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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악단에서 나팔을 불면서 얻은 깨달음

글/ 토론토 대법제자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천국악단에 참가한 지 십몇 년이 되었습니다. 비바람 속에서 오늘날까지 오면서 잊지 못할 경험이 매우 많았습니다. 사부님의 가지(加持)하에 악단 단원들은 모두 퍼레이드 중에서 자신의 법기(法器)로 공연하고 대법의 아름다움을 세인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수련의 길을 성취했습니다. 여기에서 튜바를 부는 과정에서 사부님이 주신 가지와 자신의 자그마한 깨달음을 교류함으로써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려 합니다.

1. 사람의 관념을 타파하고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악단에는 튜바가(低音號) 없었기에 눈을 딱 감고 튜바라고도 하는 큰 나팔을 불었다. 운지법이 예전에 불던 트럼펫과 같았기에 연습 과정은 괜찮았다. 다만 힘이 더 많이 들었다. 악기의 무게와 부피 때문에 주눅이 좀 든 데다가 예전에 사용하던 악기보다 몇 치수나 크고 몇 배나 더 무거웠다. 등에 지고 있으면 온몸이 불편했다. 양손은 어디를 붙잡아야 평형이 잘 되는지 몰랐고 오른손으로 건반을 누르기도 좀 힘들어 움직임이 둔했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부담이 컸다. 어떤 퍼레이드의 기나긴 노선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행진할 때 큰 나팔이 시선을 가릴까 봐 걱정도 됐다. 도로 위에 구덩이가 있으면 빠질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그러자 사부님께서 수련생의 말로 나를 점화해 주셨다. “그것이 무겁다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무겁다는 생각이 없으면 무겁지 않습니다.”

그해 성 파트리치오 축제 행진에 참여한 기억이 난다. 나와 다른 한 수련생은 처음으로 튜바를 불면서 비교적 긴 노선을 걸었기에 속으로 좀 불안했다. 우리 둘은 퍼레이드 전에 포륜(抱輪)을 했다. ‘성후이쩡리(生慧增力), 룽신칭티(容心輕體)’[1]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당시의 마음 상태를 생각해보니 좀 우스웠다. 하지만 어쨌든 한 걸음을 내디뎠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속인 중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을 당신에게 모두 내려놓게 해야 한다. 어떠한 집착심이든 당신에게 있기만 하면, 각종 환경 중에서 그것을 닳아 없어지게 해야 한다. 당신에게 곤두박질치게 하고 그중에서 도(道)를 깨닫게 하는데, 바로 이렇게 수련해 온 것이다.”[2]

그 후 매번 퍼레이드에서 추위, 더위, 무거움, 햇빛, 통증 등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관념이 계속 올라와 정념과 겨루었다. 이런 마음속 교전은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재작년 캘거리 스탬피드 퍼레이드 때는 지난해보다 더웠다. 게다가 퍼레이드 노선이 길고 행진 속도가 빠른 데다가 전날 저녁잠을 잘 자지 못했다는 등 생각에 퍼레이드를 앞두고 압력을 느꼈다. 두려운 마음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도중에 생수를 나르는 수련생이 있었는데, 마치 ‘목마르다’, ‘덥다’라는 생각을 귀띔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한 모금도 감히 마시지 못했다. 시원한 물에 안일한 마음마저 올라와 끝까지 버티지 못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도로 옆에 관중이 매우 많았는데 나는 실력을 잘 발휘하지 못하고 좀 힘겹게 전 과정을 마쳤기에 속으로 후회도 좀 됐다.

지나고 난 후에 깨달았다. 나는 사부님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했다. 사람의 관념을 철저히 타파하지 못했기에 사람의 관념으로 추리해 나타난 ‘걱정’(즉 두려운 마음)에 따랐고 매우 피곤하다고 느꼈다. 예전에 중국 대법제자의 교류문장을 본 생각이 났다. 경찰이 대법제자를 강제로 전향시키려 할 때 반드시 우선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먼저 그를 아무도 없는 깜깜한 방에 가두고 10여 명의 흉악한 경찰이 충전이 잘 되어 파란 불빛이 번쩍거리는 전기봉을 휘두른다. 사악은 행동하기 전에 대법제자에게 이러한 것을 듣고 보게 한다. 그리고 결과는 깜깜한 방, 경찰과 전기봉 자체가 아니라 당시 사람의 판단과 추리에 이끌렸는지에 결정된다. 그 후 나는 더욱더 자신의 일사일념을 주시하고 습관 된 판단과 추리를 부정하는 법을 배웠다.

