시작됐다.
하루는 내가 친정으로 오는 길에서 한 젊은이를 만났는데 나에게 점을 봐주겠다고 했다. 나는 “아이가 다른 사람의 집에 있어서 저는 빨리 물건을 사고 다시 집으로 가야 해요”라고 말했다. 아무리 그에게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그는 친정집까지 따라왔다. 어머니는 나에게 그 사람은 누구며 뭐 하러 왔냐고 물었다. 나는 길에서 만난 사람인데 기어이 나에게 점을 봐주겠다고 한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점을 꽤 믿는 편이라 3위안을 주면서 점을 봐달라고 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생년월일을 물은 후에 바로 “당신은 장래에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어요. 그러나 당신이 30세 되는 해에 난이 있을 것인데 만약 운이 있어 고인(高人)이 점화해주면 나중에는 순풍의 돛단배가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 당시 나는 빨리 집으로 가서 아이들을 볼 생각에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몇 년 후 아들이 3살, 딸이 1살 때였다.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밭에 일하러 갔다. 두 아이는 더러운 물웅덩이가 있는 곳에서 돌을 던지며 놀다가 딸이 빠졌다. 아들이 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에 뛰어가 보니 딸아이는 머리만 내놓고 이미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딸을 덥석 잡아끌었다. 그리고 두 아이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농사고 뭐고 다시는 하지 않겠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평생을 후회하게 될 거야’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도 두렵다.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시지 않았다면 딸은 아마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나중에 우리는 도시로 이사했다.
행운으로 대법을 만나 고생이 낙으로 바뀌다
오랫동안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신체는 끝내 탈이 났다. 딸을 낳은 후 매번 생리가 올 때면 열흘 혹은 보름이었고 숨이 차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때 나이가 30세가 좀 더 됐다. 나는 속으로 ‘점쟁이가 30세 때 난이 있지만, 귀인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는데 그 귀인은 어디에 있지?’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중의사와 양의사를 찾아다니며 치료했고 각종 민간요법을 써 봤지만 소용없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딸이 유치원 졸업반에 다닐 때였다. 한번은 주말이었는데 나는 괴로워서 두 아이를 안고 울고 있었다. 인생의 출로가 없는 것 같아 죽으려고 아들을 보고 수면제를 사 오라고 했다. 그런데 동네 약방 약사는 아들을 알아보고 내가 수면제를 먹으려고 아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수면제를 주지 않았다.
1995년 5월, 친구가 내 사정을 알고 파룬궁을 추천했다. 그녀는 “내 셋집 주인이 파룬궁을 연마하는데 몸이 아주 좋아, 너도 한번 해보렴”이라고 말했다. 이전에 여러 번 그의 제안을 거절했었지만, 그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기에 그 아주머니를 찾았다. 그 아주머니는 어디에서 책을 살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그날 애를 데리고 서점에 가서 ‘전법륜’을 샀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아이에게 “엄마가 책 한 권을 샀는데 젖으면 안 되니까 네 책가방에 넣자”라고 했더니 아들은 순순히 따라주었다.
집에 와서 책을 펼치니 붉은빛이 나왔다. ‘이 책은 왜 이러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학교에 얼마 다니지 않았기에 한 글자 한 글자씩 보고 한 구절씩 읽어보았는데 구절마다 마음에 와닿았다.
‘전법륜’을 3페이지도 채 읽지 않았는데 신체는 이미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때는 약을 달이면서 책을 보았는데 볼수록 책이 너무나도 좋다고 느꼈다. 첫날은 겨우 약을 먹었으나 이튿날 약을 달일 시간이 되자 ‘약을 달일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책을 더 보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 후부터 생리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숨이 차지도 않았고 어지럽지도 않았으며 정신이 나서 3일 동안 잠을 자지 않아도 됐다.
몸이 좋아지자 바로 운전을 배웠다. 밖에서는 남편을 도와 차를 운전했고, 집에서는 옷을 빨고 밥하고 무엇이나 다 할 수 있었으며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몇 년간 열심히 일해서 아무것도 없던 데서부터 지금은 집도 있고 차도 있게 됐다. 이 모든 것이 대법을 수련해 얻은 복이다.
