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방법과 효과

‘기점을 바로잡음’을다시 논함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몇 개 문제에 관하여 줄곧 수련생들과 교류하고 싶었다. 그러나 작문을 두려워해 계속 미뤘다. 최근 법을 위해 책임지고 수련생을 위해 책임지자면 역시 써서 교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 쓰지 못할까 봐 다른 수련생에게 내 생각을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이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여러분과 교류하고 서로 수련을 바로잡고 원용하면 좋겠다.

여기에서 먼저 개인의 인식을 말해보려고 한다. 부족한 곳은 수련생이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1. 병업 가상에 관한 문제

아주 많은 수련생은 교류 중 박해를 만나면 사부님께서 ‘도와주셔서 연화(演化)’한 병업의 형식이고 사악이 불법으로 수감하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교류했다. 여기에서 사부님께서 ‘도와주셔서 연화’한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말하지 않겠다. 이 병업 형식의 표현만 봐도 이미 대법을 실증할 수 없다. 우리는 말끝마다 대법은 병을 없애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신기한 효과가 있고 수련한 후 병이 없고 온몸이 가벼워졌다고 하는데 왜 박해를 당하기만 하면 고혈압, 고혈당, 심장병이 다 생기는가? 이것은 대법을 실증하는 것인가? 많은 사람은 언제나 공식에 끼워 넣기만 좋아하고, 대법 수련은 반드시 마음을 닦아야 하고 마음을 닦는 것과 사명을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이라는 것을 잊었다.

만약 자기에게 누락이 있어 빈틈을 타게 했다 해도 병업의 형식으로 곤경에서 벗어나는 목적을 이뤄서는 안 된다. 이런 형식이 바로 공식이라고 생각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러면 소도 수련과 같지 않겠는가? 대법의 위덕을 체현하지 않았다!

이런 정황에 부딪혔을 때 우리가 이 방면의 인식이 똑똑한지 아닌지 분석해봐야 한다. 사부님께서 “진짜로 수련하는 사람은 병이 없다. 나의 법신이 모두 제거해 버렸다.”[1]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진짜로 신사신법 했는가? 설령 믿었다고 해도 에누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병업형식으로 집으로 돌아왔다는 수련생의 교류문장을 보고 무의식중에 사람을 따라 배우고 법을 배우지 않는 이런 형식이 맞다고 생각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우리도 이런 형식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법을 실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인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인가? 이런 형식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정당당한가? 위사위아의 마음이 올라올 때 법의 장엄함마저 돌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가?

수련은 무엇을 수련하는 것인가? 무엇을 성취하는 것인가? 잘 생각해봐야 하지 않는가? 당신이 정말로 태연자약하고 움직이지 않을 수 있고, 정말로 자아를 내려놓고 정말로 법을 첫 자리에 놓고 정말로 한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할 수 있어 중생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써 중생이 대법을 인정하고 대법을 공경해 구도될 수 있게 하더라도 자신의 생과 ’사(死)’를 고려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또한 ‘죽음(死)’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 ‘죽음(死)’에 대해 의식하고 승인해서는 안 된다! 즉 여기서 자신의 득실을 내려놓고 박해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움에 부딪히면 마음을 닦고 안으로 찾으며 상대방에게 자비를 베푸는 동시에 내심의 위엄으로 사악을 해체하고 중생이 대법에 죄를 짓지 않게 한다고 정념을 내보내야 한다. 또한, 정당한 행동을 하는 과정 중 위엄 속에 악의 요소가 있고 악으로 악을 다스리는 표현을 보이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마음에 자비가 있어야 하고 표면에도 선량함이 있어야 한다. 대법의 아름다움과 수승함을 드러내야만 진정으로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2.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한 마디

박해 기간에 수련생이 외치는 ‘파룬따파하오’ 한 마디로 사악을 해체시키고 구타를 당하지 않은 예도 있고 박해하는 경찰이 감동받아 눈물을 흘린 예도 있으며, 박해자가 이로부터 더는 사악해지지 않고 박해하기를 기피하며 심지어 남몰래 대법제자를 도와주는 예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파룬따파하오’를 외치고는 더 악독한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왜 똑같이 ‘파룬따파하오’를 외쳤는데 결과는 완전히 다를까?

