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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찾으며 고층차의 법과 대조하다

글/ 미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다른 사람이나 자신이 관을 잘 넘지 못하는 것이 보일 때, 우리는 항상 안을 향해 찾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고 본다. 만약 안을 향해 찾아도 제고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원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안을 향해 잘 찾지 않고, 겉으로만 찾거나, 제대로 찾지 않은 데 있다. 최근 주변의 어떤 수련생이 병업관으로 세상 떠나는 것을 보고 나는 큰 불안을 느껴 하루빨리 이 교류를 하고 싶었다.

확실히 법만 있으면 우리의 제고를 지도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이상이 연공(煉功)해도 공이 자라지 않는 두 가지 원인이다. ‘고층차 중의 법을 모르고서는 수련할 수 없으며, 안으로 수련하지 않아 心性(씬씽)이 수련되지 않으면 공이 자라지 않는다.’ 바로 이 두 가지 원인이다.”[1] 우리가 관을 넘기지 못한다면 연공을 해도 공이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명명백백하게 말씀하신 이 두 가지 문제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왜 항상 안을 향해 찾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고층차 중의 법을 모르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까? 이유는 바로 우리가 법 공부를 하면서 이 고층차의 법을 배우지 못했고, 법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한층 높은 법이 우리에 대한 요구에 도달하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음을 인식했다. 예를 들어 한 속인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그는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서 원인을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련인이 만약 늘 그렇게 한다면 곧 자신을 속인으로 여기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제고를 촉진할 뿐, 영원히 자신을 제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을 향해 찾으려면 먼저 수련할 대상이 누구인지, 자신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말하기는 쉽지만, 속인의 사유 습관이 지극히 완고하기 때문에 무조건 자신을 찾는 것이 여전히 몹시 어려워 우리가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의 문제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안으로 찾는 습관을 만드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며, 이것이 수련의 법보(法寶)다.

그런데, 안을 향해 무엇을 찾을까? 자신의 사람 마음과 관념을 찾고, 진정한 나와 교란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모순(특히 큰 마난)을 만났을 때 안을 향해 찾는데, 한 번 찾고는 자신에게 모든 마음이 다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각종 사람 마음을 한 번 세는데, 자신이 몇십 가지 마음을 찾아냈다며, 무슨 질투심, 과시심, 원망심, 근심…… 등등, 무엇이든 다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어놓고 법 속에서 언급한, 안을 향해 찾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안을 향해 찾아 법리와 대조해 자신을 잘 수련하는 것이다.

우리 공법의 특징은 수련인, 바로 당신이 어떤 마음을 버려야 할 때 법 속에서 반영되어 나오고, 공(功) 중에서 반영되어 나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바로 당신이 부딪힌 구체적인 문제에 반영되어 나오므로 안을 향해 찾아 법에서 버릴 것을 요구하는 사람 마음을 즉시 찾아내야 하는데, 비록 때때로 그 마음을 멈출 수 없겠지만, 오히려 아주 명확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날 내가 포스터를 붙이러 가다가 길에서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미녀를 여러 차례 쳐다봤는데, 결국 포스터를 붙일 때 포스터가 단번에 내 손가락을 베여 즉시 피가 났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베였을 때는 피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즉시 그 문제를 알아챘다. 나는 곧 자신에게 말했다. “내가 이미 알았으니까 출혈은 필요 없어.” 결국 몇 분 후에 손가락을 다시 보니 어디에도 상처조차 보이지 않았다.

