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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교사, 명리를 담담히 보아 자연스럽게 아름다워지다

글/ 산둥 대법제자

[밍후이왕] 20여 년 전 나는 사범대학 음악과를 졸업하고 우리 이 향진(鄉鎮) 중학교에서 음악 교사를 맡았다. 갓 졸업했을 때 전시 제1회 학교 예술절을 맞았는데 내가 지도하고 주역을 맡아 춤춘 무용이 1등 상을 타 진(鎮) 교육위원회에 영예를 안아왔다. 음악 선생님으로서 공연 임무, 무대에 오를 기회가 많았다. 무용, 노래, 비파 연주 나는 학교 전공을 운용하여 무대에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펼쳐 보였다.

생활 속에서 나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명리를 추구하고 자기를 중히 보았다. 예를 들면 출근 카드 찍을 때 부교장이 나을 억울하게 대하고 나에 대한 태도가 매우 좋지 않았을 때 나는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지면서 다투었고 마지막에 동료가 나를 끌고 가서야 그만두었다. 우리는 진 기관을 대표하여 시(市)에 공연하러 가게 되어 프로그램을 두 개 준비했는데 하나는 상급에서 자금이 부족하다고 빼려고 했다. 우리는 연습하느라 노력했는데 보여줄 수 없다는 것만 생각하고 이유를 대어 다른 한 프로그램도 공연하러 가지 않아 진 관계자는 매우 난처했다.

명리를 담담히 내려놓으니 사람이 자연스럽게 아름답다

1998년 봄 나는 행운으로 대법을 얻었다. “쩐싼런(眞·善·忍)은 좋고 나쁜 사람을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이다”[1] 정확한 인생 방향과 표준이 있어 나는 바르지 않은 모든 것을 점차 바로잡고 있다.

1999년 7월 중공(中共)이 대법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좌천되어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 농촌 초등학교에 가 글을 가르쳤다. 그때 나는 일을 매우 잘했기에 나를 초등학교에 보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땐 반박해를 모르고 연공인은 상사를 난처하게 해서는 안 되고 고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평온하게 이런 불합리한 배치를 받아들였다.

초등학교 교사는 인원이 부족하여 나는 늘 나의 전공만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학교 수요에 따라 내가 가르친 과목은 변해 20년 동안 초등학교 과목을 나는 다 가르쳤다.

우리 이곳은 학생 성적을 교사에 대한 심사로 삼고 그것으로 우수교사를 선정하고 선진을 수립했으며 직급을 올려주었다. 학생은 선생님이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공구로 되었다. 어떤 교장은 선생님을 배치하여 번갈아 가며 학생들에게 오전 자습 시간을 배치하게 하고 “사람은 쉬어도 말은 쉬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학생이 말인가? 사람으로 대하지 않은 거다! 학생의 성적을 높이기 위해 학생을 때리고 욕하는 일이 늘 있었고 선생님은 갖은 방법을 다해 심지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학생에게 시험 칠 때 커닝하게 했고 답안지를 거둔 후 보안실에 가 학생의 답안지를 고치고 답안지를 볼 때 동료에게 위탁하여 학생의 점수를 고치게 했다. 심지어 상사에게 뇌물을 주어 서열을 고쳐달라고 했고 또 교육국에서 사전에 시험지를 얻어오는 각종 부패한 현상이 적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오염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오염된 학생을 최선을 다해 씻어야 한다. 나는 나의 학생을 나의 애들처럼 가르치리라 생각했다. 우선 품행을 가르치고 다음 지식을 가르쳤다. 나는 그들을 인도하여 진실·선량·관용·양보 등 사람 됨됨이를 가르쳐 그들 어린 마음에 선량하고 아름다운 종자를 뿌려주었다.