재작년에 노정이 비교적 긴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를 앞두고 무릎이 붓고 아파서 절뚝거리며 걸었다. 퍼레이드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왔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찌 됐든지 해야 해. 절뚝거려도 걸어야 해!’ 며칠 후 이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절뚝거린다면 어떻게 대법을 실증하겠는가? 활력 있게 행진해야 옳은 것이다. 다리가 아프면 꼭 절뚝거려야 한다고 누가 말했는가? 출발하기 전에 일부러 뜀박질했다. 한 번 뛸 때마다 그런 나쁜 생각을 밟아 죽였다. ‘파룬따파 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음악이 울리자 내 법기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특별히 우렁차게 매 한 수의 곡을 연주해냈다. 사부님의 가지 하에 활력이 넘치는 걸음으로 전 코스를 다 걸었다.

감당력이 커짐에 따라 오랫동안 보관실에 놓아둔 더욱 큰 수자폰에 눈길이 갔다. 우리 악단은 성립 초기에 사부님께서 몸소 4개의 수자폰과 6개 튜바를 포함해 모든 악기의 구매와 운반을 배치하셨다. 이미 수련생 두 명이 용감하게 수자폰을 불기 시작했다. 그들 둘은 늘 말한다. 나머지 2개도 꺼내와야 더욱 기세가 있다고. 이전에 보관실에 조용히 누워있는 큰 악기들을 보면 마음이 간간이 아프곤 했다. 그것들이 틀림없이 매우 슬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사부님께 선택받은 법기로 환생했지만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 발휘해야 할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얼마나 유감인가! 나는 수자폰을 짊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전에 수자폰을 짊어진 수련생이 대오의 맨 뒤에 서 있는 것을 보면 마치 천신(天神)이 속세에 내려온 것처럼 위풍당당했다. 이는 키 큰 남자 수련생만이 얻을 수 있는 보너스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런 수련생을 찾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한번 해 보기로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수자폰을 부는 다른 2명의 수련생의 키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과 나란히 서도 악단의 균형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근 한 달을 연습했지만, 여전히 그것을 짊어지고 행진하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일요일에 노선이 좀 짧은 부활절 퍼레이드를 선택했다. 목요일에 큰 팀의 법공부 운동장에서 수자폰을 메고 연습할 때 악단의 한 아주머니 수련생이 오시더니 격려를 해주셨다. “내가 봤을 때 자넨 돼. 해봐. 자넨 그것이 불고 싶은 거잖아? 그럼 불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나는 사부님께서 그녀의 말로 나를 격려해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토요일 퍼레이드는 얼마나 긴 노선인지도 모르고 수자폰을 불었다. 이때 노선이 길고 짧다는 생각은 이미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못했다. 다만 법기 하나가 많으면 기세도 그만큼 증가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앞의 큰 북과 호응하자 악단은 머리가 무겁고 후미가 가벼운 불균형에서 벗어났다. 지금 대부분 퍼레이드에서 4개의 수자폰이 대열 후미에 선다. 자신의 감당력도 서서히 커졌다. 최소한 그것의 겉으로 보이는 크기와 무게에 겁먹지 않았다. 나는 인간 세상의 무게와 부피가 그것의 진실한 표현이 아님을 깨달았다. 다른 공간에서는 아마도 전혀 다른 상황일지도 모른다.

사부님께서 ‘홍음-누가 과감히 속인의 마음을 버릴 수 있으랴’에서 ‘과감히(敢)’라는 글자를 사용하셨다. 올해 법회에서 사부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로 말하면, 이 한 부의 법에 따라 수련해야 한다. 사부는 일찍이 한 마디 말을 했는데, 나는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높게 수련하고 싶으면, 당신은 과감히 하기만 하면 된다!’”[3] 지금까지도 나는 그 내포의 1~2도 깨달을 수 없다. 다만 우선 감히 담당해야겠다는 일념이 있어야 법의 기적이 나타날 것이다. 설사 능력이 부족할지라도 사부님께서 보충해주신다. 마치 애초에 세상에 내려올 때처럼 우리는 인간 세상에서 훼손될 위험을 과감히 무릎 쓰고 사부님을 따라 정법 하려고 맹세했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에게 영광과 법력을 부여하셨다.