수련을 막 시작했을 때는 부딪힌 모순이 비교적 분명했으므로 자신의 문제가 대략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가 알고, 일부 사람 마음을 조금 버릴 수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사람 마음을 인식하자마자 그 관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아주 여러 해 동안 수련했다면 그것을 단지 대략 알아내고 실질적으로 수련해 버리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나의 일에서 수많은 사람 마음이 드러날 수 있는데, 그런 마음을 찾아낸 후에는 즉시 하나의 문제에 연관된다. 바로 나의 어디가 잘못됐는지를 알게 됐지만, 어떻게 해야만 옳은가 하는 것이다. 특히 한동안 수련한 후, 일부분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불확실해 꾸물거리며 가끔 일을 방치하고 시간을 끌면서 흐지부지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다시 올 가능성이 아주 크며, 천천히 난관이 누적되기 시작한다. 이 문제의 근원도 고층차의 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일하는 것을 중시하는 행위다. 사실 마음만 옳다면 당신이 어떻게 하든 모두 옳다. 왜냐하면, 모든 일이 당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면 더욱 근본적인 문제, 다시 말해서 어떻게 이 마음을 버릴 것인가이다. 왜냐하면, 이 마음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근본이며, 그래야만 우리에 관한 법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에게 지금 이 관이 없는 까닭은 우리가 이 마음을 똑똑히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인데, 일부 사람들이 스스로 이 마음을 알아냈다고 하지만, 버릴 방법이 없다. 나는 사실 바로 이 마음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 것이지, 인식하고도 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치 당신이 병에 걸린 사람에게 한 덩이, 한 덩이의 검은 기가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당신이 그 검은 덩어리를 봤다고 생각하고, 곧 당신이 알아챘다면 그런 검은 기를 차례로 버려야 한다. 사실 그 검은 기는 표면에 불과하며, 배후의 더욱더 깊은 공간에 웅크리고 있는 그 영체가 검은 기를 만들어 낸 것이 원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반드시 먼저 법에서 제고해야만 더욱 심층의 원인을 인식할 수 있고, 그 마음을 버릴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수련생은 자신에게 원한심이 있고, 아주 심하다고 말하면서도 오랫동안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수련생이 아주 심하게 다른 수련생을 해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녀와 교류하면서 그 원한심이 사실 단지 겉으로 나타난 것이며, 배후에서 왜 이런 마음이 나올 수 있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홀연히 깨달았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왜 그를 원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거야말로 더욱 중요한 것이다.

나의 분석을 그녀에게 말했다. “사실 당신이 그를 원망하는 건, 당신이 스스로 상해를 입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에요. 겉으로 보기엔 당신도 확실히 상해를 입었어요. 그래서 그 일이 당신에게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는 상해를 입은 것은 사실은 집착이 건드려진 거예요.”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들이 명(名)ㆍ이(利)ㆍ정(情)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될 때, 당신들은 비로소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2] 그러나 우리가 수련인이므로 이런 일이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해 주신 수련의 길이며, 바로 구세력이 강요한 교란이므로 모두 좋은 일로 여길 수 있고, 수련 경지를 제고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데, 어떻게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빠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결국은 여전히 신사신법(信師信法)의 문제이지,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얼마나 나쁜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고층차에 입각해 만약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그 수련생이 다시 당신을 이른바 불공평하게 대할 때 당신은 자연스럽게 원망하는 마음을 내지 않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당신이 그 마음의 근원을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더 깊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업력이 누구에게로 떨어지면 바로 그가 괴롭기 때문인데, 보증코 이러하다.”[1] 내가 깨달은 바로는, 사실 당신이 문을 들어서자마자 한 덩이 업력이 그에게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이 점을 깨달을 수 있다면, 당신은 또 당신의 배우자와 잘 지낼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신이 그래 자비와 연민을 일으킬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신은 또 당신 대신 감당한 사람에게 감사드려야 한다.

