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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쟁투심을 찾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이틀 전, 다른 수련생이 수구하지 않고 마음을 닦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어 마음에 충격이 컸다. 일이 급작스러워 반응하지 못하고 며칠이 지난 후에야 반응이 왔다.

사건은 이러하다.

나는 수련체험을 적었는데 내놓지 못할 것 같아 A 수련생에게 봐 달라고 하며 정리를 부탁하니 해주겠다고 했다. 저녁에 C 수련생에게서 문자가 왔다. “낮에 A에게 가니 너의 문장이 다 좋은데 반복되는 곳이 있어 삭제하면 동의할지 모르겠다고 말해, 삭제할 것은 삭제하라고 네가 반대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

이 문자를 보고 나는 냉정하게 즉시 안으로 자신을 찾지 않고 도리어 반감을 가지며 밖으로 찾았다. 이어서 좋지 않은 생각이 올라왔다. 그때는 좋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C는 왜 이런가? 참견하기 좋아하고 수구하지 않는다. 알았으면 알았지 또 나에게 알려주고 오고 가며 말하다니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왜 A도 수구하지 않는가? 정리가 다 되지 않은 수련 소재를 왜 C에게 알려주는가? 수련생 사이에 이래도 믿을 수 있는가?’ 나는 A와 같은 인식이 있었다. 밍후이에서 발표하지 않는 문장은 미리 수련생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참견하기 좋아하고 수구하지 않으며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꼬리표를 붙인 후, 나는 A와 C에게 문자를 보냈다. 생각한 것처럼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빙빙 둘러서 그들이 수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자신의 좋지 못한 생각에 따라 그들을 생각하고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A에게서 문자가 왔는데 문장 이야기는 하지 않고 다른 말을 했다고 했다. 그의 문자를 보고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마음속에 또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나왔다. ‘한 사람은 말했다고 하고 한 사람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수련생이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과 삼자대면해서 누가 거짓말하는지 봐야겠다.’

길고 긴 문자를 적었다. 당당하게 말하고 체면을 세워주지 않고 말끝마다 가시가 박혀 있었다. 다 적고 보니 마음에 들었다. 보내려고 발송키를 누르려는데 갑자기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이 말을 마땅히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법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가늠해야 한다. 마땅히 말해야 하는 것은 법으로 가늠하여 연공인의 心性(씬씽)표준에 부합되면 문제가 없다.”[1] ‘그렇다,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법에 맞는가? 연공인의 심성 표준에 부합하는가? 항상 다른 사람을 고치려 하고, 내가 맞으면 남을 용서하지 않는 이것은 속인 마음이 아닌가? 바로 중공악당의 가악투(假惡鬥 거짓, 흉악, 투쟁) 그런 것이 아닌가? 이 발송키는 누를 수 없다. 왜 나에게 부딪히고 듣게 했을까? 이 일은 나도 당사자 중 한 명이다. 왜 잘못은 다 남의 것인가? 무슨 대질을 하겠다는 건가? 왜 이리 심각하게 받아들이는가? 이것은 쟁투심이 아닌가?’ 나는 놀라서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당신이 이 일이 당신 생각에 맞지 않음을 발견했을 때, 당신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대법에 부합되지 않는 것인지 당신도 마땅히 보아야 한다.”[2] 그렇다. 마땅히 ‘보아야 한다’는 법으로 가늠해보니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아 이렇게 수련생을 생각하고 말했다. 왜 이렇게 말했는가. 이십여 년간의 수련 중에서 여러 번 사악의 박해를 받고 형성된 이런 부정적인 사유, 염두, 관념은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작용을 일으킨다. 특히 방금 접촉한 수련생들과는 ‘경계’심, ‘관찰’하려는 마음, ‘자신을 보호’하는 마음, ‘신뢰하지 않는’ 마음 등이 있다. 일단 이런 사람 마음을 건드리면 즉시 이런 낡은 관념으로 형성된 사유방식으로 남의 잘못을 생각하며 밖으로 찾는 방식을 쓰기 시작하는데 안으로 찾을 수 있겠는가? 자신을 ‘손전등’으로 변화시켜 남만 비추고 자신은 비추지 않는다. 수련생에게 ‘모모’ 꼬리표를 붙이면 밖으로 찾는 이유가 생겨 밖으로 밀고 배척하며 수련생을 멀리하고 접촉하기 싫어한다. 자세히 생각해보고 자세히 보면 이런 좋지 못한 사상은 정말 나 자신이 아니다. 모두 악당 문화에서 형성된 것이다. 아, 진선인(眞·善·忍)의 표준과 얼마나 먼가. 그야말로 거꾸로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좋지 않은 염두가 나올 때가 바로 안으로 찾고 자신을 찾아 자신을 제고하는 기회가 아닌가. 그러나 관건적인 시각에 안으로 찾는 것을 잊었다. 안으로 찾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그런 좋지 않은 염두로 다른 수련생이 나쁘고 어떠어떠하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니 정말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무엇 때문에 내가 보게 됐는가, 나에게 어떤 마음이 있지 않은가, 나에게도 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수련은 당신이 진정으로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며, 자신을 돌이켜보아야 한다.”[3] “수련자는 영원히 자신을 닦는 것”[4]이다. “너무나 많고 너무나 강한 집착을 내려놓고 자신의 길을 잘 걸어가”[4]라.

나는 깨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을 심사하고 주시하며 안으로 찾았다. 그들이 수구하지 않고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여기는데 정말 수구하지 않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가. 아니다. 그들이 수구하지 않고 믿음직스러운 것이 아니며, 내가 이 몇 가지 방면에 문제가 있다. 대법 표준으로 자신을 잘 가늠하고 고쳐야 한다. 그들이 수구하지 않는다는 마음과 이 좋지 못한 염두, 수련생을 믿지 못하는 이 마음을 닦아내야 한다. 사부님은 이 환경, 이 일을 이용해 나를 이 방면에서 제고시키려는 것이다. 이런 더러운 마음을 제거하지 않으면 사악에게 이용당하는 대상이 되어, 수련생들과 간격이 생기는데 그러면 사악이 좋아한다. 탈 틈이 있게 된다.

자신의 이런 문제를 인식하니 이기적인 각도, 기점에서 ‘색안경’을 쓰고 수련생을 볼 때, 본 것은 모두 그들의 부족함, 수구하지 않음,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거꾸로 다시 자신을 보니 얼마나 마음이 좁고 이기적인가. 안으로 찾는 각도, 기점에서 수련생을 보니 그들의 좋은 점만 보였고 모두 좋고 정다웠다. 수련생들의 밝은 점이 나에게는 다 없는 것들이었다.

안으로 찾아 이기적이고, 마음이 좁으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쟁투하는 마음을 제거하니 수련생에 대한 관용, 포용, 존경, 탄복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다시 그들을 보니 무엇이든 다 마음에 들고 다 좋았다. 나는 온몸이 가벼워졌다. 정말 “관념이 바뀌고 부패된 물체 없애니 광명이 나타나네”[5]였다. 제자에게 각별한 마음을 써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린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여기에서 이번에 심성제고를 제공해준 수련생께도 감사드린다. “감사합니다. 당신들을 오해할 뻔했습니다. 저의 사과를 받아주세요. 미안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미국동부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오스트레일리아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 경문: ‘유럽법회에 보내는 축사’
[5]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신생(新生)’

 

원문발표: 2019년 12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2/19/39721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