비록 우리가 그 중의 인연관계를 모르고, 여러 가지 상황이 있을지 몰라도 반성하고 분석해봐야 한다. ‘파룬따파하오’를 외치는 기점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만약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 중생에게 복음을 알려준 것이라면 우리의 마음과 표면의 외침은 충분히 자비한가 하지 않은가? 만약 사악을 해체하기 위한 것이라면 자신이 박해를 면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중생이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가? 우리가 사악을 벌벌 떨게 하는 마음은 위엄을 버리지 않은 상황하에 투쟁이 없고 원망하는 마음이 없으며, 찾아내기 어려운 중생을 멸시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닌가? ‘당문화’식의 용맹이 아닌가? 다른 사람이 외치는 것을 따라 배우는 마음이 아닌가? 어떤 수련생은 생사를 내려놓는 확고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섞여 있거나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외친다면 사악을 철저히 해체하는 정도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똑같은 일, 똑같은 표현, 똑같은 ‘파룬따파하오’라도 그 배후의 실질과 내포는 다른 것이다. 표현된 경지가 다르다면 그 결과도 다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역시 일사일념으로 기점을 잘 장악해야 하는 문제다.

3. 선(善)은 원용한 것이다

선(善)에 대해 밍후이왕의 수련생들은 이미 아주 전면적으로 교류했고 인식도 아주 좋았다. 여기에서 보충하고 싶은 것은 사람에 대해서든 일에 대해서든 부딪힌 갈등을 처리할 때든 무엇이 진정한 선인지 똑똑히 분별해야 한다. 우리가 사람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 법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으로 문제를 보는가 아니면 우주 정법시기의 법리로 문제를 보고 있는가를. 이렇게 하려면 튼튼한 법공부 기초가 있어야 하고 진정으로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기점에서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법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법공부를 많이 하고 법리가 똑똑해야 정진하고 착실하게 수련할 수 있다. 만약 방해 중, 갈등 중, 박해 중 상대방이 위선적이든 폭력을 가하든 우리가 당시 법리가 똑똑하지 않고 사람의 관념에 빠져 깨닫지 못한다면 정법의 가지를 얻기 힘든 것이다.

나의 교훈이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똑똑히 분별하지 못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 줄 모른다면 우리의 행동이 대법에 죄를 지었는지 중생이 대법에 죄를 지었는지 이 점을 잘 장악하기만 해도 충분히 고비를 넘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여전히 마음의 자비와 표면의 상서로움에 주의해야 한다. 대법은 원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에 확고함만 있을 뿐, 있어야 할 선을 수련해내지 못했다면 아직 누락이 있는 것이고 사람을 구하는 효과가 에누리 된다. 그러므로 정념의 일면이 똑똑해야 하고 확고해야 하며 인성의 일면도 지혜롭고 원용해야하며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하면 안 된다. 우리가 ‘극단적이고’ 심지어 우리를 ‘정신병’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최대한 속인의 상태에 부합해야 하고 이지적이며 맑고 선량해야 하고 사람들을 오해하게 해 최대한으로 중생을 구하는 것에 영향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람의 일면을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 수련에는 크고 작은 일이 없다. 조그마한 누락일지라도 원만할 수 없고 대법을 실증하고 대법에 원용한다는 것은 더욱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이상은 다만 개인적인 인식이고 벽돌을 던져서 구슬을 끌어들이는 작용을 하려는 생각뿐이다. 부족한 곳은 자비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파룬따파의해-창춘(長春) 法輪大法(파룬따파) 보도원을 위한 설법’

 

원문발표: 2019년 10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0/11/394436.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