상사, 동료들은 나의 수업을 듣고 모두 친화력이 있다고 했다. 한 교장은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수업을 잘한다고 했고 표준어를 잘하며 글씨가 예쁘고 춤도 잘 추고 그림도 잘 그린다고 칭찬했다. 여성 부교장은 농담조로 “재능 있는 여자”라면서 “학부모가 말한 학교에서 가장 기질이 있는 그 여선생님이 바로 선생님을 가리킨 것일 겁니다”라고 말했다. 나에게 직함이 없고 각종 영예 칭호가 없지만, 동료들은 모두 나를 인정했다. 나는 명리를 구하지 않고 글만 가르치고 타인의 모범이 되었으며 언행이 우아하고 대범했으며 마음이 평온하고 홀가분했다.

한 학생의 어머니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우리 아들은 집에 돌아와 선생님이 어머니 같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웃었다. 그러기에 어떤 학생은 나에게 문제를 물을 때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엄마’라고 불렀다. 매일 학생을 때리고 욕하는 선생님을 학생들이 ‘엄마’라고 잘못 부를 수 있을까?

나는 학부모의 선물을 받지 않았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것은 가치를 따져 상당한 선물로 답례했다. 우리 진에 또 대법제자 한 분이 있었는데 다른 한 학교에서 근무했다. 그녀도 역시 이러했다. 한번은 내가 시내에 가 그녀를 도와 문구 세 개를 사주었다. 그녀는 두 남학생과 한 여학생에게 답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학부모들은 우리가 명리를 탐내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안다. 학생들은 졸업한 후 우리를 보면 여전히 매우 존경했다.

다투지 않고 싸우지 않으니 마음이 자연히 조용하다

수련에서 승화됨에 따라 불공정한 대우를 받을 때 나는 다시는 따지지 않았다. 한번은 전체 진 교사 탁구 시합에서 나는 여자 우승을 했는데 시내에 시합하러 간 선생님은 준우승한 그 여성 상사였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또 한번은 전체 진 교사 ‘스승으로서의 도덕’ 연설 시합에서 나는 탈고하여 연설했는데 남보다 월등하게 1위를 차지했다. 진 교육위원회는 나에게 시내 시합에 참가하도록 배치했고 교장도 일부러 사람을 찾아 원고를 썼지만, 마지막에 나보다 서열이 뒤에 있는 선생님에게 참가하게 하여 나는 가지 못해도 가서 따지지 않았다.

또 한번은 ‘우수 교사’ 칭호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해 나는 1학년 수학을 가르쳐주었는데 성적이 매우 좋았다. 같은 학년의 20여 개 반 중에서 1년에 네 번 시험 중에 모두 3등을 했다. 일반인의 좋은 성적은 선생님이 ‘가르쳐’ 낸 것이고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지만 우리 반 성적은 ‘하늘이 하사하신’ 것이었다. 학생들의 지력이 모두 매우 좋았고 인원수도 적었으며 성적이 좋아 필연적으로 되었다. 이런 반을 나는 처음 만났는데 1년밖에 가르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탐내 여름 방학 후 다른 선생님에게 조정(調整)해주었다.

그해 나는 ‘교학 품질 1등 상’을 받았다. 이렇게 좋은 성적이면 우리 학교 ‘교사 평점’에서 앞자리를 차지하는데 나의 서열은 여덟 번째였다. 학교의 우수 교사 7명 정원에 내가 빠진 것이다. 진 스승의 날 상을 다 나누어준 후 가끔 ‘교사 평점’이 늘 틀릴 때가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나의 점수를 잘못 계산한 것이 아닌지를 생각하고 교장에게 물었더니 교장도 이상하다면서 우리 다시 계산해보자고 했다. 계산해보니 과연 나에게 점수를 적게 더했다. 나는 원래 7명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상을 받은 제7명이 원래는 제8명이어야 했다. 나는 온화하게 교장에게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교장도 온화하게 말했다. “진작 말할 것이지 상을 이미 내주었잖아요?” 나는 교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웃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법을 수련하기 전이였다면 나는 교장에게 기어이 진에 가 고치라고 했을 것이다. 최저로 그에게 다음에 영예가 있으면 보상으로 나에게 하나 남겨주겠다고 승낙하게 했을 것이다.