박해로 우리 집이 망할 뻔하다
생각지도 못하게 몇 개월이 지난 7월 20일 장쩌민 악마는 수중의 권력을 이용해 하늘을 덮을 기세로 파룬궁을 수련하는 좋은 사람들을 박해했다. TV와 라디오 매체의 거짓 선전으로 남편은 지혜를 잃었다. 그는 설법 테이프를 던지고 대법 서적을 찾지 못하게 꽁꽁 감췄다. 심할 때는 나에게 “아직도 연마할 거야?”라고 엄숙하게 묻고 내가 연마하겠다고 하면 따귀를 때렸다. 몇 번이고 출근도 하지 않고 죄수를 감시하듯이 나를 지키고 온종일 잠을 못 자게 했다. 그런 시간이 1년이나 지속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이혼을 요구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할 테니 아이 둘과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니 차 한 대를 달라고 했다. 남편은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법을 금방 얻었고 지식도 없어 겨우 몇 페이지만 읽었다. 아이들도 아직 어린데 생활은 계속해야 하니 수련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속으로 지금은 잠시 책을 놓으나 나이가 들면 반드시 다시 보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내려놓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일 때문에 외출할 때 소리 없이 많이 울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야겠다고도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달 후 병마가 내 몸을 감쌌다. 허리 통증으로 심할 때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남편과 함께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보았는데 요추 3~4번이 돌출됐다고 했다. 의사는 수술하지 않으면 하반신 마비가 된다고 했다. 나는 대성통곡했다. 속으로 ‘만약 내가 마비되면 어린 두 아이는 어떻게 할까?’라고 생각하면서 앞날을 걱정했다. 그 상황을 본 남편은 나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 남편은 친구를 통해 베이징에 가서 수술받자고 했다. 마침 그 의사가 고향으로 돌아와 있다고 해서 의사를 찾아갔다. “수술하면 좋아진다고 보증할 수 있나요?”라고 내가 물으니 의사는 “병원에서는 무슨 보증이라는 게 없어요. 나으면 나은 것이고 안 되면 마비가 되는 거죠”라고 했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지금은 걸을 수 있는데 만일 마비가 되면 두 아이는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그래서 수술을 포기했다.
나는 마사지를 받고 침을 맞았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머리를 숙일 수 없었고 아침이면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심지어 빈 그릇도 들 수가 없었다. 집안일을 할 수 없어 남편이 출근도 못 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밥을 지었다. 그때는 정말로 하늘도 무심해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는 이런 제자를 버리지 않으셨다. 딸의 입을 빌려 점화해주셨다. 몇 번이고 딸이 “엄마, 전에 연공할 때 몸이 그렇게도 좋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괴로우니 다시 연마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딸이 말해줘서 나는 ‘전법륜’을 다시 구해왔다. 책을 가져오자 몸이 아주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책을 줄곧 감추고 남편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책을 가져온 지 이틀이 되던 날 아침에 일어날 수 있었고 허리도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허리를 굽혀 세숫대야를 잡을 수 있었고 간단한 집안일도 할 수 있었다. 3일 후 수련해야겠다는 확고한 마음이 생겼다. ‘돈이 있으면 병을 고칠 수 있으나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다시 수련하는 데 있어서 첫 번째 관은 남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요즘 내가 좀 좋아진 것 같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남편은 “몸이 아주 가벼워진 것 같네”라고 말했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어떻게 좋아졌는지 알고 있나요? 수련을 다시 시작했어요”라고 했다. 그리고 아주 확고하게 “이번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고 수련만 할 테니 좋게 헤어져요”라고 말했다. 남편은 듣고 나서 “좋아, 수련하고 싶으면 수련해”라고 말했다. 그 후부터 나는 매일 즐겁게 법공부하고 연공했으며 일이 있으면 바로 가서 할 수 있게 되어 가족과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대법의 기적을 보여줬다.
한 사람이 법을 얻자 정말로 온 가족이 이로움을 얻다
2003년 아주버님은 병원에서 간경화 진단을 받았다. 그때 나는 이런 병이 전염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는 12일 동안 매일 아침, 내가 운전을 해서 병원으로 모셔다드리고 주사를 다 맞고는 모셔왔다. 이렇게 매일 같이 한 밥상에서 밥을 먹었고 같은 집에서 잠을 잤다. 큰고모네 딸이 우리 집에 아주버님을 보러 왔다 갔는데 말 몇 마디만 하고 갔을 뿐인데 그 식구 4명 중 3명이 감염됐다.
