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베이 대법제자
[밍후이왕] 정법수련은 결속하는 날짜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 수련인이 수련 성과를 발표하는 시각으로서, 수련인의 거취를 결정한다. 사부님 역시 수차례 대법제자가 원만할 때 장관을 이루는 장면을 묘사하신 적이 있으시다.
그런데, 마침 그 한 시각의 중요함과 휘황함 때문에 오히려 수련인의 최대 집착으로 되기 쉽다. 초기에 우리는 모두 사람 마음으로 원만을 상상하고 추구했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20년간, 오늘날까지 걸어올 수 있는 수련생들은 모두 마음을 고요히 하고 생각해보라. 우리는 몇 번이나 원만에 대한 가상과 희망이 있었고, 또 몇 번이나 가상과 희망이 깨졌는가? 어떤 이는 사부님의 경문, ‘홍음’ 속에서 원만과 관련된 시구를 찾아, 봄부터 가을까지 기대했고, 어떤 이는 고대로부터 남겨진 예언 속에서 답안을 찾아 2012년부터 2019년까지 기대했다. 또 어떤 이는 모모가 중공을 해체하고 파룬궁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등등을 해주기를 바라며 줄곧 설레어했다. 사람의 생각으로 마음속의 몽상을 쫓으면서도 우리는 사부님의 부탁을 마음속에 두지 않았다. “집착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련해야만 비로소 원만할 수 있다!”[1]
비록 이 시각이 매우 중요하긴 하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이 시각에 있지 않다. 대학입시를 치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험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마치 수련이 결속하는 그날과도 같다. 그러나 이 결과는 결과를 공표하는 이 하루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것은 평소에 조금씩 사람 마음 집착을 제거하는 중에 한 걸음 한 걸음 제고해 올라온 것이다. 어느 한 관을 넘지 못하고, 어느 사람 마음을 제거해버리지 못하고, 그 속인의 관념이 전변되지 않으면 층차를 제고하지 못하며, 더 높은 그 한 층차의 단계로 올라가지 못하는데, 또 어찌 원만을 말할 수 있겠는가?
수련의 길 위에서 사람마다 자신의 원만으로 통하는 길은 다 다르지만, 사람마다 이 길 위에서 경험한 고초, 순탄치 못함, 격류, 험탄 등 각종 마난은 모두 우리 각자의 사람 마음을 겨냥해 사부님께서 설치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사람 마음으로서, 어느 한 알의 사람 마음이 반영되어 나오면 곧 그것을 잡아채 소멸시켜버려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원만’을 마음에 두어 거대한 집착, 거대한 부담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사실 오로지 원만하려고 수련하는 것 역시 이기적인 것인데, 수련은 곧 이기, 자기 이익을 포기하는 과정이며, 최후에는 가장 큰 사심인 ‘원만에 대한 집착’까지 포기해야 비로소 무사무사(無私無我)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만의 모든 내포는 평소에 자아를 버리고 승화시켜 매 한 층 표준에 도달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여래가 말하는 공(空)은, 실은 속인의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남은 마음 하나 없음이 공(空)의 참뜻이다.”[2]라고 말씀하셨다. 누락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고 마음속이 공명무욕(空明無欲)하며 어떠한 집착도 없어야 자연히 ‘원만, 결속’ 등등 개념이 마음속에서 정력을 쓰게 하지 않을 것이다.
수련의 진도는 오직 사부님만이 쥐고 계시는 것이므로, 구우주의 신이든 수련 중에 공능이 나온 사람이든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은 오직 세 가지 일로서, 수련이 결속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곧 순서대로 착실히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해야 한다. 설령 결속하는 그날이 왔다 해도 우리는 역시 무슨 격동할 것이 없는데, 사부님께서 한 가지 예를 들어 우리에게 알려주신 적이 있다. ‘기쁨’과 ‘두려움’ 모두 수련인으로 하여금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게 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조용히 사부님의 선택을 기다려야 한다. 이루고 못 이루고, 어느 층차에 도달할 것인가는 모두 자신이 정진 혹은 정진하지 않은 결과로서 아무리 조급해하여도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속되기 전에 우리는 정말로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집착하는 꿈속에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자.
사부님께서 ‘정진요지’ 중 한 경문에서 사부님과 신의 대화를 기술하셨는데, 제목은 ‘시간과의 대화(和時間的對話)’이다. 이 역시 우리에게 시간은 곧 신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시간이 흐르는 과정에 따라 말하면, 우리 일반적으로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는데, 그럼 우리는 마땅히 어느 시간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마땅히 현재다. 왜냐하면 이미 지나간 일과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마음에 두는 것은 곧 집착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시간 계산 방법인 ‘시’, ‘분’, ‘초’에 따라 말하면, 우리는 마땅히 ‘초’와 함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 일은 바로 1초 1초의 변화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련인이 과거의 일로 번뇌할 때,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일로 애태울 때, 그럼 그는 곧 지금 당장의 그 1초 1초 동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곧 황폐한 시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초’와 함께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비로소 신과 함께 있는 것이고, 사부님과 함께인 것이며, 우리는 비로소 사부님께서 우리의 곁에 계심을 느낄 수 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나는 또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역시 남을 위하고 후세 사람을 위하는 데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대법(大法)의 영세불변(永世不變)을 위해 고려해야 한다!”[3]라고 알려주셨다.
장기간 우리 많은 수련생이 이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사부님께서 거듭 결속의 시간을 연장하신 것은 바로 구도 받을 수 있는 중생, 승화해 올라올 수 있는 제자를 기다리고 싶으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중생을 구하려 하신다. 우리가 결속을 기대하는 것은 사부님의 안배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생각지 못한 것은 아닐까? 심지어 방해 작용까지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마음을 조용히 하고 최후의 이 길을 잘 걸으며, 사부님의 정법 진도를 바짝 쫓아 함께 사악한 중공을 해체하고 대법이 만고에 걸쳐 칭송받는 휘황을 펼쳐보이자.
개인의 깨달음이므로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다면 수련생들이 바로 잡아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수련은 정치가 아니다(修煉不是政治)’
[2]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무엇이 공인가(何爲空)’
[3]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불성무루(佛性無漏)’
원문발표: 2019년 9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9/24/39367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