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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눈에 비친 다른 사람

글/ 무기명

[밍후이왕] 유대인의 속담 중에 “인간은 생각하고 하나님은 웃으신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저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간이 자신의 미약함과 스스로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왜 “인간은 생각하고 하나님은 웃으신다”고 하는가? 인간이 생각하는 기점은 가장 낮은 수준의 지식으로부터 비롯되고, 사람 마음의 집착으로 집약된 지식 면에서 얻어진 결론이기 때문이다. 만약 낮은 수준의 지식 자체가 모두 잘못되었다면 생각하는 것과 목적도 위사위아(爲私爲我)이고, 사욕을 채우기 위해 한 일과 생각해 낸 결과는 필연적으로 진리를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상계 생명의 눈에는 인간의 생각이 가소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 기점으로 사람들과 교제하고, 특히 자기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추측하면 그로 인해 많은 갈등과 오해가 일어난다. 이때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찾아내지 못한다면 자기 견해를 고집하면서 냉정해지지 못한다. 인간의 본성에 있는 악의 면은 에너지를 얻어 강화되기 때문에 이성을 잃게 되고, 정서에 이끌리면서 논쟁이나 더 극단적인 일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경우에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게 된다.

수련자에 대해 말하면 이런 상황이 가끔 일어난다. 사람 마음이 있기만 하면 논쟁을 피할 수 없는데 만약 오랫동안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하면 적어도 이 층차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 것으로 문제가 된다.

그럼 우리 눈에 비친 다른 사람의 실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사람 중에서 오랫동안 형성해 온 관념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가늠해서 비춰보았을 때 반영되어 나온 것일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바로 거울 속의 우리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은 사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원래 모습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련 중 교류 중에서 갈등이 발생하거나 제삼자가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런 마음이 있어 반영되어 나온 현상이기 때문에 모두 자신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문제를 보았을 때 적어도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사부님께서 일부러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상대방에게 말하고 일깨워 주었을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조금 보여줘서 우리가 자신의 문제를 안으로 찾도록 하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를 보고 상대방에게 말하고 싶을 때 다만 선의적인 어투로 일깨워 주어야 하는데, 상대방은 선한 마음을 느끼면 보통 모두 받아들인다.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상대방의 심성 문제이므로 강요해서는 안 되고, 고치고 안 고치고는 그의 일이다.

사실 대부분은 모두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고, 일부러 다른 사람이 표현하는 문제를 우리가 보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수련은 자신을 닦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로 수련 중의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고,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수련 중의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심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사람 마음이 올라오면 특히 잘 닦아내지 못한 마성이 에너지에 의해 강화된 후 논쟁을 할 때 속인보다 더 기세등등한데 이런 것은 매우 불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비친 다른 사람의 문제는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를 겨냥해서 온 것이고, 우리의 수련을 위해 온 것이다. 이렇게 보면, 수련 중에서 잘난 체하며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우리 수련자는 법리에 따라서 문제를 고려해야 하는데, 그 기점은 모두 대법제자가 해야 할 세 가지 일을 둘러싸고 해야 한다. 그래야만 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교류 중에서 상대방의 인식을 존중해야 하고, 법리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으로 누가 옳고 그른가를 말하지 말아야 한다. 경지와 층차의 차이만 있어 이로 인해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면서 팽팽히 맞서거나 서로를 인정하지 않을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속인들이 억지 주장을 내세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수련인 사이의 교류는 신처럼 신성함과 순결함에 이르지 못하지만, 반드시 공손함과 겸손함으로 넘쳐야 한다. 수련자는 인간과 신(神) 사이에 있는 상태이므로 사람 상태의 표현을 피할 수 없지만 결국 모두 신을 향해 가야 한다.

 

원문발표: 2019년 10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0/10/39440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