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경제 교란을 만났을 때, 우리는 먼저 돈을 벌어 걱정거리를 없앤 후 다시 한마음으로 세 가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떤 때 아이가 학교에 잘 다니는 것은 장래에 사람들 속에서 발을 잘 붙이고 걱정거리가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는 진상을 더 잘 알려서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출발점이 맞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주셨다. “나는 당신이 망상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생활을 간섭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우지할 수 없다. 아내와 자식, 부모형제를 포함한 그들의 운명, 그것이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밖에, 당신이 뒷근심이 없고, 당신이 어떤 번거로움도 없다면 당신은 또 무엇을 수련하겠는가? 편안하고 편안하게 거기서 연공(煉功)을 한다고? 어디 그런 일이 있는가? 그것은 당신이 속인의 각도에서 생각한 것이다.”[1]
우리의 사상 속에 법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 곳이 있다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다면 마의 교란이 나타나고 사부님께서는 이를 빌려 우리에게 그 마음을 제거하게 하신다.
지금 나는 자신이 실질 수련에서의 하나의 체험을 써내어 수련생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초기에 나도 아이가 좋은 학교에 다니면 법을 실증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소원과 다르게 아들은 좋은 대학에 가지 못했는데, 이는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들은 포기하지 않고 졸업 후 베이징에 가서 일했고 스스로 회사를 설립했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한번은 아들이 어느 한 회사에 가서 일을 보았는데 그곳의 상사가 아들에게 본인 회사 어느 부서의 총감독을 하라고 했다. 이 회사는 중앙기업의 과학기술 회사이고 이미 상장한 회사였는데 관리하는 직원들은 모두 박사, 박사후였다. 그러나 아들은 졸업한 후 회사에 다녀본 적이 없고 대기업에서 일한 경험이 없었다. 학력도 모두 모자랐는데 그 상사는 기어코 아들에게 와서 출근하라고 했고 며칠 만에 입사 절차를 마치고 업무에 들어갔다.
아들은 본래 현지에서 아주 유명한 고등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입시를 잘 보지 못했다. 본래는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길이었다. 이렇게 하면 나의 걱정을 덜 수 있고 법을 실증할 수 있는 정력과 물력을 가질 수 있었는데, 생각 밖에 고생스러운 길을 걸어가게 되었고, 겪은 것은 모두 도전성이 아주 극한에 달하는 큰 관과 난들이라 여기서 상세히 말하지 않겠다. 본래 나의 머리에는 한 가지 관념이 있었는데, 반드시 좋은 학교에 가야 비로소 좋은 일자리를 찾고 그것은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고, 그렇지 않으면 법을 실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후에 현실에서 발생한 일은 나에게 이 관념을 바꾸게 했는데, 제고해서 올라가지 못한 것은 이전에 이 관념이 옳지 않았고, 아울러 사상에 경직된 틀이 있었기 때문임을 발견했다.
2년간 일하고 아들은 퇴사했다. 사실 아들은 그곳에서 아주 훌륭하게 일했는데 회사 수익은 모두 아들에게 의지했다.아들이 말했다. “그곳에 가서 출근한 것이 마치 꿈만 같았어요.” 뜻은 바로 어쩔 수 없었던 것이고 그곳에 가서 출근하는 것이 무엇을 실증하기 위한 것 같았는데, 아마도 좋은 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좋은 직장에 다닐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일 것이다. 지금 실증을 다 했으니 마땅히 떠나야 한다.또 항상 아들은 마치 한 가지 일을 위해 온 것 같다고 느꼈는데, 일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인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무엇을 실증하기 위한 것인데, 무엇을 실증하는 것인지는 나도 분명하지 않았다.
처음에 나도 주의하지 않았고 농담으로 여겼는데, 후에 기억한 것은 밍후이왕 사이트에서 그 당시 “무엇을 실증하는가?”라는 몇 글자를 보면서 마치 자물쇠가 열리는 것 같았는데, 온몸이 한번 진동하더니 사유가 단번에 열리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아들이 말한 그런 말들이 우연이 아님을 의식하게 되었다.
먼저 내 아들은 대법 책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하겠다. 박해 초기에 가장 어려울 때 그는 나를 도와 법을 실증하는 많은 일을 했고, 삼퇴와 장(江)고소도 모두 앞장서서 해냈다. 나는 갑자기 깨달았는데, 대법제자의 아이들 중 일부는 보기에 마치 진정으로 수련에 들어온 것 같지 않지만, 역시 정법 중에 사명이 있도록 배치되었고 또 무슨 배역을 맡고 있었는데, 바로 일체는 모두 사부님의 배치였고, 자신이 어떻게 하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이를 생각했을 때 원래의 틀이 사라졌는데, 이전의 사상은 과학에 따라 경직된 것이고 과학 논리에 따라 문제를 생각했던 것이며 “좋은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좋은 직장에 못 다닌다.”라는 이런 사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이는 과학을 실증하는 것임을 발견했다. 자신의 층차에서 이치를 깨달았고 사부님께서 무엇을 배치하심에는 사람의 논리에 따라 배치하시는 것이 아니기에 과학의 틀이 없고 미래에 남겨주는 길로 각양각색이며 모두 법을 실증하는 길이지 과학을 실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비록 부동한 환경에서 수련하지만 모두 그 마음을 제거해야 하고 바로 우리가 처한 표면 환경이 다르고 걸어가는 길이 달라도 어떠한 환경에서든 마음 상태가 법의 요구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똑같다.