사부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수련의 이치는 사람의 이치와는 반대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편안하게 지내면 좋다고 여기지만, 수련인은 불편함이 제고에 좋은 일이라고 여기는바, 이는 반대 이치 중의 정리(正理)가 아닌가?”[4] 평소의 수련 중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수련의 바른 이치로 문제를 생각했다. 예를 들면 야외에서 연공 할 때 겨울에 수련생들이 양지쪽에 서 있기 좋아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늘에 섰다. 여름에 수련생들이 그늘을 선호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양지쪽에 섰다. 수련생들의 언행을 봐도 자신을 대조했다. 정말로 고생을 낙으로 여겼는가? 매번 홍콩 퍼레이드에서 수자폰을 짊어진 대원을 볼 때마다 자신과의 격차를 알게 된다.

2. 기꺼이 조연을 맡아 다른 사람을 부각시키다

예전에 나는 트럼펫을 불었다. 반주 악기이긴 하지만 으뜸음도 있었고 어떤 선율은 매우 듣기 좋았다. 튜바를 불 때는 거의 모두 반주여서 처음에는 정말 적응이 안 됐다. 악기 몸체가 크고 길기에 대단한 기력이 있어야만 진동으로 소리를 낼 수 있다. 때로 기가 모자라면 공음이다. 어떤 때 호흡이 부족하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원래 매우 듣기 좋은 퍼레이드 곡이 우리가 튜바를 불기만 하면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농담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곡을 한 단락 불면 무슨 곡인지 맞추는 사람에게 상을 준다고. 저음의 악보는 상대적으로 간단하기에 단독으로 연주할 때면 좀 따분하고 무미건조한 느낌이다. 그런데 음악 선생님마다 저음은 악단의 뿌리라고 하셨고, 그것이 없다면 곡이 흔들리고 중후한 밑바탕이 없어진다고 하셨다.

서서히 나도 단독으로 연주할 때 평범하던 음표가 합주에 들어가기만 하면 매우 아름답고 조화롭게 변한다는 것을 체험했다. 어떤 때는 자신도 감동한다. 특히 매번 퍼레이드 때 사부님께서 주신 가지를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2] 지금 수자폰 4개는 연주하는 사람이 있지만, 튜바 6개는 연주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는 가끔 농담한다. “우리 베이스 팀이 가장 부유해요. 사람마다 큰 법기가 2개씩이네요. 하나는 행진 때 쓰고 하나는 연습할 때 쓰고요.” 사부님은 우리 베이스 팀의 부족함을 아신다. 특히 내 힘이 작은 것을 아신다. 그래서 퍼레이드가 시작되기만 하면 내 법기는 예행연습 때보다 소리가 훨씬 크다. 그러면 나는 충격과 감동에 울고 싶어진다.

하지만 수련의 길은 정말 좁다. 매우 깊이 은폐된 일부 집착은 어떠한 상황이 되어야만 나타나는데 방종하기만 하면 바른 궤적에서 벗어난다. 큰 악기를 짊어진 후 수련생들은 늘 격려와 칭찬을 보내줬다. 듣는데 매우 기분이 좋았다. 특히 행진이 끝나고 매우 피곤할 때 수련생들의 인정과 칭찬은 계속 노력하는 격려가 됐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환희심, 과시심과 다른 사람을 깔보는 마음 등이 생겼다. 인식하고는 늘 경각심을 높였다. 이런 생각들은 어떤 때는 스쳐 지나가고 어떤 때는 어느 정념(正念) 밑에 은폐되어 발견하기 쉽지 않다. 당시에 그것을 붙잡아 바로 제거하지 않으면 그것을 방종하게 되는데 수련생들 사이의 간격을 조성한다. 예를 들면 수련생 또는 정체(整體)의 어떤 문제를 발견하고 비교적 용감하게 말한다. 문제를 지적하는 자체는 잘못은 아니지만, 수련생과 정체에 책임지는 선의에 자신의 집착을 집어넣는다면 수련생이 느낀 것은 전부 선의가 아닐 수 있다. 수련생의 반응은 거울처럼 자신의 문제를 비춘다. 한 번은 한 수련생이 내 방법이 타당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쟁투심을 갖고 변명했더니 수련생은 평소의 온화한 태도는 어디 가고 엄격하게 말했다. “당신의 생각과 방법은 점점 과격해져요. 다른 사람만 볼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좀 봐요.” 나는 정신이 번득 들었다. 내가 어떻게 그를 자극했기에 이렇게 평소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까! 진지하게 자신을 반성하고 내심 수련생에게 고마웠다.

