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신사신법(信師信法)

글/ 캐나다 대법제자

[밍후이왕]

존경하신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느덧 대법 수련에 들어선 지 8년이 됐고 수련에 대한 이해도 시간에 따라 달라졌다. 최근에 일부 관을 넘은 과정 중에서 이전에 법리에 대해 이해가 모호했던 부분이 천천히 혹은 갑자기 선명하게 바뀌었다. 일부는 나 스스로 비교적 깊은 집착과 마음의 매듭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 풀리게 되어 또렷이 알게 됐는데 그러한 한순간의 깨달음은 사부님께서 하사해 주신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예를 들겠다.

1. 선을 닦다

수련생의 교류문장을 보면 늘 한 가지 말이 나오는데 ‘남을 깔보는 마음’이다. 그런데 왜 남을 깔보게 될까? 이전에 늘 나는 남의 어떤 행위를 깔보거나, 못 본 척하고 겉으로 이성적으로 문제를 ‘양 방면’으로 보는 것 같았지만 사실상 자신의 수련에 마이너스가 됐다.

예를 들어, 남의 어떤 행위를 보면 눈에 거슬리고 염두가 올라온다. ‘이 사람은 왜 이러지?’ 그다음 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은 철이 없으니 그와 견식을 같이 하지 말고 자신이나 닦자.’라며 조용히 피했다. 이전에는 이것이 수련이라고 여겼지만 최근 비로소 알게 됐는데 이는 모호한 표현으로 자신이 본래 선심(善心)을 닦아야 할 기회를 덮어 감춘 것이었다. 선(善), 그것은 상상해낸 것이 아니고 수련해내는 것이며, 남들과 함께하면서 자신이 표현해낸 상태, 평화로운 어투, 부드러운 자태, 상대방을 위해 생각하는 성실함, 자아를 내려놓는 깨우침 등으로, 모두 남들과 함께하면서 실증하거나 닦아내는 것이다.

좋지 못한 행위나 법에 부합되지 않는 행위를 보거나, 속인 속에서 나쁜 영향을 끼치는 행위를 보고도 못 본 척하면서 자신을 닦지 않았다. 만약 진짜로 보이지 않았다면 나의 내심에 어찌 이런 행위에 대한 평가가 있었겠는가? 이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 아닌가? 이는 자신을 닦는다는 구실로 자아를 보호하고 이기적이고 교활한 물질을 키우는 것이 아닌가? 몇 해 동안의 수련을 거쳐 마침내 겸손하게 자신을 일깨울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공간장 내에서 수련해 제거해야 할 물질들의 반영이라는 것을.

그러나 지금 번뇌가 또 왔다. 나는 자신에게 스쳐 지나가는 불쾌함을 느꼈는데, 어떤 집착 때문에 그런 좋지 않은 것이 숨겨져 있고 나를 불쾌하게 하는지 찾지 못했다. 다른 수련생과 교류하니 수련생은 나에게 사고의 폭을 넓히고 타인에 대한 관념을 내려놓고 거들떠보지 말라 등을 말해줬다. 이런 것을 나는 모두 생각해봤지만 모두 똑똑히 와닿지 않았다.

한 수련생은 나에게 선심(善心)이 모자란다고 지적했다. 나는 눈이 번쩍 뜨이며 인정했다.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지 말고, 마음과 생각 및 행위와 표현에서 실제로 선을 닦아야 했다. 자신의 선심을 닦아야 할 뿐만 아니라 또 남을 도와줘야 하는 데 얼마나 좋은가! 때론 나는 보기에 온화해 보이는 시어머니나 어머니의 호의를 선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즉시 사존의 경문 ‘정진요지’ ‘선을 알기 쉽게 해설’을 다시 배웠다. “대법(大法)은 원용(圓容)한 것으로, 眞(쩐)ㆍ善(싼)ㆍ忍(런) 세 글자를 갈라놓아도 마찬가지로 眞(쩐)ㆍ善(싼)ㆍ忍(런)의 특성을 완벽히 갖추고 있다. 왜냐하면, 물질은 미시적인 물질로 구성됐으며 미시적 물질은 또 더욱 미시적인 물질로 구성되어 줄곧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진(眞) 역시 眞(쩐)ㆍ善(싼)ㆍ忍(런)으로 구성됐고, 선(善) 역시 眞(쩐)ㆍ善(싼)ㆍ忍(런)으로 구성됐으며, 인(忍)도 마찬가지로 眞(쩐)ㆍ善(싼)ㆍ忍(런)으로 구성된 것이다.”[1] 진정한 선이 없으면 진선(眞善)이 아니다.