아주버님은 호전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나는 이 병이 감염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검사를 받아보자고 해서 병원에 가서 검사해보니 남편과 아들만 항체가 생겼고 나와 딸은 아무 일도 없었다. 친척과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대법의 신기함을 증명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남편의 대법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그리고 남편도 대법 수련의 길에 들어섰다.
세인들에게 진상을 똑똑히 알리다
나는 수련 체험을 통해 대법이 정말로 좋다고 느꼈다. 나는 속으로 내 차를 타는 사람들은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고 그들에게도 파룬궁 진상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운전하면서 연분 있는 사람들에게 ‘천안문 분신 사건’이 조작된 것과 파룬궁이 어떻게 선을 향하고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한번은 저녁 6~7시쯤에 한 사람을 태웠다. 나는 그에게 ‘천안문 분신 사건’이 조작됐다는 것과 파룬궁 수련은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게 가르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문득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요? 난 부대의 장교인데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할 건가요?”라고 했다. 그때 사부님의 법이 떠올랐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당신이 무엇을 하러 왔든, 당신이 원래부터 법을 파괴하러 왔든지 불문하고 나는 모두 당신을 제도한다.”[1] 사부님의 법이 떠오르자 정념이 나와 그 장교 배후의 진상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했다. 그리하여 30분 사이에 그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 밝은 선택을 해서 중국공산당, 공청단, 소선대에서 탈퇴했다.
차를 운전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진상을 알렸는지 나도 모른다. 흔쾌히 동의하는 이도 있었고 태도 표시를 하지 않은 이도 있었으며 받아들이지 않은 이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사부님의 보호 아래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사부님 말씀대로만 하면 된다는 것을 똑똑하게 알고 있었다. 매일 집에서 법공부하고 연공했으며 밖에 나가 진상을 알렸다. 매일 돈을 얼마나 벌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고 오로지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운전할 때는 차가 스스로 가는 것 같았고 길옆의 화초는 나를 반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매일 즐겁게 생활했다.
우리 집에도 ‘꽃’(자료점)이 피다
한번은 자료점에 가서 자료를 가져올 때 수련생들이 자료를 제작하느라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도 자료점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은 빚이 10여만 위안(약 1천7백만 원)이나 있는 데다가 자료 비용은 어떻게 할 것인지, 차는 누가 운전할 것인지를 몰라 망설였다. 그러나 바로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나오자 머리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사정법(助師正法)을 하러 온 것이다. 집안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지만, 자료를 제작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시각 나는 사명감을 느꼈다.
수련생은 제작 설비 한 세트를 가져왔다. 그러나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나는 병음(중국어 발음 표기법)도 몰랐고 컴퓨터도 몰랐다. 수련생들은 인내심 갖고 내가 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었다. 딸이 옆에서 먼저 배웠고 다시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 모든 것이 모두 사부님의 배치대로 진행된 것이었다.
그 당시에 우리 집에서는 나와 딸만이 수련했다. 일요일에 나는 자료를 만들었고 주말에 딸은 시간만 나면 나를 도와 자료를 가져오고 배송했다. 설 기간에는 장사도 잘되고 수련생들이 자료를 많이 요구해 나 혼자서는 다 할 수 없었다. 내가 운전하면 딸은 나를 도와 자료를 만들었고 페이지, 수량, 용지 추가 등을 확인하고 묶는 것을 도왔다. 섣달그믐날과 설날에도 쉬지 않았다.
나중에 아들과 남편이 수련을 시작하면서 우리 자료점 꽃은 더욱 활짝 피게 됐다. 우리도 각종 정교한 정기 간행물, CD, 장식걸이 등을 만들어 현지 수련생들의 요구를 만족시켜주었고 세인을 더욱 잘 구했다. 이렇게 어린 제자를 둘이나 배치해 내가 조사정법 하는 것을 돕고 중생을 구할 수 있게 하신 사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여기까지 적으니 사부님의 자비와 위대함을 깊이 느낀다. 비록 우리는 떠들썩한 큰일은 하지 못했지만, 반드시 사부님의 요구대로 할 것이고 세 가지 일을 잘하도록 노력하며 원만하여 사부님을 따라갈 것이다. 무릎 꿇어 사부님께 인사를 올린다.
개인적인 체험이니 부적절한 곳은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서: ‘오스트레일리아 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0년 1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11/39883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