그래서 만약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면, 여전히 근원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의 한 가지 문제가 여러 마음, 여러 근원이 함께 뒤섞인 것이기 때문일 수 있고, 이전에 하나씩 버려야 했을 때 버리지 않았다면, 그것이 지금 한데로 뒤섞여 나타나는데, 곧 더욱 강한 결심을 내리고, 마음을 더욱 고요하게 하여 정중하게 법 공부를 잘해야 한다. 각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이 있는지는 다른 사람이 전혀 알 수 없고, 당신 자신이 가장 분명하므로 자신이 버릴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아무래도 당신이 이 문제를 훨씬 깊이 안다면서 형식적으로 법에서 말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진정하게 생각할 것은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라는 것이다. 이 믿음의 정도 자체가 바로 고험의 목적이며, 이는 속인 중의 지식이 아니다. 이는 사람의 가장 본원적이며, 그런 정도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상 세 가지 기점에서 볼 때, 진정으로 안을 향해 찾아야 하며, 모두 당신이 고층차의 법을 알아야만 전진해 나갈 수 있다. 내가 알기로는 안으로 찾는 것과 고층차의 법을 아는 것의 관계, 이 두 가지는 마치 하늘의 계단을 오르는 두 발과 같고, 두 발을 교대로 내디뎌야만 올라갈 수 있는데, 사실 아직 아주 확실치는 않고, 나는 사실 반드시 먼저 고층차의 법을 알아야만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연공해도 공이 자라지 않는 두 가지 이유에 대한 사부님의 말씀에 또 한 가지 뜻이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당신이 안으로 찾아도 제고될 수 없음을 발견했을 때, 다시 말해서 그 원인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면 마땅히 다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해도 오직 이 두 가지 원인이다.

고층차의 법을 배워야 하며, 반드시 착실하게 법 공부해야 한다. 한 수련생은 대법 책이 아주 익숙한데, 법리를 전혀 분간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나도 수년 전에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여러 차례 반복됐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은 그런 감각이 없었고, 내가 책을 진지하게만 보면 대단히 많은 법리가 보였으며, 아주 익숙하다는 느낌이 조금도 없이 늘 책이 아주 새로웠고, 아주 많은 부분이 낯설었으며, 조금은 수련 초기와 같은 감각을 느꼈다. 한번은 ‘전법륜(轉法輪)’의 앞쪽 겨우 네 페이지를 이틀 동안 읽었는데, 모두 대략 4~5시간 만에야 모두 읽었다. 매 구절에 법리가 내포되어 있었고, 이어서 더욱 큰 법리, 층층의 법리가 그야말로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법리는 우리의 수련을 지도하기 위한 것으로, 읽는 과정에서 수많은 의문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수련하는 과정에서 문제에 부딪히면 원래는 수많은 의문을 법리상에서 해결해야 하므로 책을 읽을 때 다음의 몇 줄만 읽어도 사부님께서 점화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수련 중에 부딪힌 문제는 모두 새로운 것이며, 그렇다면 우리가 배우는 법도 당연히 모두 새로운 것이고, 수련이 처음과 같은 느낌도 당연하다. 뒤로 읽어갈수록 전법륜에 쓰인 말씀이 ‘실제’적으로 변하며, 더욱 깊이 믿게 된다. 또 읽어나갈수록 스스로 법을 알 수 있고, 운용할 수 있는 법이 더욱더 많아지고, 말할 수 있는 도리가 더욱더 많아지며, 자신의 깨달음이 옳은지를 추리할 수 있는 부분이 더욱더 많아진다는 느낌이 든다. 법 공부를 하고 얻어낸 법과 표면적으로만 아는 법에는 여전히 차이가 있다. 얻어낸 법이야말로 우리의 것이며, 운용할 수 있어 공능을 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단지 알기만 하는 법은 여전히 사부님의 법이며, 당신의 것이 아니다.

나는 고층차의 법을 얻은 후의 구체적인 표현 한 가지는 이렇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원래는 아주 까다로웠던, 일의 좋고 나쁜 양면을 갈수록 아주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고, 그 일의 혼란한 일면을 다룰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아주 분명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이 분명히 바르다고 생각하는 말속에 존재하는 문제를 갈수록 분명하게 보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해서 고층차의 법도 안을 향해 찾는 것이며, 다시 말해서 당신이 고층차의 법을 얻었으면 틀림없이 문제에 부딪히는 즉시 자신의 안을 향해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고층차 법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의 인식은 안으로 찾는 것과 고층차의 법을 아는 것은 일체이고, 상보상성하는 것이며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문제에 부딪혔을 때는 이 두 가지 방면에 손을 대야 하며, 어느 한 방면만 단독으로 추구하면 우리에 대한 법의 요구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다.

개인의 체험이라 층차에 한계가 있으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수련생들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허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서 :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의 신경문 : ‘정진요지-진수’

 

원문발표: 2019년 11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19/11/12/39566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