아들이 이직한 후 원래 그다지 수익이 없었던 그의 사업이 갑자기 좋아졌는데, 원래 역풍을 맞받아 나아가는 격이었다면, 지금은 갑자기 순풍에 돛단 듯하며 아울러천상 변화의 천시, 지리에서 세를 이끌었다. 나는 사부님의 배치 속에서 혹시 다음 일보를 위한 초석을 닦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했다. 사당의 경제는 쇠퇴했지만,사부님의 다음 일보 배치는 마침 인간 세상에서 조용히 펼쳐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문제를 생각하는 시야가 넓어졌는데, 단지 개인의 각도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수련의 각도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때 일체는 모두 그렇게 질서가 있고, 사부님께서는 한판의 아주 큰 바둑을 두시는데 홍대한 격식과 짜임새가 있다고 느꼈다.
나는 이전에 자신은 모두 자아의 각도에서 사부님의 배치를 대했고, 자신의 이 하나의 바둑알만 보았으며, 법 속에서 구하려고만 했고, 개인의 득실만 생각했던 것이 생각났다. 사실 제고한 후 다시 보니, 바로 자신이 이전에 구세력의 경제적 교란을 그저 제거하려고 했는데, 모두 자아의 작은 테두리 안에서 몸부림치는 것 같았고, 모두 자아 각도에 서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해득실을 따진 것이었다.
경제적 박해에서 그 당시 물질의 재부가 모자라면 안 되고, 많아져도 덕이 재부로 변하는 것이기에 역시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취중(取中)’인가를 생각했고 재부의 많지도 적지 않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했다. 크게 벌고 크게 망하는 것을 겪으면서 보기에는 당신의 것이지만 결국에는 또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자신은 일정한 층차에서 사부님의 법 속에서 말씀하신 “바로 개인의 절실한 이익상에서 그는 곧 이렇게 대하고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르는 것을 중시한다.”[1]를 체득했다. 오로지 수련만 하고 개인 이익은 자연스러움에 따르는 것이 바로 도 속에 있는 것이다.목적은 개인 득실에 놓을 수 없다.
우리는 마땅히 사부님 정법의 바둑판 속을 보아야 하고 자신이 바둑알로써 마땅히 일으켜야 할 작용을 일으켰는지를 보아야 한다. 역시 이런 것을 깨달은 후 환경은 변화가 발생했고, 또 바로 외부환경은 사실 우리를 제고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실질 수련의 예를 말하겠다. 인생 명리정의 분투를 생각하면 이렇게 복잡하고 이렇게 지치며 살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 나에게 속하는 것은 몇 개의 낡은 가구와 옷들이고 아무것도 없다. 지금 인생에서 집착하는 것을 모두 내려놓으면 홀가분함을 느끼고, 사는 목적은 오로지 세 가지 일을 행하기 위함이며, 물질상에서 이런 물품만 있는 것으로도 족하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내려놓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감탄하는 사이에 갑자기 허공에 뜨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자신에게 속하는 겨우 이 몇 가지 물품들이 공중으로 떠올랐고 내려오게 하려고 해도 마치 발붙일 곳이 없었다. 내려놓을 장소가 없었는데 바로 이렇게 사유가 공중에서 배회했다.
나는 사람 속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발을 못 붙여서 비로소 이 상태였다는 것은 의식했다. 그런 가구와 옷가지 등은 물론 뿌리가 아닌데 그런 것들이 여전히 공중에 뜨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당시 사람의 타성에 따라 되돌아가서 사람들 속에서의 발붙일 점을 찾으려고 했었다. 그 당시 이 관성적 사유가 반영되어 나온 것은 내 생각으로는 마땅히 집이었다. 그러나 경제적 박해로 집을 잃고 사상에서 사람들 속에서 발붙일 곳을 찾지 못했는데, 사상 속에서 뿌리가 뽑힌 듯했다. 또한 표면 물질 욕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것을 상징하기에 사상이 허공에 떠오른 것이다.
생각해보라, 사실 우리는 항상 아이가 좋은 학교에 다녀 장래에 사람들 속에서 발붙일 수 있다는 등등 이러한 생각들은 사람 여기에 묶여 있다. 비록 당신이 좋은 학교에 다녀도 사상 역시 사람 여기에 묶여 있으면 안 되는데, 생각은 세상 밖에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높은 곳에 서 있어야 생각이 세상밖에 있을 수 있고 속인의 기점에 서 있지 말아야 한다. 나는 사람들 속에 잠시 머무는 것이지만, 내 생각은 세상 밖에 있어야 하고 속인에서 뛰쳐나올 수 있어야 한다. 속인에서 뛰쳐나오려면 속인의 관념을 철저히 개변해야 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원문발표: 2020년 1월 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2/39845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