‘우수’ 선생님을 억지로 따간 선생님의 남편은 바로 학교의 평점을 매기는 몇몇 수학 선생님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백분율을 환산하여 더하는 것을 어찌 틀릴 수 있단 말인가? 그 후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말이다. 교장은 그녀 사무실에 가서 “선생님의 ‘우수 교사’는 마땅히 모모(나를 가리킴)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듣고 화가 나 다른 사람에게서 상품이 침대 시트라는 말을 듣고 이를 악물고 “갈기갈기 찢더라도 나는 가져오지 않을 거다”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대법을 얻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반환을 요구하러 갔을 것이고 그녀와 원한을 맺을 것이며 교장과 다투거나 진에까지 가서 싸웠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하지 않았고 마음이 매우 평온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의 것이라면 잃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다퉈서도 얻지 못한다.”[1] 정말 이러하다. 이듬해 나는 마침 이 여교사(그녀는 산후 휴가를 냈음)가 맡은 반을 맡았다. 2, 3개월 가르치고 나는 ‘교학 품질상’을 탔고 나는 여름 이불을 받았다. 그 후 나는 진급할 때 ‘교학 품질’ 2개와 공연할 때 받은 몇 장의 상 탄 증서로, 손에 한 무더기 ‘영예’를 가지고 있는 선생님들과 함께 순조롭게 진급했다. 나는 마땅히 당신에게 있으면 있을 것이고 당신의 것이라면 잃지 않는다는 법리를 체험했다.

평화롭게 한 차례 폭력 상해를 제지하다

어느 날 오후 방과 후, 술 취한 사람이 벽돌을 들고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보고가 있어 나와 교장은 사무실 2층에서 동시에 듣고는 함께 계단 쪽으로 뛰어갔다. 나는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 서쪽 강의실 건물 방향으로 뛰어갔다. 머리에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이 떠올랐다. “당신이 살인 방화하는 것마저 상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상관할 것인가?”[1] 이 일은 도의상 마땅히 상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뛰다가 보니 한 20~30살 되고 키가 170이 넘는 그다지 우람지지 않은 사람이 손에 반 조각 벽돌을 들고 강의실 건물과 사무실 건물 사이 남쪽에 서 있었다. 그의 북쪽 1~2m 있는 곳에는 막 수업이 끝난 여교사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40이 넘었고 한 명은 20살 넘었다. 두 사람은 도망가지도 못하고 감히 말도 못하고 상대방의 몸 뒤에 숨어 원래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매우 두려운 표정이었다. 그녀들의 북쪽은 운동장이었다. 보아하니 교도 주임은 술 취한 남성과 교섭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았다. 벽돌에 맞지 않으려고 그는 운동장 멀리 도망갔고 교도 부주임은 동쪽의 화단 옆에서 외쳤다. “당신이 감히 치는지 보겠습니다!”

이 사람의 서쪽에서 3~4m 떨어진 곳에는 줄을 나란히 선 초등학생이 서 있었다. 사람이 밀집해 있고 기율 단속이 있었기에 애들은 제때 흩어질 수 없었다. 그가 학생 대오를 향해 가면 결과는 상상할 수 없다.

위험은 눈 깜짝할 사이에 비통한 현실로 변할 수 있다.

이 정황을 보고 나는 뛰던 데서부터 걸어서 곧바로 그 사람 앞에 가 그에게 말했다. “그것을 나에게 주세요.” 그는 흉악하게 나를 흘겨보았지만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평온하면서 호의적으로 그를 보며 친절하게 또 말했다. “그것을 나에게 주세요.” 나는 그의 눈에 흉한 빛이 사라진 것을 보았다. 그는 순순히 벽돌은 나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받는 대로 옆에 있는 화단 풀숲에 던졌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이 수련자가 되려고 하면, 전적으로 당신 자신의 그 마음에 의거해 닦아야 하며, 전적으로 당신 자신에 의거해 깨달아야 하는데, 본보기가 없다.”[1] 수련인은 오로지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으로 일에 처사해야 가장 바르고 가장 좋은 것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9년 12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2/29/39794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