이때 사존께서 말씀하신 법이 생각났다. “우리 法輪大法(파룬따파), 이 한 법문은 우주의 최고 표준-真(쩐)ㆍ善(싼)ㆍ忍(런)을 동시에 수련하므로, 우리가 연마(煉)하는 공(功)은 대단히 크다.”[2] 나의 내심은 그 순간에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홍대함을 느꼈고 조화로운 기묘함을 접한 것 같았다. ‘真(쩐)ㆍ善(싼)ㆍ忍(런)을 동시에 수련하므로’[2] 이 몇 글자는 마치 내 신체의 매 세포를 밝게 비췄고 또 동시에 나와 연대되어 있고 연분이 있는 모든 생명의 매 세포를 밝게 비췄다. 나는 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되기를 진정으로 바랐고 이렇게 하면 나는 모든 생명을 더욱 선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존께서 하사하신 것이고 자신이 닦아낸 것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착실하게 닦아내야 비로소 자신의 것이다.

2. “主意識(주이스)가 강해야 한다”[2]를 수련하다

대법제자가 해야 할 세 가지 일은 가장 명확하다. 가끔 뉴스를 보면 일종의 느낌이 있는데 정법 노정은 인간 세상 형세에 가져다준 변화를 ‘날마다 색다르게’ 묘사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때가 됐고 사람은 깨어나고 있다. 나는 서명을 받는 과정에서 에피소드가 있는데 아주 인상이 깊었다.

한 사람은 나에게서 왜 서명을 받는지 진지하게 들었다. 파룬따파를 말할 때 그는 갑자기 내 말을 끊으면서, “당신이 공산주의를 사악하다고 말하기만 하면 나는 반드시 서명할 것”이라고 했다. 일부 사람은 나에게 그들은 공산주의 국가에 반대하기에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반드시 서명하겠다고 했다. 또 늘 이런 격려를 했는데 당신들은 옳은 일을 하고 있으니 굳게 해내야 한다고 했다. 세상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공산사령(共産邪靈)이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또 일부 파룬궁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진상을 들은 후 파룬따파를 위해 어떻게 기부할 수 있는지 진심으로 물었다.

군중 속을 걸어 다니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진상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또 그들의 피드백을 들으면 세상 사람들이 깨닫고 있으며, 세상 사람들이 법을 위해 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이 장면은 내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주었다. 왜냐하면, 불성과 인성의 선함이 표출된 것이 나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의상, 외관, 문화, 언어의 차이는 모두 매우 옅어졌고 대법과 인연을 맺은 기쁨은 그들 공동 언어가 됐다. 나는 사람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린다. 어떠한 의도적인 표현 없이 그들은 이미 나에게 생명 깊은 곳의 아름다운 것을 보여줬고, 나의 큰 집착을 제거하도록 도와줬다. 그 큰 집착은 바로 생명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그와 관련한 수련 자체에 대한 곤혹이었다.

내가 법을 얻은 표현형식은 사부님의 법에 감동한 것이고 ‘전법륜’의 한 단락 법을 나는 독실하게 믿었는데 이는 신께서 쓰신 책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은 그렇게 큰 자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대법 수련으로 들어왔다. 나는 내가 법이 선택한 수련인임을 깊이 믿었다.

그러나 생명 존재 자체에 대한 곤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생명이 온 곳과 가는 곳을 사부님의 법에서 아주 명확히 말씀하셨고, 갖가지 원시 생명의 탄생을 사부님께서 말씀해주셨으며 똑똑히 말씀하셨지만 내 마음의 매듭은 그곳에 있었고 아울러 감히 묻지 못했다.

‘미국 동부 법회 설법’에서 한 제자가 여쭤보았다. “우주 중에서 왜 생명이 생기게 됩니까?”[3] 사존께서 답해주셨다. “마치 한 미생물이 그것의 사유방식으로 사람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사유로는 영원토록 신(神)의 존재와 사유방식을 명백히 생각할 방법이 없다. 사람은 우주에 대하여 아직도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도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모르는데, 어찌 그 우주 중의 일을 물을 수 있는가? 이 말을 묻는 것은 ‘왜 우주가 있는가?’를 묻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것이 왜 우주가 있고 왜 생명이 있는지 상관하지 말자. 왜냐하면, 이것은 당신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당신이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우주를 만들었는데, 생명이 없고 아무것도 없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사람의 말로 하면 바로 주[主, 만왕지왕(萬王之王)] 혹은 주불도신일체지존(主佛道神一體之尊)이라고 부르는 그가 이렇게 원한 것이다.”[3] 나는 이 곤혹스러움이 잘못된 것이며 나 자신이 아니지만, 돌파가 어려웠던 것은, 여러 해 동안 내 공간장에서 이것이 계속 맴돌며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았다.