나중에 깨달았다. 이번 대법 수련이 예전 어떠한 수련과도 다른 점은 바로 우리에게는 사부님께서 개창한 이 환경이 있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환경을 이탈하면 수련 성취할 수 없다. 당신이 느끼기에 이 환경이 느슨하든 엄격하든, 편안하든 괴롭든 무조건 안으로 찾는 것은 사부님께서 주신 법보(法寶: 법력이 있는 보물-역주)이다. 자신이 문제를 보지 못하면 사부님께서 반드시 수련생의 말로 당신을 점화해 주신다. 집착심이 클 때면 아프게 찔러야 당신은 깨달을 수 있다. 특히 상대방의 태도가 좋지 않을 때 한 말을 중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때 그는 더 숨기지 않고 직접 말하는데 그가 당신에게서 느끼는 진실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우연한 것은 없다. 분명히 자신에게 잘 수련해야 할 곳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도 중시해야 한다. 한 수련생이 칼과 숫돌의 관계에 비유했는데 매우 적절하다. 이 칼은 바로 이 숫돌에 갈아야 예리해진다. 이 사람은 역사상 자신과 은혜와 원한이 있었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만약 있다면 이는 틀림없이 나의 누락이다. 나와 수련생 사이에 제거해야 할 마음이 없을 때는 그에게 매우 많은 문제점이 있어도 그는 여전히 매우 사랑스럽다. 마음이 올라올 때는 같은 수련생인데 문제점을 가득 지적해낸다. 그와 말을 많이 하기도 싫다. 이때면 나는 상대방의 장점을 생각하라고 자신에게 강요하고 그가 눈에 거슬린다는 생각을 눌러 버린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심 수련생이 사랑스럽고 존경스럽다고 느낄 때면 이 고비를 넘긴 것이다.

한번은 수련생이 말했다. 자네 이건 저조(低調: 베이스) 악기야. 당시 ‘저조’ 두 글자가 특히 두드러졌다. 저조! 나는 얼마나 ‘고조(高調: 감정, 사상이 많이 높아진 상태)’적인가. 여러 가지 말과 생각을 발표하기 좋아하고, 어떤 때는 수구(修口)하지 않고, 어떤 때는 과격한데 이는 나에게 좀 ‘저조’하다고 점화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악기를 보니 그것의 표현은 그렇듯 사심이 없다. 한 번도 주역이 아니지만, 묵묵히 보충하고 협력하며 늘 맨 뒤에 서서 영원히 다른 사람을 받쳐 주고 정체에 원용한다. 이것이 바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수련해내라는 경지가 아닌가? 나는 사부님께서 무엇 때문에 베이스 악기를 부는 기회를 주셨는지 알게 됐다. 자신이 어떻게 대단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속에서 제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깨달았다. 수련생들이 함께 조사정법(助師正法)하고 중생을 구하는 것은 마치 악단의 악기들이 협력하는 것과 같다. 연주가들은 비교적 높은 연주 기교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묵묵히 협력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오로지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응어리가 없으며 타인을 포용해야 조화롭고 아름다운 곡을 연주해낼 수 있고 대법의 위력을 체현해낼 수 있다.

마지막에 사부님의 한 단락 법을 인용해 수련생들과 격려하려 한다. “천지개벽에도 우주 정법의 홍대한 천상(天象)이 없었고, 천지개벽에도 대법제자는 있어 본 적이 없다. 사부가 이 휘황(輝煌)을 개창했는데, 당신들을 이런 역사적인 시각으로 이끌어 주었다. 당신들 자신을 잘 수련하여,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 당신들 자신을 한껏 펼쳐 보이고, 더욱 잘하라!”[3]

이치에 맞지 않는 곳은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서: ‘대원만법-2. 동작도해’
[2] 리훙쯔 사부님 저서: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19년 뉴욕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서: ‘2005년 샌프란시스코 법회 설법’

(2019년 캐나다 법회 교류원고)

 

원문발표: 2019년 7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해외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7/24/3905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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