어느 날 이런 문제들이 또 올라왔고 날 아주 괴롭게 했다. 밖으로 나가 걸었고 꽃은 마침 잘 피고 있었고 나무도 활기찬 새로운 초록색 잎이 돋아 있었다. 길을 걸으면서 보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에 사부님께서 넣어주신 것처럼 두 개의 선명한 글자 ‘생명(生命)’이 나타났다. 나는 마음속으로 부끄러웠고 묵묵히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부님께서 명확히 말씀해주셨다. “무엇이 수련인가? 사실 그것의 진정한 함의를 진정하게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수련이란, 바로 생명을 성취하는 것이다.”[4] 나는 그 당시 이를 사부님께서 알려주셨다고 생각했다. 비록 이렇다고 할지라도 내 상태는 여전히 좋아졌다가 나빠졌다 했고 나는 이렇게 나아가면 끝장이며 구세력의 칼에 찔려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마침내 어느 날 명확한 염두가 나왔다. 이런 문제와 생각은 더는 있어서는 안 되고 나는 이런 문제와 생각이 나의 것이 아니라 너희 것들이라는 것을 알고, 너희들은 이런 타락한 관념으로 나를 교란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선해(善解)될 기회가 있다. 너희들이 만약 다시 온다면 나는 너희들을 마(魔)로 여기어 모조리 해체할 것이고 나의 공은 시시각각 모두 이렇게 할 것이고 정념의 위력은 강대한 것이다. 이후 이른바 문제, 부정적인 물질, 왠지 모를 슬픔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고, 그 후로는 아주 적게 나왔다. 더 나아가 완전히 사라졌고 법에 대한 바른 믿음의 본성이 주도하게 됐다.

조금 전에 말했던 때가 됐다는 이 염두가 나온 것도 오랜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나오게 된 것으로,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인상 깊은 일이 있는데 시간 순서에 따라 이러했다.

(1) 갓 법을 얻은 지 얼마 안 되어 가부좌했는데 조용해지지 않았고 각종 염두가 머릿속에서 들끓었으며 무척 심했다. 나는 또 그것들을 따라서 생각할 때 하늘에서 갑자기 사부님의 지극히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이스(主意識)가 강해야 한다!” 나는 온몸이 한번 진동했고 감히 더 생각하지 않았고 즉시 그런 두서없는 허튼 생각을 멈췄다. 이것이 한 가지 일이다.

(2) 몇 년 후, 눈에 보이는 것, 접하는 사람과 일 때문에 마음이 괴롭고, 권태로우며, 소극적이고, 혐오스러운 것들로 점점 무거워졌다. 그 시기에 만약 자신에게 ‘사부님만 계시고 법만 있다’라고 규정한 지침이 아니었다면 지나오기가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사부님께서 나를 도와주셨고 한 수련생과 만나 교류하고 자신의 수련 체험을 나눌 수 있도록 배치해 주셨다. 나는 감명받아 그 후 마음을 조용히 하고 발정념해 자신의 공간장을 청리했고 짧은 15분이 채 안 되어 한 무더기 검은색 물질이 나의 모공 속에서 청리되어 나와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장면은 그렇게 또렷하고 눈에 선했다. 발정념이 끝난 후 온몸이 홀가분해졌고, 나는 또 한 번 명명백백하게 자신을 분별하고 외래의 교란을 인지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3) 그러나 또 일종 강대한 업력이 있었는데 사상업이었다. 이것은 아주 사람을 잘 속였다. 나 자신도 경험한 적이 있는데 스스로 생각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사상에 이끌려 헷갈리거나 무질서한 상태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루는 나는 사상업을 집중적으로 제거하기로 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사부님의 법을 외우면 된다.

나는 그날이 목요일로 기억되는데 나는 틈만 나면 법을 외웠고 거의 끊임없이 ‘주이스가 강해야 한다’ 그 단락 법을 외웠고 아울러 발정념을 강화해 사상업을 제거했다. 금요일 단체 법공부 때까지 지속했고 나는 계속 이렇게 행했다.

그날 단체 법공부에 나는 일찍이 갔고 그곳에 앉아서 발정념으로 사상업을 제거했다. 이때 두 아주머니 수련생이 내 양옆 자리에 앉았고 그들이 가져온 물품을 정리했다. 비닐봉지 소리와 그녀들의 대화 소리는 아주 컸고 왼쪽 오른쪽에서 나를 중간에 두고 있었지만, 그때 나는 발정념을 하다가 갑자기 입정되어 주변의 잡음에서 격리됐다. 나는 내가 맞게 행했다는 것을 알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계속 법을 외웠고 저녁에 잠자기 전에도 침대에 누워 계속 법을 외웠다.

이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 가지 일이 발생했다. 그때 깊은 밤에 조용했고 나는 머릿속에서 한번 또 한 번 ‘주이스가 강해야 한다’ 이 단락 법을 외웠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은 가히 아주 강한 주관사상[主意識(주이스)가 강함]으로 그것을 배제(排除)할 수 있으며 그것을 반대할 수 있다.”[2] 이때 내 머릿속에서 무척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된 거지!’ 나는 당시 깜짝 놀랐고 그 목소리는 내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여자 목소리가 아니라 남자 목소리였다. 그러나 또렷하게 내 머릿속에서 나왔고 아울러 그 목소리에는 늙고 두렵고 방법이 없지만, 또 포기하지 못한 교활함도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렸고 ‘아, 사상업 네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구나. 나는 너를 소멸하겠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계속 법을 외웠고 잠이 들 때까지 외웠다. 그것은 내가 유일하게 똑똑히 사상업을 한 개 생명체로 접해본 것이고 나의 공간장에서 내 모습으로 나타나 나를 통제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생각이 날 때마다 나는 몸서리를 쳤다. 사람의 육신은 너무나 약했고 그렇게 많은 좋지 못한 것들이 교란하고 있었으며, 일부는 심지어 나도 모르게 잠재되어 있다. 주이스가 강하지 못하면 진짜로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그 후로 나는 우선 언어에서 시작해 자신을 통제하려 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나는 주의하며 무슨 ‘나의 집착심’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집착심은 외래의 타락한 물질이고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무슨 ‘병업관’이란 말을 말하지 않는데 무엇을 ‘병업관’이라고 하는가? 수련인은 병이 없는데 어디에서 온 ‘병업관’인가? 모두 심성관이다. 내가 또 되도록 ‘노년 수련생’, ‘청년 수련생’ 이런 말을 하지 않자 나는 잇달아 오는 사람의 염두를 보게 됐는데, 만약 이때 내가 가서 억지로 변명하거나 대항하면 또 구세력의 수작에 말려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또 관념을 촉발하지 않는 대체품을 찾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단지 응대하지 않을 뿐이고 이런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등등을 내보낼 뿐이다. 이렇게 사람 위에 있고 또 법 위에 있는 일념 지차의 시험은 항상 존재했고 아주 평범한 나날일수록 일사 일념을 수련하는 엄숙성을 더욱 느끼게 됐다.

말하기는 쉬워도 “해내어야 수련이로다”[5]. 이런 과정을 겪은 후 나는 어느 날 그 명확한 염두를 내보내게 됐고 아주 좋은 작용을 일으켰다.

이 과정을 되돌아보니 감개무량했다. 돌고 돌아서 올 때의 곳으로 향하게 됐는데 공경하고 순응하는 마음으로 조건 없이 신사신법(信師信法)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부님의 ‘논어’의 첫 시작을 다시 새겨본다. “대법(大法)은 창세주(創世主)의 지혜이다. 그는 천지개벽(開天闢地)ㆍ우주조화(造化宇宙)의 근본으로, 내포가 지극히 홍대하고 미세하며, 부동(不同)한 천체 층차(層次) 중에 부동한 펼쳐보임(展現)이 있다.”[6]

이상은 개인 수련의 깨달음이고 법에 입각하지 못한 곳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선을 알기 쉽게 해설’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미국 동부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 경문: ‘2018년 워싱턴DC 설법’
[5] 리훙쯔 사부님의 시: ‘홍음-착실한 수련’
[6]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논어’

(2019년 캐나다 법회 교류문장)

 

원문발표: 2019년 7월 3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7/30/390682.html